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Wicked Princess Plans for Her Life RAW novel - Chapter (61)
망나니 황녀님의 제멋대로 인생 계획-61화(61/207)
루벨리오 녀석이 너무 착실하게 데드 플래그를 쌓고 있는 게 가련해서 살짝만 도움을 주기로 했다.
“여기 와서 네가 보인 행동 좀 생각해 봐봐.”
다행히 루벨리오는 진짜 바보가 아니었다.
제법 눈치 빠른 녀석답게 그는 내 말을 듣자마자 안색을 변화시켰다.
“2황자님, 대신관님께서 기다리십니다.”
“바보같이 자꾸 티 내지 말라구, 멍청아.”
난 입술을 옴짝거리는 루벨리오에게 마지막으로 속닥이며 경고해 준 뒤, 열린 문으로 고개를 돌렸다.
모르페우스가 가느다랗게 미소 지은 얼굴로 그곳에 서 있었다.
이 시기의 모르페우스가 내가 알던 것만큼 무시무시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자, 그동안 보기만 해도 뼈가 시린 느낌이 들던 그의 얼굴이 좀 만만하게 느껴지는 것 같았다.
침을 꿀꺽 삼킨 루벨리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3황녀님은 조금만 더 기다려 주십시오.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겁니다.”
“네에!”
그렇게 루벨리오가 먼저 대신관을 만나러 떠났다.
난 그리 큰 걱정 없이 내 차례를 기다렸다.
이제 곧 만날 사람은 나도 아주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시벨라누스 대신관.
이름은 좀 시벨스럽지만 성격은 그와 정반대인 할아버님이었다.
그는 어느 음흉한 악역 신관과는 달리, 겉과 속 모두 자비롭고 선량한 대신관 그 자체였다.
‘지난 회차에서 내가 처음 대신전에 들어갔을 때도 나한테 진짜 할아버지처럼 잘해줬었지.’
그런 그를 만나러 가는 거니, 긴장될 리가 없었다.
신성력 측정을 어떻게 하는 건지도 이미 두 번이나 직접 겪어봐서 익숙했고.
그냥 신성력을 측정하는 성물에 1분 정도 손을 올리고 있으면 끝인 간단한 방법이었다.
다만 보다 정확한 신성력 측정을 위해 그 한 번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3일 연속으로 테스트를 진행하는 게 정석이었다.
그래도 진짜 신성력 측정만 하고 끝내기는 정 없으니, 대신관하고 대화도 좀 나누고 뭐 그런 거였다.
“3황녀님, 대신관님께서 기다리십니다.”
예상대로 기다리는 데 긴 시간은 걸리지 않았다.
드디어 내 차례가 되어, 나는 의자에서 폴짝 일어났다.
이번에 날 데리러 온 건 모르페우스 신관이 아니었다.
혹시 다른 일이 있어서 돌아갔나? 그런 거면 좋겠다.
“들어가셔도 됩니다, 3황녀님.”
하지만 내가 가벼운 마음으로 있을 수 있던 것도 잠시뿐.
열린 문 안으로 들어가 거기에 있는 사람을 직접 봤을 땐 기절할 뻔했다.
“허허, 어서 오십시오. 이번에는 아주 귀여운 황녀님이시군요.”
나를 향해 환영 인사를 건네는 노인의 몸을 가득 뒤덮은 구역질 나는 검은 사기 덩어리 때문이었다.
그의 얼굴은 내 기억에서처럼 여전히 인자했지만, 눈빛은 안개가 낀 듯이 혼탁했다.
대신관 뒤에 그림자처럼 서 있던 모르페우스 신관이 나를 보며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자, 그럼.”
모골이 송연해질 정도로 아주 섬뜩한 미소였다.
“어서 이쪽으로 와서 앉으십시오, 3황녀님.”
시벨라누스 대신관.
어째서인지 그는 이미 검은 마석에 먹혀 조종당하고 있었다.
* * *
‘이, 이런 시벨!’
이게 도대체 뭔 일이야?
우리 대신관 할아버지가 대체 어떻게 된 거야?
나도 모르게 비명을 지를 뻔했다.
“안녕하세요, 대신관 할아부지!”
하지만 여기서 그런 멍청한 짓을 할 수는 없었다.
난 시벨라누스 대신관에게 인사한 뒤 그의 맞은편에 있는 의자로 걸어갔다.
제길, 마음의 동요를 완전히 숨기지 못해 목소리가 약간 떨렸다.
하지만 다행히 모르페우스와 시벨라누스는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았다.
“허허, 신성력 측정은 간단하니 긴장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시벨라누스 대신관은 조종당하는 주제에 꽤나 자연스러운 말투를 구사했다.
지금은 신성력 측정을 위해 대신관과 만나는 자리였으니 어른이라도 긴장할 만했다.
또 이런 어린애가 보호자도 없이 덜렁 낯선 어른을 만났으니 서먹한 태도를 보이는 것도 당연했다.
그래서 조금 전 내가 보인 동요에도 좋은 핑곗거리가 된 것 같았다.
‘으악, 이럴 땐 다섯 살 몸이 도움이 되는구나!’
“먼저 과자와 차를 좀 드시겠습니까?”
내 긴장을 풀어줄 생각인지, 대신관이 다과를 권했다.
“모르페우스.”
“예, 대신관님.”
모르페우스가 다가와서 테이블 위에 있던 찻잔에 김이 폴폴 나는 따끈한 차를 따라 주었다.
미친, 악당이 따라주는 차라니.
‘여기에 독 탄 거 아냐?’
내심 경계하며 봤으나 차에는 사기와 독기 둘 다 느껴지지 않았다.
하긴, 밖에 다른 신관도 많은데 그런 건 너무 눈에 띄는 수작질이긴 하지.
“3황녀님의 입에 맞을지 모르겠군요. 한번 드셔 보십시오.”
“고마씀미다, 신관님!”
어린애인 나와 2황자를 위해 준비한 듯, 달달한 꿀차였다. 과자도 마찬가지였다.
‘이 미친 자식. 이 정신 나간 악역 새끼!’
하지만 나는 과자를 씹으며 속으로는 모르페우스를 향한 욕을 몇 번이나 퍼부었다.
아직은 덜 숙성된 악당이라고 생각해서 어쩌면 그 틈을 내가 이용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역시 시벨이다.
이 줘도 안 먹을 악당 놈!
차라리 기회를 봐서 최대한 빠르게 처리해 버리는 게 낫겠어.
“입에 맞으십니까?”
“네에! 대신관님이랑 신관님도 먹어요!”
‘시벨라누스 대신관님, 저 토할 거 같아요. 지금 이 상황이 너무 시벨스러워…….’
분명 아직은 검은 마석의 프로토타입만 존재할 시점인데, 어떻게 대신관이 벌써 저렇게 된 건지 이해가 안 됐다.
“이렇게 오랜만에 어린 황족분들을 뵙게 되니 무척 반갑군요.”
시벨라누스 대신관이 이웃집 할아버지처럼 푸근하게 웃으며 나와의 대화를 시도했다.
“저는 일찍부터 데메테아 여신님의 종으로 이 대신전에서 들어와, 사는 동안 공식적인 자리를 제외하고는 외부와 접촉할 기회가 드물었지요. 더군다나 이제는 여신님의 품으로 돌아갈 나이가 되어서 그런지 몸이 예전 같지 않더군요. 그래서 한동안 외부 활동을 자제하고 있어 더욱 적적하던 참이었답니다.”
아…….
그런데 이 무슨 별로 궁금하지도 않았던 TMI입니까?
꼭 정해진 대본을 읊는 것처럼 어딘가 부자연스럽게 느껴지는 대사에 뭐라고 반응해야 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의 얘기를 듣고 한 가지는 감을 잡았다.
‘검은 마석으로 조종하고 있는 걸 숨기려고 모르페우스가 대신관과 외부인들의 접촉을 막은 거구나!’
“그러니 3황녀님, 과자를 먹으며 제게 신성 의식 때의 이야기를 해주시지 않겠습니까?”
아, 앞의 TMI는 이 대사를 위한 포석이었군.
이렇게 은근슬쩍 신성 의식 때의 일을 캐내려 하다니…….
역시 비열한 힘숨찐!
“그날 백색 심연에서 신기한 일이 있었지요?”
아무래도 내가 받은 데메테아 여신의 축복에 대해 자세히 확인할 요량으로 이런 수작을 부리는 것 같았다.
‘젠장, 루벨리오 녀석은 이 위기를 잘 극복했으려나? 설마 여기서도 신전의 마석이 어쩌구 하는 얘기를 술술 분 건 아니겠지?’
“응, 길잡이 꽃이 새로 변해서 신기해써!”
하지만 속마음이야 어떻든 간에, 난 아무것도 모르는 척 해맑게 손뼉을 치며 외쳤다.
“루벨리오 오빠의 길잡이 꽃은 고양이가 됐대요!”
당연히 이 대답은 모르페우스가 원하는 내용이 아닐 거다.
그러나 난 계속 삼천포로 빠진 답변을 늘어놨다.
“근데 다른 언니, 오빠들도 길잡이 꽃 모양이 변했다던데, 왜 그런 건지 잘 모르게써요! 대신관님은 알아요?”
초롱초롱한 눈으로 시벨라누스 대신관을 보며 물었다.
그러자 시벨라누스 대신관은 여전히 혼탁한 눈으로 나를 보며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예에, 길잡이 꽃이 백색 심연에서 각기 다른 생명체로 변하는 건 황족분들 개개인의 마력과 백색 심연의 신성력이 반응해서…….”
검은 마석에 조종당해도 무의식은 여전히 어느 정도 남아 있어서 그런가?
시벨라누스 대신관은 내 질문을 무시하거나 대충 대답하지 않고 그가 아는 내용을 상세하게 설명해 줬다.
난 물개박수를 치면서 호응했다.
“우와앙, 그러쿠나! 엄청 신기하다! 대신관님 어엄청 똑똑해!”
“허허, 이 정도는 로잔티나의 신관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하면 황녀님……. 신성 의식 때 황족분들을 백색 심연으로 인도하는 심연의 거울의 유래는 아십니까?”
“우와! 그게 뭐예요?”
“지금으로부터 1400년 전, 당시에는 로잔티나의 황태자였던 뤼미에르 황제와 데메테아 여신님 사이에 재미난 내기가 벌어졌다고 하지요…….”
시벨라누스 대신관이 느닷없이 옛날이야기를 시작했다.
원래도 그는 신심이 투철한 고위급 성직자답게 데메테아 여신과 관련한 로잔티나의 역사를 줄줄 꿰고 있었다.
그래서 지난 회차에도 견습 신관들을 대강당에 모아 놓고 서너 시간은 너끈하게 연설하곤 했던 기억이 났다.
‘하지만 무의식이 이 정도로 강하다니! 역시 아직 시험 단계인 검은 마석이라 그런지 효과가 약하구나!’
망나니 황녀님의 제멋대로 인생 계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