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Wicked Princess Plans for Her Life RAW novel - Chapter (39)
망나니 황녀님의 제멋대로 인생 계획-39화(39/207)
슬슬 거리를 가늠한 뒤에 손을 번쩍 들고 외쳤다.
“지금부터 술래잡기 시작!”
“앗!”
뒤 한 번 안 보고 우다다 복도를 뛰어갔다.
“황녀님!”
뒤늦게 정신을 차린 수행인들이 쫓기 시작했지만, 이미 늦었다.
모퉁이를 꺾어 사각지대에 들어서자마자 안 보이는 곳에 몸을 숨겼다.
그런 내 앞을 사람들이 후다닥 지나쳐갔다.
나도 곧바로 뛰쳐나와 눈썹이 휘날리게 달려갔다.
‘이왕 온 김에 그때 그 남자애 상태나 살짝 보고 가야지!’
지금 내가 있는 곳은 같은 바스티온 가문 소속인 아이작 신관과 남주인공 형만 따로 이용하는 공간이라고 했다.
그러니 지금 힘숨찐 악당을 만날 위험은 적었다.
자, 그럼 목적지를 탐색합니다!
목표 대상을 찾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사기가 뭉친 곳을 찾아가면 되었으니까.
그리고 마침내 도착한 곳에는…….
솨아아아아.
나는 꽃향기를 머금은 바람을 맞으며 멈춰 섰다.
내 예상대로 군청 빛 머리칼을 가진 소년이 붉은 꽃들을 배경으로 한 채 분수대 위에 걸터앉아 있었다.
하지만 그는 혼자가 아니었다.
오늘도 탐스럽게 굽이치는 긴 검 보랏빛 머리카락이 소년의 옆에 서 있는 호리호리한 남자의 몸을 휘감으며 나부끼는 모습이 보였다.
서늘한 눈으로 조용히 소년을 내려다보는 모르페우스 신관의 주변에 유독 짙은 공기가 흐르는 것 같았다.
‘제, 젠장. 또 힘숨찐, 너냐……!’
이렇게 얼굴을 보니 또 호달달 살이 떨렸다.
게다가 지난번에도 느꼈지만, 이 인간은 20년 후랑 징그러울 정도로 외모가 똑같았다.
20년이면 미청년이 미중년이 될 시간인데, 왜 하나도 안 늙는 거야? 방부제야?
남주인공의 형과 악당은 주변에 다른 사람들도 물리고 조용히 대화를 나누는 중인 듯했다.
그런데 소년의 눈이 먼 상태라는 걸 모르페우스도 알고 있어서 그런가?
다른 사람들 앞에서 인위적으로나마 그려 보이던 미소까지 깨끗이 지운 얼굴이 소름 끼치도록 냉혹하고 위험해 보였다.
그런데 돌연 그가 남주인공 형을 향해 손을 뻗는 광경이 보였다.
‘저, 저 나쁜 신관이!’
나도 모르게 무심코 몸이 움직였다.
“우, 우와아, 예쁜 정원이네~!”
‘제길, 내가 왜 최종 보스의 아가리에 스스로 걸어 들어가고 있는 거야?’
일부러 바스락 소리를 내며 그들에게 다가갔다.
“어? 그때 봤던 신관님이다! 안녕하세요?”
하지만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든지 간에,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 태연하게 모르페우스 신관에게 아는 척했다.
내 외침이 정원을 가로지르자마자 남주인공의 형이 순식간에 눈빛을 변화시키며 내 쪽으로 빠르게 고개를 돌렸다.
순간 그의 머리 위에서 댕댕이 귀가 쫑긋하는 환영이 보인 것 같았다.
모르페우스 신관 역시 소년에게 향했던 손을 천천히 내린 뒤, 내게 눈길을 옮겼다.
라 벨리카 황제나 2황녀 알렉시아와 같은 짙은 황금빛 눈.
신의 사랑을 받는 자만 가질 수 있는 증표.
그러나 모르페우스의 것은 모골이 송연할 정도로 섬뜩하고 시린 느낌이었다.
그런 눈으로 나를 관통할 듯이 직시하던 남자가 돌연 입가에 오싹한 미소를 새겼다.
“그렇군. 분명 3황녀라 했던가.”
무언가를 깨달은 듯한 눈빛이 내 얼굴을 꿰뚫었다.
“혹시 레예스가 황궁에 온 이유가 당신이었습니까?”
갑자기 그의 입에서 까닭을 알 수 없는 말이 내뱉어졌다.
삽시간에 체감 기온이 뚝 떨어지며 온몸에 솜털이 바싹 일어났다.
도대체 뭐 때문인지, 소설의 최종 흑막이 갑자기 날 향해 어두운 기운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어쩐지 아이작이 갑자기 조카를 데리고 황성에 동행하겠다 했을 때부터 이상하다고 생각했지요. 하여 궁금증에 따라와 보았더니…….”
목소리는 여전히 온화하고 부드러웠으나 날 보는 눈빛은 달군 쇠꼬챙이처럼 뜨거웠다.
모르페우스가 느릿하게 걸음을 뗐다.
“아이작이 관심을 보이던 것도 그렇고, 레예스가 받은 신탁에 황녀님이 관련되었나 보군요.”
‘뭐, 뭔 소리야, 이게?’
신탁? 무슨 신탁?
갑자기 벌어진 상황에 너무 당황해서 그런지, 지금 이놈이 무슨 말을 하는지 하나도 모르겠다.
‘아, 아니, 그보다 가까이 오지 말라고, 이 악당아!’
당장 잡귀를 몰아내는 굿판이라도 벌이고 싶었지만 긴장감에 몸이 굳어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않았다.
모르페우스가 한 발짝씩 날 향해 걸어올수록 내 심장도 점점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모르페우스 신관님. 섣부른 추측은 금해 주십시오.”
소년의 차분한 미성이 밀도 높은 공기를 가른 것은 바로 그때였다.
어느새 분수대에 걸터앉은 몸을 일으킨 소년이 고요한 눈을 모르페우스에게 두며 말을 이었다.
“제가 이번 황궁행을 결정한 것은 어디까지나 저희 바스티온 가문의 일로 폐하께 주청 드리고 싶은 일이 있어서일 뿐. 게다가 무엇보다도 황녀님은 제 신탁과 연관이 없는 분이십니다.”
그 순간, 모르페우스 신관의 걸음이 멈췄다.
그가 느릿하게 뒤돌아섰다.
“모르페우스 신관님께서는 제가 받은 신탁의 내용을 모르시니 그렇게 말씀하셨겠지만, 지금 하신 발언은 자칫 데메테아 여신님과 황녀님께 모욕이 될 수도 있습니다.”
모르페우스 신관은 소년의 말을 곱씹는 것 같았다.
“신탁의 내용과 엮는 것이 모욕이 될 수도 있는 일이라고?”
입가에는 미소를 띠고 있지만 여전히 웃음 한 조각 찾아볼 수 없는 날카로운 눈으로 그가 소년의 얼굴을 살폈다.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소년의 청려한 얼굴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난 그의 눈이 보이지 않는 게 차라리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저런 섬뜩한 눈빛을 정면에서 받으면 누구나 오금이 저려 태연히 서 있을 수 없을 테니까.
곧 모르페우스 신관의 얼굴에 엷은 미소가 피어났다.
혼자만의 생각을 끝마친 듯, 그가 날 천천히 돌아봤다.
“레예스의 말이 맞군요. 제가 황녀님께 큰 실례를 저질렀습니다.”
언제 위협했냐는 듯이 정중한 거죽을 뒤집어쓴 모르페우스가 내게 몸을 기울였다.
“조금 전의 무례를 용서해 주시겠습니까?”
머리 위로 드리워진 그의 그림자조차 소름 끼쳤다.
아직도 내 심장은 쿵쿵 뛰고 있었다. 식은땀이 났는지 등이 축축했다.
“으으으음, 신관님 말이 어려워서 잘 모르게써요.”
하지만 티 내지 않고 최대한 바보 같은 표정을 지으며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듯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아델이 머를 용서해?”
사실 겁먹은 어린애처럼 우는 척하는 게 가장 좋을 것 같긴 했다.
하지만 슬프게도 난 우는 연기를 처참할 만큼 못 했다.
“근데 뭔진 몰라두 괘나차, 신관님!”
그래서 차선책으로나마 다섯 살짜리 바보라 조금 전 내가 위협당한 것조차 알아차리지 못한 것처럼 굴었다.
“어린 황녀님의 마음이 참으로 넓으시군요.”
웃고 있는 모르페우스의 눈이 미세하게 가늘어졌다.
“한데 오늘은 저를 봐도 아무렇지 않으신가 봅니다. 지난번엔 낯을 가리시더니.”
이, 이 자식. 쓸데없이 날카롭네.
난 계속 ‘아무것도 몰라요’ 하는 눈으로 모르페우스를 보며 말했다.
“응! 오늘은 아는 신관님이니까 안 무서워요.”
“그러십니까.”
다행히 모르페우스는 아이들과 친하지 않아서 그런지 내게 큰 이상함을 느끼지는 못한 것 같았다.
하지만 그의 눈은 여전히 나를 뜯어볼 듯이 주시하고 있었다.
마침 시기적절하게 남주인공의 형이 내게 다가와서 시선이 끊어졌다.
“처음 뵙겠습니다, 3황녀님. 인사가 늦었습니다. 전 레예스 바스티온입니다. 로잔티나의 별께 태양의 축복이 깃들기를.”
그는 내게 황족을 대하는 예를 갖춰 인사했다.
정말 아무런 연고도 없는 초면인 것처럼 건조한 목소리가 담담하게 이어졌다.
“제 숙부인 아이작 신관님께서 평소 성소에 관심이 많아 일전에도 황녀님께 무례를 저지르셨다지요. 한데도 오늘 초대에 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혹시 내 목소리를 못 알아들은 걸까?
잠깐 그런 생각도 했지만, 역시 이 소년이 그 정도로 둔한 것 같지는 않았다.
한데도 그는 내게 따로 알은척하지 않았다.
“마침 3황녀님께 신성 의식에 대한 신탁이 내려왔다는 소식도 들었습니다. 데메테아 여신님의 빛이 비치기를 기원하겠습니다.”
지난번에 내가 했던 말 때문이든 아니든, 어쨌든 나이답지 않은 현명한 처신이었다.
지난번에는 굉장히 나른하고 무기력한 느낌의 남자애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 훨씬 더 어른스럽고 똑똑한 것 같았다.
“그럼 모르페우스 신관님과 저는 먼저 실례하겠습니다. 천천히 정원의 경치를 즐기십시오.”
어느새 정원 안으로 들어와 가까이 다가온 시종에게 남주인공의 형이 손을 내밀었다.
시종이 그에게 익숙한 듯 지팡이를 건네줬다.
앗, 그걸 보니 지난번의 일이 떠올랐다.
혹시 그때도 나한테 일으켜 달라고 손을 내민 게 아니었나?
그럼 내가 실수한 건데.
“그럼 가시죠, 신관님.”
남주인공의 형이 모르페우스를 돌아봤다.
모르페우스는 여전히 어둑한 광채가 스민 눈으로 소년과 나를 번갈아 응시했다.
“아델!”
“황녀님!”
하지만 정원의 입구에서 나를 찾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려온 순간, 모르페우스도 느슨한 미소를 지은 채 몸을 움직였다.
망나니 황녀님의 제멋대로 인생 계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