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Wicked Princess Plans for Her Life RAW novel - Chapter (64)
망나니 황녀님의 제멋대로 인생 계획-64화(64/207)
그녀는 내 말에 발끈한 듯이 소리쳤다.
[……어차피 난 영혼인데 뭐 어때! 이렇게 옆에 있어도 내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손을 내밀어도 닿을 수 없는걸!]“어휴, 영혼이라고 안심하지 말어.”
난 그런 성령을 보며 쯧쯧 혀를 찼다.
“우리 아빠 유부남인 건 알지? 내가 이렇게 토끼처럼 귀여운 딸래미라고 해서 우리 엄마도 그럴 거라구 생각하면 안 돼. 지금 이러는 거 알면 우리 엄마 성격에 강령술을 해서라도 언니를 눈앞에 불러내서 영혼까지 가루로 만들어 버릴걸?”
[헉, 너, 너희 엄마가 정말 그렇게 무서운 인간이라고?]“아무리 대신전에 박혀 살았어도 그렇지, 라 벨리카 황제 소문도 못 들어봤어?”
[허억! 라 벨리카 황제! 맞네! 네가 황녀니까!]백색 심연에 있던 악 속성 영혼인 앤디미온처럼 모든 성령이 착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이 성령은 비교적 순한 맛이 있는 것 같았다.
[오, 오해하지 마, 아가야. 난 네 아빠에게 불순한 의도 같은 건 없었어.]곧 여성체 성령이 미약한 독기마저 지운 얼굴로 시무룩하게 말했다.
[그냥 저렇게 아름다운 인간은 너무 오랜만에 봐서……. 그래서 대신전을 떠나기 전에 좀 더 많이 봐두고 싶었던 것뿐이야. 왠지 내가 살아생전에 가장 사랑했던 인간을 닮기도 했고…….]애수가 깃든 얼굴이 처연하기까지 했다.
난 그런 성령을 보다가 넌지시 떡밥을 던졌다.
“그러면, 언니. 나랑 계약할래?”
[뭐?]“그럼 우리 아빠 가끔 보게 해줄게.”
[난…… 내 미학에 완벽하게 들어맞는 인간이 아니면 계약하지 않는데?]뭐야?
이 언니가 지난 회차에서랑 똑같은 소리를 하네.
그래도 두 번째라 그때처럼 자존심이 상해서 복장이 뒤집히진 않았다.
‘하여간에, 꼭 같잖은 미학을 운운하면서 이렇게 한번 튕긴단 말이지.’
그래도 영 구미가 당기지 않는 얼굴은 아니어서 한 번 더 낚시질을 시도했다.
“에잉, 쯧쯧.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네. 욕심이 너무 큰 거 아냐? 알다시피 우리 아빠만 한 사람이 흔한 게 아니야.”
난 성령을 향해 또다시 보란 듯이 ‘파하!’ 한숨을 내쉬었다.
“한번 생각해 봐봐. 우리 아빠만 한 사람은 400년 만에 처음 봤다고 했지? 그럼 언니가 앞으로도 계속 이 대신전에 박혀 있으면 다음에 또 이렇게 마음에 드는 사람이 나타날 때까지 400년쯤 걸리겠네?”
[……!]“그러느니 차라리 나랑 계약하고, 옆에서 우리 아빠의 미모를 감상하는 게 훨씬 낫지 않아?”
성령은 그 말에 깨달음을 얻은 것 같았다.
그녀는 속전속결로 마음을 정했다.
[생각해 보니 넌 아직 어려서 그렇지, 좀 더 자라면 네 아버지 못지않게 아름다워질 것 같구나. 잘 부탁해, 계약자.]“그래, 티타니아 언니.”
앤디미온과 계약할 때처럼 내가 막 이름을 지어준 성령에게 신성력을 담은 손을 가져다 댔다.
파앗!
내 신성력이 황금빛 깃털로 변해 성령에게 빨려 들어갔다.
다음 순간, 계약이 완료되어 나와 연결된 성령이 눈앞에서 사라졌다.
성스러운 기운으로 가득한 대신전이니 이 정도 성력을 사용한 건 티도 나지 않을 것이다.
‘좋아, 아버지의 안락한 잠자리도 사수하고 새로운 발닦개도 얻었다!’
하지만 여운에 잠길 새도 없이, 난 아버지가 오기 전에 후다닥 뛰어서 방으로 돌아갔다.
그날 밤도 피곤해서 쥐죽은 듯이 잠들 수 있었다.
side
마리벨과 루벨리오, 그리고 록샨
“모르페우스 신관님, 마리벨입니다.”
그날 늦은 저녁, 마리벨 신관은 모르페우스 신관을 찾아갔다.
모르페우스는 중앙 예배당에 있는 데메테아 여신의 신상 앞에 앉아 있었다.
노을이 스미는 창 앞에 앉아 눈을 감은 모르페우스의 모습은 자못 경건해 보였다.
마리벨도 데메테아 여신상에게 두 손을 모아 엄숙하게 인사한 뒤 모르페우스에게 이틀 동안 있었던 일을 보고했다.
“말씀하신 대로 어제와 오늘, 황자와 황녀를 살펴보았습니다.”
굳게 다물려 있던 모르페우스 신관의 입술이 열렸다.
“어땠지?”
“오늘 저녁 기도 시간까지 유심히 관찰했으나 3황녀에게서는 특이한 점을 찾을 수 없었고, 2황자가 좀 이상했습니다.”
“2황자가?”
이번에는 눈꺼풀 밑에 가려져 있던 황금빛 눈이 모습을 드러냈다.
“예, 어제 오전에 향주머니를 주었을 때 어째서인지 그것을 꺼림칙해하며 기피하는 기색을 보이더군요.”
마리벨 신관의 말에 모르페우스의 입술 끝이 비스듬히 끌어 올려졌다.
“꺼림칙해하며 기피했다?”
“꼭 못 볼 것이라도 본 것처럼 향주머니에 손도 대기 싫어하는 눈치였습니다. 오늘도 그랬고요.”
마리벨은 이틀 동안 본 2황자 루벨리오의 모습을 떠올리며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모르페우스 신관의 명령을 받아 황자와 황녀를 관찰하긴 했지만, 2황자의 그 반응은 여전히 이해하기 어려웠다.
마리벨은 향주머니 안에 사기가 깃든 마석이 있다는 사실을 몰랐기 때문이다.
“그리고 오늘 저녁 기도 시간에 기도실 앞에서 바스티온 첫째 공자와 마주쳤는데, 그때도 2황자가 눈에 띄는 반응을 보였습니다.”
마리벨은 모르페우스에게 그 일에 대해서도 자세히 설명했다.
“그것 역시 정확히 무슨 이유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모르페우스 신관님 말씀처럼 아직 어려서 그런지 도무지 동요를 감추지 못하는 모습이었습니다.”
그의 말을 들은 모르페우스는 무언가를 생각하는 눈치였다.
마리벨 신관도 그 모습을 보며 혼자 추론을 시작했다.
애초에 그가 모르페우스 신관에게 비밀리에 전달받은 특명은 단순했다.
그저 황자와 황녀가 대신관에 머무는 동안 일거수일투족을 파악해 보고하라는 것뿐이었으니까.
모르페우스는 마리벨에게 다른 이유를 설명해 주지 않았다.
하지만 마리벨은 평소 존경하던 모르페우스가 쓸데없는 이유로 이런 일을 시키지 않았을 것이라 확신했다.
하여 그는 이틀 동안 관찰한 결과, 몹시도 수상쩍은 모습을 보였던 2황자를 의심했다.
‘혹시 2황자에게 무슨 문제가 있는 게 아닐까? 모르페우스 신관님의 눈에만 보이는 아주 사악한 영혼을 가지고 있다거나……. 아니면 2황자에게서 데메테아 여신님의 가르침에 반하는 이단의 자질이 느껴진다거나.’
생각할수록 아예 신빙성 없는 일은 아닌 듯했다.
성스러운 정화석이 든 향주머니를 보고 2황자가 그렇게 질색했던 것이나, 신관들 사이에서 알음알음 저주받았다고 알려진 레예스 바스티온을 향해 그런 의미심장한 반응을 보인 것만으로도 충분히 의심해 볼 만했다.
‘게다가 부자가 똑같이 속세의 만악에 찌들어 있었지. 그 하늘 무서운 줄 모르던 오만한 모습이라니! 오오, 데메테아 여신이시여.’
마리벨 신관은 오만방자한 쿤차와 루벨리오 부자의 모습을 떠올리며 손으로 성호를 그렸다.
물론 2황자 루벨리오는 신성 의식 때 데메테아 여신의 축복을 받았지만, 마리벨은 인정할 수 없었다.
분명 여신님께서 어떤 착오가 있었던 게 분명했다.
“수고했다, 마리벨. 황족들이 돌아갈 때까지 계속 2황자 쪽을 좀 더 살펴보도록.”
마침내 모르페우스가 입을 열어 내일의 새로운 지침을 내렸다.
“알겠습니다! 맡겨 주십시오.”
마리벨은 결의에 찬 얼굴로 대답했다.
모두의 오해 속에서 2황자 루벨리오에게 확실한 데드 플래그가 꽂힌 순간이었다.
* * *
‘전부 다 꿈일 거야.’
한편, 그 시각 루벨리오는 여전히 침대에 드러누워 격렬히 현실을 부정하는 중이었다.
저녁 기도 시간 이후, 그는 낮보다 더욱 크게 넋이 나가 쉽게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그런 게 내 미래라니, 말도 안 돼……!’
산발이 된 긴 분홍색 머리카락 사이로 언뜻 드러난 황금빛 눈도 잘게 흔들리고 있어, 지금 루벨리오의 상태가 지극히 불안정함을 보여주었다.
아까 그의 방에 왔었던 이부 여동생을 떠올리자 마음이 더 시끄럽게 요동쳤다.
루벨리오는 며칠째 식사도 하는 둥 마는 둥 한 상태였다.
쿤차가 아까도 그를 걱정하며 찾아왔었지만 도무지 밥이 입으로 넘어가지 않았다.
당연했다.
지금도 시시때때로 떠오르는 충격적인 장면이 입맛을 뚝 떨어지게 만들었으니까.
루벨리오가 이렇게 식음을 전폐하기 시작한 건 신성 의식 이후부터였다.
더 정확히는, 신성 의식 때 들어갔던 백색 심연에서 데메테아 여신이 그에게 예지를 내렸을 때부터였다.
그날, 길잡이 꽃의 안내를 받아 마침내 당도한 검은 문 안에서 루벨리오는 계시를 받았다.
눈앞에 찬란한 황금색 빛이 폭발한 이후, 루벨리오의 눈에 뭐가 뭔지 알 수 없는 여러 장면이 짧게 스쳐 지나갔다.
이해하기 어려운 현상이었으나, 루벨리오는 그것이 앞으로 그에게 다가올 미래라는 사실을 저절로 깨달을 수 있었다.
‘그래도 오늘은 늦지 않고 왔구나, 루벨.’
그 여러 예지 중 무엇보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마지막에 떠오른 장면이었다.
거기에서 루벨리오는 창가에 서 있는 여인을 마주하고 있었다.
‘오늘도 늦으면 엉덩이를 차서 쫓아내려고 했는데.’
눈 부신 빛 때문에 여인의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다.
망나니 황녀님의 제멋대로 인생 계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