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wolf I saved proposed marriage RAW novel - Chapter 15
15장
가을은 생각보다 빨리 찾아왔다.
늑대들은 겨울잠을 자지 않지만, 추워질수록 다른 계절에 비해 행동이 느려지는 건 어쩔 수 없기에 월동 준비를 미리 해놓을 필요는 있었다.
랜달은 폭설까지는 아니어도 눈이 많이 오는 지역이라, 색바랜 나뭇잎이 떨어지기 시작하면 저택의 사람들은 바쁘게 움직였다.
하인들은 땔감을 구하러 나갔고, 지하 창고에 쌓여있던 제설용 빗자루와 도구들도 정원으로 꺼내졌다.
리타와 하녀들은 모든 커튼을 두꺼운 재질로 갈아 끼우느라 거의 반나절을 썼는데, 별로 추위를 느끼지 않는다는 늑대들이 왜 그렇게 겨울나기에 열과 성을 내는지 의아할 따름이었다.
“마님은 추위를 많이 타시잖아요. 더구나 조만간 갓난아기도 태어날 텐데. 이가 나기 전까지는 수인도 여느 인간 아기와 다를 게 없거든요.”
그 궁금증은 내 앞으로 온 서신을 분류하던 크리스틴이 해결해주었다.
꼼꼼하게 분류를 마친 그녀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내 앞에 두 무리의 편지를 내밀었다.
“오른쪽은 친척분들의 안부 편지이고요, 왼쪽은 다른 분들. 하나는 레이나가 보냈더라고요. 아기 선물을 보내고 싶다고.”
“이미 언니분께 충분히 받았는데요. 그보다 잘 지내고 있는 거죠? 벌써 결혼한 지 한 달쯤 지났나요?”
마커스와 레이나의 결혼식은 예정보다 다소 규모가 축소되어 치러졌다.
얼추 해결은 됐다지만, 아무래도 강제로 수인이라는 게 밝혀진 여파를 완전히 이겨내지는 못한 모양이었다.
아쉬웠으나, 당사자들은 나름대로 만족하는 성싶어 말을 아꼈다.
물론 자초지종을 전해 들은 클라라는 스노우 백작을 두고 ‘목덜미를 찢어버리겠다.’라며 으르렁거렸다.
화이트 자작도 못내 안타까운 기색을 내비치다가, 황후 폐하가 말없이 보내신 축하 선물에 황송해했다.
“그럼요. 선물해주신 향수도 잘 쓰고 있대요.”
“다행이네요. 자작도 잘 지내죠?”
그러자 크리스틴은 질린다는 듯이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말도 마세요. 레이나 결혼했다고 이젠 화살이 저한테 돌아오는 거 있죠? 자기도 안 했으면서. 사실 가장 급한 건 언니 아니에요?”
몸을 들썩이며 구시렁대는 예쁜 늑대를 물끄러미 바라보는데 슬며시 입꼬리가 치솟았다.
원피스 앞섶에 달린 나뭇잎 모양 브로치가 움직일 때마다 잘그락대며 미미한 빛을 자아냈다.
“흐음. 아닌 것 같은데.”
그에 당연히 내가 맞장구쳐줄 거라고 믿었던 두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난 비스듬히 팔을 괴고는 브로치를 가리켰다.
“그거 내가 누구 준 거거든요. 나중에 애인 생기면 주라고. 근데 그걸 지금 크리스틴이 갖고 있네요.”
딱히 그 ‘누구’가 크리스틴에게 호감이 있으리라곤 생각하지 않는다.
그 성격상, 제 손에 있어봤자 무용지물인 물건을 그저 어울릴 법한 사람에게 건네준 것뿐일 거다.
단, 크리스틴이 저렇게 뻣뻣해진다면 비단 가볍게 넘길 얘기는 아니었다.
“그, 그게. 그냥 주신 거예요. 자신이 가지고 있기보다는 제가 갖는 게 나을 거라고……”
어느 한 곳이 고장이라도 난 것처럼 크리스틴은 과장된 몸짓과 말투로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루퍼스의 마음은 모르겠다.
하지만 적어도 목각인형을 보듯이 관절이 굳어버린 이 아이의 마음은 알겠다.
“미안해요, 놀려서. 사실 진작 눈치채고 있었어요. 처음부터 크리스틴은 루퍼스를 잘 따랐으니까. 동경이 연정이 되는 건 흔하잖아요.”
괜히 민망해하지 말라고 웃어줬지만, 크리스틴은 삐걱거리는 자세 그대로 주춤거리더니 이내 다른 볼일이 생각났다면서 자리를 피해버렸다.
귀여워도 함부로 나설 수는 없었다.
아그네스 공주 전하와 카일의 징검다리 노릇도 당사자의 요청이 있기에 수락한 것이다.
저렇게 얼굴이 새빨개져서 어쩔 줄 모른다면 연결해주느니 마느니, 내 멋대로 구는 건 무례한 짓이었다.
그저 두 사람이 조금만 더 솔직해지기를 바랄 수밖에.
그렇게 여기며 편지를 훑던 나는 낯설지 않은 이름을 보고 손을 멈칫했다.
노엘 그랜트.
질기게도 따라붙는 이름이었다.
* * *
“크리스틴이요?”
레이먼드가 귀를 쫑긋거렸다.
내 배에 찰싹 달라붙어 책을 읽어주다가 낮에 있던 일을 얘기하니, 호기심이 동한 듯했다.
황갈색 눈동자가 소년처럼 반짝거렸다.
“쉿. 함부로 얘기하고 다니면 안 돼요.”
“나도 그 정도는 알아요. 근데 진짜예요?”
“몰랐나 보네요. 꽤 티가 많이 났는데.”
“크리스틴은 에블린과 함께 있는 시간이 많잖아요. 난 몰랐죠.”
사춘기 소년이 형제의 연애 얘기를 듣는 것 양, 그는 히히 웃음을 숨기지 못하며 벌러덩 누웠다.
“뭐, 잘됐어요. 저 일 중독자를 누가 데려가나 했는데. 크리스틴이면 감지덕지죠.”
“아직 아무것도 정해지지 않았어요. 근데 나 마음에 걸리는 게 하나 있는데.”
“뭔데요?”
“루퍼스는 평민 아닌가요?”
반대, 편견은 아니었다.
단지 귀족과 평민 사이의 연정이 얼마나 힘든지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에 우러나온 노파심이었다.
아무리 수인 사회가 폐쇄적이라고 해도, 귀족끼리의 결혼이 일반적이었다.
루퍼스가 유능함으로 만인에게 인정받을지언정, 신분이 낮다면 그건 또 별개의 문제였다.
그러나 레이먼드는 ‘아’하며 몰랐냐는 듯이 말문을 열었다.
“에블린은 몰랐겠네요. 하긴, 얘기할 필요가 없었을 테니.”
“무슨 뜻이에요?”
“얘기하자면 긴데, 결론만 얘기하면 루퍼스도 귀족이에요. 애초에 영주 대리나 비서는 승계권이 없는 귀족의 차남이나 삼남이 도맡잖아요?”
“그렇긴 한데 루퍼스는 가족이 없다고 하지 않았나요?”
“그래서 얘기가 길다고 한 거예요. 음, 핵심만 짚자면 방계에서 비롯된 혈통이라고 할까요. 뭐, 의절했지만.”
군더더기 없이 깔끔해 보이는 사람이 의외로 복잡하고 사연이 깊기도 한 법이었다.
더 파고들었다가는 나중에 루퍼스에게 미움받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과거에 대해서는 묻지 않았다.
대신 신분 탓에 불거질 불미스러운 일은 없을 테니, 그것으로 안심하기로 했다.
“어쨌든 내가 보건대, 루퍼스도 크리스틴이 싫지는 않을 거예요. 항상 머릿속에 크리스틴이 있으니까 브로치가 어울리겠다고 생각한 거 아니겠어요?”
만약 그렇다면 좋을 텐데.
내 생각에 맞춰 대답이라도 하듯이 배 속의 아기가 발을 한 번 굴렀다.
마침 레이먼드가 내 배에 머리를 기대고 있던 터라, 즉각적으로 몸을 일으키며 반응했다.
“느꼈어요? 방금 움직였는데.”
“오늘도 기운이 넘치네요. 얼마나 움직이는지 레이먼드는 모르죠?”
“아들인가 봐요.”
“레이먼드를 닮은 딸일 수도 있죠.”
7개월쯤 되자 배에 큼지막한 짐 하나를 얹고 다니는 감각이 들었다.
그만큼 다리도 금세 부었고 허리도 자주 아팠지만, 다행히 그 고생을 했던 것치곤 아이는 잘 크고 있었다.
이제는 불시에 발을 뻥뻥 차기도 했는데, 그때마다 레이먼드는 신기한지 배에 대고 말을 걸기도 했다.
이번에도 신이 나서 혼자 종알대는데 어쩐지 조금 죄책감이 들기 시작했다.
노엘로부터 온 편지를 무시할 생각이어도 그에게는 얘기해야 할 성싶었다.
“레이먼드. 오늘 편지 하나를 받았는데요.”
“그래요? 누구한테 왔는데요?”
“노엘이요.”
얼굴 만면 가득하던 부드러운 미소가 차츰 사그라들었다.
예상했던 반응인지라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사적인 얘기는 아니었어요. 그랜트 가문은 보석 가공 사업을 운영하고 있는데, 그레이 가문의 광산과 관련해서 동업을 제안하더라고요.”
“정말 그게 목적이었다면 에블린이 아니라 나한테 편지를 보냈겠죠. 핑계도 좋네요. 그나저나 우리가 광산을 가졌다는 건 어떻게 안 건지, 참.”
레이먼드가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프로스트 공작의 부군이 늑대인간이란 사실은 이미 만천하에 공개된바.
그 신상이 낱낱이 밝혀지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아니면 노엘이 개인적으로 뒷조사를 했을 수도 있고.
“그냥 무시해요. 어차피 나도 그럴 생각이었고. 동업자는 그 사람 말고도 널렸어요. 굳이 할 필요도 없고.”
이런 편지를 받았다는 사실도 불편하지만, 그 사람의 얼굴을 보는 게 훨씬 불편했다.
어떻게 되찾은 평화인데.
그러나 비아냥거리던 레이먼드는 조금 생각이 달라진 듯 보였다.
“아니에요. 그래도 기왕 들어온 제안인데 무시는 답이 아니죠. 만나자고 하죠. 대신, 답장은 내가 보낼게요. 엄연히 가주는 나니까.”
그 말에 나도 모르게 그의 손을 덥석 붙잡았다.
“잠시만요, 지금 만나겠다는 거예요?”
“안 될 거 없잖아요?”
“안 될 거 있죠. 나한테는 절대로 만나지 말라고 하면서, 레이먼드는 만나겠다는 거잖아요. 잊었어요?”
나한테 그렇게 신신당부했으니 차마 잊었다고는 말하지 못할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그때 호텔에서 매달리던 자신의 행동이 떠올랐는지 그가 끙 소리를 내며 말을 잇지 못했다.
이럴 때는 좀 더 강하게 나가야 했다.
“좋아요. 무시가 답이 아니라면 만나요. 단, 나도 같이 만나요. 뭐가 됐든 그 편지는 우선 나한테 온 거니, 엄연히 나도 권리가 있어요.”
화를 내려던 건 아닌데, 얼떨결에 목소리가 커졌다.
레이먼드가 놀라며 손짓으로 나를 진정시켰다.
“알았어요. 같이 만나요. 같이 만날 테니까 진정해요. 화내면 몸에 안 좋아요.”
그 말에 습관적으로 배로 손이 가며 목소리가 가라앉았다.
레이먼드가 내 어깨를 토닥토닥 다독여주며 다정한 말투로 말했다.
“맞아요. 에블린의 말대로 같이 만나야 하는데, 내 생각이 짧았어요.”
“아니에요. 잠깐 열 받았나 봐요. 왜 이렇게 질척거리는지. 이번에야말로 끝을 내야겠어요.”
단칼에 잘라낸 인연인 줄 알았더니 몇 번 난도질 끝에 질긴 한 줄이 남아 있었나 보다.
그래. 몇 년을 나름대로 부부와 비슷한 형태로 엮여 있었는데 그게 깔끔하게 끝이 나지는 않겠지.
이제는 그 간신히 남은 한 가닥의 실마저 끊어낼 때였다.
나는 칼을 갈았다.
그 실을 끊을 칼을.
* * *
오늘 깨달았다.
내겐 뭔가를 만드는 손재주가 없다는 걸.
분명히 크리스틴과 똑같이 배우기 시작한 뜨개질인데 왜 이렇게 결과물이 차이가 나는지 모르겠다.
어지간하면 좋은 말만 해주던 리타도 차마 칭찬해주기는 어려웠던지, 난처한 미소로 내가 만든 아기 모자를 힐끗거렸다.
“확실히 난 뭘 쓰는 재능은 있어도 만드는 재능은 없나 봐요.”
예정일이 한창 겨울인 터라, 아기가 쓸 털모자를 직접 만들어주고 싶었을 뿐이다.
근데 뭐 어쩌겠어.
도중에 코가 몇 번 빠져서 리타가 되살리느라 실은 너덜너덜해졌고, 모양도 삐뚤빼뚤.
그저 내 한계를 체감하고 겸허히 받아들이려는데, 주변이 내 기운을 북돋기 위해 더 난리였다.
“그렇지 않아요. 아기는 당연히 엄마가 만든 걸 더 좋아할 거예요.”
“그럼요. 모양이 뭐가 중요하겠어요. 마음이 중요하지.”
혹시라도 내가 시무룩해질까 봐, 리타와 크리스틴은 양쪽에서 좋은 말만 골라내려 애를 쓰고 있었다.
그럴수록 도리어 점점 작아지는 기분이라 나는 헛헛하게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렇게까지 할 필요 없어요. 난 이 정도로는 아무렇지 않으니까. 못하는데 뭐 어떻게 하겠어요.”
아기한테 예쁜 모자를 씌워줄 수 없는 건 조금 아쉽긴 하지만, 아직 시간이 있으니 마음을 비우고 천천히 공을 들이면 지금보다는 나아질 터다.
회색 머리카락에는 무슨 색깔 실이 어울릴지 털실을 고르는데 크리스틴의 발그레한 웃음이 시야에 들어왔다.
“왜 그렇게 웃으면서 봐요?”
“공작님 성격이 부러워서요.”
“내가요?”
“그냥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거, 의외로 힘든 일이잖아요. 특히 자신이 못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그런가요. 무작정 물고 늘어지기보다는 수긍하는 게 마음이 편하잖아요.”
“마님은 정말 좋은 엄마가 되실 거예요. 큰마님도 그러셨거든요.”
리타가 날 보며 흐뭇하게 입가를 늘어뜨렸다.
괜히 쑥스러워서 어색하게 따라 웃던 나는 문득 잊고 있던 사실을 떠올리며 리타에게 물었다.
“참. 두 분 생신이 언제였죠?”
“더글러스님은 늦겨울이시죠. 큰마님은 이른 봄이시고요. 그러고 보니 백작님도 봄이시네요.”
“늦겨울이면 얼마 안 남았잖아요.”
내 말에 리타는 단념 섞인 미소를 지은 채 고개를 내저었다.
“잡스럽게 일 벌이는 게 싫으시다며 매번 가족끼리 조촐하게 식사하는 정도로 끝내고 있어요. 아, 마님은?”
자연스럽게 돌아온 반문에 실을 풀던 손이 멈칫했다.
이내 나는 애써 밝게 웃으며 대답했다.
“저는 새해 겨울이에요. 눈이 정말 많이 오는 날에 태어났다고 하더라고요.”
“어머, 정말요? 어쩌면 아기님과 비슷한 시기에 같이 생일 파티를 할 수도 있겠네요.”
화기애애한 이 분위기를 망치기는 싫어 말을 아꼈다.
두 사람 모두 내가 이 저택에 오기 전까지 어떤 삶을 살았는지 대략적으로나마 전해 들어 알고는 있을 테였다.
하지만 정확히는 모르겠지.
지난 수년간 내 인생에서 생일이란 건 없었다는 사실을.
* * *
“노엘 그랜트라면 마님 전 약혼자 아닙니까?”
레이먼드가 부치라며 건넨 서신의 ‘받는 이’를 확인한 루퍼스는 마뜩잖은 눈으로 입술을 삐죽거렸다.
“집안이 보석 가공 사업을 하는데 동업 제안을 하더라고. 거절하더라도 만나봐야 하지 않을까 해서.”
“굳이 직접 만나서요? 거절이라면 서신 상으로도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동업 제안은 핑계겠지. 그래서 만나자고 하는 거야. 에블린도 그러자고 했고.”
거, 참.
루퍼스가 혀를 끌끌 찼다.
“알겠습니다. 근데 과연 여기까지 올지는 미지수네요. 가까운 거리도 아니고.”
“본인이 아쉬우면 오겠지. 우리는 그 사람이 오지 않아도 상관없어.”
대수롭지 않은 척해도, 아까부터 검토 중인 서류가 단 한 장도 넘어가지 않는 걸 보아 신경 쓰이는 게 분명했다.
루퍼스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레이먼드의 손에서 깃펜을 빼냈다.
“가서 쉬세요. 이 상태로는 앉아 계시는 게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그에 레이먼드는 믿지 못하겠다는 듯이 가자미눈으로 옆을 힐끔거렸다.
“어쩐 일이야? 네 입에서 쉬라는 얘기가 나오고. 언제는 죽어도 책상 앞에서 죽으라며.”
“당장 바쁜 게 없으니까요. 경계선 보수 공사도 마무리됐고, 월동 준비를 위한 물품들도 충분히 보급했거든요.”
“연말 정산서는?”
“아직 괜찮습니다. 그리고 올해만 특별히 제가 작성할게요. 마님 출산이 얼마 남지 않으셨잖아요.”
레이먼드는 책상에 턱을 괴고는 물끄러미 루퍼스를 쳐다보았다.
평소의 자신이었더라면 행여 비서의 마음이 바뀔라, 반색을 보이며 잽싸게 서재를 뛰쳐나갔겠지만, 에블린에게 들었던 말이 떠오른 까닭에 쉽게 그럴 수가 없었다.
“아냐. 내가 할게.”
이번에는 루퍼스의 표정이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변했다.
다시 비서의 손에서 펜을 가져오려던 레이먼드는 문득 이마 위로 올라오는 손길에 눈살을 찌푸렸다.
“뭐 하는 거야?”
“열은 없으신데.”
“그러니까 뭐 하는 거냐고.”
“생전 안 하던 말씀을 하시길래.”
“그럼 걱정하지 말고 기뻐해 봐, 좀. 이제야 철들겠다는데.”
그래도 루퍼스는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고 빤히 레이먼드를 흘겨보았다.
새삼 자신의 신뢰도가 이렇게 낮았던 건가, 반성하며 레이먼드는 차분하게 말했다.
“그냥 쉬라고. 그동안 나 대신에 일하느라 거의 쉬지도 못했잖아. 시간 있을 때, 연애도 좀 하고.”
“말씀은 감사한데, 주변에 사람이 있어야죠.”
“멀리서 찾지 말고 가까운 데에서 찾으면 되잖아.”
타고난 눈썰미가 좋아 금세 알아채겠거니, 슬쩍 던진 말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잠시 말이 없다가 이내 의미심장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어쨌든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시고 마님께 가보세요. 이유는 모르겠는데 아까 잠깐 뵈니 안색이 안 좋으시더라고요.”
“에블린이?”
아침까지는 괜찮았는데.
별일 아니더라도 이런 말을 들으면 그냥 넘겨들을 수는 없었다.
더구나 제삼자가 이런 말까지 덧붙인다면 더욱.
“네. 끝난 인연이라도 전 약혼자가 자꾸 들쑤시니 기분이 좋지는 않으시겠죠.”
* * *
괜히 생일 얘기를 꺼냈나 보다.
그 이후로 계속 기분이 우울해져서는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딱히 생일이 중요해서라기보다는 그냥 그 시기에 당했던 일들이 연기처럼 머릿속에 피어오른 까닭이었다.
보풀이 일어 도저히 새로 만들었다고는 보이지 않는 작은 털모자를 만지작거리던 그때.
“뭐 하고 있었어요?”
레이먼드가 나타났다.
나는 일부러 그에게 엉망진창인 털모자를 보여주었다.
“이것 좀 봐요. 내가 만들었지만, 모양새가 참…… 아무래도 아이한테 직접 만든 모자를 씌우려면 시간이 오래 걸리겠죠?”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빙그레 은은한 미소를 머금은 채, 손바닥만 한 모자를 말없이 어루만질 뿐이었다.
곧바로 리타나 크리스틴과 비슷한 반응이 튀어나오지 않을까, 예상했던 나는 의외의 행동에 속으로 조금 놀랐다.
그러니 그의 다음 말에는 더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이것 때문에 기분이 안 좋았던 거예요?”
어떻게 알았는지 의아해지려던 찰나, 아까 루퍼스를 만났던 게 떠올랐다.
나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체하는 건 그만두고 솔직한 심정을 털어놓기로 했다.
“루퍼스군요. 사실 이것 때문은 아니에요.”
“그럼 전 약혼자 때문이에요?”
음. 뭐라고 대답해야 하지.
마냥 아니라고 하기도, 그렇다고 하기도 애매했다.
결국, 오해를 사지 않기 위해서는 말이 길어질 수밖에 없었다.
“완전히 아니라고는 말하지 못하겠는데, 그 편지 때문은 아니에요.”
“그럼요?”
나는 그의 손 위로 내 두 손을 포갰다.
그새 또 한기가 스며들었던지, 유난히 그의 손이 따뜻하게 느껴졌다.
“긴 얘기인데……그래도 잘 들어줘요.”
약간의 심호흡을 한 후, 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 * *
겨울치고는 하늘이 맑았다.
확실히 수도에서 멀리 떨어진 지방인지라, 풍경도 공기도 남달랐는데 이런 곳에 익숙지 않은 시종은 아까부터 투덜거리고만 있었다.
“직접 오실 것까지는 없지 않습니까. 도련님, 아니 이제 작위를 물려받으셨으니 후작님이시지. 어쨌든 후작님께서 뭐가 아쉬우셔서……”
노엘은 듣지 못한 척, 덜컹거리는 마차 안에서 창밖만 내다보았다.
에블린이 나고 유년기를 보냈다는 곳은 처음이었다.
사실 말로도 거의 들은 적이 없었다.
원체 사적인 대화 자체를 한 적이 거의 없던 탓이었다.
그나마 관계가 틀어지기 전에 얼핏 들었던 기억을 더듬어 보자면, 늑대가 많이 사는 지역이라고 했었더랬다.
그래서인가.
“후작님, 조심하세요. 수인들은 성질이 사납고 야만적이지 않습니까. 분명 해코지라도 하려고…….”
“그만.”
노엘은 더는 못 들어주겠다는 듯, 미간을 좁히며 시종을 쏘아보았다.
“그 말은 지금 황후 폐하도 사납고 야만적이라는 뜻인가? 입조심 해. 그러다가 경을 치는 건 우리 가문이니까.”
미처 가브리엘라 황후는 생각지 못했는지 시종은 입을 꾹 다물었다.
시종을 못마땅한 시선으로 겨누어 본 노엘은 다시 차창 밖으로 눈길을 돌렸다.
넓고 한적하지만, 험준한 산이 울퉁불퉁한 게 퍽 접근이 어려운 지역이었다.
그 산길 중 하나를 타고 오르던 마차 앞에 이내 깊숙한 숲길이 나타났다.
도심지에서 뚝 떨어진 곳에 있는 영주의 저택.
사람에 따라서는 으스스하게 느껴질 만큼 키가 크고 잎이 빽빽한 나무들이 늘어선 숲이 제법 한참 줄을 지었다.
겨울이 가까워져 오는데도 아직 잎이 건재한 나무들이 저렇게 많다는 게 신기하던 찰나, 시종이 툭 말을 던졌다.
“도착했습니다.”
그의 말대로였다.
저 멀리 숲과 어우러진 오래된 저택이 모습을 드러냈다.
노엘은 마른침을 삼켰다.
저곳에 그녀가 있었다.
* * *
달리 환대를 기대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예상외로 저택 사람들은 평범한 손님 대하듯, 응접실로 안내해주었다.
자신이 누군지 모르는 건지, 노엘이 의아하게 여기던 그때.
“오랜만입니다.”
조금은 딱딱하다고 느낄 법한 목소리의 남자가 들어왔다.
그제야 노엘은 의아함을 지울 수 있었다.
“네, 오랜만입니다.”
남자, 레이먼드가 자신을 대하는 태도를 보건대 단지 이 저택의 고용인들은 자신이 누군지 전달받지 못했을 뿐, 알면 냉대를 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날씨가 꽤 쌀쌀한데도 레이먼드는 가벼운 긴 팔 정장 차림이었다.
아무리 응접실 벽난로에 불꽃이 활활 타오르고는 있다지만, 후덥지근할 정도는 아니었던지라, 노엘은 슬쩍 그의 복색에 시선을 주었다.
“신기한가 봅니다.”
“네?”
“옷이 얇아서 신기하게 보이냐고요.”
그리고 레이먼드는 그 눈길을 기가 막히게 알아챘고.
제 영지고, 제 저택이라 묘하게 위치적 우월감을 차지한 레이먼드는 다소 거만해 보이기까지 했다.
조금 성가셨으나, 노엘은 최대한 평화롭게 해결하고 싶었다.
‘프로스트가 어디 보통 물건이니? 우호적으로 지내서 하등 나쁜 것 없단다. 알아보니, 마침 그 남편이 광산을 소유하고 있다던데 동업 제안을 넣어보렴.’
작위까지 이어받은 아들에게 아직도 치맛바람을 휘두르는 어머니만 아니었다면 그런 편지 따위 보내지도 않았을 것이다.
굉굉한 어머니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리는 듯했다.
부쩍 피로해진 눈가를 문지르며, 노엘은 침착하게 중얼거렸다.
“내가 마음에 안 드는 거 압니다. 하지만 난 이 자리에 사업 관련 논의를 하러 온 거고, 그 부분에 관해서만 얘기하죠.”
“뭐, 우선 알겠습니다. 관련 자료부터 보죠.”
레이먼드가 노엘이 가져온 가방 쪽으로 턱짓했다.
그랜트 가문이 운영한다는 보석 가공 사업 서류들이었는데 대부분 매출 추이와 관련된 것들이었다.
“수완은 좋은가 봅니다. 적자가 난 적이 한 번도 없네요.”
“황실로도 납품하고 있으니까요. 그 밖에 외국으로 수출하기도 하고. 근데 지금 계약하고 있는 업체가 없습니까?”
“지금은 없습니다. 예전에는 인간들에게 맡겼는데, 우리 동족이 살해당하는 일이 생기면서 교류가 끊겼거든요.”
태연히 서류를 넘기는 레이먼드와는 달리 노엘은 뒷덜미가 송연해졌다.
새삼 이곳이 늑대인간이 사는 저택이고, 눈앞에 있는 서늘한 남자가 늑대 수인이라는 사실을 되새기게 되는 순간이었다.
“사업체는 건실하네요. 근데 어떡하죠? 나 혼자서 정할 수는 없는 사안이라서 말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분명 편지에는……”
“편지 얘기를 꺼내면 나도 할 말이 많은데. 사업 얘기를 하자면서 내가 아니라 에블린한테 보낸 것부터 그렇고.”
회색 늑대의 입가에 미소가 길게 늘어졌다.
문득 시종이 조심하라고 했던 말이 떠올라, 노엘은 말을 아낄 수밖에 없었다.
“원래 부부는 한 몸이라는 말이 있잖아요? 난 에블린의 결정을 따를 테니까, 잘 얘기해 봐요.”
“자, 잠깐. 그럼 지금…….”
“자리 비켜줄 테니까 빌든, 매달리든, 그렇게 간절하면 할 수 있는 건 다 해 봐요.”
‘건투를 빈다.’라는 말을 남긴 채, 레이먼드는 휘적휘적 응접실을 나가 버렸다.
얼떨떨해지기도 잠시, 미처 마음을 추스르기도 전에 문이 다시 열렸다.
그리고.
“잘 지냈어요?”
그녀가 들어왔다.
* * *
솔직히 왜 날 보고 저렇게까지 놀라나 했다.
아무리 몇 달 만에 본다지만, 얼굴이 바뀌지도, 목소리와 말투가 바뀌지도 않았는데.
그렇게 무의식적으로 배를 감싸던 나는 그제야 왜 노엘이 저런 반응을 보이는지 깨달았다.
그렇지. 노엘은 몰랐겠구나.
뭐, 그렇다고 배려할 생각은 없었다. 내가 뭘 잘못한 건 아니니까.
“보다시피 조금 있으면 만삭이라서요. 자세가 다소 흐트러져도 이해해줘요.”
노엘은 뭔가에 단단히 얻어맞은 사람처럼 멍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다가 황급히 자세를 추슬렀다.
“축하해요. 인사가 너무 늦었지만.”
“고마워요. 설마 당신한테 축하를 받을 줄은 몰랐네요.”
아닌 척해도, 노엘의 두 눈은 심히 요동치고 있었다.
심정이야 이해할 수 있었다.
어떻게 끝났든, 전 약혼녀가 다른 남자의 아내가 되어 배가 불러서 나타났는데 아무렇지 않을 수는 없겠지.
“어머니와 아내는 잘 계시죠?”
“그럼요. 잘 지내요.”
“작위를 이어받았다면서요.”
“아…… 들었군요.”
“그럼 이 제안은 당신 결정이라고 봐도 되는 건가요?”
안다. 달라진 건 노엘의 호칭뿐일 거라는 걸.
작위를 물려줬다고 한들, 그 어머니가 하루아침에 아들에게서 치마폭을 거둬들일 리도 없을 테고 노엘 스스로 그 아래에서 벗어나기도 힘들 터였다.
그런데도 콕 짚어 묻는 건 그냥 조금 괴롭히고 싶어서였다.
“……맞아요. 전에도 말했지만, 난 당신과 나쁜 관계를 유지하고 싶지 않거든요.”
우스웠다. 왜 인제 와서 치맛바람을 벗어난 척하는지.
약혼자일 때는 세상 그런 효자가 없더니.
“그런가요. 근데 미안해서 어쩌죠? 난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데.”
노엘의 입술 밑이 파르르 떨렸다.
꼭 파혼 선언을 들은 나를 보는 듯했다.
나도 저랬을 거다.
“……에블리나. 먼저 이 서류부터 읽고 판단해주면 안 될까요? 당신 남편은 수긍했어요. 그러니…….”
“필사적인 걸 보니 당신 결정이 아니었군요. 역시 어머니 지시였나 보네요.”
내게 서류를 건네던 손이 멈칫했다.
나는 눈을 반쯤 뜨고 그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기억나요? 어머니 생일이랑 내 생일이랑 같은 날인 거.”
모른다고는 못할 거다.
그가 먼저 물어봤으니까.
아마 약혼할 때쯤, 그러니까 적어도 인간 대 인간으로서의 호감이 있었을 무렵에는 그래도 챙겨주려는 생각이 있었겠지.
“……알죠. 알아요.”
“그럼 몇 년 동안 한 번도 내 생일 챙겨준 적 없는 것도 기억나요?”
“그건 당신이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고 했잖아요. 어머니 위주로 챙기라고.”
그 어머니의 괄괄한 성격상, 함께 챙겨지는 걸 알았다가는 집안이 뒤집혔을 거다.
나도 그 부분은 충분히 이해했다.
당시의 나는 세상에서 가장 못나고 천한 반쪽짜리 사생아였다.
후작 가문의 약혼녀 자리를 꿰찬 것만으로도 과분해야 하는.
그래도 말이지.
“그럼 그 뒤에 내가 실수했을 때, 생일 안 챙겨줘서 그런 거냐고 타박하지 말았어야죠.”
노엘의 어머니, 그랜트 후작 부인은 내가 작은 실수만 해도 신경질적으로 소리를 지르며 나무랐다.
그게 싫었을 테니, 끔찍한 효자인 노엘은 어머니 편을 들어 어떻게든 상황을 마무리하는 걸 우선으로 여겼을 거고.
그때는 그게 당연한 줄 알았다.
어쨌든 원인을 제공한 건 나였던 까닭에.
“공사 구별 좀 해라, 그냥 어머니한테 맞춰라, 그게 어렵냐. 그게 모욕이라는 걸 이제 알았네요, 바보처럼.”
앞선 말은 입으로 뱉으면서도 내 아이가 들을까 봐 무서웠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배를 움켜쥐었는데, 그게 노엘의 무언가를 건드린 모양이었다.
“제발, 에블리나!”
그가 서류를 내팽개치더니 머리를 쥐어뜯으며 괴로워했다.
“나도 미치는 줄 알았어요. 지금도 그렇고요. 그래요. 내가 잘못했어요. 뭐가 됐든, 당신에게 그런 모욕적인 말은 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근데 나도 좀 이해해줄 수 없어요? 어머니잖아요. 난 아들이고. 어떻게 홀대했겠어요?”
“우리가 무슨 사이라고 내가 왜 당신을 이해해야 하죠? 그런 말은 지금 당신 아내한테나 가서 해요.”
“에블리나, 제발…….”
그놈의 제발, 제발, 제발!
세상 자기가 불쌍한 척은 다 하지만 사실 그는 단 하나도 잃지 않았다.
애초에 숙부가 밀어붙이다시피 강행한 약혼이었고, 당연히 이성 간의 애정이라곤 손톱만큼도 없었다.
그러니 나를 잃었다고 표현할 수는 없을 터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지그시 내려다보았다.
남의 영지에까지 와서 비는 자신의 모습이 스스로 생각해도 한심하겠지만, 이기적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을 거다.
그러니 그가 얼마나 이기적이었는지 알려줘야겠다.
“제발? 나도 제발 부탁 하나 할게요.”
그가 힘없이 고개를 들었다.
거기에 최대한 담담하게, 당시의 그가 했던 그 어조 그대로 나는 말을 내리꽂았다.
“제발 공사 구별 좀 해요. 그게 어려워요?”
* * *
“공작님, 역시 강한 성격이셨네요.”
창밖으로 멀어지는 손님의 마차를 보며 크리스틴이 중얼거렸다.
곁에 선 루퍼스는 착잡한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열 내시면 안 좋은데 말이죠. 특히 만삭에 가까울 때는요.”
“왜요?”
“아기가 빨리 태어날 수도 있습니다. 모체가 정신적으로 압박을 받으면 아기도 고스란히 느끼거든요.”
“아, 그래서 지금 백작님이…….”
“네. 달래주고 계세요. 그나저나 처음에 함께 들어간다고 하셨는데 왜 따로 들어가신 건지.”
“그거야 복수할 시간을 주신 거겠죠. 어쨌든 공작님은 일방적으로 파혼을 당하신 거잖아요?”
크리스틴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에 가슴께에 달린 브로치가 짤랑 소리를 내며 반짝였다.
그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루퍼스는 따뜻한 커피를 홀짝이며 말했다.
“이래서 후회할 짓은 하지 말아야 하는 겁니다. 근데 사람들은 그걸 모르죠.”
“루퍼스님은 가만 보면 산신령 같을 때가 있어요.”
“어른스럽다고 해주세요. 안 그래도 어중간한 나이인데 산신령은 너무 늙어 보이잖아요.”
억양이 없는 불만에 크리스틴이 히히 웃었다.
잠깐의 적막 후, 커피를 후루룩 마신 루퍼스가 넌지시 말을 건넸다.
“주말에 시간 됩니까?”
“네? 왜요?”
“근처에 들판이 있는데 이 시기에만 피는 꽃이 있습니다. 백작님이 오랜만에 휴가를 주셔서 다녀오려고요. 괜찮으면 같이 가자고요.”
한동안 크리스틴은 말귀를 알아듣지 못했다는 듯이 눈을 깜빡이며 자신을 가리켰다.
“저랑요?”
“거기 그쪽 말고 다른 사람 있습니까?”
“왜요?”
“그동안 제대로 구경도 못 했잖아요. 나름 선배인데 신경을 못 써줘서요. 싫으면 됐습니다.”
“아, 아니에요! 갈게요.”
얼굴을 발갛게 물들인 채, 크리스틴은 한 발자국 옆으로 옮겼다.
루퍼스의 곁으로.
* * *
“잘했어요, 정말.”
아이를 낳는 건 힘든 일이라는 걸 오늘 또 깨달았다.
화 한 번 내 마음대로 내지 못한다니.
설령 낸다고 해도 주변 사람들이 다 달려들어 내 열을 가라앉히기 위해 애를 쓰는 모습이란.
내 손을 붙잡고 다독여주는 레이먼드의 눈을 보는데 갑자기 핑 눈물이 돌았다. 이유는 모르겠다.
“왜 울어요?”
“모르겠어요. 그냥 눈물이 나와요.”
“내심 힘들었나 보네요. 마음 같아서는 울라고 하고 싶은데, 리타가 무조건 진정시키래요. 미안해요.”
달 수가 부족한데 아이가 나오면 큰일이라나.
최대한 숨을 고르며 감정을 가다듬는데, 내 곁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레이먼드를 보자니 별안간 실없는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제야 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래요. 차라리 그렇게 웃어요. 막 웃으면 기분이 좋아지지 않을까요?”
“이제 괜찮아요. 근데 혹시 내가 노엘에게 했던 말들, 저택 사람들이 다 들었을까요?”
다소 감정이 격앙되어 있었고, 이 저택 사람 중 귀가 안 좋은 사람이 없는지라 뒤늦게 걱정이 되었다.
“괜찮아요. 다들 모르는 척할 거니까. 그나저나 그 남자 얼굴 한 번 봤어야 했는데. 못 봐서 아쉽네요.”
“됐어요. 이제 볼 일 없을 텐데요. 어쨌든 고마워요. 혼자 만나게 해줘서.”
“처음에는 둘이 같이 앉아서 쏘아볼까 했는데, 생일 얘기 들어 보니까 에블린도 쌓였던 걸 풀 시간이 필요하겠더라고요. 이제 속 시원해요?”
나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숙부와 고모들에게 의절을 선언하고 레이먼드를 따라 나올 때만큼은 아니었더라도, 제법 큰 후련함이었다.
진작 이랬어야 했는데, 너무 오랫동안 질질 끌었다.
그 간당간당한 한 줄기의 연을 마저 끊어내지 못하고.
아니, 끊어냈다고 생각하고.
“참, 노엘 때문에 미처 말 못 한 게 있는데.”
“뭔데요?”
“친척분 통해 들어온 서신인데, 수해 탓에 피해가 심한 영지에 인력난으로 복구 작업이 더뎌지고 있대요. 혹시 수인들이 작업을 도와줄 수 있냐고 묻더라고요.”
“복구 작업이요?”
레이먼드는 생각이 많아 보였다.
섣불리 수락할 수는 없을 것이다.
당장 인간에게 배타적이지 않은 동족을 모으는 게 급선무였고, 나도 어떤 업무인지 더 자세하게 물어봐야 했다.
“알겠어요. 도와줄 수 있는 동족들을 모아보죠. 다들 정 싫다고 하면, 우리 저택 하인들이나 레인저들이라도 보내고요. 아니면, 블랙과 화이트에게 도움을 청해 볼까요?”
“아, 그거 좋은 생각이네요.”
“블랙 백작은 카일을 어떻게든 부마로 만들고 싶어 하니까 동참해줄 거예요.”
요컨대, 지금부터라도 주변에 좋은 인상을 줘야 하니 이런 일에 솔선수범할 수밖에 없다는 거다.
그러고 보니 카일과 공주 전하는 어떻게 됐는지 모르겠다.
무소식이 희소식이랬다고, 달리 연락이 없는 걸 보아 잘 되어 가는 건가?
그리고 궁금하기가 무섭게, 두 사람에 관한 소식은 며칠 뒤에 곧바로 찾아왔다.
“이건 황실에서 온 거네요.”
묘하게 기분이 좋아 보이는 크리스틴이 편지 하나를 건넸다.
처음에는 황후 폐하인가 싶었는데, ‘아그네스’라는 이름에 눈이 휘둥그레져 얼른 뜯어보았다.
“공주 전하세요?”
황실에서 왔다고 하니 조금 궁금했던 모양이다.
크리스틴이 슬며시 기웃거리며 호기심을 내비쳤다.
단숨에 편지를 읽어내린 나는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편지를 접었다.
“네. 갑자기 편지를 보내셨길래 큰일이라도 난 줄 알았는데 다행히 아니었네요.”
사적인 얘기라 크리스틴에겐 말할 수 없지만, 요점만 얘기하자면 그냥 카일과 어떻게 되어가는지에 대한 일종의 보고서였다.
아무리 애정 공세를 퍼부어도 카일은 여전했고, 공주 전하도 포기할 생각이 없으시다고.
사람이 하루아침에 달라질 수는 없는 노릇이니 22년 쌓아온 성격을 몇 개월 만에 버릴 수는 없을 거다.
그나마 다행인 건, 황제 폐하와 황후 폐하가 카일을 꽤 마음에 들어 하신다나.
그 얘기를 듣고 레이먼드는 무척 의외인지 고개를 갸웃거리기까지 했다.
“그 버르장머리, 아니 예의 없는 도련님이 황실 취향이었다니 의외네요.”
“이젠 함부로 부르면 안 될 수도 있어요. 공주 전하와 결혼하면 정말 황실 사람인데.”
“그래봤자 카일은 카일이죠. 내가 약점까지 잡았는데 뭐 어쩌겠어요.”
“목줄 산책 말하는 거죠?”
“뭐, 카일이 먼저 날 건드리지 않으면 나도 건드릴 생각 없어요.”
레이먼드가 우쭐대며 어깨를 추켜세웠다.
하여튼 평생 두 사람은 이런 식의 친구로 남을 것이다.
그렇게 또 시간은 흘렀고 그동안 제발 아무 일도 터지지 않길 바란 덕분인지, 평화로운 나날이 지났고 수해 복구 작업도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블랙은 선뜻 협조해주었으나, 아직 화이트는 안주인 사건 때문인지 우호적으로 나서는 이가 없다며, 극히 적은 동족들만이 동원되었다.
하지만 그중에 클라라가 있다는 건 꽤 의미 있는 일이었다.
우리는 급한 대로 오스틴과 레인저 몇 명을 보냈는데, 오스틴의 말마따나 투덜대면서도 빼지 않고 열심히 했다나.
블랙에서는 아니나 다를까, 오스틴이 올지도 모른다며 아리아나가 끼어 왔는데 종일 재잘대며 오스틴에게 붙어 다닌 통에 곤란했더랬다.
“아리아나도 지극정성이네요.”
내 배에 대고 말을 걸던 레이먼드가 피식 웃었다.
이제는 만삭인지라 그냥 움직이기만 해도 배가 파도치듯 울렁였다.
“자기 성인 될 때까지 기다리라는 말을 하루에 몇 번 했는지 모르겠대요.”
“그 정도면 세뇌죠. 오스틴 녀석, 코가 꿰인 거죠.”
“오스틴도 싫어하지는 않는 기색이던데요.”
“오스틴은 숙맥이라 그런 적극적인 여자가 어울려요.”
아리아나가 성인이 되려면 한 3년쯤이려나.
그때가 되면 이 아이도 씩씩하게 뛰어다니겠지.
배가 자주 뭉치고 아랫배가 묵직해질수록 점점 출산일이 가까워진다는 사실이 실감 났다.
설레는 한편, 무섭기도 했고.
슬쩍 어머님과 리타에게 많이 아프냐고 지레 겁을 먹고 물어봐도 각기 답이 달라서 큰 도움은 되지 않았다.
원래 산모마다 차이가 커서 낳기 전까지는 모른다고.
단, 하나.
쉽지 않다는 사실만은 매한가지였다.
나름대로 긴장을 완화하기 위해 아기 물건들을 하나씩 정리하기 시작했다.
요람과 모빌, 속싸개와 옷, 장난감 등등.
대부분 선물 받은 것들이라 그만큼 감사함이 차곡차곡 쌓였다.
내가 조금이라도 무리하는 꼴을 못 보는 리타가 그러시지 말라고 황급히 다가와 정리하는 걸 도왔다.
“만삭 때는 허리도 함부로 굽히면 안 돼요. 제가 할 테니까 앉아 계세요.”
“서 있는 게 더 편한데, 정상인가요?”
“배가 부르니까 그렇죠. 참, 아기 이름 정하셨어요?”
“레이먼드에게 맡기긴 했는데, 들어보고 마음에 안 들면 제가 다시 지으려고요.”
“글쎄요. 저는 마님이 지으시는 게 낫다고 보는데.”
이유를 묻자,
“백작님 이름부터 유래가 특이하잖아요. 아시죠?”
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하긴. 어머님 첫사랑 이름이랬나.
“으음. 일단 아들 이름은 예전부터 생각한 게 있어요.”
“그래요? 뭔데요?”
리타가 아기 물건을 한쪽으로 옮기며 밝은 얼굴로 물었다.
나는 한 글자씩 또박또박 발음하며 대답했다.
“레이먼드 주니어. 어때요?”
리타의 표정에서 차츰 활기가 사라졌다.
“……그냥 더글러스님께 맡길까요?”
* * *
보송보송한 눈이 내렸다.
밤새 쌓인 눈이 하얀 설원을 만들어냈고, 이른 아침부터 하인들은 정원을 쓰느라 부산스러웠다.
저택에서 맞이하는 첫눈이라 그런지 감회가 남달랐다.
두꺼운 옷을 껴입고 밖으로 나가 조심스레 눈을 손바닥 위에 올려 담았다.
이내 잔 얼음들은 체온 속으로 스며 사라졌다.
“아가, 봐봐. 이게 눈이야.”
태어났을 때도 남아있으면 좋으련만.
그렇게 생각하는데 목덜미에 두꺼운 팔이 스윽 둘렸다.
익숙한 향수 냄새와 더불어 나직한 목소리가 머리 위에서 들렸다.
“같이 걸을까요?”
“오랜만에 좋죠.”
레이먼드가 능구렁이처럼 씩 웃었다.
올봄에 그와 종종 걸었던 산책로였다.
앙상한 나무들과 눈이 쌓인 풍경으로 변한 길을 걷자니, 마치 다른 곳에 있는 것만 같았다.
아까부터 얼지 않도록 내 손을 붙잡고 놓지 않는 레이먼드가 잔뜩 들뜬 얼굴로 속삭였다.
“에블린, 다음에는 셋이서 와요.”
“아기가 걸을 때까지는 얼마나 걸리죠?”
“한 1년? 수인은 좀 빨리 걷기는 하는데.”
고사리 같은 손을 붙잡고 걸을 생각을 하니 나도 모르게 배시시 미소가 지어졌다.
“아기 낳고 에블린의 몸이 괜찮아지면 아버님과 어머님도 뵈러 가요. 보고 싶으실 거예요.”
“그래야죠. 아기한테도 알려주려고요. 너한테도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가 있다고.”
출산일이 다가온 탓인지 부쩍 엄마 생각이 자주 나는 요즘이었다.
몇 개월 후면 벌써 1주기였다.
아직도 엄마가 세상에 없다는 게 믿기지 않을 때가 있었다.
언제쯤 돼야 무뎌질까.
드문드문 엄마 생각을 하며, 아기에게 외할머니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얘기해주며, 너에게는 사랑을 듬뿍 줄 친할아버지와 친할머니도 계신다는 것도 알려주며, 드디어 나는 내 아이와 새해를 맞이했다.
며칠 본가에 다녀온 크리스틴이 작은 새처럼 조잘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주전부리를 먹는데 별안간 아랫배가 싸늘해졌다.
“공작님, 왜 그러세요?”
“아니에요. 좀 뭉치나 봐요.”
“아! 혹시…….”
“아니에요. 진통은 딱 느낌이 온댔어요.”
별로 아프지도 않았고 그마저도 금세 가셨다.
하지만 이건 나의 큰 착각이었다는 걸, 오후가 돼서야 깨달았다.
예정일보다 대략 2주나 빨랐고, 처음 통증이 심하지 않았기에 방심한 탓이었다.
낮잠을 청하는데 점점 아랫배가 조여오듯 아파져 왔고, 그 빈도가 잦아지자 식은땀이 났다.
결국, 클레어를 부르기 위해 움직이려는 순간.
“아.”
칼로 난도질하는 듯한 고통이 배를 스쳤다.
* * *
아무도 내게 일러주지 않았다.
그냥 아프다고만 했지, 출산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아픈지.
날 위한 배려였던 건지는 몰라도 지금은 솔직히 좀 원망스러웠다.
이럴 줄 알았다면 각오를 더 단단히 다졌을 텐데 말이다.
“세상에, 식은땀이 줄줄 나네요.”
리타가 수건에 물을 묻혀 이마를 닦아주었다.
양수가 진작 터진 탓에 아랫배가 급격히 조여오기 시작했지만, 당장 해줄 수 있는 게 없더랬다.
“조금만 기다리세요. 지금 산파를 부르러 갔으니.”
“레이먼드는요?”
“하필 레인저 관련 일 때문에 오스틴 도련님을 만나러 가셨어요. 말을 전하러 갔으니 금방 오실 거예요.”
항상 곁에 있던 사람이 왜 이럴 때는 없는지.
세상만사 신기할 따름이었다.
숨을 고루 내쉬고, 피가 통하지 않는 팔다리를 리타가 주무르는 동안 산파가 도착했다.
난 금방이라도 아기가 나올 거라고 얘기할 줄 알았는데, 아직도 멀었다는 말에 정신이 아찔해졌다.
“이렇게 아픈데 멀었다고요?”
“아기 머리가 완전히 내려오지 않았대요. 더 기다려야 한다고.”
눈앞이 노래진다는 게 이런 뜻이구나.
차라리 누가 배를 눌러서 밀어내줬으면 하는 강한 바람이 치솟았다.
얼마나 지났는지 모르겠다.
별안간 바깥에서 요란한 소리가 들리더니 문이 쾅 열리며 사색이 된 레이먼드가 나타났다.
리타가 우왕좌왕하는 그를 손짓으로 진정시키며 내 곁으로 데려왔다.
“백작님, 와서 마님 손 잡아주세요.”
그제야 정신이 돌아왔는지 그는 내 손을 붙잡으며 털썩 주저앉았다.
진통 때문에 기운이 없는 와중에도 나보다 더 벌벌 떠는 그를 보자니, 어째서인지 실실 웃음이 나왔다.
“누가 보면 레이먼드가 낳는 줄 알겠어요.”
“나 지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많이 아파요?”
“처음에는 아팠는데 지금은 버틸만해요. 익숙해져서 그런가. 그보다 아직 몇 주 남았는데 이렇게 빨리 나올 줄은 몰랐어요.”
아무 생각 없이 한 말이었는데, 그는 마치 죄인이라도 된 양, 날 쳐다보지 못했다.
왜 그러나, 눈을 깜빡거리는데 이내 머뭇거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그, 내가 그랬대요. 어머니 뱃속에서 한 달이나 빨리 나왔다고.”
설마 그런 것마저 닮을 거라곤.
재밌다고 생각할 무렵, 갑자기 산파와 리타가 부산스러워졌다.
클레어도 따뜻한 물을 가져오겠다고 서둘렀고, 분위기가 산만해졌다.
“왜 그래요?”
“마님, 일단 힘을 한번 줘보실래요? 백작님은 잠시만 나가 계셔주세요.”
같이 있으면 안 되냐는 그의 옷자락을 붙잡으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레이먼드가 있으면 신경이 분산될 게 뻔했다.
리타가 불안해하는 그를 데리고 나가자, 산파가 곧 아기가 나올 거라며 침착하게 말했다.
산파의 말에 따라 천천히 힘을 주고 호흡을 가다듬기를 몇 번, 체감상 얼마 지나지 않은 듯한데 수십 분이 지났나 보다.
뱃속에서 뭔가가 급격히 빠져나가는 느낌이 들더니,
“아드님이세요!”
아기 울음소리보다 고조된 산파의 목소리가 먼저 들렸다.
사실 진통이 워낙 아팠던 터라, 낳는 순간 자체는 아프지도 않았다.
그저 알 수 없는 뭔가가 몸 밖으로 빠져나가는 기분.
정말 내가 아기를 낳은 건지 얼떨떨한 와중에, 그제야 칭얼대는 첫 울음소리가 들렸다.
으앵.
흔히 우렁찬 울음이라고 하던데, 현실은 왜 자신을 귀찮게 하냐는 듯 성질을 내는 것에 가까웠다.
리타가 곧 탯줄을 잘라낸 아기를 흐뭇한 얼굴로 내 품에 안겨주었다.
온몸이 붉고 쭈글쭈글한 건 둘째치고, 꼬물대는 손도 발도 너무 작았다.
“왜 이렇게 작아요?”
설마 제 아이를 처음 본 소감이 그거냐는 듯, 리타가 잠시 말을 잃었다가 이윽고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그럼 갓 태어난 아기가 크면 얼마나 크겠어요.”
“뱃속에서 하도 무겁길래 클 줄 알았는데.”
그때, 이번에는 문을 거의 부서뜨릴 기세로 레이먼드가 우당탕 소란스럽게 들어왔다.
아까보다 배는 더 들떠 있었다.
산만해진 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던 그는 곧장 나와 아기를 보고는 천천히 다가왔다.
안아 보라고 꼼지락대는 아기를 넘겨주었으나, 그는 움찔대며 잠시 주춤거렸다.
그러나 이내 산파와 리타의 반강제적인 도움 아래 살포시 아기를 받아들었는데, 그 자세 그대로 뿌리 내린 것 양 굳어버려 우리 모두 웃음을 참지 못했다.
“신기해요. 머리가 회색이에요.”
보송보송한 솜털 같은 머리칼은 옅은 회색이었다. 듣자니 레이먼드도 어릴 때는 지금보다 밝은 회색이었더랬다.
“에블린, 봐요. 눈 떴어요.”
그가 내 옆에 앉으며 아기를 보여주었다.
나는 당연히 머리칼이 회색이니 눈동자도 그를 닮은 황갈색일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런데.
“어쩜, 눈은 마님을 닮았네요.”
내가 마주한 건 파랗고 보라색인 눈이었다.
제삼자가 내 눈을 바라보는 건 이런 기분이었구나.
아직 눈만 떴을 뿐 나를 보지는 못하겠지만, 소리가 나는 쪽으로 열심히 굴리는 눈이 퍽 귀여웠다.
“아르센.”
레이먼드가 나직하게 아기에게 속삭였다.
그에 나는 갸웃거리며 반문했다.
“아르센?”
“아르센. 아들이면 아르센이라고 짓자고 생각했어요. 어렸을 때 읽었던 동화에 나온 용사 이름이에요. 용을 무찌르고 평화를 가져온.”
너무나도 레이먼드다운 이유라서 반대하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입 속에서 굴러가는 어감도 부드러웠고.
나는 다시 한번 그 이름을 불러보았다.
“아르센 그레이. 예쁘네요.”
그때, 리타가 창밖을 가리키며 작게 탄성을 내질렀다.
“어머, 저기 좀 보세요.”
눈이 오고 있었다.
내가 태어났을 때처럼 아주 탐스러운 함박눈이.
* * *
누가 그랬다.
아이 한 명을 키우는 데에 마을 전체의 노력이 필요하다고.
그 말대로였다.
아르센의 경우 마을 전체까지는 아니어도 내가 몸을 회복할 때까지 모든 저택 사람의 관심 아래서 무럭무럭 자랐다.
“어쩜 이렇게 예쁠까. 레이먼드보다는 에블린을 더 닮았구나.”
산부에게 좋다는 음식 재료를 바리바리 싸 들고 오신 어머님은 레이먼드가 어릴 때가 생각나셨는지, 추억 얘기를 늘어놓느라 바쁘셨다.
“얘가 얼마나 까다로웠는데. 안아주질 않으면 밤에 통 잠을 안 잤어. 장난도 많이 쳐서 깨뜨린 장식품이 한두 개가 아니었단다.”
그 덕분에 본의 아니게 레이먼드의 어린 시절 장난꾸러기 역사를 알게 되었다.
뭐, 레이먼드도 멍멍이인 척 내 유년기를 다 알고 있으니 피차일반이었다.
아버님은 어머님처럼 대놓고 아기를 예뻐하지는 않으셨어도, 물끄러미 쳐다보거나 잠투정을 부릴 때 토닥여주는 등 알게 모르게 애정을 보이셨다.
레이먼드는 그걸 두고 손자 앞에서는 체면을 내려놓으셔도 된다며 볼멘소리를 했으나, 크게 달라질 것 같지는 않았다.
오스틴은 하루가 멀다고 매일 같이 찾아와 얼굴도장을 찍었는데, 그걸 보고 그에게 얼른 결혼해야겠다는 말을 안 할 수가 없었다.
“아르센 도련님은 참 순하세요. 밤에 잠도 잘 자고, 혼자서도 잘 놀고. 저는 이런 아기면 열 명도 더 키우겠어요.”
리타가 호호 웃으며 말했다.
그녀의 손에는 또 내가 만들다 코를 빼먹은 뜨개질 거리가 들려있었다.
“자, 이제 다시 만드시면 돼요.”
“미안해요. 꼼꼼하게 한다고 하는데 왜 자꾸 빠지는지 모르겠네요.”
“처음 만들 때는 다 그렇죠. 그나저나 뜨개질도 무리하시면 안 돼요. 손목 조심하세요.”
말은 알겠다고 하는데 이 속도로는 겨울이 다 지난 뒤에야 아르센에게 털모자를 씌워줄 수 있을 듯해 조바심이 났다.
“엄마가 언제쯤 너한테 모자를 씌워줄 수 있을까.”
내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밥을 배불리 먹은 아르센은 요람 속에서 쿨쿨 자고 있었다.
아르센이 태어났다는 소식은 금세 퍼져서 여기저기서 축하를 많이 받았다.
친척과 동족들은 물론, 황후 폐하와 러더퍼드 공작까지.
하나하나 지인들을 곱씹자니 문득 베스칼의 수인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그때 이후로, 만난 적도 소식을 들은 적도 없었다.
그저 잘살고 있으려니, 막연히 그렇게 바라고만 있을 뿐.
그러고 보니.
스노우 백작과 엘리엇의 가족을 해친 늑대를 레이먼드가 찾아보겠다고 했는데.
몇 개월 동안 감감무소식인 걸 보아, 역시 역부족인 걸까.
나는 잠투정을 부리는 아르센을 토닥토닥 다독이며 생각을 되뇌었다.
* * *
“찾았습니다.”
어느 쪽을 바랐는지 모르겠다.
지시를 완벽이 이행한 오스틴의 앞에서 레이먼드는 그 어떤 표정도 지을 수 없었다.
말로는 찾는다고 해놓고, 정작 마음은 못 찾기를 바랐던 건지.
막상 저 소식을 맞닥뜨리니 심장이 쿵 내려앉는 무거운 기분이었다.
그건 오스틴도 마찬가지였다.
처음 그의 형에게 자초지종을 듣고 임무를 받았을 때, 어깨는 물론 한 걸음 한 걸음 내딛는 발걸음까지 묵직해, 마치 쇠사슬을 찬 무게감이었다.
그래도 그가 일언반구 질문 없이 지시를 이행한 단 하나의 이유.
“벌하셔야죠. 그게 옳잖아요.”
그가 부모님을 죽인 인간을 정당하게 원망하려면 동족이 다른 종족에게 끼친 해악을 인정해야 했다.
그건 레이먼드 역시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터였다.
착잡한 얼굴로 마른세수를 한 그는 눈을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래, 그래야지.”
“제가 잡아 오겠습니다.”
“아니.”
레이먼드는 건조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얼굴만큼이나 목소리는 까슬해져 있었다.
“내가 해.”
“하지만 형님.”
“무슨 말 할지 알아. 에블린이랑 아르센 곁에 있으라는 거지?”
아들을 낳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사람에게 험한 일을 맡기고 싶지 않은 건 당연했다.
그러나 레이먼드는 완고했다.
흔들릴 거라는 것도, 고민할 거라는 것도 처음부터 각오하고 있었다.
자신이 시킨 일이었으니 끝맺음도 스스로 해야만 했다.
“난 떳떳해져야 해. 뒤에 숨을 수는 없어.”
설령 제 손으로 동족을 처단하는 일일지라도.
* * *
어쩐 일로 아르센이 새벽녘에 거하게 잠투정을 부리는 바람에 눈을 뜰 수밖에 없었다.
아직 유모를 구하지 못해 당분간은 리타와 내가 번갈아 가며 보살피고 있었는데, 이 녀석이 내가 재워줄 때만 어리광을 부리고는 했다.
리타는 그렇게 순한 아이가 없다고 했는데.
아르센은 조금 움직임이 있어야 쉽게 잠드는 아기라 저택을 한 바퀴 돌 수밖에 없었다.
다들 잠든 새벽이라, 조용히 방을 나서려는데 협탁 위에 놓인 쪽지 하나가 보였다.
‘에블린에게’라고 쓰인 필체는 분명 레이먼드의 것이었다.
곁에 없길래 서재에서 밀린 업무라도 보고 있는 줄 알았는데.
아르센이 깨지 않도록 조심스레 쪽지를 펼친 나는 내용을 읽고 그만 짧게 기함하고 말았다.
때맞춰 아르센이 조약돌 같은 손을 꼼지락대지 않았다면 그대로 망연히 서 있었을지도 몰랐다.
우선 당장 아기를 재우는 게 먼저라 소리 없이 문을 닫고 나왔다.
교교한 저택 속에 아기의 색색거리는 숨소리가 녹아들었다.
무의식적으로 아르센의 등을 토닥여주며, 나는 창가로 다가가 슬쩍 커튼을 걷었다.
희끄무레한 달빛이 창문을 뚫고 들어오고 있었다.
아직 아르센은 보통 아기라서 달빛을 쐬어도 괜찮다고 했다.
나는 그 밝은 달 속으로 멍하니 생각을 하나둘 던지기 시작했다.
하도 많은 일을 겪어서 그런가.
이제는 불안이 습관이 되어버린 것 같다.
아무 일 없이 돌아올 수도 있는데 왜 무조건 안 좋은 예감이 드는 건지.
“괜찮을 거야.”
네가 있는데 돌아오지 않을 리가 없어.
그냥 나는 그 말처럼 이 아이를 잘 돌보고 있으면 되는 거다.
내 말을 알아듣기로 한 듯, 아르센이 잠결에 내 머리카락을 붙잡고 희미하게 웃었다.
꼭 멍멍이가 기분 좋게 가릉대는 것처럼.
* * *
아기는 하루가 다르게 큰다더니 정말이었다.
하루에도 열두 번은 더 얼굴이 바뀌는 것 같았다.
전체적으로 나를 닮기는 했는데, 어떨 때는 레이먼드의 얼굴이 보이기도 했다.
아직 낯을 가릴 시기가 아니라서 누구에게나 방긋방긋 웃어주었는데, 어머님은 그럴 때는 나와 똑같다고 하셨다.
레이먼드는 이때부터 꼭 장난꾸러기답게 웃었다고.
“이때부터 책을 많이 읽어주셔야 합니다. 큰마님이 여유 부리시다가 백작님이 그렇게 되신 거거든요.”
루퍼스가 어디서 났는지 동화책을 잔뜩 들고 나타나서는 중얼거렸다.
한 무더기로 쌓인 책더미에 인형의 팔다리를 붙잡고 아르센에게 재롱을 떨던 나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태어난 지 아직 한 달도 안 됐어요. 아직 목도 못 가누는 애한테 책은 무슨.”
“마님, 제가 백작님 옆에서 그 고생을 하는 걸 보셨으면 그런 말씀을 하시면 안 됩니다.”
단호한 태도에 나는 그의 등을 떠밀며 아이의 방을 나섰다.
“우선 나가요. 막 잠들었으니까. 할 말도 있고.”
클레어에게 아기를 맡기고 최대한 사람이 없는 곳으로 루퍼스를 끌고 가자, 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그러십니까?”
“쉿. 목소리 낮춰요.”
보는 눈과 듣는 귀가 없는지 철저히 확인한 뒤, 그제야 나는 안색을 가라앉히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레이먼드는 어디로 간 거예요?”
루퍼스의 얼굴에 차츰 동요가 일기 시작했다.
“저도 잘 모릅니다. 혹여 마님께 말실수라도 할까 봐, 목적지를 말씀해주지 않으셨거든요.”
“정말이죠?”
“정말입니다. 제가 왜 마님께 거짓말을 하겠습니까. 그리고 설령 마님께서 목적지를 아신다고 한들, 지금 찾아갈 수 있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하긴, 그것도 맞는 말이었다. 그래도 오래 걸리지 않는다고 했는데 벌써 며칠째 감감무소식이니, 신경을 쓰지 않고는 견디지 못할 지경이었다.
“백작님은 아르센 도련님이 초식 수인의 아이와 함께 뛰놀았으면 하셨어요. 그것을 위해서 스스로 폐단을 끊어내시려는 겁니다.”
“……알아요. 내가 겪은 게 많아서 예민했나 봐요. 역시 인내심을 갖고 기다려야겠죠?”
“그래도 이번 달 셋째 주 첫날까지는 돌아온다고 하셨습니다. 중요한 날이잖아요.”
루퍼스가 어깨를 으쓱거리며 입가를 느슨하게 늘어뜨렸다.
반면 나는 웃을 수 없었다.
괜히 아무 말이나 꺼냈다가 코끝이 시큰해질 것 같아서였다.
이번 달 셋째 주 첫날.
매년 돌아오지 않기를 바랐던 날이었다.
* * *
“네 마음대로 해. 죽이든, 살리든.”
차갑고 나직한 목소리였다.
그 앞에 선 작달막한 소년은 극명하게 동요하고 있었다.
나뭇가지 같은 팔다리.
부스럼이 일어나고 진물이 흘러나오는 피부.
도저히 갓 중년에 접어들었다고는 보기 힘든 사내가 거의 정신을 잃은 채, 소년의 발치에 쓰러져 있었다.
레이먼드는 무미건조한 눈으로 송장이나 다름없는 사내를 물끄러미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몇 년 전부터 심각한 피부병을 앓았다고 하더라고. 찾아냈을 때는 이미 이런 상태였어. 인과응보겠지.”
성대와 입가의 피부까지 전부 짓물러 비위가 약한 사람이라면 도저히 두 눈을 뜨고 멀쩡히 쳐다볼 몰골이 아니었다.
엘리엇은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깨물 뿐, 말이 없었다.
도저히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가족의 목숨을 앗아가고, 자신에게 악몽을 심어준 장본인의 말로가 이렇게 비참하다면 으레 통쾌해할 거라고 생각했으나, 현실은 아닌가 보다.
어쩐지 레이먼드는 엘리엇의 심정을 알 수 있었다.
차라리 그의 뇌리에 굳게 새겨진 끔찍한 모습으로 건재했더라면 동요하지도 않았으리라.
“별로 기쁜 얼굴은 아니네.”
엘리엇을 힐끗 쳐다본 레이먼드가 말했다.
다람쥐 소년은 이젠 자신의 손에 들어온 원수를 혼란스럽게 쳐다보며 대답했다.
“그러게. 나도 왜 그런지 모르겠어. 이날만 피를 삼키며 살았는데.”
“어쨌든 지금부터는 네 몫이야. 이대로 황실에 끌고 가서 신고해도 되고. 뭐, 그럴 필요 없이 그냥 내버려 둬도 죽겠지만.”
약속은 지켰다.
그것으로 된 거다.
레이먼드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가 떴다.
어깨를 가득 짓누르던 압박을 조금 덜어낸 기분이었다.
짐 하나를 털어버린 레이먼드는 자신을 기다리는 오스틴에게로 걸음을 돌렸다.
멀리 떨어진 곳에서 그를 기다리던 오스틴은 민첩하게 곁에 붙으며 말을 걸었다.
“이제 랜달로 가시는 거죠?”
“가야지. 아기가 내 얼굴 잊어버리기 전에. 근데 넌 따라오지 말라니까, 왜 굳이.”
“형님 가시는 곳에 제가 어떻게 안 따라갑니까. 도중에 밀렵꾼한테 잡히시면 어쩌려고.”
슬그머니 레이먼드의 가느다란 눈초리가 동생에게 꽂혔다. 조그마한 웃음이 오스틴의 입가에 번졌다.
“그러고 보니 봄이 오면 1년이 되네요. 시간 정말 빠릅니다.”
“벌써 그렇게 됐나.”
“그 전에 형님 생일이 있죠?”
“그보다 더 전에.”
“네?”
“얼마 후에 더 중요한 날이 있어.”
에블린이 랜달에 온 뒤 처음 맞이하는 날. 몇 년 동안 좋은 기억이라곤 하나도 없었을 날.
“이젠 좋은 기억으로 남겨줘야 하거든.”
이번 달 셋째 주 첫 번째 날.
그날이 머지않아 다가오고 있었다.
* * *
“어머, 제법 능숙해지셨네요.”
드디어 완성한 하늘색 털모자를 보고 리타가 손뼉을 쳤다.
이거 하나를 만들려고 시간이 날 때마다 얼마나 애를 썼는지 모르겠다.
아직 배열이 삐뚤빼뚤해도 이번에는 코도 빠뜨리지 않고 털실의 보풀도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
마침 아르센이 모빌을 구경하느라 기분이 좋아 보이길래 슬쩍 씌워봤더니 까르륵 웃었다.
“예뻐라.”
물론 내가 배시시 미소 짓기가 무섭게, 답답한지 칭얼거려서 바로 벗겨주었지만.
아무래도 실내에서는 조금 더울 테니 밖에 데리고 나갈 때 씌워야겠다.
아직 앉지도, 팔다리를 제대로 가누지도 못해서 달리 갖고 놀 수 있는 게 없어서 별수 없이 루퍼스가 가져온 동화책을 뒤적여보았다.
근데 아무리 동화책이라도 유아용과 어린이용이 있는 법인데, 루퍼스가 가져온 건 어느 정도 글을 읽을 줄 아는 어린이용이라 슬슬 옹알이를 시작할 아르센이 듣기에는 지나치게 수준이 높았다.
결국, 나는 책더미를 저쪽으로 밀고는 요람을 천천히 흔들며 아이에게 말을 걸었다.
“아가. 랜달에서 유명한 얘기 해줄까? 늑대 신부 전설이라고, 아빠랑 비슷한 신이 나오는 얘기야.”
보통 신화가 그렇듯 그리 긴 얘기는 아니라서 말은 금방 끝났다.
근데 아르센이 똘망똘망한 눈으로 나를 빤히 쳐다보는 바람에 나도 모르게 괜히 내 이야기를 더 하고 말았다.
“엄마가 그 늑대 신에게 소원을 빈 적이 있었어. 다시 고향에 오게 해달라고. 근데 정말 그렇게 됐어. 지금 생각해 보니까 진짜 그 신이 존재하나 봐.”
만약 그때 내가 다른 소원을 빌었다면 상황은 달라졌을까?
어쩌면 랜달에 관련한 소원을 빌었기에 들어준 것일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사실 엄마한테 그 신은 아빠였던 것 같아. 신이 보내준 게 아니라 날 구원해주러 직접 찾아온 게 아닐까?”
어릴 때 자란 마을 어른들이 영주 가문은 늑대 신의 후손이랬으니 어쩌면 영 틀린 가설은 아닐 것이다.
본인이 믿든 말든 말이다.
막상 말을 꺼내고 나자 지난 시간이 주마등처럼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
사색에 잠기자마자 아르센이 왜 자기에게 관심을 주지 않냐는 듯, 몸을 버둥거리기에 안아주자 또 내 머리카락을 붙잡았다.
“정말이지. 너도 굉장히 엉겨 붙는구나.”
바로 그때.
“그러게요. 누굴 닮은 건지.”
품에서 아르센이 쑥 빠져나가며 머리 위로 인기척이 드리웠다.
고개를 들자 쭉 뻗은 다리 위로, 기저귀를 채워 토실한 엉덩이를 받친 팔이 보였다.
그리고.
“나 왔어요.”
날 구렁텅이에서 꺼내준 나의 신.
그의 눈이 부드럽게 휘었다.
* * *
“우리 아들 못 본 새에 더 컸네요. 곧 뛰겠어요.”
허구한 날 두 손으로 안는 엄마만 보다가 오랜만에 한 손으로 번쩍 들어주는 아빠를 만나니 아르센도 신이 나는 모양이었다.
할 줄 아는 말도 없는 녀석이 조막만 한 입술을 양껏 오물대며 뭐라고 뭐라고 옹알댔는데, 레이먼드는 마치 전부 알아듣는 양 흐뭇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아르센도 아빠 보고 싶었지?”
아기는 목을 가누지 못하기에 뒷덜미를 잘 받쳐줘야 했는데, 거의 아르센이 태어나자마자 저택을 떠나야 했던 레이먼드가 올바른 자세를 알 리가 없었다.
“그렇게 안는 거 아니에요.”
하고 싶은 말, 따지고 싶은 마음을 꿀꺽 삼킨 채 나는 우선 그의 손을 붙잡고 자세를 고쳐주었다.
이 서투른 늑대가 자칫 잘못해서 아기 늑대를 떨어뜨리기라도 하면 안 되니까.
최대한 숨긴다고 숨겼는데, 묘하게 말투에 가시가 돋았나 보다.
안정적으로 아르센의 목을 받친 레이먼드가 슬그머니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나를 흘겨보았다.
“미안해요. 화났죠?”
“아니요. 안 났어요.”
“그런 표정으로 안 났다고 하면 아무도 안 믿어요.”
“진짜 안 났어요. 그냥 긴장이 풀려서 그래요.”
괜히 과민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아, 애먼 장난감들을 정리하는 척 그에게 등을 돌렸다.
연이어 큰일들이 터지는 바람에 신경이 알게 모르게 신경이 잔뜩 곤두서 있었다.
사실 누군가 툭 건드리면 온갖 짜증과 신경질을 부릴 수 있었는데, 그러면 안 된다는 걸 알아서 그러지 않았던 것뿐이다.
“잘못했어요. 근데 말하고 가면 걱정할 것 같아서 그랬어요.”
“말 안 하고 가면 더 걱정할 거란 생각은 안 했어요?”
“안 그래도 오스틴한테 혼났어요. 미안해요. 그래도 무사히 돌아왔으니까 한 번만 용서해줘요.”
더 나무라려다가 그의 품에서 아무것도 모르고 나를 말똥말똥 쳐다보는 푸른 눈 때문에 말았다.
대신 다른 것을 묻기로 했다.
“알았어요. 일은 잘 해결했어요?”
그는 천천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런 것 같아요. 남은 건 엘리엇의 몫이죠. 내 할 일은 끝났어요.”
“어떤 자였어요? 상상 이상으로 위험한 자였나요?”
이번에는 무겁게 고개가 좌우로 흔들렸다.
“이미 벌을 받고 있더라고요. 심각한 피부병을 앓고 있었어요. 성대와 입가도 짓물러서 말 한마디조차 제대로 하지 못했어요.”
“……엘리엇이 마냥 두 팔 벌려 기뻐하지는 않았겠네요.”
내 말에 그는 짐짓 놀란 얼굴로 눈을 크게 떴다.
어떻게 알았냐고 묻는 듯해서 나는 담담하게 말을 이어붙였다.
“숙부와 고모들이 그렇게 됐을 때, 나도 비슷했거든요. 이유는 모르겠더라고요. 후회는 아닌데, 그냥 형언할 수 없는 어떤 허무함.”
돌이켜보면 막막함이 아니었을까 싶다.
이렇게 스러질 존재들에게 지독하게 붙들려 있던 게 억울했던 건 둘째치고, 목적이 사라진 막연함.
“그래도 복수를 끝맺었기에 다음 할 일을 찾았고, 여기까지 온 거겠죠. 엘리엇도 당장은 혼란스럽고, 방황할지 몰라도 주변에 좋은 사람들이 있으니 금세 떨쳐낼 거예요.”
인간은 앞으로 나아가는 동물이니까.
부디 다람쥐 소년이 혼란을 깨부수고 훌훌 털어내길 바라던 내 허리로 별안간 묵직한 두 팔이 감겼다.
그새 아르센은 요람 속에서 색색 귀여운 숨소리를 내쉬며 잠들어 있었다.
“맞아요. 나도 다음 할 일이 있어서 얼른 돌아온 거예요.”
그가 콧잔등을 내 귓바퀴에 비비며 중얼거렸다.
“조금 이르지만 가장 먼저 얘기하고 싶으니까 지금 얘기할게요.”
구름 위를 걷는 듯 포근한 목소리가 귓가를 휘감았다.
“생일 축하해요, 에블린.”
* * *
솔직히 나는 누군가에게 챙겨지는 것 자체가 쑥스러웠다.
배려가 아니라, 스스로 잘해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힌 시간이 길었던 탓이었다.
그래서 아무도 챙겨주지 않는 생일 따위, 사실 속상했으나 아니라고 세뇌했고 합리화했다.
어차피 매년 돌아오는 날. 특별히 챙겨서 무엇하냐고.
몸이 아니라 정신에 밴 습관은 어지간하면 지워지는 게 아니라서, 레이먼드를 만나고 그 산전수전을 겪고 아르센을 낳은 뒤에도 변하지 않았다.
정확히는 ‘생일을 축하하는 행사’를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 때문인가.
“리본은 어떤 게 좋을까요?”
“환한 게 낫죠. 케이크 장식과 비슷하게.”
“알겠어요. 그럼 테이블보도 맞춰서 꾸밀게요.”
리타와 크리스틴이 연회장의 장식을 두고 신중히 의논하는 모습을 보자니, 어쩐지 목 안쪽이 간지럽고 발바닥에 뭉툭한 가시가 돋은 것처럼 성가신 기분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저택의 모든 고용인이 아침부터 부산스럽게 움직이며 연회장으로 식기와 테이블, 여기저기서 보내준 선물을 나르느라 정신이 없었다.
“보이십니까? 보라색 상자는 화이트에서 보낸 거고, 파란색은 블랙, 눈에 띄게 번쩍번쩍한 금색이 황실과 러더퍼드 공작이…….”
“그만. 그만해도 돼요, 루퍼스. 나중에 다 확인 할게요.”
“아르센 도련님이 조금만 더 자랐더라면 손님들을 직접 불렀을 텐데, 아쉽네요.”
태어난 지 한 달이 채 되지 않은 아기가 있는 집에 외부인이 북적거리는 건 좋지 않기에, 내 생일은 그냥 우리끼리 지내기로 했다.
더구나 아직 눈이 녹지 않아 랜달로 오는 길이 꽁꽁 언 빙판길이었고. 오다가 사고라도 나면 내가 그 사람을 볼 면목이 있겠어?
“저택이 시끄럽네요. 도련님 모시고 잠시 손님용 숙소에 가시는 게 어떠세요? 난로에 장작을 넣으라고 하겠습니다.”
“괜찮아요. 잠깐 나가 있으면 돼요. 오늘은 따뜻한 편이니까 아르센도 두껍게 입히면 되겠죠.”
진실을 말하자면 날씨는 핑계고, 그냥 손수 만든 털모자를 씌우고 싶었다.
애는 날이 갈수록 쑥쑥 크는데 이때가 아니면 도저히 씌울 틈이 나질 않을 듯했다.
내의에 털조끼, 장갑과 양말, 마지막으로 하늘색 털모자까지 쓴 아르센은 두 눈이 휘둥그레져 나를 올려다보았다.
생후 열흘하고도 아흐레쯤. 이렇게 옷가지에 꽁꽁 싸인 적이 없던 것이다.
거기에 솜을 누빈 포대기까지 두르자 평소 아르센의 무게보다 배는 더 무거워진 것 같았다.
그래도 태어나서 처음으로 하는 바깥 구경에 아이가 눈을 떼지 못하는 걸 보자, 무거운 건 어느샌가 문제가 되지 않았다.
“봐봐, 이게 나무야. 지금은 가지밖에 없는데 조금만 있으면 잎이 자랄 거야.”
내가 뭔가를 가리키면 포도알같이 동그란 눈이 그대로 따라왔다.
나무를 가리키면 나무를, 눈더미를 가리키면 눈더미를, 하늘을 가리키면 하늘을, 산을 가리키면 산을.
뭔가 더 알려줄 게 없을까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그때, 레이먼드가 어디선가 나타나 아이를 내게서 빼갔다.
“치사하게 둘이서만 산책해요? 안 됩니다. 가뜩이나 애가 아빠 얼굴 못 알아보는 것 같은데.”
“어머, 레이먼드 보고 얼마나 방긋방긋 잘 웃는데요.”
“나도 그런 줄 알았죠. 근데 아르센은 루퍼스한테도 방긋방긋, 오스틴한테도 방긋방긋, 심지어 지나가는 하인한테도 방긋방긋 잘 웃어줍니다. 안아달라고 칭얼대는 건 에블린뿐이라고요.”
그의 말을 방증하듯, 때맞춰 아르센이 까르륵 새된 소리를 내며 웃었다.
레이먼드가 눈을 게슴츠레 뜨든 말든, 아르센은 두 팔을 버둥거리며 그의 머리카락을 잡아당겼다.
“알았어요. 애 그렇게 들면 떨어뜨리니까 얼른 제대로 안아요. 이쪽으로 쭉 걸을 생각이었는데, 같이 가요.”
아랫입술을 삐죽 내밀면서도 레이먼드는 혹여 아기를 떨어뜨릴라, 아주 소중히 작은 생명체를 품에 안았다.
눈이 덮인 길을 걸을 때마다 저벅저벅 소리가 났다.
그러고 보니 아르센과 함께 이 산책로를 걷는 건 처음이었다.
“레이먼드, 수인 아기는 이가 나면 늑대로 변한댔죠?”
“보통은요. 조금씩 차이는 있지만요. 거의 걸음마 시기와 비슷하다고 보면 돼요.”
아직 잘 모르겠다. 내 눈을 가진 늑대라니. 그보다 얘는 알까? 자기가 늑대라는 걸?
“그때부터 내가 가르칠 게 많아지죠. 처음에는 멋대로 변하거든요. 주체를 못 해요.”
“아…….”
“그리고 말을 배우고 뛰놀기 시작하기 전에 내 할 일을 끝내야 하고.”
무슨 말인지 단번에 이해했다. 그는 자기와 같은 아픔과 실수를 아르센이 겪지 않기를 바랐다.
좋아하는 상대가 인간이라는 이유로 붙잡지 못하고 보냈을뿐더러, 정체조차 드러내지 못했던 것.
“갈 길이 아주 멀어요. 몇 년 안에 끝나지 않을 수도 있고, 어쩌면 이 녀석이 내가 에블린을 처음 만난 나이가 되어서도 그대로일 수도 있고. 그래도 낙담하지는 않으려고요.”
매우 오랜만이었다. 레이먼드의 표정이 쾌청해 보이는 건. 처음 만났을 때의 천진함은 다소 사라졌을지 몰라도, 그 자리를 다른 무언가가 채운 것만은 확실했다.
“그렇게 계속하다 보면 언젠가는 도달하겠죠. 내가 꿈꾸는 이상에.”
훗날 먼 미래에서 지금을 바라볼 때, 허무맹랑한 소리라며 일갈할지도 모른다.
결국, 이상 따위는 없다고, 네가 꿈꾸는 세상은 오지 않았다고 절망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건 나중의 일이다. 나중의 일을 벌써 걱정할 필요는 없다.
“아야.”
레이먼드가 눈살을 찌푸리며 아르센을 품에서 떼어냈다.
뭐가 좋은지 제 아빠와 똑같은 머리칼을 가진 녀석은 히죽 웃으며 손을 꼬물댔다.
“왜 그래요?”
“내 머리카락 뽑았어요.”
“네?”
“이상한 소리 하지 말고 자기한테 관심이나 달라는 뜻이겠죠.”
이럴 때 보면 영락없이 레이먼드 판박이인데 왜 다들 나를 닮았다고 하는지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적어도 나는 주변의 이목을 끌기 위해 누군가의 머리카락을 뽑지는 않는데.
그래도 아기의 티 없이 맑은 웃음은 저절로 입가에 미소를 짓게 했다.
레이먼드도 아무리 머리털이 뜯겼을지언정, 아르센의 엉덩이를 받친 손을 절대로 내리지 않았다.
“가요.”
그가 남은 한 손을 내밀었다.
줄곧 밖에 내놓고 있던 탓에 얼어서 굳어 있었다.
살포시 털장갑을 벗고 그 손을 붙잡자, 모아둔 온기가 레이먼드에게로 스며들었다.
나는 간절히 바랐다.
내가 그에게 받은 따스함이 이번에는 그에게 전해지기를.
@ZP 타싸X요게X공금갠소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