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youngest of the returning tycoons RAW novel - Chapter 12
12화 드러나는 존재감 (1)
“표정이 왜 그 모양인 거냐?”
엄상철 회장은 서재로 들어온 엄수경의 얼굴이 굳어 있는 것을 보자 불길함을 직감했다.
“확인된 거냐?”
“네, 아버지.”
엄수경이 무겁게 입을 열어 대답했다.
“흥. 돌아가신 아버지도, 형제자매도 다 속이면서 송우그룹 회장으로 대접을 받으시겠다? 어림없는 소리지.”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옛날부터 모든 걸 가져야 직성이 풀리던 양반이었다. 내 것까지 차지하겠다고 저 지랄을 하는데, 가만히 있으면 내 손으로 갖다 바치는 꼴이야.”
엄수경도 그 말이 일리는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현호가 얘기한 것처럼 정면으로 부딪치면 아버지가 절대 불리했다.
“아버지, 무리해서라도 기관투자자들을 만나 보는 건 어떨까요?”
“우리가 그러고 다니면 형님은 가만히 있을 거 같아? 가격을 두 배, 세 배로 올려 버리면 그자들이 누구한테 팔 거 같으냐?”
“……!”
엄수경은 반박할 수 없었다.
송우미디어가 장외에서 주식 거래를 시도한다는 걸 큰아버지가 포착하는 순간, 더 이상 잴 것 없이 송우미디어를 차지하려 할 것이 분명했다.
그렇다고 손 놓고 있을 수만은 없다. 큰아버지가 언제 작전을 시작할지 모르니.
“그러면 어쩌실 생각이세요?”
“먼저 형님과 송우그룹의 자금이 움직이지 못하게 묶어 둬야지. 그리고 그사이 송우그룹 회장 자리를 흔들어 버리는 거야.”
“그게 무슨……?”
“곧 알게 될 거야. 넌 기다리고 있다가 내가 지시할 때 움직이면 돼.”
* * *
[오늘 평양에서 역사적인 남북 두 정상의 만남이 있었습니다. 공항에서 만난 두 정상은 같은 차를 타고…….]
동생이 무슨 일을 계획하는지 알지 못하는 엄상현 회장은 기업인 평양방문단의 일원으로 남북정상회담 행사에 참여하고 있었다.
대한민국이 온통 이 이슈에 빠져 있을 때, 현호는 다른 것으로 마음이 바빴다.
“최 비서.”
“예, 이사장님.”
“여기 적힌 사람, 서둘러 약속 잡아요.”
현호가 최명준 비서에게 한 남자의 신상이 적힌 메모지를 건넸다. 그 메모에는 ‘명성부품엔지니어링, 강상수’라고 쓰여 있었다.
“투자사와 관련된 사람이 아니네요?”
현호는 최명준 비서와 함께 비밀리에 투자사 인수를 진행하고 있었다.
“네. 하지만 내게 꼭 필요한 사람이에요. 서둘러요.”
“예, 알겠습니다.”
최명준은 더 이상 묻지 않고 지시한 일을 처리하러 성큼성큼 사무실 밖으로 나갔다.
‘서둘러야 해.’
현호는 엄상현 회장이 평양에서 돌아온 직후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고 있었다.
전생에서는 작은아버지 엄상철 회장이 시작한 공격 때문에 송우그룹이 잠시 어려움을 겪었다.
하지만 엄상현 회장은 어렵지 않게 문제를 해결하고, 도리어 반격을 시작했다.
결국 그 싸움의 승리는 엄상현이 차지했고 말이다.
현호는 똑같은 결과가 나오도록 내버려 둘 생각이 없었다.
그를 위해서는 빨리 모든 준비를 끝마쳐야만 했다.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역사적인 남북공동선언에 합의함으로써 앞으로 남북 간의 교류와 협력이…….]
남북정상회담이 마무리되어 평양방문단이 돌아오고 며칠간 떠들썩했던 이슈가 차분하게 가라앉은 날 아침이었다.
“회장님.”
엄상현 회장 가족이 본관 식당에서 식사를 하던 그때, 박경국 과장이 다급한 걸음으로 들어왔다.
“무슨 일이야, 박 과장?”
“뉴스를 보셔야겠습니다.”
마음이 급한 박경국 과장은 허락도 떨어지지 않았는데 리모컨을 작동시켜 식당 정면에 TV를 켰다.
스크린에 클로즈업된 한 건물을 배경으로 하여 기자가 리포트를 진행하고 있었다.
[용산구에 있는 시가 80억의 건물, 소유주는 박 모씨입니다. 구로구 있는 시가 150억의 건물, 소유주는 이 모씨입니다. 그런데 건물 주인이 자기 건물인 줄 모릅니다.]
기자가 누군가에게 전화를 거는 화면으로 바뀌었다. 화면 아래쪽에 자막이 표시되었다.
[기자: (박 모씨에게) 선생님, 용산구에 있는 건물 있으시잖아요. 그거 파실 생각 있으세요?]
[박 모씨: 전화 잘못한 거 같네요.]
[기자: (박 모씨에게) 용산구 건물 파실 생각이 없으세요?]
[박 모씨: 없는 걸 어떻게 팔아요?]
기자가 다른 사람에게 전화하는 것과 동시에 그의 말이 흘러나왔다.
[상황은 구로구 건물 소유주 이 모씨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기자: (이 모씨에게) 구로구에 있는 선생님 건물을 매매하실 의향이 있으세요?]
[이 모씨: 전화 잘못한 거 아니에요? 무슨 얘긴지 모르겠네.]
이제 화면에는 송우전자 본사 건물이 보였다.
[서로 다른 사람이지만 두 사람에게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두 사람은 모두 송우전자 임원입니다. 송우전자 전, 현직 임원의 명의로 된 건물은 서울에만 있는 게 아니라 전국에 퍼져 있습니다. 소유주가 모르는 건물들, 송우전자의 불법적 차명 재산과 그로 인한 비자금과 탈세가 의심…….]
엄상현이 리모컨으로 화면을 꺼 버렸다.
그의 얼굴은 어둡고 딱딱하게 굳었고, 가족들은 어떤 말도 꺼낼 수 없을 만큼 식당의 분위기는 가라앉았다.
“누구 짓이야?”
곧 터질 것 같은 분노를 품은 엄상현이 박경국에게 물었다.
“최 변호사님께서 알아보시겠다고 했습니다.”
“일이 이렇게 될 때까지 최 변호사도 몰랐다는 거야?”
엄상현의 목소리가 거칠게 높아졌다.
“네, 회장님. 최 변호사님도 방송 몇 분 전에야 알았다고 합니다.”
“당장 그룹 홍보팀 집합시켜서 더 이상 퍼지지 않게 막으라고 해. 해프닝으로 끝나야 해. 비자금과 탈세까지 가면 안 돼, 알겠어?”
“네, 회장님.”
엄상현의 지시를 이행하기 위해 박경국이 빠르게 식당에서 사라지자, 장남 엄현식이 걱정스러운 듯 끼어들었다.
“아버지, 내부 사람이 아닐까요?”
기자에게 제보한 사람이 그룹 내부인일 가능성이 컸다.
하지만 엄상현은 확신할 수 없었다. 그룹 내부인이라 하더라도 오래전에 형성된 차명 재산과 비자금의 정보를 아는 사람은 극히 제한적이었으니까.
그들이 자신을 상대로 제보했다면, 송우그룹과 싸워 보겠다는 것과 같다. 만신창이가 될 각오가 아니라면 나설 수 없는 일이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뉴스로 방송된 정보를 아는 회사 내부인 중 송우그룹과 맞설 사람이 생각나지 않던 그때였다.
“작은아버지 아닐까요?”
현호가 불쑥 끼어들었다. 그러자 장남 엄현식이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대꾸했다.
“네가 뭘 안다고 지껄여? 작은아버지가 미디어와 리조트를 분리해서 나갔지만, ‘송우’라는 타이틀 지키고 계셔. 송우그룹 이미지가 나빠지면 그쪽에도 이로울 게 없다고.”
“형은 등잔 밑이 어둡다는 속담도 몰라?”
“뭐?”
인상을 찌푸리는 그에게 대꾸하는 대신, 현호는 엄상현 회장을 쳐다봤다.
허공에서 눈빛이 마주쳤을 때 엄상현은 뭔가 알아차린 듯한 표정이었다.
황원기 전 사무장과 거래를 하려 했던 엄상철.
하지만 거래 전 황원기에게서 차명 재산 자료들을 빼돌렸다.
엄상철이 그것에 앙심을 품었다면, 오늘의 갑작스러운 뉴스 보도가 가능하다는 걸 엄상현은 알고 있다.
그때, 그의 휴대폰이 울렸다.
최덕일 변호사였다.
“누가 제보했는지 알아냈어?”
[기자가 윗선에도 제보자가 누구인지 밝히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누군지 알아낼 수 없다는 거야?”
제보자를 찾아내 본보기를 보여야 한다. 송우그룹과 맞서려 했다가는 더 크게 다칠 수 있다는 것을.
그래야 이어지는 제보를 막을 수 있다.
[제보자가 누구인지 짐작되는 사람이 있습니다.]
“누구?”
[기자에게 제보된 자료를 남현민 검사에게도 전한 사람입니다.]
“뭐, 남현민?”
엄상현은 신경질적으로 미간을 찌푸렸다.
남현민은 대검찰청 중앙수사부 소속 검사로, 과거에 송우그룹 사건을 맡았다가 좌천된 이력이 있는 인물이었다.
아마 지금까지도 송우그룹에, 엄상현 회장에게 앙심을 품고 있을 게 분명했다.
그러니 남현민에게 제보자료는 송우그룹과 엄상현 회장에게 복수를 꿈꿀 수 있게 만들어 주는 좋은 재료일 터였다.
다만, 남현민과 송우그룹의 관계에 대해 아는 인물을 많지 않았다.
그룹 내부에서 오래전에 차명 재산으로 만든 비자금과 남현민 검사와의 관계를 아는 자는 단 네 명.
자신과 박경국 과장, 최덕일 변호사, 그리고…… 동생 엄상철뿐이었다.
“엄상철, 이 자식이…….”
분노 섞인 말투로 중얼거린 엄상현이 최덕일 변호사에게 명령하듯 말했다.
“남현민부터 막아.”
[그 검사가 작정했는지 아예 외부 연락을 받지 않습니다.]
“윗선에 연락해서 찍어 누르면 되잖아.”
지금의 검찰총장은 송우그룹 엄상현 회장의 도움을 받아 그 자리에 오른 인물이었다.
그에게 연락을 취한다면 문제는 간단히 해결될 터였다.
[그게…… 총장의 약점을 잡고 있습니다.]
“뭐?”
[그 약점을 무기 삼아, 중수부로 인사이동을 한 겁니다.]
몇 년 전 송우그룹 사건을 파다가 좌천된 검사였다.
지방 한직을 돌아다녀야 할 그가 검사의 출세 코스 중수부로 인사이동을 했다는 건, 그럴 힘이 그에게 생겼다는 의미였다.
“당장 대책 세워서 보고해.”
통화를 끊는 엄상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엄현호는 속으로 웃었지만, 표정은 심각하게 말을 했다.
“아버지, 제가 해결해 보겠습니다.”
현호의 말에 가족 모두가 화들짝 놀랐다. 그들 중 장남 엄현식이 가장 먼저 언성을 높였다.
“야! 너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차남 엄현태도 거들었다.
“네가 끼어들 일이 못 돼. 그룹 전체가 비상인 상황이야. 너는 검찰 수사가 시작되기 전에 흠잡힐 만한 게 없는지 재단 서류나 다시 살펴봐.”
“둘째 형은 검찰 수사를 막을 방법이 없다고 생각하는 거야?”
“너는 이 일이 애들 장난처럼 보여? 재단 이사장으로 대접받으니 세상일이 쉽게 느껴져? 어디서 주제도 모르고 끼어들어?”
“검찰 수사만 기다리는 형이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
“그룹에는 법무팀이 있어. 그 사람들이 괜히 고액 연봉을 받는 줄 알아?”
“법무팀 해결만 믿고 그렇게 여유 부릴 때가 아니야. 그러다 그룹 회계 자료를 검찰에 털린 후 해결되면 언제든 우리 목에 들이댈 칼자루 쥐여 준 꼴밖에 더 돼?”
“네가 뭘 안다고…….”
“그만들 해!”
엄상현이 언성을 높이자 말다툼이 끊어지고 식당에는 다시 침묵이 흘렀다. 잠시 생각하던 엄상현이 현호를 보며 물었다.
“무슨 계획이라도 있는 거냐?”
“아버지, 현호는 아직 세상 물정 모르는 어린애나 마찬가지예요. 물을 만한 사람한테 물으셔야죠.”
장남 엄현식이 투덜거리듯 얘기하자 현호가 끼어들었다.
“큰형이 나를 그렇게 생각할 뿐, 아버지는 나를 사업가로 인정해 주셨어.”
“뭐……?”
“엔터테인먼트 사업을 허락받았고, 성공하면 미디어 그룹도 맡기겠다고 하셨어.”
“…….”
너무 놀란 건가.
두 형과 누나까지 눈도 깜빡이지 못하는 인형이 된 듯 얼굴이 굳었다.
그들의 이런 반응은 예상했다.
철부지 망나니로만 아는 동생에게 아버지가 계열사를 약속했으니.
하지만 그들이 두려움을 갖는 것은 따로 있다.
아버지와 자신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냐는 것.
애틋한 막내아들이라고 무작정 내줄 분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이 그렇게 놀라는 사이, 현호는 엄상현의 표정을 살폈다.
그가 아버지와의 거래를 밝힌 건, 다른 가족들의 패닉을 감상하려는 단순한 자기만족 때문이 아니었다.
이 사실을 드러냈을 때 엄상현이 어떠한 반응을 보일 것인가.
앞으로 어떻게 움직일지를 계산하기 위해선 그의 속내를 조금이라도 더 파악해 둘 필요가 있었다.
“아버지, 현호 말이 사실이에요?”
아니나 다를까.
장남 엄현식이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누구든 나를 만족시키는 결과를 내면, 그에 맞는 보상은 당연한 게 아니냐.”
엄상현은 답을 살짝 피해 가는 말을 했다.
그의 입에서 나온 ‘누구든’이 의미하는 것은, 반드시 현호가 아니어도 되고, 장남 엄현식일 필요도 없는 것이다.
자식들의 경쟁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이만한 게 있을까.
엄상현의 마음을 확인한 현호는 담담히 다음 말을 이었다.
“아버지, 남현민 검사는 제가 해결하겠습니다.”
“네가 무슨 수로?”
의구심이 깃든 눈으로 엄상현 회장이 물었다.
“시간은 흘러가는데 월급 받는 법무팀만 쳐다보고 있으시겠습니까, 아버지?”
잠시 말없이 쳐다보던 엄상현이 나직이 입을 열었다.
“서재로 가자.”
엄상현이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향했다.
뒤따라 일어난 현호는 세 형제자매를 힐끔 쳐다봤다. 돌처럼 딱딱하게 굳어 있는 얼굴을 보자 저절로 미소가 떠올랐다.
전생에서는 자신을 파멸시키기 위해 셋이 뭉쳤었다. 이번 생에는 다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