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Wicked Princess Plans for Her Life RAW novel - Chapter (40)
망나니 황녀님의 제멋대로 인생 계획-40화(40/207)
“그럼, 3황녀님. 곧 다가올 신성 의식 때 데메테아 여신님의 가호가 내리기를 바라겠습니다.”
처음보다는 아니나, 그래도 여전히 질척한 그림자를 품은 눈빛이 마지막으로 나를 스쳤다.
정원의 입구로 향하는 길목에서 수행인들을 뒤에 둔 우리 아버지와 두 사람이 마주친 게 보였다.
“로잔티나의 달께 태양의 가호가 내리기를.”
“……데메테아의 천칭께 태양의 빛이 비치기를.”
그들 사이에 짧은 인사가 오갔다.
아버지의 눈이 정원 안쪽에 있는 나한테 닿았다.
어쩐지 우리 아버지의 눈에 한순간 날카로운 빛이 스쳐 지나간 것 같았다.
“아델, 여기 있었구나. 갑자기 없어져서 찾았잖니.”
모르페우스와 바스티온 첫째 공자가 정원을 나서고, 아버지가 나한테 달려왔다.
나는 아버지와 수행인들이 정원 안에 들어올 때까지 꽃향기가 가득 밴 바람을 맞으며 우두커니 서 있었다.
시, X벌…….
왜 오늘 나한테 데드 플래그, 혹은 거기에 버금가는 배드 엔딩 플래그가 하나 꽂힌 것 같은 불길한 느낌이 들지?
side
레예스와 아이작, 그리고 모르페우스
바스티온 가문의 장자 레예스는 모르페우스와 헤어져 방으로 돌아갔다.
“레예스, 이제 오는구나!”
“외숙.”
기별도 없이 와 있던 외숙부 아이작 신관이 기다렸다는 듯이 달려 나와 그를 맞았다.
“내가 방금 3황녀님을 만나 뵈었다. 아직 전부 확인하지 못했지만 역시 네 신탁의 주인이 그분일 가능성이 높을 것 같다!”
그는 한껏 흥분해 체면도 모두 던져 버리고 푸드닥거렸다.
레예스는 위스테리아 궁에 와서 늘 두던 곳에 지팡이를 세워두고 방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얼마 걷지 않았는데도 몸이 물먹은 솜처럼 무거웠다.
시력이 약해진 눈이 거의 보이지 않게 된 지도 벌써 1년이 지났다.
오래전부터 그를 좀먹고 있는 저주 때문이었다.
“그만 진정하세요, 외숙.”
레예스는 얕은 한숨을 내쉬며 의자에 앉았다.
검은빛으로도 보이는 암청색 머리칼이 눈썹 위로 흐트러지며 붉은 눈매에 짙은 그림자를 만들었다.
의자에 깊이 몸을 기대며 손으로 턱을 괴는 모습에서는 깊은 피로가 엿보였다.
그는 이제 고작 여덟 살인 소년이었지만 일찍부터 죽음의 기로에 서서 벌써 몇 번이나 생사를 오간 탓인지, 쉽게 감정에 휩쓸리지 않는 나이답지 않은 면모를 가지고 있었다.
“내가 진정하게 생겼느냐? 여신님께서 드디어 네게 구명줄을 내려주셨는데!”
반면 아이작은 눈물까지 글썽거리며 두 손을 모아 쥔 채 짙은 감동을 표출하고 있었다.
그런 아이작을 향해 레예스가 입을 열었다.
“외숙, 다른 이들 앞에서 3황녀님께 불필요하게 말을 걸거나 가까이 다가가지 마세요.”
그는 약 한 달 전 받은 신탁의 내용을 떠올리고 있었다.
“제 신탁의 내용을 정확히 아는 것은 저를 제외하고 어머님과 숙부님밖에 없습니다. 하나 제가 신탁을 받은 것 자체는 이미 비밀이 아니고, 몇몇 눈치 빠른 이들은 신탁이 제 저주와 관련이 있다는 것을 유추했을 가능성도 있으니.”
지금 레예스를 나날이 죽어가게 만드는 것은 대신관조차 정화하지 못하는 지독한 저주였다.
그러다 얼마 전 갑작스럽게 신으로부터의 옥음이 내려왔다.
물론 신탁의 특성상 해독이 필요할 정도로 은유적인 내용이었지만 레예스는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단숨에 깨우칠 수 있었다.
“그러니 3황녀님께서 제 저주를 풀어줄 당사자란 사실이 밝혀진다면 당장 바스티온의 정적들이 그분을 노릴지 모릅니다.”
“그, 그렇구나.”
레예스의 말을 들은 아이작이 찬물이라도 맞은 것처럼 번쩍 정신을 차렸다.
감동과 기쁨으로 들떠 있던 얼굴이 본래의 침착한 빛을 되찾았다.
“확실히 네 말이 맞다. 그런 간단한 이치조차 생각하지 못하다니, 내가 너무 흥분했었나 보다.”
이제 고작 여덟 살 된 조카가 이런 고통을 겪는 게 너무 안타까워서.
그래서 간절한 기도 끝에 마침내 하늘에서 내려온 한 줄기 빛을 목도했을 때는, 감격에 눈이 멀어 주변의 다른 것을 미처 살펴볼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의 어른스러운 조카는 역시 생각이 깊었다.
“혹시 오늘 내 행동이 3황녀님께 누가 되지는 않았을지 모르겠구나.”
아이작이 안절부절못하는 것을 본 레예스가 묘한 표정을 지었다.
“숙부님은 평소에도 신의 손길이 닿은 모든 것에 애정과 관심이 남다르시니, 이번에도 그런 이유였던 것으로 하면 큰 문제는 없을 겁니다.”
“그래! 그럼 내친김에 당장 다른 황족분들과도 좀 만나고 와야겠다.”
좋게 말해 아이작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신심으로 가득했고, 나쁘게 말해 그는 여신조차 질리게 할 신전의 진성 덕후였다.
성서와 성물, 성수, 성지, 하다못해 신전의 작은 돌조각 하나까지도 아이작의 신심을 뜨겁게 불타오르도록 만들 수 있었다.
그런 아이작이지만, 혹여 레예스가 저주로 잘못되기라도 하면 신관복을 벗고 살아갈 각오까지 하고 있었다.
레예스를 잃은 뒤에도 지금까지와 같은 신심을 품고 여신님의 종으로 살아갈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 정도로 조카에 대한 애정 역시 각별했다.
그것을 레예스도 알고 있었다.
“그럼 난 먼저 가보마! 피곤할 테니 푹 쉬어라, 레예스.”
“네. 살펴 가십시오, 외숙.”
레예스는 아이작이 떠난 자리에 혼자 남아 3황녀 아스포델과 처음 만났던 날을 떠올렸다.
‘너, 언제까지 여기 있어?’
위스테리아 궁에 들어와 황제 폐하와의 알현을 앞두고 있던 때.
서슴없이 다가와 그의 손을 감싼 온기가 있었다.
맞닿은 곳부터 시작해 맑은 물처럼 온몸을 휩쓸면서 퍼지던 그 청량한 기운을 레예스는 죽는 날까지 잊지 못할 것이다.
게다가 머리 위에서 울린 앳된 목소리를 귀에 담은 순간, 그는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나 이제 가 봐야 돼. 빨리 말해.’
이분이다.
바로 이분이다.
이분이 바로 나의 유일한…….
‘그래, 그럼 또 올게.’
3황녀 아스포델은 정말 약속했던 대로 오늘 또 그를 만나러 와주었다.
레예스는 살짝 떨리는 손을 들어 창백한 얼굴을 감쌌다.
“황녀님…….”
사실은 아까, 3황녀의 목소리를 처음 들었을 때부터 심장이 너무 빠르게 뛰어서 당황스러웠다.
서둘러 달려가 그 앞에 무릎 꿇고 그가 할 수 있는 최고의 경의와 기쁨을 표하고 싶은 마음을 주체하기 어려웠다.
바로 조금 전에 헤어졌는데도 벌써부터 어린 황녀님이 그리워 애가 닳았다.
물론 그의 나이가 아직 어리니만큼, 이런 감정은 남녀 간의 애정에 기반을 두고 있지는 않았다.
오히려 지금 레예스가 느끼는 감정은 그의 외숙인 아이작이 신에게 느끼는 맹목적인 애정과 닮아 있었다.
레예스는 자신이 태어나 누군가에게 이런 마음을 품을 수 있을 거라고는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눈이 보이지 않아 직접 모습을 확인하지는 못했지만 목소리만 들어도 마음이 충족되어 행복해지는 이런 감정은…….
이 역시 신탁에 속한 내용 때문인 걸까.
레예스는 그렇게 3황녀 아스포델과의 만남을 질리지도 않고 생각하고 또 생각하다가, 조금 전 정원에서 만났던 모르페우스 신관을 기억의 한 귀퉁이에서 떠올려 냈다.
“…….”
레예스의 붉은 눈이 미세하게 가라앉았다.
어쩌면 괜한 착각일 수도 있다.
모르페우스 신관은 대신전의 모두가 우러러보는 차기 대신관 예정자이자, 이미 그 황금빛 눈으로 누구보다 뛰어난 신심을 입증한 자였으니.
하지만 기이하게도 레예스는 예전부터 그가 껄끄러웠다.
직접 대신전에 들어가 생활하면서부터는 명확히 설명하기 어려운 미묘한 위화감이 더 크게 느껴졌다.
게다가 아까 무심코 보인 듯한 모르페우스 신관의 그 기묘한 태도…….
레예스는 지난날 닿았던 3황녀의 온기가 배어 있는 것만 같은 손을 꽉 움켜쥐었다.
‘신탁에 따르면 3황녀님의 앞길에 그분을 방해할 수많은 장애물이 나타날 것은 이미 예정된 일.’
한순간 맞닿았던 어린 소녀의 손은 참 보송하고 작았다.
그 위에 남몰래 짊어지고 있는 무거운 사명이 언젠가 그 여린 몸을 무참히 짓누르는 게 아닐까 두려울 정도로.
그러니 내가 지켜드려야만 한다.
그분의 발밑에 감히 더러운 흙탕물 하나 튀지 않도록.
아무도 모를 맹세와 결의를 담은 어린 소년의 눈이 달처럼 빛났다.
* * *
“그렇군. 아이작이 이번에는 다른 황족들을 들쑤시고 있다…….”
커튼이 걷히지 않은 방은 어두웠다.
모르페우스는 조금 전에 보고들은 내용을 되새기며 비릿한 미소를 입가에 걸쳤다.
“좀 헷갈리는군. 또 그 경박한 취향을 숨기지 못해 온갖 곳을 헤집고 다니는 건지, 아니면 잡초들 속에 보석을 감추려는 수작인지.”
아이작이 신의 손길이 닿은 것이라면 물건이나 장소를 가리지 않고 눈이 뒤집힌다는 사실을 신전 내에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모르페우스는 조금 전 만난 어린 소년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를 한 번 떠보기 위해 3황녀를 건드려 보았으나 바스티온의 첫째 공자는 반응하지 않았다.
망나니 황녀님의 제멋대로 인생 계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