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Wicked Princess Plans for Her Life RAW novel - Chapter (67)
망나니 황녀님의 제멋대로 인생 계획-67화(67/207)
side
시벨라누스와 앤디미온, 그리고 모르페우스
대신관의 방.
시벨라누스 대신관은 여전히 검은 마석에 잠식당한 채 의자에 멍하니 앉아 있었다.
아스포델의 예상대로, 모르페우스는 시벨라누스 대신관이 검은 마석의 영향력에서 벗어나려 할 때마다 그에게 새로운 검은 마석을 계속 사용하고 있었다.
시벨라누스 대신관의 나이도 있었기에, 다른 신관들은 그의 몸 상태가 좋지 않다는 모르페우스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었다.
모르페우스가 옆에 붙어 있지 않을 때도 검은 마석의 효과는 여전했다.
그래서 시벨라누스는 모르페우스의 명령대로 신성력 측정을 위해 황자와 황녀를 만날 때를 제외하고는 누구도 방에 들이지 않았다.
또 그 혼자 마음대로 방 밖으로 빠져나가지도 않았다.
파앗!
시벨라누스의 눈앞에 신성한 빛이 퍼져 나간 것은 그러던 어느 순간이었다.
시벨라누스 대신관의 몽롱한 눈이 찬란한 빛을 더듬듯이 느릿하게 움직였다.
[시벨라누스.]바로 그때.
하얀빛 속에서 신비로운 목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아직은 앳된 느낌이 드는 음성이었으나, 그 안에 깃든 위엄만큼은 대단했다.
[시벨라누스, 나는 데메테아 여신님의 사자다.]바로 그 순간, 시벨라누스를 둘러싸고 있던 검은 사기가 크게 일렁였다.
빛과 목소리가 나타난 위치는 벽에 걸린 데메테아 여신의 조각상이 있는 곳이었다.
시벨라누스의 몸에 닿아 있던 검은 마석에 쩌저적 금이 가기 시작했다.
역시 대신관의 자리까지 오른 자의 신심은 남달랐다.
안개가 낀 듯이 흐리던 시벨라누스의 눈이 서서히 초점을 되찾아 갔다.
꼭 어둠이 걷히고 새벽이 찾아와 산등성이 너머로 해가 떠오르듯이, 그의 눈동자에도 밝은 빛이 맺히기 시작했다.
“오, 오오……. 데메테아 여신님.”
아직은 멍한 기운이 남은 시벨라누스의 얼굴에 기적을 목도한 것 같은 감격과 동요가 서리기 시작했다.
시벨라누스가 비틀거리며 여신을 경애하듯이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내가 오늘 온 것은 네게 비밀리에 명할 것이 있어서이다.]여신의 대리자가 엄숙한 목소리로 그런 그에게 명했다.
[지금 바로 3년 기도에 들어가라.]대신전의 신관들에게는 가까운 성소인 눈꽃 암벽 안에 들어가서 심신을 정양하며 수련하는 제도가 있었다.
시기는 따로 정해져 있지 않았고, 누구나 원할 때 눈꽃 암벽에 들어갈 수 있었다.
그러나 어지간한 각오 없이는 해낼 수 없는 일이었기에 신심이 특별히 뛰어나거나 명예욕이 있지 않은 이상 쉽게 도전하는 이는 없었다.
[오늘 나를 만난 것은 누구에게도 말하지 말고, 여신님의 뜻에 따라 한시도 지체하는 일 없이 지금 바로 준비에 들어가도록 해라.]여신의 대리자는 시벨라누스가 거의 20년 전의 젊은 시절에 마지막으로 실행했던 바로 그 3년 기도를 명했다.
[그렇게 한다면 네게 데메테아 여신님의 은총이 깃들 것이니라.]대신관 시벨라누스는 신의 대리자를 배알한 감격에 차 머리를 조아렸다.
“데메테아 여신님의 종, 시벨라누스……. 명을 받듭니다!”
시벨라누스의 신실함이 신의 대리자를 만족스럽게 했는지, 엎드린 그의 머리 위에 손길이 내려앉았다.
꼭 어린애의 것처럼 느껴지는 작은 손이었지만 늙은 대신관을 감격하게 만들기엔 충분했다.
* * *
모르페우스는 시벨라누스 대신관이 갑자기 방에서 나왔다는 소식을 듣고 그의 뒤를 쫓았다.
“대신관님, 지금 어딜 가시는 중입니까?”
“오오, 모르페우스.”
시벨라누스 대신관이 반색하며 모르페우스를 돌아보았다.
며칠 만에 보는 대신관의 맑은 눈빛에 모르페우스의 눈이 가느스름해졌다.
“왠지 오늘따라 긴 잠에서 깨어난 것처럼 머리가 맑고 상쾌해 데메테아 여신님께 전심으로 기도드리고 싶은 심정이지 뭔가. 그래서 지금 바로 3년 기도에 들어갈 생각이네.”
“이렇게 갑작스럽게…… 말입니까?”
“허허, 원래 이런 일은 결정했을 때 바로 실행에 옮겨야 좋은 것 아니겠는가.”
모르페우스는 시벨라누스의 얼굴을 가만히 살폈다.
역시 그는 검은 마석에 조종당한 것을 기억하지 못하는 듯했다.
‘그보다, 혼자 사기를 완전히 떨치고 자아를 되찾다니……. 지금까지도 몇 번 조짐이 보이긴 했지만 예상보다 빠르군.’
시벨라누스 대신관이 한동안 검은 마석에 조종당해 모르페우스의 뜻대로 방에만 얌전히 있어 방심했던 게 문제였다.
그가 잠깐 한눈을 판 사이에 이런 일이 일어나다니 탐탁지 않은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이미 벌어진 일은 어쩔 수 없었다.
역시 검은 마석의 효능은 아직 안정적이지 못했다.
모르페우스가 시벨라누스 대신관에게 미완성의 검은 마석을 사용해 본 건 사실 충동적인 일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퍽 위험한 일이기도 했다.
하지만 왠지 그에게는 이것을 사용해도 괜찮을 거라는 막연한 확신이 들었다.
‘그런데 이렇게 갑자기 3년 기도에 들어간다고? 이대로 놔주긴 아까운데.’
다른 대신관들에게도 시험해 볼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들은 시벨라누스처럼 만만한 자들이 아니니 섣불리 접근해서는 안 됐다.
‘별수 없군. 한동안은 검은 마석을 개발하는 데 열중하는 수밖에.’
모르페우스는 마뜩잖은 마음으로 계획을 수정했다.
마침 2황자가 수상하기도 하니 황궁에 눈을 심어 그쪽을 좀 더 지켜볼 필요도 있었다.
‘게다가…… 어제저녁 기도 시간에 겁 없이 설친 데메테아의 개도 처리해야 하니.’
모르페우스가 오늘 잠시 시벨라누스에게서 눈을 돌린 이유는, 어제저녁 기도 시간에 감히 그를 공격한 자를 색출하기 위해서였다.
꽤 강력한 신성력이었던 것으로 보아, 고위급 신관 중 하나일 것이다.
지금까지 이런 식으로 그를 위협하려 한 자들이 없었던 것도 아니라 후보는 비교적 쉽게 추려졌다.
다만 살생을 할 수 없는 신관의 몸으로 이번에는 진짜 그를 죽이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공격이 평소보다 날카롭던 게 의외이긴 하지만…….
어차피 모르페우스가 데메테아 여신에게 받고 있는 보호는 아직 견고하니 상관없었다.
다만 이번에는 워낙 살기 어린 공격이었던 데다, 최근 몸 상태가 좋지 않았던 터라 모르페우스에게도 타격이 있었다.
어젯밤과 오늘 아침, 썩은 피를 대거 토해낸 모르페우스의 안색은 지금도 창백했다.
‘그러니 찾아낸다면 이번엔 반드시 죽일 것이다.’
모르페우스의 입매가 미세하게 비틀어졌다가 금방 원래 모습을 되찾았다.
주변에는 다른 신관들도 여럿 있었기에 모르페우스는 시벨라누스를 막지 못하고 고개 숙여 그를 배웅했다.
“시벨라누스 대신관님. 3년 기도를 무사히 마치고 돌아오시길 기원하겠습니다. 부디 데메테아 여신님의 광명이 비추기를.”
그렇게 3년 기도에 들어간 시벨라누스 대신관은 후일 눈꽃 암벽에서 놀라운 깨달음을 얻어 강력한 신성력을 각성함으로써 많은 이에게 존경받는 인물이 되지만, 그것은 아직 다가오지 않은 미래의 일이었다.
Chapter 20
양손의 소년들
모르페우스와 시벨라누스 대신관이 만나는 동안 난 잽싸게 레예스를 찾아갔다.
“황녀님!”
“헉헉, 안녕! 시간 없으니까 빨리 확인하자. 내가 준 보석, 지금 갖고 있어?”
지난번처럼 그와는 화원에서 몰래 만났다.
이번에도 레예스는 혼자 있었다.
전부터 짐작했듯이 아무래도 신관들이 그를 피해서 그런 것 같았다.
아무것도 모르고 다가오는 시종들의 경우에는, 저주의 영향을 받을까 봐 레예스 쪽에서 먼저 접근을 막는 듯했고 말이다.
“여기 있습니다.”
숨 돌릴 틈도 없이 내가 닦달하는데도 레예스는 순순히 내 말을 따랐다.
그가 건네준 보석을 받았다.
역시나 내가 줬던 보석은 표면이 까맣게 그을려 있었다.
‘아이고, 역시 레예스한테 깃든 사기는 강력해서 이 정도 성력으로는 오래 못 가는구나.’
아무래도 성력을 좀 더 많이 넣어야 그나마 효과가 얼마간이라도 지속되겠는데?
이번에는 성력을 빵빵하게 불어넣자 보석의 까만 그을음이 지워지고 다시 반짝반짝해졌다.
여전히 모르페우스에게 들킬 위험성은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레예스를 이대로 그냥 방치하는 것은 너무 가혹한 일이었다.
게다가 레예스는 신중한 성격이었으니, 알아서 잘 처신할 것이라고 믿었다.
“난 이제 내일쯤 황궁으로 돌아갈 것 같은데, 넌 계속 여기 있을 거야?”
일단 급한 용무를 마친 뒤 레예스에게 앞으로의 거취에 대해 물었다.
“저도 기회를 봐서 가문으로 돌아갈 생각입니다. 마침 어머니께서 부르시기도 해서 핑계를 대기도 좋고요.”
레예스가 나한테 돌려받은 보석을 소중히 손에 쥐며 답했다.
레예스의 어머니라면 현 바스티온 가주 말이군.
다행히 레예스도 이 대신전에 오래 머물지는 않을 예정인 듯했다.
그건 즉 모르페우스의 눈에서 벗어나는 일이니 일단 안심이 됐다.
잠깐 레예스의 눈치를 살피다가 물었다.
망나니 황녀님의 제멋대로 인생 계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