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Wicked Princess Plans for Her Life RAW novel - Chapter (86)
망나니 황녀님의 제멋대로 인생 계획-86화(86/207)
한순간 등이랑 팔에 닭살이 돋았다.
[헉! 이, 이 기운은!]그때 갑자기 앤디미온이 들고 있던 펜을 손에서 놓치며 소리쳤다.
[데메테아 님……!]뜬금없는 소리에 당혹감보다도 더 큰 황당함이 밀려왔다.
뭐요? 데메테아라고?
왜 갑자기 테메테아가 여기서 튀어나와?
[앤디미온이구나. 네가 얼마 전 이 아이에게 종속되어 백색 심연을 나간 것은 알고 있었다.]그런데 해파리도 촉수를 하늘거리며 앤디미온을 알은척했다.
황소 머리 괴물 인형이 비틀거리며 솜뭉치 몸을 굽혀 책상 위에 무릎을 꿇는 자세를 취했다.
[데메테아 님의 사자 앤디미온이 인사드립…… 어억!]하지만 어린이 인형의 비율상 머리가 커서 그런지, 앤디미온은 인사를 채 끝마치지 못하고 책상에 뿔을 박으면서 엎어졌다.
만약 티타니아가 조금 전에 돌아가지 않고 아직 여기에 남아 있었다면 저 모습을 보고 엄청 비웃었을 게 분명했다.
[시간이 없으니 인사는 됐다.]해파리는 허우적거리는 앤디미온을 뒤로한 채 다시 얼굴을 나한테 돌렸다.
내 손등에 올라온 촉수가 꾸물거리며 움직여서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아이야. 만나서 반갑구나. 대신전에서부터 너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으나 방해 요소가 많아 그러지 못했다.]“지, 진짜 데메테아?”
여전히 믿기지가 않아서 되물었다.
그러자 해파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나는 얼떨떨함에 어버버거렸다.
그러다 순간적으로 머리를 스쳐 지나간 기억에 입을 떡 벌렸다.
가만, 대신전에서부터 나한테 말을 걸려고 했다고?
어억, 그럼 설마 대신전에서 웬 귀신 같은 목소리를 들은 것 같다고 느낀 게 진짜였나?
그때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해파리가 덧붙였다.
[다행히…… 지금은 네게 종속된 사역마들이 여기 없구나.] [예? 설마 그 건방진 족제비 녀석들이 감히 데메테아 님을 방해했단 말입니까?!]책상에 머리를 박은 채 계속 버둥거리다가 결국 답답함을 못 참고 인형에서 뛰쳐나온 앤디미온이 영혼 상태로 허공에 둥둥 뜬 채 격양된 목소리로 외쳤다.
[그 아이들 때문에 곤욕을 치른 적이 많지만…… 사소한 일이니라. 내가 작은 피조물에 현신한 탓인지 먹잇감으로 안 것 같더구나.]기분 탓인지 해파리의 목소리가 아까보다 우울해진 것 같았다.
[어쨌든 나로서도 이 땅에 직접 현신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 하여 한동안은 인세의 일에 관여하지 못하고 지켜만 보다가 마침 오늘 기회가 왔을 때 파장이 맞는 그릇이 이곳에 있어 이렇게 성물에 들어와 네게 말을 걸게 된 것이다.] [그러셨군요! 데메테아 님의 성음을 500년 만에 직접 들을 수 있어 너무나 영광입니다!]감격한 듯한 앤디미온을 보고 이번엔 다른 부분에서 놀랐다.
“오백 년?”
만약 이 해파리가 진짜 데메테아 여신이 맞다면, 앤디미온 너…….
“너 그동안 여신님하고 별로 안 친했구나?”
앤디미온은 지난 회차들에서부터 백색 심연에서 자기가 엄청난 실세였던 것처럼 걸핏하면 잘난 척하기 일쑤였다.
그런데 그게 다 공갈이었단 거구먼?
[무, 무엄하다, 새끼 인간! 여신님의 성음을 직접 들을 수 있는 기회가 많은 줄 아느냐!]내 흐린 눈을 마주한 앤디미온이 발끈했다.
하지만 바로 뒤에 이어진 해파리의 말을 듣고 이번에는 내가 앤디미온과 같은 표정을 짓고 말았다.
[아이야. 나는 이제까지 네가 이곳에서 보낸 기나긴 시간을 알고 있다.]“……!”
순간 뒤통수를 세게 후려 맞은 것 같은 기분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지금 이 해파리가 뭐라 그런 거지?
지금까지 여기에서 내가 보낸 긴 시간을 알고 있다고?
갑자기 온몸의 피가 차갑게 식는 기분이 들었다가, 금방 속이 보글보글 끓기 시작했다.
“그게 무슨 의미야?”
[네가 이 세계 최후의 시간선 안에 갇혀 있음을 알고 있다는 얘기다.]담담한 목소리가 다시 한번 고막을 울렸다.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앤디미온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해파리와 나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뭐야…….”
그런데 어째서일까?
해파리가 나를 응시하며 그렇게 말한 순간, 속에서 울컥하는 감정이 솟아올랐다.
어쩌면 지금까지 열심히 개고생했던 시간이 떠올라서 그런 건지도 몰랐다.
“혹시 그 말은 그동안 날 지켜보고 있기라도 했다는 거야?”
내가 지금 무슨 반응을 보여야 하는 거지?
그러고 보니 이 해파리는 대신전에서부터 나와 대화를 하고 싶었다고 했다.
하지만 왜?
내가 이곳에서 보낸 시간을 알고 있었다면, 지금까지 가만히 있다가 왜 이제 와서?
“당신이 진짜 데메테아 여신이라면 왜 지금 갑자기 나타나서 나한테 이런 소리를 하는 거야? 지금까지는 한 번도 이런 적 없었잖아.”
게다가 내 입장에서는 이 해파리가 진짜 데메테아 여신이 맞는지도 여전히 의심스러웠다.
만약 진짜라면, 왜 지금껏 한 번도 이런 식으로 나타난 적이 없다가 이번 회차에서만 갑자기 레예스에게 수수께끼 같은 신탁을 내리고 루벨리오에게도 예지를 보여줬는지, 이상한 점이 너무 많았다.
[나도 사정이 있지만 길게 이야기할 시간이 없구나. 이 땅에 불순물이 들어와 원래 안배되어 있던 균형을 흐트러뜨리기 시작한 것을 나조차도 완전히 막을 수 없었으니.]내가 자신을 수상해하는 것을 느꼈는지, 해파리가 점이 찍힌 것 같은 눈으로 날 보며 촉수를 움직였다.
[하나 이번에는 반드시 네게 직접 경고해야 할 것이 있어 찾아왔다.]꿈틀거리며 들어 올려진 해파리의 푸른 촉수가 나를 다독이듯이, 혹은 이제부터 자신의 말을 집중해 들으라는 듯이 내 손등을 툭툭 두드렸다.
[아이야. 이대로라면, 정해진 시간이 되어 네가 맡은 소임을 끝낸다 해도 너는 네 원래의 자리를 찾지 못하고 죽을 것이다.]“뭣……!”
예상치 못한 말에 소스라쳤다.
어디 한번 무슨 소리를 하나 들어보자는 심산이긴 했지만 대번에 이런 폭탄을 투척할 줄은 몰랐다.
뭐야, 그게?
내가 맡은 소임을 다 해도 죽을 거라고?
그러니까…… 내가 이 이야기를 해피 엔딩으로 이끄는 데 성공한다고 해도 죽을 거라는 말인가?
이번에는 질겁해서 외쳤다.
“그, 그게 무슨 소리야! 해피 엔딩으로 끝내면 다 해결되는 거 아니었어? 내가 왜 죽어?”
[잘 들어라, 아이야……. 네가 원래의 자리로…… 위해서는…….]그런데 해파리가 막 중요한 이야기를 시작하려고 할 때, 갑자기 노이즈가 낀 것처럼 치지직거리는 소리가 들리며 음성이 중간중간 끊겼다.
[단순히…… 면 되는 게 아니라…….]“자, 잠깐. 이거 중요한 순간에 왜 이래?”
설마 지금 전형적인 고구마 클리셰를 따라가려는 건 아니겠지?
[이런…… 벌써…… 시간이…….]이씨, 시간 타령하지 말고 필요한 말만 딱 하란 말이다!
[이 세계를 어지럽히는…… 열세 번째…… 추락한 별의 후예를 찾아서…….]“뭐요, 열세 번째 별이 어쩌고저째?”
[아이야……. 부디 조심……. 다음에…….]탄식 어린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마음이 급해져서 하늘거리는 해파리를 붙잡고 흔들었다.
“아니, 기다려……! 하던 말은 마저 하고 가야 할 거 아니야!”
[데메테아 님! 이대로 가시는 겁니까?!]앤디미온도 나와 함께 해파리를 애타게 불렀다.
하지만 아무 소용 없었다
내 손등 위에 가냘프게 얹혀 있던 해파리의 촉수가 툭 하고 떨어지며 조금 전까지 느껴지던 생명력이 완전히 사라졌다.
“아, 안 돼, 돌아와!”
“아델…….”
“가지 마, 이렇게 사라지면 안 돼애……!”
하필 그때 아버지가 문을 열고 내 방에 들어왔다.
그는 해파리를 두 손으로 붙들고 절박하게 소리치는 나를 보며 크게 흠칫했다.
“…….”
“…….”
잠깐 서먹한 분위기가 우리 사이에 감돌았다.
“우리 딸이…… 역할 놀이 중이었나 보구나…….”
아냐, 그거 아니야!
“친구가 어디 먼 곳으로 떠났니? 그래도 아델이 이렇게 간절히 부르니 목소리를 듣고 친구도 곧 돌아올 거란다.”
아버지는 놀이에 한참 심취한 딸을 방해한 줄 알고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그러고는 딸의 놀이에 장단을 맞춰 어깨를 다독이며 말했다.
“그래도 이제 잘 시간이 되었으니 아쉽더라도 다음에 다시 만나기로 약속하고 오늘은 친구를 그만 보내주자, 아델.”
“크흥, 네에…….”
어쩔 수 없이 눈물을 머금고 손에 든 해파리를 놓아줬다.
어차피 성물 안에 깃들어 있던 존재가 사라진 게 느껴졌기에, 이걸 더 붙들고 있어봤자 소용없다는 걸 알았다.
“앤디미온……. 돌아가.”
[그, 그래!]힘없는 손길로 해파리 성물을 상자 안에 주섬주섬 넣으며 앤디미온을 돌려보냈다.
“그 물 속성 신수 인형 이름을 앤디미온으로 지어줬나 보구나. 아델이 좋아하는 동화책 속 해골 기사의 이름이었지?”
“네에…….”
내 속도 모르고 아버지가 귀엽다는 듯이 웃으면서 말했다.
이후 방을 가로질러 씻으러 터덜터덜 걸어가는 내 모습은 분명 글씨 연습을 하러 가는 앤디미온의 모습과 비슷했을 것이다.
망나니 황녀님의 제멋대로 인생 계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