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Wicked Princess Plans for Her Life RAW novel - Chapter (52)
망나니 황녀님의 제멋대로 인생 계획-52화(52/207)
오늘 대신전행에는 나와 함께 신성 의식을 치렀던 2황자 루벨리오와 그 부친인 3부군 쿤차도 동행할 예정이다.
원래 지난 생까지는 신성 의식 이후 나 혼자 대신전에 갔었는데, 이번엔 어째서인지 루벨리오도 의식 때 축복을 받았기 때문에 함께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들이 아직 도착하지 않아서 우리는 이번 행렬의 또 다른 일행과 먼저 인사를 나누었다.
“로잔티나의 달과 별께 태양의 축복이 내리기를.”
“데메테아의 천칭께 태양의 빛이 비치기를.”
바로 신관들이었다.
지난 신성 의식 이후 아직 황성에 머물고 있던 신관들이 우리와 대신전까지 동행하게 된 건 별로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대신전까지 잘 부탁드립니다, 신관님.”
“허허, 저희가 드릴 말씀이지요. 그리고 실례인 것은 알지만 일행 중 한 명은 몸이 좋지 않아 먼저 마차에 올랐습니다. 지금 함께 인사드리지 못하는 것을 양해 부탁드리겠습니다.”
“괜찮으니 개의치 마시길 바랍니다.”
아이작 신관의 말을 듣고 주위를 둘러봤다.
신관은 몇 명 없어서 금방 인원 파악이 됐다.
그런데 남주인공의 형…….
그러니까 바스티온 첫째 공자가 보이지 않았다.
아무래도 아이작이 말한 사람이 바로 그인 것 같았다.
‘진짜 몸이 안 좋은 것도 맞겠지만, 왠지 눈에 안 띄려는 이유가 더 큰 것 같은데…….’
“키노.”
난 키노가 심부름을 잘했는지 궁금해서 그에게 몰래 속닥거렸다.
“어땠어?”
키노가 눈치 빠르게 ‘끼!’ 하고 울며 고개를 몇 번 끄덕였다.
‘좋아, 잘 주고 왔나 보군.’
키노는 내 눈과 귀가 되어 가끔 나 대신 황궁 안을 살피고 있었다.
오늘의 심부름은 위스테리아 궁에 있는 바스티온 첫째 공자에게 보낸 것이었다.
아까 카루스 부자에게 준 것과 같은 내 신성력을 담은 물건을 그에게 전해 주기 위해서였다.
키노를 통해 전달한 건, 내가 직접 바스티온 첫째 공자를 만나기에는 상황이 여의치 않았기 때문이다.
일단 신성 의식 이후로 나를 주목하는 시선이 너무 많기도 했고, 모르페우스의 눈이 의식되기도 했다.
물론 그는 황성을 떠났지만 어디에 그의 눈이 심겨 있을지 모르니 조심할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남주인공 형을 완전히 모른 척하기엔 키노에게 전해 들은 그의 몸에 쌓인 사기의 양이 너무나 심상치 않았다.
그래서 키노를 몰래 보낸 것이다.
다행히 바스티온 첫째 공자는 일전에 자신을 두드려 팼던 수상한 족제비의 선물을 내치지 않은 듯했다.
혹시 몰라서 쪽지라도 같이 보낼까 했지만 결국은 그만두었다.
괜히 그런 증거를 남겨서 좋을 게 없는 데다, 바스티온 첫째 공자가 지금 시력으로 내 쪽지를 읽을 수 있을지 확신할 수도 없었다.
어쨌든, 그래도 눈치가 있는 건지 그는 지난번처럼 오늘도 나를 아는 척하지 않았다.
아이작 신관도 마찬가지였다.
‘일단 나도 거기에 맞춰야지.’
아 참, 그리고 키노가 알아온 바에 의하면 2황자 루벨리오는 신성 의식 이후로 급격히 얌전해져서 진짜로 거의 방에만 처박혀 있다고 하더라.
그래서 쿤차가 노심초사하고 있다고 들었다.
오늘도 어째서인지 평소에 시간 약속 하나는 칼같이 지키던 쿤차와 2황자가 지각을 다 하고 말이다.
“3부군님과 2황자님께서 오셨습니다!”
때마침 쿤차가 비실거리는 2황자를 데리고 나타났다.
“본의 아니게 준비가 늦어졌습니다. 기다리시게 해서 죄송합니다, 신관님들.”
헐레벌떡 달려온 쿤차가 신관들에게 먼저 사과했다.
“록샨, 늦어서 미안하네. 지금 바로 출발하지.”
이후 아버지와 내 쪽에도 사과한 그는 서둘러 루벨리오를 마차에 태우려 했다.
“뭐야, 진짜 많이 아팠나 본데?”
“그러게. 얼굴 좀 봐.”
다른 황녀, 황자들이 루벨리오를 보고 놀랐다.
내내 궁에 틀어박혀 모두의 의문과 궁금증을 불러일으켰던 2황자는 못 본 새 진짜 파리해진 모습이었다.
허옇게 뜬 얼굴 하며, 퀭해진 눈 밑 하며.
하긴, 진짜 아팠던 게 아니면 그동안의 칩거가 이해되지 않긴 했다.
“그보다 저 녀석 눈, 진짜 황금색이네.”
유클레드가 루벨리오를 보다가 중얼거렸다.
그 말대로, 루벨리오의 눈은 더 이상 부친인 쿤차와 동일한 연보라색이 아니었다.
내가 마지막으로 루벨리오를 본 건 신성 의식 때였다.
하지만 그때 그는 기절한 상태였다.
게다가 이후에는 궁 밖으로 통 나오지 않아서 이렇게 눈을 뜨고 있는 건 오랜만에 봤다.
그런데 소문으로 들었던 대로, 루벨리오의 연보라색 눈은 나와 같은 황금빛으로 변해 있었다.
그걸 보니 루벨리오가 이번 생에 진짜 데메테아 여신의 축복을 받은 게 맞다는 실감이 들었다.
“루, 루벨. 조심해서 다녀와!”
오매불망 2황자만 기다렸던 3황자가 외쳤으나 그는 이쪽을 본 척도 하지 않고 비실거리며 마차에 오르려 했다.
“루벨리오 오빠야, 어디 많이 아퍼?”
평소라면 안 그랬을 텐데, 지난번 신성 의식 때 본 녀석의 모습이 계속 찝찝하게 남아 있던 터라 굳이 2황자에게 말을 걸었다.
그러자 뜬금없이 유클레드가 움찔했다.
아무래도 신수 둥지 앞에서 있었던 일에 대한 충격이 아직도 그의 마음에 옅게 남은 듯했다.
‘짜식, 뒤끝 한번 기네.’
난 어쩌면 루벨리오가 3황자한테 그랬듯이 무시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는 내 목소리를 듣자마자 헛숨을 들이켰다.
“너, 너…….”
그런데 다음 순간, 비틀거리며 나를 돌아본 루벨리오는 꼭 못 볼 걸 본 것처럼 질색했다.
얼굴을 우그러뜨리고 바들거리는 입술을 꽉 깨문 모양새가 제법 흉흉했다.
아니, 턱에 호두 모양이 생길 정도니까 입술을 깨문 수준이 아니라 아예 이를 악물었다고 해야 하나?
어쨌든, 원래도 나를 싫어하긴 했지만 이번에는 반응이 평소와 좀 달라서 나는 2황자가 더욱 수상해 보였다.
“너, 나한테 말 걸지 마……!”
나한테 앙칼지게 소리친 2황자는 꼭 도망이라도 치듯이 마차에 올라탔다.
“뭣, 저 녀석 걱정해 주는 사람한테 말본새가 왜 저래?”
유클레드가 나 대신 발끈했다.
난 그런 그를 흘겨봤다.
‘너도 예전엔 저 녀석 뺨쳤어, 인마.’
“루벨!”
마차 밖에 남아 있던 쿤차의 얼굴이 핼쑥해졌다.
아들을 따라 바로 마차에 오르려다가, 주위의 시선을 의식한 듯 허둥지둥거리는 모습이 좀 안돼 보였다.
“미, 미안하구나, 아스포델. 우리 루벨이 몸이 많이 안 좋아서 그러니 이해해 주렴.”
그래, 많이 아프긴 한가 보네.
제 부친과 닮아서 체면을 중시하는 녀석이, 더군다나 신관들까지 보는 앞에서 저런 식으로 성질머리를 드러내다니.
우리 아버지도 나와 같은 생각이었나 보다.
“혹시 모르니 신관님께 한번 보이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후우, 이미 어제 신관님을 모셨었다네.”
엥, 그런 것치고는 안색이 똥이던데.
“한데 심적인 원인으로 얻은 병은 고치기 어렵다고…….”
한숨을 내쉰 쿤차가 약간의 불신이 담긴 눈초리로 신관들을 바라봤다.
물론 누군가 눈치채기 전에 얼른 거두긴 했지만.
“이런 자리에서 할 소리가 아닌데 내가 별말을 다 하는군. 다들 마차에 오른 듯하니 우리도 그만 출발하세.”
일단은 거기서 대화를 마무리 짓고 우리도 다른 마차에 올랐다.
side
록샨과 쿤차
대신전의 위치는 황성과 그리 멀지 않아서 이동하는 데 하루가 채 걸리지 않았다.
그러나 말이 쉴 시간도 필요한 데다, 행렬의 일행은 다들 귀한 신분이라 대부분 장거리 이동에 익숙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들은 중간에 휴식 시간을 갖게 되었다.
“아스포델은 정말 다른 말이 없던가?”
“예, 전에도 답변드렸지만 루벨리오의 증상에 대해 오히려 궁금해하는 눈치였습니다. 루벨리오야말로 계속 아무 설명도 없습니까?”
“하아……. 그렇다네. 도대체 신성 의식 때 무슨 일을 겪었기에 저러는지 알 수가 없으니 답답하군.”
록샨은 깊은 한숨을 내쉬는 쿤차를 보다가 루벨리오가 타고 있는 마차로 눈길을 돌렸다.
휴식 시간을 틈타 록샨에게 만남을 청한 쿤차는 근심 걱정이 많아 보였다.
록샨도 이해되지 않는 바는 아니었다.
아까 출발 전에 본 루벨리오의 상태가 그만큼이나 나빠 보였으니까.
하지만 록샨이 쿤차에게 해줄 수 있는 말은 달리 없었다.
아스포델에게 들은 내용에 의하면, 신성 의식 때 루벨리오가 쓰러져 있는 것을 발견해 밖으로 데리고 나온 것뿐이라고 했으니.
‘나이가 더 많은 오빠를 혼자 옮기기 힘들었을 텐데. 누구 딸인지 참 착하기도 하지.’
록샨은 딸에게 대견함과 애틋함을 느끼다가 쿤차에게 말했다.
“신성력도 소용이 없었다니 안타까운 일입니다만, 그래도 이번 대신전행에서 루벨리오의 증세에 차도가 있었으면 좋겠군요.”
“그래, 나도 그런 기대를 품고 있다네. 혹시 대신전에 가면 여신님께서 답을 주실지도 모르지.”
쿤차는 나날이 말라 가는 아들을 떠올리며 눈빛을 흐렸다.
“루벨이 말은 안 해도, 신성 의식 때 뭔가 아주 엄청난 걸 보거나 들은 것 같은데…….”
그러다 그는 저도 모르게 이어질 뻔한 말을 삼켰다.
망나니 황녀님의 제멋대로 인생 계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