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Wicked Princess Plans for Her Life RAW novel - Chapter (65)
망나니 황녀님의 제멋대로 인생 계획-65화(65/207)
하지만 허리까지 길게 늘어뜨린 머리카락이 달빛을 엮은 듯한 은발이란 점만큼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그에 의구심을 느낀 찰나, 루벨리오의 귀에 놀라운 이름이 들렸다.
‘오늘 같은 날까지 늦을 수는 없지. 하지만 다른 날은 봐줘. 난 네가 그렇게 짜증을 내면서 날 기다리는 게 좋거든, 아스포델.’
믿을 수 없게도 예지 속의 자신은 눈앞에 있는 여인을 그의 얄미운 이부동생의 이름으로 불렀다.
이후에 이어진 내용은 더더욱 놀라웠다.
그 예지에는 아까 기도실에서 본 바스티온 첫째 공자도 나왔다.
물론 아스포델과 마찬가지로 그 역시 어른이 된 듯한 모습이었지만, 지금의 이목구비가 남아 있어 얼굴을 알아볼 수 있었다.
바스티온 첫째 공자 말고도 처음 보는 사람이 더 등장했다.
다만 그게 누군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
오늘 대신전의 예배당에서 바스티온 가문의 첫째를 직접 보기 전까지만 해도, 루벨리오는 그가 예지 속의 ‘레예스’라는 걸 몰랐으니까.
아무튼 루벨리오는 오늘 일로 인해, 자신이 신성 의식 때 본 게 정말 미래의 예지가 맞다는 것을 다시 한번 확신했다.
그 후, 루벨리오는 거의 절망했다.
그렇지 않아도 대신전에 와서는 더욱 마음이 불안해져서 밤에 한숨도 잠을 제대로 잘 수가 없었다.
데메테아 여신의 신상이 있는 기도실에도 들어가기 싫었다.
혹시나 데메테아 여신이 나타나, 그의 예지가 진짜라고 신성 의식 때처럼 계시라도 내릴까 봐 두려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국은 이렇게 다른 방식으로 사실을 확인해 버렸으니, 루벨리오가 이성을 온전히 유지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날 신성 의식 때 본 마지막 장면.
그중에서도 루벨리오의 평정을 무엇보다 크게 뒤흔든 건, 예지가 끝나기 직전 자신이 미래의 아스포델 앞에서 마지막으로 취한 행동이었다.
‘성격 한번 고약하기는. 하긴, 그게 너답기는 하지만.’
창가에 서 있던 아스포델이 힐난하듯이 말한 뒤 자리에서 걸음을 뗐다.
‘아무튼 준비됐으면 따라와.’
‘그래, 벌써 시간이 되었군.’
루벨리오도 그녀를 따라 움직였다.
그 후 참으로 충격적이게도…….
그는 자신의 앞까지 다가온 여인의 앞에 복종하듯이 서슴없이 무릎을 꿇었다.
그걸로도 모자라, 그녀의 손에 경건히 입을 맞추고는…….
‘나의 왕이 걷는 길에 가장 눈부신 영광을.’
“으아아아악!”
루벨리오는 다시금 몸부림치며 침대에서 벌떡 몸을 일으키고 말았다.
수치심과 굴욕감에 귀까지 열이 홧홧하게 올랐다.
그 외에도 미처 형용하지 못할 복잡하고 강렬한 감정들이 루벨리오의 심장과 뇌를 쥐어짰다.
“루벨, 무슨 일이냐!”
“왜 내가! 왜 내가아아아……!”
“루, 루벨리오?”
루벨리오의 포효하는 듯한 외침을 들은 쿤차가 급히 방으로 뛰어 들어왔다.
하지만 루벨리오는 그 사실조차 알아차리지 못하고 계속 억울함에 침대를 뒹굴었다.
그렇게 발작하던 루벨리오가 얌전해진 것은, 그로부터 한참의 시간이 더 지나 마침내 완전히 탈진한 뒤였다.
* * *
대부분의 사람이 곤히 잠든 깊은 밤.
그러나 록샨은 아직 잠자리에 들지 않은 상태였다.
일하는 사람들마저 모두 물러간 처소의 복도는 적막하고 어두웠다.
그런 늦은 밤에, 록샨은 직접 등불을 들고 방에서 빠져나와 빈 복도를 걸었다.
그가 향한 곳은 딸인 아스포델의 방이었다.
아스포델은 많이 피곤했는지 색색 고른 숨소리를 내며 족제비들과 함께 깊이 잠들어 있었다.
오늘은 아침 일찍 일어난 데다, 황궁에서보다 활동량이 많았으니 피곤할 만도 했다.
록샨은 아스포델에게 이불을 잘 덮어준 뒤 다시 조용히 방을 빠져나왔다.
이후 록샨의 걸음은 다시 복도를 지나 밖으로 향했다.
싸아아.
서쪽에서 불어온 바람에 검게 물든 나뭇잎이 꼭 살아 있는 생물체처럼 꿈틀거리며 흔들렸다.
달빛을 머금은 듯한 록샨의 긴 머리카락도 희미한 궤적을 그리며 나부꼈다.
‘뭔가 이상하구나.’
냉연한 빛을 띤 푸른 눈이 어둠 속을 기민하게 훑었다.
황궁을 떠난 날부터 대신전에 머물고 있는 지금 이 순간까지.
자꾸만 무언가가 예민하게 곤두선 그의 육감을 건드렸다.
하지만 이토록 그의 신경을 긁는 것이 무엇인지 도대체 알 수가 없었다.
꼭 신발 속에 굴러들어온 모래알 하나처럼 아주 작지만 분명 거슬리는 무언가가 있는데…….
록샨이 이런 미묘한 기분을 느낀 적은 살면서 매우 드물었다.
본디 눈앞에서 탐스러운 먹잇감이 냄새를 풍기며 얼쩡거리면 그것을 쫓고야 마는 것이 사냥꾼의 습성인 법.
인생의 절반 이상을 마수 사냥꾼으로 살아온 록샨 역시 자꾸만 그의 신경을 건드리는 것을 당장 찾아내, 뒷덜미를 붙잡아 눈앞에 끌고 오고 싶은 욕구를 느꼈다.
그러나 대신전에서 그가 움직일 수 있는 행동반경은 좁았고, 지금 이곳에서의 그의 역할은 대신전에 방문한 황족이자 어린 딸의 보호자일 뿐이었다.
록샨은 그의 몸을 감싸며 뜨겁게 일렁이던 열기가 좀 더 흉포해지기 직전에 기운을 갈무리하고 돌아섰다.
또다시 음지에서 불어온 바람이 달아올랐던 몸을 식게 했다.
잠시 후, 다시금 건물 안으로 향하는 록샨의 모습은 여느 때처럼 평온했다.
그러나 마지막까지 어둠 속을 유영하는 눈빛만은 여전히 잘 갈린 칼날처럼 날카로웠다.
Chapter 19
암살자 황녀님
그 이튿날 아침, 바로 잊지 않고 루벨리오를 떠봤다.
다행히 그는 시벨라누스와 모르페우스의 앞에서 예지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고 한다.
‘넌 내가 바보인 줄 알아?! 그딴 얘기를 내가 다른 사람들한테 왜 해! 짜증 나니까 이제 그만 좀 물어봐!’
애가 자꾸 날 피하길래 그냥 두세 번 정도 찾아가서 확인해 본 것뿐인데 어찌나 앙칼지게 성질을 내던지.
‘에잉, 그러게 그냥 한 번에 말해줬으면 서로 피곤할 일도 없었을걸.’
아무튼 그래도 루벨리오가 성격은 더러워도 눈치는 없는 편이 아니라 다행이다.
하지만 중요한 예지의 내용에 대해서는 안간힘을 쓰면서 입을 열지 않아 결국 원하는 걸 전부 알아내지는 못했다.
한편 시벨라누스 대신관은 오늘도 여전히 검은 마석에 조종당하고 있었다.
나는 전날처럼 그와 후덜덜한 시간을 보내며 신성력을 측정했다.
* * *
그런 뒤, 저녁 시간.
“신관님! 안녕하세용!”
예배당에서 모르페우스를 만났다.
루벨리오는 오전 내내 마리벨에게 시달린 후, 신성력 측정까지 한 게 무리가 되었는지 두통을 호소하며 또 방에 쉬러 갔다.
오늘 저녁 기도 시간에는 대신전에 있는 모두가 모여 단체 기도를 하기로 정해져 있었다.
그래서 루벨리오가 없어도 나 혼자는 아니었다.
“안녕하십니까, 3황녀님. 오늘도 2황자님은 저녁 기도에 빠지십니까?”
오늘도 창백해 보이는 모르페우스가 붉은 입술에 가느다란 미소를 그리며 날 내려다봤다.
“루벨리오 오빠는 아프다구 방에 가써요!”
“그랬군요. 마리벨 신관을 보내 상태를 살펴보게 해야겠습니다.”
‘이 악마……!’
루벨리오에게 일부러 마리벨을 보내다니?
루벨리오가 마리벨 신관 때문에 신경쇠약에 걸린 걸 알고 일부러 이러는 게 분명했다.
“그럼 대예배실로 가시지요, 3황녀님.”
나는 모르페우스를 따라 예배당의 복도를 걸었다.
‘기도 시간에는 아버지와 떨어져서 다행이네.’
대신전의 규범은 엄격해서, 단체 기도를 하는 날임에도 아이들과 어른들을 따로 떨어뜨려 놨다.
“이쪽입니다.”
그래서 난 현재 대신전에 머무는 아이들, 즉 어린 견습 신관들이 모인 곳으로 향했다.
모르페우스와는 가야 하는 길이 달라 중간에서 헤어졌다.
“헉, 황녀님이다!”
“와아!”
견습 신관들이 나를 보고 수런거렸다.
그곳에는 나 말고 현재 대신전에 머무는 손님인 레예스도 있었다.
물론 그는 격리되듯이 커튼으로 반쯤 가려진 곳에 따로 앉아 있는 상태였다.
이번에도 레예스는 날 알은척하지 않았다.
차분한 그의 낯빛을 보고 내심 혀를 내둘렀다.
못 본 새 레예스의 사기가 더욱 짙어진 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많이 고통스러울 텐데 저렇게 티를 안 내다니……. 어린애가 대단하기도 하지. 그나저나, 저 정도면 내가 준 성력석은 이제 효능이 없겠군.’
아무래도 대신전을 떠나기 전에 저것도 해결해야 할 듯했다.
‘우씨, 할 일 되게 많네! 다들 나한테 돈 줘야 하는 거 아니야! 나처럼 노동을 많이 하는 어린애가 어디 있어!’
내심 투덜거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 저기 아빠다!’
멀리 있는데도 우리 아버지의 모습은 한눈에 들어왔다.
갑자기 갑갑하던 속이 싹 씻겨 내려가는 기분이 들면서, 스트레스 지수도 급격히 하락했다.
역시 우리 아버지!
나한텐 거의 만병통치약이로세.
이렇게 보기만 해도 마음이 정화되는 느낌이 들고 말이다.
‘저 한 마리의 우아한 학 같은 분위기는 아무나 흉내 낼 수 있는 게 아니지, 암.’
망나니 황녀님의 제멋대로 인생 계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