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Wicked Princess Plans for Her Life RAW novel - Chapter (89)
망나니 황녀님의 제멋대로 인생 계획-89화(89/207)
“로잔티나의 별들께 태양의 축복이 내리기를!”
귀족들의 좌석에 도착하자마자 인사가 쏟아졌다.
1황자님은 날이 갈수록 늠름해지시는 것 같다는 둥, 1황녀님은 오늘도 한 떨기 우아한 장미꽃 같으시다는 둥…….
아직은 내 나이가 어려 다른 사람들 앞에 노출된 일이 적은 만큼 날 아는 척하는 귀족의 수는 유클레드나 타마린느보다 적었다.
하지만 그래도 그들이 날 보면 꼭 입에 올리는 인사말이 있었다.
“3황녀님, 신성 의식 때 축복을 받으신 걸 경하드립니다!”
황족 중에서도 황금색 눈을 가진 이가 손에 꼽을 정도다 보니, 확실히 구경거리가 되는 것 같은 느낌은 좀 있었다.
특히 어린 귀족 아이들이 날 좀 많이 힐끔거리는 것 같았다.
아무튼 우리는 다 같이 사이좋게 여기까지 손을 잡고 온 것이 무색하게도 금방 여러 파벌의 귀족들에게 둘러싸여 뿔뿔이 흩어졌다.
“오랜만에 보네요, 시스나몬 가주.”
“1황녀님. 이렇게 찾아와 주셔서 영광입니다.”
“클라리사, 메리엘도 오랜만이야.”
타마린느는 소기의 목적대로 시스나몬 가문의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1황녀님, 그간 강녕하셨습니까.”
“오랜만에 뵈어요, 1황녀님…….”
장녀인 클라리사야 원래도 워낙 어른스럽다지만 오늘은 메리엘도 얌전했다.
‘지난번에 1황녀궁에서 타마린느하고 있었던 일로 집에서 혼쭐 좀 난 건가.’
시스나몬 가주가 가끔 예리한 눈으로 둘째 딸을 주시하는 걸 보면 그게 맞는 것 같았다.
메리엘도 제 어머니의 눈길이 자신을 향할 때마다 몸을 작게 움찔거렸고 말이다.
물론 지난 기억을 되짚어 보면, 고작 이 한 번으로 메리엘이 진짜 반성해서 겸손함을 아는 어른으로 자랄 리는 없었다.
‘어차피 지금 중요한 문제는 아니니까, 뭐.’
속으로 혀를 찬 뒤 그들에게서 시선을 떼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유클레드도 어느새 그에게 몰려든 귀족들을 상대하고 있었다.
“1황자님, 다가올 가을에는 저희 가문의 별장에 한번 방문해 주시면…….”
“아버지께 말씀드려 보지.”
나한테 보이던 허술한 모습과는 사뭇 다른 의젓한 황자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아직 어린애는 어린애라 그런지, 타마린느와 마찬가지로 유클레드도 몰려든 사람들에게 정신이 팔려 내 존재를 새까맣게 잊은 눈치였다.
‘나야 오히려 잘 됐다만.’
내가 지금 가장 관심이 있는 건 당연히 바스티온 가문이었다.
그런데 막상 귀족들의 좌석에 오니 사람이 너무 북적거려서 멀리 있을 때보다 사람을 찾기가 어려웠다.
“아델!”
누군가 내게 빠르게 다가온 것은 그때였다.
“우리 손녀가 할아버지를 보러 왔나 보구나!”
샴푸 광고를 찍는 것처럼 반짝이며 찰랑거리는 긴 은발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그다음 꼭 우아한 엘프 장로같이 생긴 아름답고 귀티 나는 얼굴이 시야에 비쳤다.
“하, 할아버지?”
“녀석, 조금 전에도 봤는데 이렇게 금방 또 할아버지가 보고 싶더냐? 누구 손녀인지 정말 귀엽기도 하지.”
흐뭇하게 웃은 할아버지가 나를 훌쩍 안아 들고 어디론가 데려갔다.
“다들 보시게, 우리 손녀라네. 정말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정도로 귀엽고 사랑스럽지 않은가?”
“호오, 자네가 그토록 입에서 침이 마르게 자랑하던 3황녀님이군. 이렇게 가까이에서 뵙는 건 처음이구먼.”
“자네를 안 닮고 록샨을 닮아 이렇게 귀여운 거로군. 저 빵실한 볼 좀 보게. 우리 딸 키울 때 생각이 나는데…….”
그곳에는 할아버지의 친구들로 보이는 다른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모여 있었다.
하지만 말이 할아버지의 친구들이지, 그들도 전부 귀족 가문의 가주나 안주인들이었다.
더군다나 그냥 귀족도 아니고, 대부분이 로잔티나의 최고 10개 가문 소속이었다.
그래서인지 다들 눈이 부리부리해서, 평범한 어린애들이라면 기세에 눌려 눈물을 터뜨릴 수도 있을 것 같았다.
“훗, 그러게 내가 말했잖은가. 우리 손녀가 세상에서 제일 귀엽다고!”
할아버지가 콧대를 높이 들자, 그의 긴 머리카락이 또 샴푸 광고의 모델처럼 차르륵 물결쳤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그는 남들에게 보여주듯이 나를 앞으로 살짝 내밀고 둥기둥기 어르고 있었는데…….
‘이 느낌 왠지 익숙한데.’
지금 우리 할아버지에게서 카루스의 느낌이 났다.
그러니까, 왠지 동네 수달들에게 손녀를 자랑하는 할아버지 수달 같았다.
“아델, 할아버지의 친구들이다. 다들 우리 손녀를 보고 싶어 해서 잠깐 인사라도 시켜 줄까 하여 데려왔다.”
“아, 안녕하세요?”
“보게, 우리 손녀 목소리도 귀엽지!”
역시 육아물의 정석인가.
여주인공이 학대받는 배경이 아닌 이상 아버지도 팔불출, 어머니도 팔불출, 그 밖에 다른 가족들도 팔불출, 전부 팔불출!
알고는 있었지만 우리 할아버지도 그 루트를 밟고 계셨다.
“자네는 안됐구먼. 이렇게 예쁜 손녀가 없어서. 역시 시꺼먼 손자 놈들보다 손녀가 훨씬 귀엽지!”
“뭐야? 우리 손자도 얼마나 귀여운데! 거기, 아범아! 당장 우리 테리를 이리 데려와라!”
“어머님, 테리는 잠깐 친구들을 만나러 갔습니다.”
“하필 이런 중요한 때!”
“흥, 어차피 누굴 데려와도 우리 손녀가 최고일걸!”
나는 할아버지의 팔에 둥기둥기 안긴 채 주위를 싹 훑어봤다.
보아하니 다른 히세리온 가족들도 저쪽에서 각자 귀족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역시 우리 식구들은 이 세계의 인싸로군.’
이렇게 할아버지에게 낚여 오는 건 계획에 없던 일이지만, 한 가지 좋은 점도 있었다.
바로 10개 가문이 앉은 상석과 자연스럽게 가까워졌다는 거였다.
“오, 그러고 보니 여기 죽은 베로나의 손자도 있었지. 레예스? 잠깐 이리 와보련.”
앗!
역시 한 다리 건너면 다 아는 사이라는 귀족 세계인가!
할아버지의 친구 중 한 분이 고개를 돌려 어딘가를 향해 손짓했다.
잠시 후 사람들 사이에서 익숙한 군청빛 머리칼의 소년이 지팡이를 짚고 나타났다.
“부르셨습니까.”
“오, 그래. 이리 가까이 와라.”
오랜만에 보는 얼굴에 나는 반가워졌다.
레예스는 오늘도 아주 잘생긴 얼굴이었다.
앞머리를 반쯤 뒤로 까서 이마를 드러낸 얼굴이 눈에 띄게 수려했다.
그래서인지 주변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단번에 레예스에게 집중된 것 같았다.
“자, 다들 봐주게. 여긴 바스티온 가문의 첫째라네. 대신전에 머물다가 오랜만에 나와서 다들 얼굴을 잘 모를 게야.”
“호오, 바스티온 가문의 장남이 벌써 이렇게 컸군.”
보아하니 바스티온 가주는 잠깐 자리를 비운 것 같았다.
그래서 바스티온과 친분이 있던 가문에서 대신 그를 인사시켜 주고 있던 모양이다.
아무튼 덕분에 레예스와 자연스러운 만남을 갖게 되어 만족스러웠다.
“인사해라, 레예스. 여기는 3황녀님과 히세리온의 가주님이시다.”
황제의 탄신연이라 레예스는 다른 때보다 격식 있는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오늘따라 정말 한 가문의 후계자인 어린 소공자로 보였다.
“로잔티나의 별께 태양의 축복이 내리기를. 오랜만에 뵙습니다, 3황녀님. 히세리온의 가주님께도 인사드립니다.”
“음? 내 손녀와 일전에 만난 적이 있었던 건가?”
“예, 대신전에서 만나 뵌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가까이에서 본 레예스는 의외로 전보다 상태가 좋아 보였다.
물론 저주는 여전한 듯했지만, 그의 몸을 감싸고 있던 사기가 눈에 띄게 줄었다.
‘혹시 내 성력석의 효과인가?!’ 하고 한순간 생각했지만 논리적으로 생각해 보면 그럴 리는 없었다.
거기에 그 정도의 성력은 들어 있지 않았으니까.
게다가 한동안 충전시키지도 못해서 효과도 떨어졌을 테고.
그럼 뭐지?
역시 신전에서 멀어지는 게 답이었던 건가?
진짜 모르페우스가 그동안 정화석 대신 검은 마석을 애한테 주고 있던 거 아냐?
나는 속으로 매우 합리적인 의심을 하며 레예스에게 인사했다.
“안녕? 오랜만이야!”
내 목소리를 듣는 순간, 레예스의 차분한 얼굴에 반가운 빛이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그건 아주 잠깐이었다.
“그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황녀님?”
쫑긋거리던 댕댕이 귀도 레예스에게서 잠깐 보일 뻔하다가 사라졌다.
레예스는 이렇다 할 감정이 드러나지 않은 얼굴로 내게 예의상의 안부 인사로 들리는 말을 덧붙였다.
에구, 사람들이 많으니까 역시 시선을 신경 써야 하는구나.
매번 이러기도 불편한데 다른 방법이 없을까 몰라.
“응, 난 잘 지내써. 바스티온 공자는?”
“저도 격조했습니다.”
지난번에 황궁과 대신전에서 우리가 따로 만나 친분을 나눈 건 비밀이었기 때문에 나도 오늘은 그를 이름으로 부르지 않았다.
아무튼 레예스의 상태가 생각보다 좋아 보여서 다행이었다.
하긴, 그러니까 오늘도 탄신연에 올 수 있었을 테지만.
부우우!
그때 본격적인 탄신연의 시작을 알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런, 자리로 돌아가야겠구나.”
“할아버지, 쩌기, 언니 오빠가 있는 데로 데려가 주세요.”
곧 황제 폐하께서 오실 예정이었기에 나는 아쉬움을 뒤로하고 일단 할아버지와 레예스와 헤어져 황족들의 자리로 돌아가기로 했다.
“그러고 보니 그 소식 들으셨습니까? 제누스 신을 따르는 크리오스 제국에 성녀가 나타났다던데…….”
자리를 떠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언뜻 보았을 때, 10개 가문 중에서 오직 오클란테만 다른 가문들과 쉽게 섞이지 못하고 따로 떨어져 있었다.
나는 바론 오클란테의 주먹이 꽉 쥐어져 있는 것을 보고 고개를 돌렸다.
망나니 황녀님의 제멋대로 인생 계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