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Wicked Princess Plans for Her Life RAW novel - Chapter (8)
망나니 황녀님의 제멋대로 인생 계획-8화(8/207)
토다다다닥!
늦은 밤.
나는 달빛 어린 복도를 혼자 질주하고 있었다.
옛 격언에 쇠뿔도 단김에 빼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그 위대한 선조들의 가르침을 따라 내친김에 지금 바로 신의 정원 로사리움에 갈 생각이었다.
‘앞으로 갈 길이 구만리라 일분일초가 아쉬울 판에 뜸 들일 필요 없지. 난 직진만 해!’
사고 직후라 경비가 삼엄하긴 하겠지만, 원래 등잔 밑이 어두운 법이라고 했으니.
오히려 외부 경계에 집중해 나처럼 작은 어린애가 숨어들 틈 정도는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발소리를 죽이고 아직 복도를 돌아다니고 있는 궁인들을 피해 움직였다.
다리가 짧아서 생각보다 속도가 안 났지만, 그래도 몸을 숨기기에는 더 좋은 것 같…….
“아델?”
“헉!”
그런데 분명 조금 전에 방에서 헤어진 아버지가 어느새 소리 소문 없이 다가와 내 뒤에 서 있었다!
“이런, 이 늦은 시간에 왜 혼자 밖으로 나왔니?”
아버지가 의아한 듯이 나를 안아 들었다.
그 자세가 참 안정적이었지만 막상 나한테 맞닿은 아버지의 몸은 탄탄한 근육이 옹골차게 박혀 있어서 생각보다 그리 편안하지 못했다.
지금 아버지의 옷차림이 얇은 침의라 돌덩이 같은 단단함이 더 생생하게 느껴졌다.
아, 맞다…….
깜빡했는데 지금 나 어려서 아버지랑 같은 궁 쓰고 있었지.
“어, 음, 잠이 안 와서…….”
“왜 잠이 안 올까, 우리 예쁜 딸이? 역시 저녁때 일로 많이 놀라서 그런가 보구나.”
“으으음…….”
“그럼 아까 읽다 만 동화책을 다시 읽어줄까?”
하, 씨.
그러니까 이 야심한 밤중에 혼자 복도를 싸돌아다니는 내 기척을 그가 감지하지 못하는 게 이상한 일이다, 이 말이었다.
나도 모르는 새 머리까지 올라 있던 열이 식었다.
동시에 푸시식 김이 샜다.
생각해 보면 애초에 아버지한테 들키지 않고 신의 정원에 가는 것부터 불가능했다.
‘우리 아버지, 그렇게 안 생겨서 육식 꽃사슴이니까 말이지.’
이런 당연한 사실을 떠올리지 못했다니.
나는 지금 나 스스로가 충분히 이성적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나 보다.
차분하게 생각해 보자 내가 조금 전 죽음을 맞고 회귀한 여파로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한껏 흥분해 침착하지 못한 상태였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 사실을 자각하자 갑자기 탈력감이 몰려들었다.
급격히 힘이 빠지는 느낌에 아버지의 팔에 녹은 찹쌀떡처럼 늘어졌다.
“아빠, 우리 로사리움에 가면 안 돼요?”
그래도 이왕 나온 김에 이대로 돌아가긴 아쉬워져서 직구를 던졌다.
어차피 빙빙 돌아가는 건 내 취향이 아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로사리움에 경비를 서고 있는 사람이 몇 명인지나 확인해 둬야지.
“로사리움에?”
“응!”
내가 고개를 마구 끄덕이자 아빠가 알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우리 아델. 기대했던 생일 연회가 그렇게 끝나서 속상할 텐데, 그런 내색은 않고 오히려 이렇게 동생 걱정을 하다니…….”
아버지의 애틋한 눈빛을 보고 순간 흠칫했다.
또잉.
내가 4황자 놈을 걱정한다니, 사실은 정반대인데…….
하지만 나는 원래 뻔뻔한 성격이었으므로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거짓말했다.
“응! 로사리움에 있는 열매가 다쳤을까 봐 걱정돼! 가서 괜찮은지 보고 싶어.”
그러자 아버지가 내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말했다.
“하지만 아델. 신의 정원은 지금 출입이 금지돼서 안에는 들어가 보지 못할 거란다.”
“그럼 바로 앞까지만이라도 가요. 응?”
똘망똘망한 눈으로 불쌍하게 쳐다보자 딸자식에게는 한없이 약한 아버지가 멈칫했다.
“그래, 아델이 하고 싶은 대로 하자.”
결국 그가 나한테 져 주었다.
나는 아버지에게 안겨 아까 화재가 난 로사리움으로 향했다.
“아델, 춥지 않니? 그냥 따뜻한 옷으로 갈아입고 나올 걸 그랬구나.”
“괜찮아요! 아빠 옷 따뜻해.”
밖으로 나왔더니 밤공기가 약간 쌀쌀했다.
왠지 다시 궁으로 돌아갈 것 같은 불길한 느낌이 들어서 아버지가 침의 위에 걸치고 있던 가운 속으로 홀랑 파고들었다.
아버지는 처음에 약간 간지러운 듯했지만 나를 떨어뜨리지 않고 오히려 더 꽁꽁 품에 감쌌다.
이렇게 그에게 안겨 있으니 꼭 캥거루 새끼가 된 기분이었다.
왠지 보호받는 느낌이 들면서 마음이 찡해졌다.
사실 두 번이나 아스포델로 살며 나는 원래 세계의 가족들보다 록샨과 더 오랜 시간을 보냈다.
그래서 그런지, 이제는 나도 그가 진짜 아버지인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첫 번째 생에서 목격한 그의 죽음은 소설에서 봤을 때보다 더 가슴 아팠다.
두 번째 생에서도 4황자가 반역을 일으켰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그의 걱정이 가장 먼저 들었다.
‘내가 다른 사람은 몰라도 우리 아버지만큼은 무슨 일이 있어도 지켜내고야 말 테다!’
그렇게 다시 한번 굳게 다짐한 순간, 아버지의 몸이 아주 작게 흔들렸다.
미세한 움직임이었지만 몸이 바싹 맞닿아 있어서 눈치챌 수 있었다.
“카루스.”
“록샨 님?”
아, 누군가 다가오는 인기척이 느껴져서 그랬나 보다.
잠시 후, 어딘가 음울한 분위기를 풍기는 검은 머리 남자가 아버지와 내 눈앞에 나타났다.
아까 연회장에서도 봤던 4황자 놈의 부친, 카루스였다.
화재 사고 때문인지 그는 기운 없이 축 처져서 터덜터덜 걷고 있었다.
그러다 아버지와 나를 발견하고 놀란 토끼 눈을 떴다.
“열매를 보러 가는 길인가 보군.”
“예, 아무래도 걱정이 돼서 오늘은 옆에서 밤을 새우려고……. 록샨 님은 이 늦은 밤중에 왜 나오셨습니까?”
“우리도 신의 정원으로 가고 있었네. 아델이 동생 걱정으로 통 잠을 못 이루기에.”
“3황녀님이요?”
아버지가 웃으며 건넨 말에 카루스가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나를 보았다.
이렇게 보니 전체적인 이목구비는 4황자 놈과 참 닮았는데, 확실히 이쪽이 더 순진하고 착하게 생겼다.
왠지 동정심을 자극하는 불쌍한 느낌이기도 하고.
한바탕 울기라도 한 것처럼 빨간 붕어눈을 한 카루스가 감동한 듯이 나를 쳐다보았다.
“세상에, 그래서 이 늦은 시간에 직접 찾아와 주시기까지 하다니……. 정말 감사합니다, 3황녀님. 그리고 록샨 님.”
하지만 나는 그를 보고 작게 실소하며 입을 벌렸다.
이게 뭐야?
아까부터 희미하게 그의 몸을 감싸고 있던 검은 안개가 꿈틀거리더니 급기야는 마주한 얼굴 전체를 뒤덮었다.
검은 덩어리가 된 카루스에게서 이루 말할 수 없는 악취가 풍겼다.
찰싹!
“악!”
“아델?!”
아이쿠야, 지난 생에서 잠깐 성녀 노릇 할 때 습관이 들어서 나도 모르게 그만.
이럴 때는 그냥 어린애인 척하자.
“아, 미안! 벌레가 있어서 그래써요.”
“괜찮나, 카루스?”
“그, 그럼요. 괜찮습니다. 하나도 안 아팠어요.”
카루스가 나한테 얻어맞은 이마를 문지르면서 호구같이 허허 웃었다.
나도 순진한 척 헤헤 웃으며 카루스에게 닿았던 손을 아버지의 옷자락에 슥슥 닦았다.
하지만 눈으로는 아까보다 확연히 연해진 검은 기운을 노려보고 있었다.
확실하다.
저건 신의 산물인 성력과 정반대되는 힘.
바로 소설 속 악역들의 힘의 근원인 불순한 사기였다.
* * *
“어머나, 우리 어여쁜 황녀님! 어쩜, 오늘은 음식을 가리지도 않고 혼자서도 씩씩하게 잘 드시네요.”
다음 날 아침, 나는 일단 밥부터 냠냠찹찹 먹어 치우며 어제의 일을 생각했다.
“다섯 살 생일이 지나 우리 황녀님도 이제 어른이 되신 걸까요?”
마가렛이 후후 웃으면서 내 입가를 살갑게 닦아주었다.
“오구구, 그래도 좀 천천히 드세요. 그러다 목에 걸리실지도 몰라요.”
마가렛은 내 보조 양육자였다.
로잔티나에는 대체로 여성이 황제인 경우가 많았다.
그 경우 어린 황족들은 대부분 부친이 직접 양육했다.
더불어 어린 황족에게는 같은 성별의 전담 궁인이 보조 양육자로 한두 명 더 붙는 게 보편적이었다.
그러다 황족이 12세가 되면 전담 궁인만 데리고 다른 궁으로 독립하는 형식이었다.
“으음, 그냥 내가 할게.”
나는 자꾸 날 챙겨주는 마가렛의 손길을 어색하게 쓱 피했다.
“그러시겠어요? 우리 황녀님은 혼자서도 씩씩하게 식사도 잘하시고, 어쩜 이렇게 똑똑하고 의젓하신지 몰라!”
마가렛이 흐뭇하게 웃으면서 아낌없이 나를 우쭈쭈해 줬다.
그걸 보니 몸이 배배 꼬여서 밥을 먹는 게 좀 곤혹스러웠다.
‘몸소 체험하는 육아물은 진짜 이런 게 별로라니까…….’
아니, 나도 소설만 볼 때는 좋았지.
주변 인물들이 귀여운 여주인공을 부둥부둥해 주는 힐링물, 얼마나 좋은가?
‘크, 하지만 내가 그걸 받고 싶은 건 아니었어……!’
아무튼 이렇게 살아서 마가렛의 살뜰한 보살핌을 받고 있으려니 내가 과거로 돌아왔다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또 실감 났다.
혹시 눈을 뜨면 영혼 상태로 변해 그 새하얀 공간으로 다시 돌아가 있는 건 아닐까 싶었는데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기절하듯이 숙면을 취한 뒤, 느지막하게 일어난 나와 달리, 아버지는 벌써 황제와 그 부군들의 조식 자리에 참석하러 간 상태였다.
결국 어젯밤에는 로사리움에 가지 못했다.
카루스와 함께 있는 동안 내 몸이 차갑게 식어 아버지가 깜짝 놀라 바로 궁으로 돌아왔기 때문이다.
나는 괜찮으니 다시 열매를 보러 가자고 했지만 소용없었다.
소란을 듣고 온 마가렛도 나를 말렸다.
망나니 황녀님의 제멋대로 인생 계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