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Wicked Princess Plans for Her Life RAW novel - Chapter (84)
망나니 황녀님의 제멋대로 인생 계획-84화(84/207)
‘황녀님은 제게 무엇이든 하셔도 괜찮습니다.’
‘사과하실 필요 없습니다. 황녀님이 손을 잡아주시는 건 좋으니까요.’
날 보며 사르르 웃던 레예스를 생각하니 마음이 좀 살랑살랑 몽글몽글해지는 느낌이었다.
어린 녀석이 참…….
남주인공의 형이라 그런지 벌써부터 다른 꼬맹이들과는 느낌이 남달랐었지.
만난 건 몇 번 안 되긴 하지만 나한테 무조건적인 호의를 보이던 녀석이라 그런가?
대신전에서 마지막으로 봤을 때 성력석을 주긴 했으나, 혹시 효력이 떨어져서 지금 또 많이 아픈 건 아닌지 살며시 걱정스러운 마음도 들었다.
그날 정신이 없어서 인사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헤어진 게 조금 마음에 걸렸다.
“아스포델, 너! 마침 잘 만났다.”
누군가 시건방진 목소리로 날 불러제낀 건 바로 그때였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리자마자 나는 표정을 썩혔다.
[어, 미역 머리네?] [오늘은 딸기 머리랑 같이 안 있네?]족제비들의 말처럼, 멀쩡히 길을 걷고 있던 나를 감히 불러 세운 건 3황자 헬리만이었다.
기껏 레예스를 생각하며 보송한 기분에 젖어 있었는데 헬리만 놈이 거기에 재를 뿌린 느낌이었다.
“로잔티나의 별께 태양의 축복을.”
오늘도 그의 뒤에 붙어 있던 뷔요른 가문의 영식이 후다닥 헬리만을 따라와 나한테 인사했다.
“너 도대체 우리 유클레드 형님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
그러거나 말거나, 헬리만은 나를 삿대질하며 대뜸 소리쳤다.
“지난번에도 그렇고, 어제도 그렇고! 형님이 나보다 네 편을 들다니, 이건 말도 안 돼!”
코웃음도 안 나오는 말에 시큰둥하게 답했다.
“왜 말이 안 돼? 내가 너보다 훨씬 착하고 귀엽자나.”
“뭐?!”
내가 내뱉은 말을 듣고 헬리만이 기겁했다.
나는 그의 얼굴에서 나를 삿대질하고 있는 시건방진 손가락으로 도르륵 눈길을 돌렸다.
“근데 너, 손가락 간수 잘해라. 우리 애들이 콱 물어버릴 수도 있다?”
“헉!”
일전에 우리 족제비들에게 발로 차여 호수에 빠진 적이 있는 헬리만이 소스라쳤다.
내 품에 안겨 있던 피오와 키노가 일부러 들으란 듯이 끼끼거리는 소리를 냈다.
그게 3황자 녀석에겐 퍽 위협적으로 느껴졌나 보다.
얼른 손가락을 내린 헬리만이 족제비들에게 겁먹은 걸 숨기려는 듯 나한테 괜히 더 세게 눈을 부라렸다.
“유클레드 형님이 없으니까 이제야 본색을 드러내는군! 그동안 형님한테 얼마나 착한 척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네 포악한 성격을 오래 숨길 수 있을 것 같아?!”
글쎄, 딱히 그 녀석 앞에서 일부러 착한 척했던 적은 없는데 말이다.
오히려 구박했으면 또 몰라.
다만 유클레드의 귀에는 필터링이 달려 있어서 내 말을 항상 이상하게 자기 좋을 대로 해석하는 것뿐이었다.
‘그나저나, 진짜 악역 보존의 법칙이라도 있는 건가?’
루벨리오가 귀찮게 안 구니 헬리만이 점점 그 역할을 대신하는 느낌인데.
“라 벨리카 황제 폐하께서 오십니다!”
그때 우리 주위에 있던 수행인 중 한 명이 황급히 외쳤다.
정말 길 건너편에서 이쪽으로 다가오는 라 벨리카 황제의 모습이 보였다.
“로잔티나의 지고한 태양께 데메테아의 영원한 빛이 머물기를!”
수행인들이 일제히 무릎을 꿇었다.
3황자의 뒤에 있던 뷔요른 가문의 영식도 서둘러 몸을 낮추었다.
단지 등장만 했을 뿐인데, 라 벨리카 황제가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것만으로도 주변의 공기가 확 달라졌다.
“어, 어마마마…… 딸꾹!”
마음의 준비도 없이 어머니와 마주친 탓인지, 헬리만은 더듬거리며 제대로 인사를 꺼내지도 못했다.
“어마마마, 편안한 밤 보내셨나요?”
그래서 내가 먼저 문안 인사를 했다.
그러자 라 벨리카 황제의 찬란한 황금색 눈이 내게 떨어져 내렸다.
“그래. 3황자와 3황녀 둘이 담소를 나누는데 내가 끼어들었나 보군.”
“아, 아닙니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헬리만의 입이 그제야 트였다.
“그, 그냥 우연히 마주쳐서 인사를 나누고 있었을 뿐입니다, 어마마마…….”
하지만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쥐꼬리만큼 가늘었다.
라 벨리카 어머니가 이번에는 그런 헬리만에게 눈길을 돌렸다.
“그런가. 멀리서 듣기에 3황자가 언성을 높이는 듯했는데.”
“아, 아, 아, 아니요……! 아, 아스포델이 반가워서 저도 모르게 목소리가 커진 것 같습니다. 저, 정말로요…….”
어머니의 눈을 정면에서 마주한 헬리만은 정신이 혼미해 보였다.
내가 아는 라 벨리카라면 지금 저 말은 그냥 의미 없이 꺼낸 것일 게 분명했다.
하지만 헬리만이 듣기에는 자신을 추궁하는 것 같았나 보다.
안절부절못하며 변명을 하는 모습이 굉장히 필사적이었다.
라 벨리카 황제의 위압감은 어른들조차 기가 눌릴 정도로 엄청나서, 헬리만이 이렇게 어찌할 바를 모르며 쩔쩔매는 것도 이해할 수 있었다.
그걸 알아서인지 라 벨리카 황제도 헬리만에게 더 말을 시키지 않았다.
“황녀, 얼마 전에 새로운 어린 신수 소환사가 네게 마수를 선물로 주었다지?”
대신 그녀는 마침 생각났다는 듯이 내게 물었다.
좀 뜻밖이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엥? 그런 자잘한 얘기가 어머니 귀에 들어갔어?
어쨌든 질문을 받았으니 대답해야 했다.
“네! 곰처럼 생긴 마수인데 어마마마가 주셨던 것보다 작고 귀여워요!”
하지만 대답해 놓고 아차 했다.
혹시 그녀에게 받은 마수가 조슈아에게 받은 것보다 별로라는 뜻으로 생각할까 봐 얼른 덧붙였다.
“물론 마수는 클수록 멋지지만요!”
그러자 라 벨리카 황제의 입가에 가느다란 미소가 떠올랐다.
“다음에 마수 박제품을 보러 3황녀의 궁에 한번 들러야겠군.”
“네! 그중에 어마마마가 주신 게 제일 머쪄요!”
어쨌거나 이 땅의 최고 권력자에게 좋게 보여서 나쁠 게 없었기에 난 열렬히 호응했다.
3황자 헬리만은 그런 우리의 옆에 찍소리 하나 못한 채 서 있었다.
3황자의 놀이 친구인 뷔요른 영식도 어머니와 나 사이에 오가는 대화를 듣고 두 눈을 흔들었다.
마수에 대한 우리의 품평회가 꽤 충격적이었던 모양이다.
그래도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서 있는 3황자를 나름대로 조금은 신경 쓴 듯, 어머니가 다시 그를 향해 말했다.
“3황자, 원한다면 네게도 마수를 주마.”
“헉!”
헬리만이 기겁했다.
그는 고개를 번쩍 들고 황망하게 입술을 뻐끔거렸다.
이번만큼은 나도 3황자 녀석의 마음을 이해하고 그를 조금 불쌍하게 쳐다봤다.
물론 라 벨리카 어머니는 지금 절대 강요하는 게 아니었지만, 어디 저 눈을 마주하며 싫다고 거절하는 게 쉽던가.
“가, 감사, 감사합니…… 으, 히잉…….”
결국 억지로 감사 인사를 하던 헬리만이 울먹이기 시작했다.
“왜 우는 것이지?”
그걸 보고 라 벨리카 황제가 진심으로 의아한 듯이 물었다.
“아,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3황자님께서 눈물을 흘리실 정도로 감격하신 듯합니다.”
헬리만의 뒤에 있던 그의 전담 궁인이 새하얘진 얼굴로 대신 답변했다.
필사적인 지원이었지만 사실 소용은 없었다.
어지간히 눈치가 없는 사람이 아닌 이상, 헬리만이 울음을 터뜨린 이유가 기뻐서가 아니란 걸 모를 수는 없었다.
헬리만을 보는 라 벨리카 황제의 얼굴에 다시금 권태로운 기색이 떠올랐다.
“폐, 폐하! 로잔티나의 지고한 태양께 데메테아의 영원한 빛이 머물기를!”
황제 폐하를 향한 예를 표하며 누군가 촐싹 맞게 나타난 건 분위기가 우중충해지기 시작한 순간이었다.
검은 머리에 주홍색 눈을 가진 남자.
카루스의 형인 바론 오클란테였다.
그는 오늘도 카루스와 제르카인을 보러 입궁한 듯했다.
어머니도 바론을 알아보고 입을 열었다.
“오클란테로군.”
“예, 예! 얼마 전 가주 자리를 이은 바론 오클란테입니다. 이렇게 폐하를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그때 내 팔에 안긴 족제비들이 속닥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어휴, 저 인간 속이 새까마네, 새까매.] [그러게. 지난번에 봤을 땐 안 저랬는데?]나도 바론을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피오와 키노의 말처럼 며칠 사이에 바론의 가슴에 새까만 사기가 뭉쳐 있는 게 보였다.
‘어유, 저 인간이 기어이.’
하지만 예전에 카루스나 레예스의 사기를 봤을 때처럼 뜬금없어서 놀라운 느낌인 건 아니었고, 그냥 올 것이 왔구나 싶은 마음이었다.
“4황자를 보러 가는 길인가?”
“그러하옵니다! 4황자님께서 날이 갈수록 라 벨리카 황제 폐하를 많이 닮아가시는 것 같습니다!”
바론은 라 벨리카 황제를 직접 만난 기회를 놓치지 않고 깨알같이 어필했다.
‘누가 봐도 제르카인은 카루스 판박이구먼, 씨알도 먹히지 않을 소리를 하고 있네.’
어머니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걸까?
그녀는 살짝 가늘게 뜬 눈으로 바론을 지그시 응시했다.
그런데 기분 탓인가…….
왠지 얼굴보다 조금 아래쪽을 보는 것 같은데.
게다가 눈빛도 조금 전보다 한결 냉엄해진 것 같았다.
‘응?’
그때 어머니의 시선이 날 향해 미끄러졌다.
뜻 모를 기묘한 이채가 그녀의 눈에 떠오른 건 지극히 찰나였다.
“그래, 짐은 다음 일정이 있어서 이만 가봐야 할 것 같군.”
하지만 미처 그 시선의 의미를 파악할 새도 없이, 잠깐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하던 라 벨리카 황제는 다시 나른한 얼굴로 돌아와 내게서 고개를 돌렸다.
“그럼 살펴 가도록, 오클란테 가주. 3황자와 3황녀도 편안한 오후 보내거라.”
그렇게 그녀는 먼저 자리를 떠났다.
망나니 황녀님의 제멋대로 인생 계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