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Wicked Princess Plans for Her Life RAW novel - Chapter (55)
망나니 황녀님의 제멋대로 인생 계획-55화(55/207)
‘모르페우스는 일단 오늘은 안 보이는군.’
괜히 좀 긴장하고 있었는데 잘됐다.
난 이동하면서 살짝 뒤를 돌아보았다.
멀리서 신관들과 함께 움직이는 한 소년의 옆모습이 보였다.
“아이작 신관님, 레예스 님. 먼 길 다녀오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온통 흰옷을 입고 있는 사람들 속에 섞여 있어서 그런지, 소년의 모습이 유독 눈에 띄었다.
그는 오늘도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 혼자 지팡이를 짚고 걷는 중이었다.
바스티온의 첫째 공자 역시 귀빈이라 그런지 대신전에 있는 시종들도 그를 신경 써 모시는 눈치였다.
“아델, 우리도 가자.”
“네, 아빠.”
한순간 바스티온 첫째 공자와 눈이 마주친 것 같았다.
하지만 다른 누가 보면 착각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 정도로 짧은 순간이었다.
나와 그는 거의 동시에 고개를 돌리고 각자 가야 할 곳으로 걸어갔다.
* * *
신전에서의 하루 해는 세속에서보다 일찍 뜨고 저문다.
그 말이 무슨 뜻이냐면…… 신관들이 완전 범생이 같은 생활을 한다는 거다.
신심 하나로 청빈하고 모범적인 생활을 하는 신관들답게 그들은 규칙적인 일과를 보냈다.
아침 6시에 일어나서 정갈하게 몸단장을 한 뒤, 가장 깨끗한 공기와 햇빛을 받으며 1시간 동안 아침 기도를 하고, 그 후 아침 식사를 한다.
남은 오전 시간 동안은 본격적인 심신 수련을 하게 되는데, 체력단련을 위한 운동을 하기도 하고 성서를 낭독하거나 성가를 부르며 마음과 몸을 갈고닦는 게 주된 내용이었다.
그렇게 오전 시간을 보내고 나면 또 점심 먹을 시간이 된다.
오후에는 각자 배속받은 곳에서 봉사 활동을 했다.
신전 부속 고아원에 가서 아이들에게 공부를 가르쳐 주기도 하고 기도실이나 신전 도서관을 다 같이 청소할 때도 있었다.
또는 아직 해독되지 않은 성서 구절을 다 같이 머리 싸매 논의하거나 하는 등의 다양한 일들을 했다.
신전에 방문한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를 들어주고 축복을 내려주는 것도 이 봉사 시간에 하는 일이다.
물론 매일 봉사만 하는 건 아니다. 가끔은 고위 신관들이 밑의 신관들을 불러 모아 설교할 때도 있었다.
이런 일들을 하고 나면 공식적인 일과가 모두 끝난다.
참고로 우리가 대신전에 도착한 시각도 이미 해가 저물 무렵이었다.
그맘때면 신관들은 저녁 식사 후에 단체 기도에 들어간다.
이후 일정은 간단했다.
잠자리에 들기 전까지 각자 휴식을 취하며 개인 시간을 보내면 되니까.
하지만 정말 신심이 남다른 신관들은 이때 성서를 따로 공부하거나 명상을 하기도 했다.
이는 모두 내가 지난 생에 성녀로서 한동안 대신전에 들어와 살며 직접 겪어 봐서 아는 일이었다.
‘신전 생활 나랑 진짜 안 맞았는데. 참, 여기 들어온 지 아직 하루도 안 됐는데 벌써부터 지겹네.’
다음 날 아침, 나는 밥을 깨작거리며 속으로 한탄했다.
나랑 루벨리오는 아직 너무 어려서 새벽 기도 시간에는 끼지 않았지만 아침 식사는 제시간에 해야 했다.
그래서 7시에 일어났더니 졸려서 밥을 먹는 둥 마는 둥 하게 되었다.
“루벨, 입맛이 없어도 좀 더 먹자.”
사정은 2황자 쪽도 비슷했다.
쿤차가 비실거리는 루벨리오에게 어떻게든 아침밥을 먹이려고 애쓰는 모습이 애잔했다.
나야 속에 어른으로서의 자아가 들어앉아 있다지만, 저 2황자 녀석은 진짜 어린애인데 이런 생활을 얼마나 참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역시 일찍 돌아가는 게 답이야.’
이번에는 4황자 제르카인이 개화하기 전에 황궁에 돌아갈 생각이었으니, 역시 대신전에서의 일정을 서두르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아델, 아침 식사 후 신관님이 대신전을 구경시켜 주신다는구나. 이것저것 신기한 게 많이 있을 테니 재미있는 시간이 될 거다.”
“와아아…….”
으억, 지겨워.
이미 구석구석 다 알아서 따로 구경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는데.
대신관을 만나 성력을 측정하는 건 내일 오후에 일정이 잡혀 있다고 한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에라도 황궁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하지만 그건 이루기 어려운 바람일 뿐이었다.
[하아, 어쩌면 이리도 곱게 생겼을까?]내가 강렬하게 대신전 탈출을 욕망하는 이유는 하나 더 있었다.
[누님, 아까부터 거기서 뭐 해?] [얘, 너도 이리 와서 봐봐! 이렇게 아름다운 인간은 400년 만에 처음 보는 것 같아!]아까부터 우리 아버지에게 달라붙어 있는 성령 때문이었다.
눈빛을 보니 아무래도 우리 아버지한테 단단히 홀린 것 같은데…….
[후아아……. 정말 봐도 봐도 안 질리네. 아깝다, 아까워. 내가 400년만 늦게 죽었어도…….]어유, 우리 어머니가 들으면 당장 영혼째로 소멸시켜 버릴 소리를 겁도 없이 하는구나.
우리 아버지가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건 맞지만 그래도 그렇지.
이렇게 밥상 앞에서 부담스럽게 얼굴을 뜯어보면 어떡해?
물론 우리 아버지는 신안이 없으니 아무것도 모를 테지만 대신 내가 체하겠네.
“아빠, 여기 벌레!”
결국 참지 못하고 손을 들어 성령이 있는 곳을 마구 휘적휘적했다.
“우리 아델이 아빠를 위해 벌레를 쫓아준 거니? 고맙구나.”
[벌레! 어디! 꺄, 난 벌레가 싫어!]너 말하는 거다, 너.
그래도 다행히 성령이 금방 도망가서 난 아버지를 지켜낸 뒤 뿌듯하고 쾌적하게 식사를 이어갈 수 있었다.
* * *
“지금 드리는 향주머니는 외부에서 오신 손님들 모두에게 드리는 선물입니다. 정화의 효능이 있으니 대신전에서 지내시는 동안 반드시 몸에 지녀주시길 바랍니다.”
아침을 먹고 나가는 길에 신관 두 명이 우리에게 손바닥만 한 향주머니를 건네줬다.
대신전에 온 기념 선물인 양 말했지만 난 저게 무슨 뜻인지 안다.
말은 순화해서 했지만 한마디로, ‘밖에서 온 너희는 오염됐어! 더러우니 정화나 돼라!’ 이거였다.
더군다나 지금 내 눈앞에 있는 당근색 머리의 말쑥한 젊은 신관은 나도 아는 얼굴이었는데, 결벽증으로 유명한 사람이었다.
이름은 마리벨.
신관들은 신전 밖에서 쓰던 성을 사용하지 않아 출신은 밝혀진 바 없었다.
하지만 그의 결벽증이 속세에 대한 거부감을 의미한다는 것만큼은 알고 있었다.
지난 회차에서 내가 성녀로 신전에 머물 때 날 제일 달달 볶아대던 것도 바로 이 인간이었다.
‘오오, 보입니다, 보여요. 황녀님의 몸에 쌓인 오염된 세속의 검은 때가 이 눈에 너무나 또렷이 보입니다. 사치와 향락을 일삼는 곳에서 오래 지낸 분이라 그런지 쉽게 정화될 것 같지도 않군요. 하지만 걱정 마십시오. 제가 황녀님을 그 누구보다도 성녀에 잘 어울리는 맑고 정결한 마음과 몸을 가진 분으로 성심성의껏 갈고닦아 드리겠습니다!’
어우 씨, 생각하니까 또 열 받네.
그때 내가 이 인간 때문에 스트레스를 얼마나 많이 받았었는지 모른다.
마리벨 신관은 나뿐만 아니라 다른 신관들의 공공의 적이기도 했다.
신관들이 청렴하다 해도 개중에는 귀족도 있다 보니, 외부에서 몰래 반입해 들어오는 사치품들도 적지 않았다.
그리고 그걸 색출해서 모조리 반송하거나 쓰레기통에 버리는 게 바로 이 마리벨 신관의 취미였다.
하지만 나한테 무엇보다 중요한 건, 그가 바로 모르페우스 신관의 진성 추종자란 것이었다.
“자, 어린 황족분들께서는 이쪽의 향주머니를 가져가 주십시오.”
난 못마땅한 얼굴의 마리벨 신관이 내민 걸 보고 의아함을 느꼈다.
‘응? 어린이용 향주머니인가? 원래 저런 건 따로 없었는데?’
어른들 것보다 좀 더 알록달록한 색상에 크기도 좀 더 작은 이 향주머니는 처음 보는 것이었다.
그런데 내가 손을 뻗자마자 마리벨 신관이 팔을 슬쩍 뒤로 빼며 말했다.
“잠깐. 제게 닿지 않게 조심해서 가져가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아니, 이놈이?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황족한테 이래도 돼?
물론 다른 사람들도 있는 자리다 보니 날 대놓고 병균 취급한 건 아니었다.
그래도 날 보는 눈빛이 꽤 더러워서 내 기분도 덩달아 구려졌다.
하지만 새삼스러울 것도 없긴 했다.
‘하긴, 얜 원래도 이런 놈이었지. 그러니까 지난 생에서도 나한테 따박따박 할 말을 다 했었겠지.’
갑자기 지난 회차의 기억이 울컥 올라와서 난 입을 삐죽 내밀며 눈앞의 향주머니를 낚아채 가져갔다.
‘엇?’
그런데 향주머니를 손에 잡자마자 묘한 기운이 느껴졌다.
‘뭐야? 장난질을 쳐놨네?’
향주머니에서 아주아주 희미한 사기가 느껴졌다.
이 정도면 정말 아주 미세해서, 신관들도 알아차리지 못할 만했다.
‘나 정도나 되니까 이렇게 한 번에 알아본 거지.’
향주머니의 겉면을 만져서 확인해 보니 새끼손톱만큼 자그마한 조약돌 같은 게 여러 개 잡혔다.
‘프로토타입 중에 하나인 검은 마석이 정화석에 섞여 있는 건가?’
앞에서 마리벨 신관이 날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는 게 느껴졌다.
난 향주머니를 손에 쥐고 고개를 들며 히죽 웃었다.
“신관님, 선물 고마씁미다!”
망나니 황녀님의 제멋대로 인생 계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