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wizard who drives a Benz RAW novel - Chapter (23)
저는 투자자입니다.
저는 투자자입니다.
“제, 제가 도와드릴게요.”
“괜찮아요. 손님이신데요. 앉아 계시면 금방 차릴게요. 수저만 하나 더 놓으면 되는데요. 뭐.”
“…”
영수는 조용히 의자에 앉아 식사를 준비하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뭔가 아늑하고 편안한 기분이 들었다.
일 끝나고 돌아와 누군가 자신을 위해 밥을 차려준 적은 한 번도 없었는데, 왠지 기억 속에 있는 것 같은 익숙한 모습이었다.
‘아니…’
어릴 때의 기억이 떠올랐다.
자신은 저쪽 의자에 앉아있었다.
발도 닿지 않는 의자에 앉아 상 위에 턱을 괴고, 어머니의 뒷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얼마지 않아 벨이 울려 현관으로 달려갔다.
까치발을 들어 잠금장치를 풀고 문고리를 돌리면, 그곳에는 아버지가 있었다.
고개를 들어 아버지를 바라보면 항상 얼굴에 그늘이 보였다. 밖에 나가셔서 얼마나 힘드셨을지 그때는 알지 못했다.
왜냐면 아버지는 항상 쪼그리고 앉아 입가에는 밝고 환한 미소를 지으며 나를 봤으니까.
입가의 미소는 전염이 심했고, 그럼 난 괜히 모를 간질거림에 그대로 달려들어 아버지의 몸을 두 팔 두 다리로 끌어안았다.
아버지는 머리를 쓰다듬어주시면서 그대로 부엌으로 걸어가신다.
어머니에게 ‘나 다녀왔어.’ 하고 한마디 하시면, ‘다녀오셨어요?’ 한마디 하시고 나를 보면서 ‘엄마가 아빠 힘들게 하지 말라고 했지?’하며 따끔하게 혼내셨다.
‘뭘 그래 아들이 아빠가 좋다는데.’ 아버지가 말하고, 우리는 식탁에 앉아 밥을 먹었다.
지금이 마치 그때 같았다. 그때처럼, 이 자리가 너무 아늑하고 익숙했다.
이 시간이 영원히 지속되면 좋을 것 같았다.
달그락 달그락…
그때, 그릇 소리와 함께 그녀가 몸을 돌렸다.
영수는 손등으로 괜스레 눈을 닦으며 고개를 돌렸다.
“죄송해요. 제가 깜빡하고 국을 아직 안 데웠네요.”
따따따따…
“저는 밥만 있어도 잘 먹습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냄비 뚜껑 너머로 보이는 된장국의 갈색 빛깔만 봐도 군침이 돈다.
‘아… 그런데, 아직 서로 이름도 모르는 구나.’
“저기 저는…”
막 자기소개를 하며 그녀의 이름을 물으려는 찰나였다.
“우우웅… 가희 배고파.”
부엌 옆에 있는 방에서 가희가 눈을 비비며 밖으로 나왔다.
마치 지금 막 자다가 깬 아기 천사 같은 모습에, 이름을 물을 수 있는 완벽한 타이밍을 방해받은 것도 잊고 그저 입가에 아빠 미소가 지어졌다.
“어, 어어. 가희 깼구나? 와서 앉을래? 아니, 와서 앉으렴, 배고프지? 아 배고프다고 했구나. 빨리 밥 준비해줄게. 아, 이 아저씨는 누군지 알지?”
그녀는 왠지 약간 당황한 듯이 말을 허둥지둥, 빠르게 말하며 영수를 소개했다.
“안녕 가희야?”
“히힛. 웃긴 아찌다!”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가희는 쪼르르 달려와 번쩍 뛰어서 무릎 위에 앉았다.
“어머, 가희야 아저씨 귀찮게 하면 안 돼요.”
“싫어! 나 아찌랑 같이 밥 먹을 거야!”
가희가 토라진 듯 그녀로부터 고개를 돌렸다.
“저는 괜찮습니다. 깃털처럼 가벼운걸요?”
“히히. 가희는 아찌랑 맛있는 꼬기 먹을 거야. 꼬기! 꼬기!”
가희는 상을 두들겨대며 박자를 탔다.
“휴우… 죄송해요.”
그녀가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영수를 바라봤다.
“아니에요. 간만에 북적북적이니 좋네요.”
영수는 그녀를 향해 미소를 지으며 가희의 머리를 헝클어주었다.
가희는 눈을 감고 한동안 가만히 있더니, 이내 자신의 고모와 영수의 얼굴을 번갈아가며 바라보다가 영수를 향해 돌아섰다.
“근데 아찌, 아찌는 이름이 뭐야?”
‘이런, 고마운 가희같으니…’
이건, 자연스럽게 이름을 어필할 찬스였다.
“아저씨는 한영수라고 해요. 영수 아저씨라고 불러도 돼요. 그런데 우리 가희는 성이 뭐에요?”
‘사실 아직 결혼 안 했으니까, 원래 아저씨는 아니란다.’
“우리 고모는 홍다희야.”
“응?”
“홍다희, 우리 고모. 나는 가희.”
“아, 으응…”
“얘는, 네 성을 말해줘야지 왜 엄마 이름을 말하니?”
그녀, 다희 씨가 가희를 다그쳤다.
‘잘했다. 가희야…’
어쩌면, 그녀도 자신처럼 속으로 가희를 칭찬하고 있지 않을까?
아이에게는 특유의 예측할 수 없는 변덕은 때론 곤혹스럽다. 하지만, 이런 변덕이라면 언제든 환영이었다.
“어… 그럼… 가희는 홍가희겠구나?”
“흐으응… 둘이 사기는 구나?”
“…”
“…”
이번 예리한 변덕은 조금 곤혹스러웠다.
“그, 그건…”
다희 씨의 얼굴이 홍당무처럼 붉어졌다.
영수의 입가에는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대답을 못 하고 머뭇거리는 것은 분명 마음이 있어서 확답을 내리지 못한다는 소리였다.
“아직은 아니야.”
“…”
보글보글보글…
“아, 맞다. 국이 벌써 다 끓었네?”
다희 씨는 몸을 끓고 있는 국 쪽으로 돌렸다.
“으응. 그렇구나. 힛…”
가희는 뭔가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무심코 손가락을 입에 넣었다.
‘이런 모습을 보면 그냥 애인데…’
좀 전에는 제법 날카로웠다.
하지만, 고마웠다. 가희 덕분에 다희 씨의 이름을 알 수 있게 되었고 서로 마음이 있다는 것을 직간접적으로 표현할 수 있었으니까.
반찬을 차리던 다희 씨가 냉장고 옆 정수기 위에서 바구니를 꺼내 이쪽으로 다가왔다.
“가희야. 밥 먹기 전에 약 먹어야지?”
“이잉… 싫은데…”
가희가 무릎 위에서 몸을 버둥거렸다.
“나중에 그러다가 또 쓰러지면 어떻게 하려고 그래?”
“약 맛 없어! 시러!”
“그래도, 안 돼. 지난번에도 몰래 뱉었다가 병원 갔잖아요. 병원 가면 따끔한 주사 맞아야 해요. 가희는 따끔한 주사 맞고 싶어요?”
“히잉… 주사 실탄말야…”
가희는 입을 삐쭉 내밀며 찡얼거렸다. 아이들이 하는 흔한 약 투정이었다.
그런데 좀 흔하지 않은 게, 딱 봐도 열 알이 넘어 보이는 약과 아까 다희 씨가 말했던 약을 먹지 않았다가 병원에 갔다는 소리였다.
“우리 가희… 어디 아파요?”
“아찌! 나 하나도 안 아파. 고모가 약 먹이려고 하는 말이야. 나, 이만큼 튼튼한걸? 봐바.”
가희는 가냘픈 팔을 들어 알통을 만들려고 했지만, 너무 작아서 티도 안 났다.
“히잉…”
“약을 꾸준히 먹어야 낫는 법이에요. 이거 먹고 밥 맛있게 먹자. 알았지?”
“싫어! 어차피 밥 먹고 또 약 더 먹어야 하잖아! 그리고 낫지도 않을 거잖아! 나 그냥 이렇게 살다가 엄마 아빠처럼 죽을 거야!”
“가희 너! 엄마가 그런 말 하지 말랬지!”
다희 씨가 입을 꾹 다물며 가희를 다그쳤다.
“이이잉, 우아아앙! 엄마 아니잖아! 고모 미워!”
우당탕탕…
가희는 엉엉 울며 자기 방을 향해 달려갔다.
쾅!
심지어 문까지 걸어 잠갔다.
갑작스럽게 지나간 폭풍에 영수는 그대로 굳어있었다.
속상한 듯 눈가가 촉촉해지는 다희 씨의 얼굴.
“으음…”
어떻게 해야 할지, 여기 와서 처음으로 어색한 순간이었다.
인천의 만향당 화장품 공장 회의실.
“…해서 이렇게 회의를 소집하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론칭 시간을 좀 더 당겨야 하는 거 아닙니까? 아직 상품의 이미지도 나오지 않아서 광고에 쓸 연예인도 선정하지 못 했는데…”
회의가 한창이었다.
‘밥 정말 맛있었지…’
영수의 입가에는 미소가 맺혀있었다.
어제 밥을 못먹고 나올지 알았는데, 다희 씨는 익숙한 듯이 가희를 달래고 얼렀다.
이내 가희는 방에서 나와 다시 씩씩하게 밥을 먹었고, 오랜만에 자신도 집밥을 먹었다.
살짝 경직되었던 분위기만 아니면 가희랑 놀아주는 것을 핑계로 좀 더 있을 수 있었을 텐데, 그게 너무 아쉽다.
‘그런데, 가희가 어디가 많이 아프다고 햇던가…’
“개발 팀장님, 상품의 디자인 시안은 나왔습니까?”
“연구팀의 가이드 라인에 따라 디자인 시안을 몇 개 정도 뽑아놨고요. 오늘 중으로 최종 후보를 선출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렇게… 할까요?”
누구에게 묻는 것일까?
“한 이사님 이에 대해서 한 이사님께는 어떤 의견이 있는지 묻고 싶습니다.”
회의를 진행하던 이가 이쪽을 본다.
‘총괄팀의 최시안 팀장이라고 했던가?’
“한… 이사님?”
모두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오늘 중으로 디자인 최종 심사를 하자고…”
“좋습니다. 그렇게 하세요. 빠를수록 좋습니다.”
“네, 그럼 그 부분은 이사님 말씀대로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점심 시간이 지나고 바로 최종 후보를 결재 올리겠습니다. 이사님이 선택만 하시면, 바로 공정으로 넘기겠습니다.”
“…”
“연구팀장님? 샘플의 테스트는 어떻게 되었죠?”
“VIP 코스메틱의 상품과 동일하게 만든 1타입은 실험이 필요 없었고요. 향이나 다른 한약재 등을 넣어 만든 2, 3, 4타입은 현재 실험 중입니다.”
다시 회의는 진행되었다.
영수는 그들을 보고 있으면서 위화감을 느꼈다.
자신들끼리 회의를 잘 진행하다가…
“우선 다른 타입보다는 1타입으로 간다고 봐야겠죠? 당장에 허가를 받고 하려면 2, 3, 4 타입은 론칭 날자를 맞출 수 없으니…”
이런 당연한 말에도 사람들이 슬쩍 고개를 돌려 한쪽을 바라봤다.
그건 바로 영수 자신이었다.
“1타입으로 가야겠죠. 시간 맞추려면 당연히…”
“그럼, 1타입에 맞춰서…”
회의가 진행되면, 당연한 부분이나 어떤 한 시점에 브레이크가 걸리고 모두 이쪽을 본다.
‘결정해야 하는 상황…’
“그럼 이번에 만향당에서 자체적으로 개발하고 사업허가도 난 가칭, 남성 전문 올인원 스킨을 어떻게 할지는 생각해 보셨습니까?”
“아무래도 당장 론칭은 그렇다고 봅니다. 우리의 상품 구성이 대부분 여성에게 맞춰져 있고, 아무래도 화장품과 향수는 남성보다는 여성적 이미지가 더 있으니…”
“최근에는 브랜드를 론칭할 때 라인업에 남성 상품을 넣는 추세입니다. 그만큼 남성 소비자들도 우리 업계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커졌다는 거죠. 같이 론칭하지 않는다면, 애초에 여성 전문 브랜드라는 이미지로 고정될 수 있습니다.”
“올인원 상품은 최근 남성 화장품 트렌드 중 하나입니다. 하지만, 여전히 화장품을 사용하는 많은 남성들은 올인원 상품보다는 기능이 나뉜 상품들을 사용하죠. 처음 시작부터 올인원 상품만을 내는 브렌드로 낙인찍힌다면 그 상품을 찾는 소수의 남성 소비자들을 가지고 타사와 경쟁을 해야 하는데, 그래서는…”
“어떻게 할지에 대해서는 아무래도…”
다들 이쪽을 본다.
“제가 결정하라는… 거죠?”
“네. 이사님의 재가가 떨어지면 그에 맞춰서…”
최 팀장이 어색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그는 눈치를 보고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다른 사람들도 자신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분명, 일은 그들이 다 하고 있는데 자신의 결정이 아니면 진행되지 않는 회의…
이건 아니었다.
“후우…”
영수는 한숨을 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러분. 눈치 보지 마세요. 저는 엄밀히 말하면 투자자입니다. 회사의 직원은 여러분이고요. 저는 사업 분야를 결정하고 기업의 방향만 제시하지, 실제 일 하고 결정을 내려서 회사에 이득을 가져다주는 것은 여러분입니다.”
“그건…”
최 팀장이 대표로 대답했지만, 회의장의 다른 이들은 조용히 눈치를 봤다.
“제가 왜 여러분에게 동급 업종보다 더 높은 연봉을 제시하면서 모셔왔을 것 같습니까? 유능하니까? 네 맞습니다. 그런데 제가 왜 높은 연봉 주면서 거기에 연간 연봉의 최대 300퍼센트까지 인센티브를 가져갈 수 있는 규정을 두었겠습니까? 제가 그냥 돈 많은 호구 투자자라서?”
“…”
여전히 회의장은 조용했다.
다들 눈치를 보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나라 기업에서는 익숙한 모습이었다. 상사의 눈치를 보고 눈에 띄지 않으면서 중간 정도로 가늘고 길게 가려는 모습.
하지만, 영수가 원하는 모습은 아니었다.
“그것은 여러분에게 주인 의식을 가지고 자신의 이득을 위해 회사를 운영해달라는 뜻이었습니다. 그런데 제 결정이 없으면 아무것도 못 한다고요?”
끼이이익.
영수는 고개를 저으며 의자를 밀어넣고 회의실 문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저는 이제부터 회의에서 빠져 완전한 투자자의 자리로 돌아가겠습니다. 회사를 살려 인센티브를 가져가는 것도, 부도를 내서 실업자 신세가 되는 것도… 이제 모두 여러분의 손에 달렸습니다.”
영수는 손잡이를 잡고 그대로 돌려버렸다.
“앞으로 최소 3일 동안은 저를 찾지 마십시오. 부디, 상식을 뛰어넘는 분들이 되시길…”
쿵!
“…”
회의실 안에는 정적이 찾아왔다.
남은 이들의 머릿속은 복잡했다.
조금 전에 영수가 했던 투자자라는 말, 자신들이 회사의 주인이라는 말, 월급도 아니고 연봉의 300%라는 인센티브에 신제품 발매 일과 이직 하기 전 자신들의 업무 태도, 그리고 상식을 뛰어넘으라는 마지막 말까지…
뽑아 놓은 사람들은 에이스다. 빠르게 적응할 거다.
자신이 이곳에 있으면서 자율성 있게 하라고 해봐야, 결국 자신의 눈치만 볼 거다.
그건 중국집에 가서 마음대로 시키라고 해 놓고 ‘난 짜장’ 하는 거나 다름없다.
그동안은 전화기도 꺼 놓고 완전히 잠수를 할 생각이다.
3일을 준 것은 그 시간동안 저쪽을 방문하고자 함이다.
‘가서 가희가 먹을 보약 좀 찾아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