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Wicked Princess Plans for Her Life RAW novel - Chapter (74)
망나니 황녀님의 제멋대로 인생 계획-74화(74/207)
side
라 벨리카 황제와 록샨
늦은 저녁, 황제의 침전.
라 벨리카는 신수 티타라의 몸에 기대앉아 술잔을 기울였다.
그녀의 시선은 테이블 위에 놓인 푸른 보석에 꽂혀 있었다.
“폐하, 그것은…….”
막 침전에 들어선 록샨이 라 벨리카가 보고 있던 보석이 무엇인지 알아차리고 입을 열었다.
라 벨리카의 입술에 가느다란 미소가 걸렸다.
“신의 정원에 있는 것을 가져왔다.”
술잔을 내려놓은 손이 이번에는 테이블 위의 보석을 집어 들었다.
“4황자가 개화하기 전에 아스포델이 두고 간 것인 듯하던데.”
누구도 그런 사실을 말한 적 없음에도 라 벨리카는 이 보석의 원주인이 누구인지 단번에 꿰뚫어 보았다.
그러나 기묘할 정도로 예리한 라 벨리카의 혜안을 하루 이틀 겪은 것이 아니기에, 록샨은 이 정도의 사소한 일로 위화감을 느끼지 못했다.
“정이 많은 성격이라 그런지, 아델이 4황자가 열매일 적부터 신경을 많이 쓰더군요.”
지극히 애정하는 딸을 생각하자, 록샨의 얼굴에 부드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그래, 정말 신경을 많이 쓰는 것 같더구나.”
라 벨리카는 꼭 흥미로운 장난감을 찾은 듯이 손가락으로 보석을 느릿하게 매만졌다.
다른 사람이 본다면 그저 황궁에 돌처럼 굴러다니는 흔해 빠진 보석 중 하나일 뿐이었다.
하지만 맹수의 것과 닮은 라 벨리카의 황금색 눈에는 희미한 이채가 서려 있었다.
그녀 역시 신의 사랑을 받는 몸.
신성력을 두 눈으로 직접 볼 수는 없었으나, 이 보석에 깃든 미세한 양의 성스러운 기운을 라 벨리카는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대신전에서 돌아오는 길에 신수와 각인했다는 그 소년.”
“조슈아 말씀이십니까?”
“그래, 일전에 신수 둥지에서 아스포델의 도움을 받은 그 견습 사육사라지?”
“예, 맞습니다.”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이긴 하나 록샨에게서 긍정의 대답이 떨어진 순간, 라 벨리카 황제의 입에서 후후 낮은 웃음이 흘러나왔다.
“재미있구나.”
그녀는 요즘 드물게 즐거워 보였다.
록샨은 그런 라 벨리카를 보다가 그녀의 빈 술잔에 조용히 술을 따라 부었다.
“록샨.”
그러는 동안 보석에서 손을 떼고 턱을 괸 라 벨리카가 록샨을 지그시 응시하며 말했다.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듯한데 망설이지 않아도 된다.”
록샨은 역시 라 벨리카에게 속마음을 숨기는 건 어려운 일이라 생각했다.
물론 록샨이 심중의 말을 꺼내기 망설인 건 라 벨리카를 능멸하려던 이유가 아니라, 모처럼 평안한 그녀의 시간을 망치고 싶지 않아서였다.
하지만 라 벨리카는 록샨이 하려던 말이 무엇인지까지 이미 알고 있는 듯했으니.
결국 그는 입을 열었다.
“낮에 서쪽 균열을 수색한 이들이 돌아왔습니다.”
“흔적은?”
“대신전에서 돌아오는 날 제가 본 것과 동일한 흔적을 발견했다고 합니다.”
록샨이 가장 먼저 어떤 징조를 느낀 것은 아스포델과 함께 대신전으로 향할 때였다.
하지만 그때는 그저 막연한 육감에 불과했다면, 마수 그록의 습격 이후 아무래도 느낌이 이상해 주변을 수색하다가 발견한 흔적은 무엇보다도 명확한 증거가 되었다.
곧바로 서쪽 균열에 보냈던 정예 기사들이 오늘 보고한 내용 역시도.
“아무래도 신좌에서 추락한 검은 새들이 지하의 문을 연 것 같습니다.”
록샨의 말을 알아듣기라도 한 듯, 얌전하던 라 벨리카의 신수 티타라가 낮게 으르릉거렸다.
라 벨리카가 손을 뻗어 그런 신수를 달래듯이 머리를 쓰다듬었다.
여전히 권태롭고 여유로운 주인의 손길에 티타라는 금방 얌전해졌다.
“그래. 타락한 자들이 기어이 음지 밖으로 기어 나오려 하는구나.”
지금 록샨이 말한 사안은 결코 가볍지 않았으나 라 벨리카의 얼굴은 여느 때처럼 지극히 담담하기만 했다.
데메테아의 현신이라고도 불리며 존경받는 로잔티나의 위대한 황제는 원래 어떤 일에도 쉽게 동요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일단 침전에서 공적인 이야기는 여기까지 하지. 나머지 보고는 내일 듣겠다.”
“알겠습니다.”
록샨이 준 술잔의 술을 한 번에 비운 라 벨리카가 신수 티타라를 돌려보냈다.
“록샨, 이리 와서 오늘도 아스포델의 이야기를 해 봐라.”
대신 그녀는 록샨을 쿠션 삼아 등을 기댔다.
물론 쿠션이라 하기엔 푹신함이 부족하다 못해 거의 없는 느낌이긴 했지만, 애초에 그런 걸 바라고 옆에 둔 게 아니니 상관없었다.
“이미 알겠지만, 아스포델 이야기를 할 때의 그대의 목소리를 내가 특히 좋아한단다.”
라 벨리카가 이렇게 서슴없이 몸을 기대고 풀어진 모습을 보이는 건 록샨이 유일했다.
“가끔 짓궂은 말씀을 하십니다, 라 벨리카.”
조금 전의 라 벨리카처럼 이번에는 록샨의 목에서 낮은 웃음이 흘러나왔다.
그는 자신의 몸 위로 흘러내린 라 벨리카의 머리카락을 익숙한 손길로 부드럽게 쓸었다.
“예, 오늘은 피곤하신 듯하니 잠드실 때까지 아스포델의 이야기를 해드리지요.”
라 벨리카 황제의 침전에 밤의 분위기와 어울리는 고요한 목소리가 나지막하게 울리기 시작했다.
어느 평온한 밤이었다.
Chapter 22
오만방자하고 제멋대로인 황녀님의 소문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아델, 또 제르카인을 보러 가려는 거니?”
“네!”
“오늘은 폐하께서 들르신다고 했으니 우린 다음에 가자꾸나.”
내가 마가렛을 다그쳐 외출 준비를 하던 때 아버지가 웃으며 말했다.
오, 어머니가 카루스와 제르카인을 보러 가다니.
나쁜 일은 아니었기에 흔쾌히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제르카인이 개화한 뒤, 라 벨리카 어머니가 카루스의 궁을 찾는 일도 확실히 전보다 늘어났다.
물론 워낙 바쁜 분이라, 그래 봤자 일주일에 한 번 정도긴 했다.
그마저도 낮에 잠깐 들러 차 한 잔 마실 정도의 시간만 보내는 게 전부라 들었고 말이다.
‘그래도 아예 발길도 안 하던 예전에 비하면 이게 어디냐.’
왠지 느낌상, 아무래도 우리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카루스의 궁에 가끔이라도 들러보라고 먼저 얘기한 게 아닌가 싶었다.
부군 중에 그래도 궁에서 가장 낮은 대우를 받는 카루스를 가엽게 여기는 건 우리 아버지밖에 없을 테니까.
내 생각에도, 그렇게라도 안 하면 무심한 라 벨리카 황제가 카루스를 신경 쓸 것 같지 않았다.
전에도 말했듯이, 그녀가 카루스를 궁에 들인 건 온전히 정치적인 목적에서였다.
원래는 우리 아버지를 끝으로 다른 남편을 더 들일 생각은 없었다고 알고 있었다.
‘어머니와 아버지들 얘기도 굉장히 흥미진진한데……. 너무 기니까 다음 기회에 다시 하기로 하고.’
아무튼, 어머니가 갑자기 카루스의 궁에 들르기 시작하자 발등에 불이 떨어진 건 궁인들이었다.
그동안 황제가 한 번도 찾지 않는 부군이라고 카루스를 무시하며 게으르게 굴던 궁인들도 이제는 매일 놀고먹을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이 영악한 궁인들은 어머니를 포함한 다른 사람이 카루스의 궁에 방문할 때만 성실한 척하기 시작했다.
매일 꾀부리는 게 일상이라 그런 쪽의 능력이 특화되기라도 했는지, 제르카인이 태어나자마자 카루스의 궁에 갔을 때는 내가 봐도 감쪽같다고 느꼈을 정도였다.
특히 황제인 어머니가 방문할 때면 아예 사람 자체가 바뀐 것처럼 굴었다.
그러니 어머니가 궁인들의 나태함을 느끼지 못했다 해도 이해할 수 있었다.
아니면 알면서도 카루스가 아무 말 안 하니 그냥 두는 걸 수도 있고.
‘우리 어머니 성격이면 그럴 수도 있을 것 같아서 뭐라 말하기가 애매하네.’
어쨌든 오늘은 어머니가 카루스 궁에 가신다니 난 다른 목적부터 이뤄야겠군.
“아빠, 저 밖에 나가서 놀고 올게요!”
* * *
“타마린느 언니, 찾았다!”
화창한 오후.
푸른 심해 정원에 있는 1황녀 타마린느를 발견하고 다가갔다.
“어머? 안녕, 아스포델!”
귀족 자제들과 함께 있던 타마린느가 나를 보고 반갑게 인사해 주었다.
“로잔티나의 별을 뵙습니다.”
타마린느의 곁에서 인사하는 아이들을 쭉 스캔했다.
이틀 전에 본 루벨리오와 헬리만처럼 타마린느도 귀족 아이들과 어울리는 중이었나 보다.
저 나이쯤 되면 선별된 귀족 아이들이 황족의 놀이 친구로 붙는 게 당연한 일이었다.
그렇게 어릴 때부터 교류하며 지내다가, 성향이 맞아 친해지면 자연스럽게 정치적 동맹을 맺어 황족의 가신이 되기도 했다.
지금 푸른 심해 정원에 있는 세 아이 중 한 명은 타마린느의 부친 1부군 테드릭의 가문 아이인 새뮤엘 린델이었다.
그러니까 유클레드, 타마린느 쌍둥이들과는 사촌인 셈이다.
새뮤엘은 린델 가문에서 많이 배출되는 붉은 머리와 녹색 눈을 가지고 있어서, 언뜻 보면 유클레드보다도 타마린느와 친남매처럼 보였다.
다만 인상 자체는 새뮤엘이 훨씬 더 유순했다.
나머지 하늘색 머리를 가진 두 아이는 시스나몬 가문의 자매였는데…….
망나니 황녀님의 제멋대로 인생 계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