The Wicked Princess Plans for Her Life RAW novel - Chapter (38)
망나니 황녀님의 제멋대로 인생 계획-38화(38/207)
클리어 난이도가 내려간 척 눈속임을 해놓고 사실은 대폭 올라간 거였어?
혹시 그래서 밸런스를 맞추느라 약간의 능력치 업그레이드를 시켜줬던 거야?
‘서, 설마 진짜 그런 거야?’
갑자기 목덜미가 시려지려고 했다.
“후, 하. 후, 하.”
라마즈 호흡법을 따라 하며 애써 침착해지려고 노력했다.
‘아냐, 그래도 아직 희망이 있어.’
내가 몰랐을 뿐, 원래도 저 악당이 이맘때 황궁에 그냥 한 번 놀러 와 봤을 수도 있지 않은가?
왠지 그럴 가능성은 낮은 것 같긴 하지만…….
그날 밤 나는 잠들기 전에 두 손을 꼭 모아 쥐고 신인지 뭔지 모를 존재에게 간절히 기도했다.
‘다른 밸런스 조정은 이제 없어도 되니까, 제발 앞으로의 미래가 제가 아는 범위 내에서만 흘러가게 해주세요!’
그 기도가 하늘에 닿은 것일까?
다행히 나한테 꼭 필요한 다른 굵직한 사건은 변동 없이 이루어졌다.
* * *
“3황녀님, 축하드립니다! 오늘 대신전에서 신탁이 내려왔습니다. 일주일 후 열릴 신성 의식을 준비해 주십시오.”
대신전에서 날아온 소식에 황궁은 완전히 뒤집혔다.
나한테 소식을 전해 주러 온 건, 아직 황궁에 체류 중이던 엑스트라 신관, 아이작이었다.
‘힘숨찐이 안 와서 다행이다.’
황족이라면 누구나 어릴 때 한 번은 거쳐야 하는 신성 의식.
이 신성 의식이란 건 원래 황족마다 신탁을 받아 치르는 시기가 달랐다.
보통은 일곱 살 생일을 전후로 신탁이 내려오곤 했는데, 나는 이른 편이었다.
‘물론 이런 것도 여주인공 버프지.’
아무튼 중요한 건 바로 이날이 내가 신성력 각성을 하게 되는 역사적인 날이란 사실이었다.
그래서 갑작스러운 신탁에 놀라고 당황한 아버지와 달리, 나는 드디어 올 게 왔구나 싶었다.
무엇보다도, 이 신성 의식을 두 번이나 치러봤으니 익숙하기도 하고.
“이 아이작, 데메테아 여신님의 종으로서 3황녀님께서 무사히 신성 의식을 치르고 오시길, 또 데메테아 여신님의 가호가 비추기를 간절히 기원하겠습니다!”
그런데 이상하다…….
“혹 괜찮으시다면 내일 위스테리아 궁으로 3황녀님을 모셔도 되겠습니까? 마침 운 좋게 제가 일찍부터 황궁에 머물고 있으니 신성 의식 전에 성수로 축복해 드리고 싶군요.”
왜 내가 신성 의식을 치르는데 아이작 신관이 저렇게 설레 보이지?
“데메테아 여신님을 직접 따르는 분께서 우리 아스포델을 위해 축복을 내려주신다니, 오히려 감사한 일이지요.”
뜻밖의 호의에 아버지는 조금 놀란 듯했지만, 결국 아이작 신관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어쨌든 신관이 직접 축복을 내려준다는데,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뭐야, 수상해.’
난 혹시 이 엑스트라 신관에게 다른 꿍꿍이가 있는 건 아닌지 의심스러워서 눈을 게슴츠레하게 떴다.
알고 보니 남주인공 친척이던 것도 그렇고, 느닷없이 남주인공 형을 황궁에 데려온 것도 그렇고, 혹시 이놈도 단순 엑스트라가 아니라 힘숨찐인 거 아냐?
그러나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에 들어가라고 했으니.
무시무시한 악역 소굴에 발을 들이고 싶진 않았지만 이대로 가만히 있으면 대비책을 세울 수도 없으니까.
하여 바로 다음 날, 나는 마음을 굳게 먹고 아버지와 함께 다시 위스테리아 궁을 방문하게 되었다.
* * *
“자, 그럼 성수로 축복을 내려드리기에 앞서…….”
나는 아버지와 내 앞에 엄숙하게 앉은 아이작 신관을 황당하게 쳐다봤다.
“3황녀님이 신의 정원에 열매로 맺힌 날과 개화하신 날이 언제인지 먼저 알 수 있겠습니까?”
와, 집착…….
알고 보니 엑스트라 신관은 계략남이었다!
지난번에도 똑같은 걸 물어보더니.
사실 저게 궁금해서 축복 핑계 대고 아버지랑 날 초대한 거 아냐?
“신관님, 그런 건 왜 물으시는 건지요?”
아버지도 뭔가 이상함을 느꼈는지, 눈을 설핏 가늘게 뜨며 반문했다.
하지만 아이작 신관은 의외로 주도면밀했다.
“성수마다 제조된 날과 그 안에 배합된 재료가 모두 다르기 때문이지요. 황녀님께 가장 적합한 기운을 가진 성수로 축복을 내려드리고 싶어서 여쭈어 봤습니다.”
엑스트라처럼 희끄무레하게 생긴 주제에 인상만큼은 어찌나 선량하고 순박해 보이는지.
그런 얼굴로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말하니 의외로 설득력이 있었다.
하지만 우리 아버지도 만만하지 않았다.
“마음은 감사합니다만, 관행상 열매로 맺힌 날짜는 같은 황족끼리도 공유하지 않기에 말씀드리기 어렵겠습니다.”
어느새 당혹감을 감추고 침착함을 되찾은 아버지가 아이작 신관을 따라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거절했다.
아버지의 말처럼 열매로 맺힌 날짜를 알려달라는 건 아무리 좋은 의도라 해도 지나치게 사적인 요구였다.
열매에 꽃이 핀 개화일을 공식적인 생일로 쳐서 로잔티나의 온 제국민이 다 알게 되는 것과는 달랐다.
“그러지 마시고, 다른 사람들은 물린 뒤 저에게만 살짝 알려주시면…….”
“그렇게 거듭 말씀하셔도 불가합니다.”
“허허, 참. 원하신다면 오늘 들은 것을 아무에게도 토설하지 않겠다고 데메테아 님의 이름에 걸고 맹세하겠습니다.”
“공식적으로 알려진 개화일이라면 신관님께도 말씀드릴 수 있지만 다른 것은 안 됩니다.”
캬, 우리 아버지 단호박이시네.
아이작 신관도 설마 이 정도로 말을 안 해줄 줄은 몰랐는지, 아버지가 철벽을 칠 때마다 불쌍하게 흠칫흠칫 몸을 떨어댔다.
“그럼 달만이라도……. 그 정도는 괜찮지 않습니까?”
아까보다 확연히 시무룩해진 아이작 신관이 거의 애원하듯이 우리 아버지를 보며 말했다.
아버지는 잠깐 생각에 잠겼다.
그러다 이내 아이작 신관의 말처럼 그 정도는 괜찮다고 생각했는지, 마침내 아이작이 원하는 답변을 내주었다.
“열매로 맺힌 달은 10월, 개화한 날은 7월 11일입니다.”
“오오! 길일 중의 길일에 태어나셨군요!”
숨조차 죽인 채 아버지의 말을 경청하던 신관이 물개 박수를 치며 좋아했다.
한껏 흥분한 그의 모습이 나는 몹시도 수상쩍었다.
“여보게, 당장 성수들을 가져오게!”
아이작은 여전히 환한 낯빛을 한 채로 밑의 사람을 시켜 큰 보관함을 들고 오게 했다.
“이 성수 좀 보시겠습니까? 이것으로 말할 것 같으면, 새해 첫날 은빛 방울 민들레꽃에 맺힌 이슬과 금빛 자작나무 숲에 가장 처음 내린 빗물을 모아 넣은 것으로…….”
그는 수십 병은 되어 보이는 성수들을 줄줄이 꺼내 하나하나 신나게 설명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여기 이 성수는 77일간 달빛을 쐬어준 크리스털과 진주로만 가공해서 병을 만들었고……. 그리고 이 성수는 안에 들어간 재료가 특히 진귀한데…….”
그 꼴을 보며 난 좀 아리까리해졌다.
‘……그냥 성수 덕후인 건가?’
처음엔 되게 수상했는데 저 모습을 보니 그냥 자기 직업에 진심이라 성지에서 태어난 황족의 생일을 꼬치꼬치 물어본 것 같기도 하고…….
좀 헷갈리기 시작했다.
“제 신관으로서의 직감에 따르면, 우리 황녀님께는 요 특별하고 사랑스러운 아이가 가장 잘 맞을 것 같습니다.”
아이작 신관은 함박웃음을 지은 채로 또 물개 박수를 치며 한참 동안 심혈을 기울여 선별한 성수로 날 축복해 주었다.
아버지가 반딧불처럼 반짝이는 빛에 감탄했다.
“저희 아스포델을 이렇게 정성스럽게 축복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신관님.”
“별말씀을요! 3황녀님께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수 있다면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지요!”
“그런데 성수에 이렇게 진귀하고 다양한 재료가 많이 들어가는지 몰랐군요.”
“그럼요. 하늘 아래 같은 성수는 없다는 말도 있지요. 하, 제가 이것까지는 꺼내지 않으려고 했는데……. 자, 이 병에 든 것도 한 번 보시겠습니까? 여기에는 신수 메멘타의 마지막 탈피 때 나온 잎사귀와 수액, 그리고 푸른 산호초를 빻아 넣어서…….”
“호오? 신수에게서 나온 부산물도 재료에 들어갑니까? 그래서 이렇게 신비로운 푸른빛이 반짝이고 있는 거군요.”
아버지는 성수에 큰 학구적 호기심을 느끼는 듯했다.
신수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부터는 두 눈에 불빛이 켜진 것 같았다.
아버지가 흥미를 표하자 아이작 신관도 더 신이 났는지, 다른 성수가 든 상자들도 가져오게 해서 테이블 위에 대대적으로 판을 벌였다.
“아빠, 저 화장실 다녀올게요오옹…….”
나 원 참, 성수 덕후와 신수 덕후에게 이런 교집합이 있을 줄은 몰랐구먼.
난 일부러 작게 소곤거리듯이 말한 뒤, 한참 성수 삼매경에 빠진 아버지를 두고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델? 아빠가 데려다주마.”
에고, 역시 성공할 리가 없나.
“아냐, 마가렛하고 가면 되는걸? 아빠랑 신관님이랑 같이 성수 구경할 동안 빨리 다녀올게용!”
난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하는 아빠를 서둘러 말린 뒤 후딱 방을 나섰다.
* * *
“황녀님, 왜 혼자 나오셨어요?”
아이작 신관의 방 앞에는 시중을 들려고 대기 중인 사람들이 있었다.
위스테리아 궁의 궁인들과 내 수행인들이었다.
문을 조용히 열고 밖으로 나가자마자 눈이 마주쳤다.
“헷.”
난 문을 닫고 그들에게 방긋 한 번 웃어줬다.
그들도 나를 보며 반사적으로 웃었다.
“잠깐만 거기서 나 보구 있어 봐봐.”
시선들을 뒤에 매단 채 복도를 뽀짝뽀짝 걸어갔다.
마가렛과 다른 사람들이 갸웃거리며 나를 쳐다봤다.
어디 보자. 이 정도면 됐나?
망나니 황녀님의 제멋대로 인생 계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