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youngest of the returning tycoons RAW novel - Chapter 20
20화 길은 내가 놓아 주지
성북동.
저녁 식사 후 어머니와의 산책을 끝마치고 방으로 돌아온 직후, 현호의 휴대폰이 울렸다.
엄수경이었다.
“어, 누나. 계약했다는 이야기는 들었어.”
[전부 네 말대로 진행했어. 그런데 이걸로 큰아버지도 아버지가 돈을 마련했다는 걸 알게 되실 텐데…… 괜찮을까?]
엄상철 회장이 대출금을 상환하면, 은행장은 곧바로 엄상현 회장에게 그 사실을 알려 줄 것이다.
그리고 그 사실을 알게 된 엄상현은 결코 가만히 있지 않을 터였다.
곧바로 엄상철을 압박하기 위한 다음 움직임을 보일 게 분명했다.
“아마 송우미디어의 주식을 본격적으로 사들이기 시작하실 거야. 그러니까 그 전에 누나가 먼저…….”
[기관투자자들을 만나서 손쓰라는 거지?]
“최대한 빨리 임시 주총을 진행할 수 있도록 이사들도 만나 두고.”
[그것도 해야지. 하아…… 할 일이 많네.]
그녀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것만 끝내면 이제 송우미디어의 주인은 누나야. 내가 마지막까지 도울 테니까, 앞으로도 진행 상황 알려 줘.”
[그래. 고마워.]
똑똑.
엄수경과의 통화를 끝내자, 곧이어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오세요.”
문이 열리며 최명준 비서가 들어왔다.
“이사장님이 부탁하신 책을 찾아왔습니다.”
방 안으로 들어선 최명준은 곧바로 책 한 권을 현호에게 건넸다.
흔들리지 않는 나무처럼.
정무수석 구진수, 그가 과거 국회의원 후보자였을 당시에 집필했던 책이었다.
상당히 오래전 절판된 책이었던 터라 구하기 쉽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역시 최명준은 능력 있는 인물이었다.
“늦게까지 수고했어요.”
“아닙니다. 그럼 가 보겠습니다.”
최명준이 방을 나간 후 현호는 책 내용을 빠르게 살폈다.
책에는 구진수가 정치인이 되기로 결심한 이유와 과정, 그리고 그가 생각하는 바른 정치에 대해 저술되어 있었다.
현호는 한참 책을 훑다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책의 제목과 내용이 참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이 든 탓이었다.
“흔들리지 않는 나무처럼…… 나무는 바람에 많이 흔들리는데.”
현호는 펼친 책을 접어 들고는 방 밖으로 나가 엄현주의 방으로 향했다.
그녀의 방문을 노크하자, 곧바로 문이 열렸다.
“무슨 일이야?”
“얘기했던 일이 어떻게 되어 가는지 궁금해서.”
“일단 들어와.”
엄현주의 방 안에는 여러 문서가 너저분하게 펼쳐져 있었다.
“일하고 있었어?”
“구진수 정무수석에 대한 자료를 좀 보고 있었어.”
“만나기로 했어?”
“내일 점심에. 저녁이었으면 더 좋았을 텐데, 시간을 더 내주지 않네.”
“짧은 시간 안에 우호적으로 만들려면 쉽지 않겠는걸.”
“그래서 정보를 좀 모으려고 이것저것 보고 있는데 급히 찾은 자료들이라 쓸 만한 게 별로 없네.”
“그럼 이걸 구해 오길 잘했네.”
현호는 그녀에게 가져온 책을 건넸다.
“어머, 이거……!”
처음에는 어리둥절하더니 책의 저자를 확인하곤 화들짝 놀라는 엄현주.
그녀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떠올랐다.
“오래전에 이분이 책을 썼다는 이야기를 들어서, 최 비서에게 부탁해 구했어.”
“현호야…… 고마워.”
엄현주는 감동한 눈빛으로 현호를 쳐다봤다.
명쾌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아 앞이 깜깜하던 찰나였는데, 이걸로 좋은 해결책을 마련할 수 있게 되었다.
현호를 바라보는 눈빛이 따뜻해질 수밖에 없었다.
“누나 일이 잘되길 빌게.”
“잘할 거야. 네가 이렇게 도와주는데 반드시 잘해야지.”
“그 책, 어떻게 활용해야 하는지 알지?”
“당연하지.”
* * *
다음 날.
엄현주는 평소보다 일찍 일어나 출근 준비를 하고 방을 나왔다. 그리고 아래층으로 내려가기 위해 몇 걸음 걸었을 때였다.
“현주야.”
돌아보니 아침 운동을 마치고 온 듯한 트레이닝복 차림의 엄현태였다.
“벌써 출근해? 병원에 일이 많아?”
“병원 일은 생소해서 새롭게 알아야 할 것들이 많네.”
엄현주는 그에게 거짓말을 했다.
자신의 자리를 찾기 위해 준비하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나면 그가 다시 무슨 수작을 부릴지 알 수 없었으니까.
“오빠는 런칭 준비 잘되어 가?”
“네가 다 준비해 놓은 일이잖아. 나는 오픈식에 참석만 하면 될 거 같던데. 아버지 화 풀리실 때까지만 참아. 나도 기회 봐서 아버지께 잘 얘기할게.”
“고마워. 오빠 말 믿고 기다리고 있을게.”
“그래. 어서 출근해.”
“어.”
그에게 등을 돌린 순간, 엄현주의 얼굴에 떠올라 있던 미소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있었다.
또박또박 걸음을 옮기는 그녀의 표정은 차갑게 식었다.
‘기다려. 내 뒤통수 친 거 후회하게 만들어 줄 테니까.’
이러한 결심도 오늘 계획한 일이 잘돼야 할 수 있다는 걸 그녀는 알고 있다. 그래서 구진수 만나기 전 머릿속으로 여러 시나리오를 상상하며 철저히 준비했다.
하지만 그녀 옆에 앉아 있는 송우병원장 남정수는 긴장한 기색이 역력해 보였다.
“원장님, 경직되어 있어요. 긴장하지 마시고 편안히 생각하세요.”
“아, 죄송합니다.”
호텔 레스토랑의 룸은 쾌적했다. 하지만 남정수 원장은 긴장감 때문에 땀이 솟는지 연신 손수건으로 손바닥을 닦았다.
대통령 주치의를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던 병원장.
하지만 로비의 성패에 따라 정말 대통령 주치의가 될 수도 있다고 생각되자 잘 안 나던 땀까지 나는 것 같았다.
“원장님, 제가 알려 드린 거 잊지 않으셨죠?”
“그럼요.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가 대답을 마쳤을 때였다.
레스토랑 룸의 문이 열리며 정무수석 구진수가 들어왔다. 둥근 얼굴에 서글서글한 눈매가 이웃집 아저씨 같은 모습이었다.
“안녕하십니까, 수석님.”
엄현주와 남정수가 동시에 일어나 그에게 인사했다.
“처음 뵙습니다. 자리에 앉으세요.”
“공무에 바쁘신데 이렇게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엄현주가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얘기했다.
“엄상현 회장님 따님 되시는…….”
“네, 맞습니다.”
“해식이에게 얘기 들었어요. 회장님이 예뻐하시는 따님이시라고.”
“외숙부님께서 그런 얘기도 하셨어요?”
“빈말은 아닌 것 같네요. 이렇게 미인이시고.”
“감사합니다. 아, 여기 이분은 저희 송우병원의 원장님 되십니다.”
현주는 옆자리의 남정수 원장을 소개했다. 그러자 원장이 고개 숙여 인사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수석님. 남정수라고 합니다.”
“반갑습니다. 그런데, 제게 할 얘기가 있다고 들었습니다만.”
“그렇습니다. 사실 의약분업 시행이 코앞이다 보니 요즘 의료계 분위기가 좋지 않습니다. 폐업과 파업 소리도 들리고요.”
“예, 정부도 걱정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제 신념도 그렇고, 병원 설립 목적도 그렇고, 의사와 병원은 환자 곁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그래서 저희 병원은 이번 파업에 참여하지 않을 생각입니다.”
“정말입니까?”
화들짝 놀란 정무수석이 믿기지 않는 듯 다시 물었다.
“저희는 외부에 파업 불참을 선언할 계획입니다.”
“송우병원 같은 대형 병원이 그렇게 해 주시면 정부도 의료계와 대화하는 데 도움이 되지요.”
“저희 병원 모든 의료 종사자들을 총동원해서 의료 공백을 막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구진수가 남정수의 손을 잡으며 고마움을 표시했다.
인사말 이후 잠자코 있던 엄현주가 입을 열었다.
“수석님, 실례가 안 된다면 사인을 받을 수 있을까요?”
“네……?”
“여기에.”
엄현주가 가방에서 한 책을 꺼내자, 그것을 본 구진수가 소스라치게 놀랐다.
“아니, 이건 내 책 아닙니까? 오래전에 절판된 건데…….”
“고등학생 때 사서 읽고 지금껏 보관하고 있었어요.”
“지금까지 보관을요?”
“수석님의 신념에 큰 감동을 받았거든요. 수석님을 이렇게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그리고 보니 우리 엄 실장이 수석님 왕팬이었죠?”
남정수가 미리 지시받은 대로 분위기를 띄우자 구진수는 쑥스러워하면서도 기분이 좋은 듯 웃었다.
“하하, 이런 인연이 있네요.”
구진수는 펼쳐진 책 위에 덕담까지 적었다. 이에 현주는 빙그레 미소 지으며 얘기했다.
“수석님, 감사합니다.”
“아이고, 두 분의 훈훈한 모습을 보니 저도 하고 싶은 게 생겼습니다.”
남정수가 다시 끼어들었다. 물론 현주가 지시한 일이다.
그는 구진수 수석에게 ‘VIP 전용’이라고 쓰인 카드를 건넸다.
“원장님, 이게 뭡니까?”
“저는 건강을 돌보는 사람입니다. 수석님과 가족분들의 건강 검진과 진료를 제게 맡겨 주세요. 저는 이것밖에 할 수 있는 게 없고, 이렇게라도 나라에 보탬이 되고 싶습니다.”
“아니, 이러면 제가 곤란…….”
엄현주가 얼른 끼어들었다.
“별장입니다, 수석님.”
“예?”
“저희 병원 VIP 전용 별장이 있습니다. 철저하게 보안이 되어 있어서 VIP께서 편안하게 진료와 휴양을 할 수 있습니다.”
철저하게 보안이 되어 있다는 말에 그의 표정이 좀 전보다 유하게 풀어졌다.
“저는 일반인에 불과하지만 이렇게라도 제가 존경하는 정치인을 지원하고 싶습니다. 격무에 시달리는 수석님의 건강을 저희가 돌볼 수 있도록 허락해 주세요.”
존경하는 정치인을 위한 지원…….
그를 인정하는 말은 거절의 벽을 허물어뜨렸다.
“하하. 이렇게까지 말하니 거절하기가 어렵네요.”
현호가 준비한 책 한 권으로 세 사람의 분위기는 화기애애하게 이어져 나갔다.
* * *
엄현주가 정무수석의 허락을 받는 그 시각, 현호는 텅 비어 있는 사무실에서 창밖을 보고 있었다.
고층빌딩 15층에 있는 사무실.
그곳에는 책상도, 일하는 직원도 없다. 다만, 창문 가까이 성능 좋은 영상촬영 카메라가 있었다.
현호는 통유리로 된 창밖으로 하늘을 봤다.
듬성듬성 구름이 있지만 강렬하게 내리쬐는 햇볕을 막을 수 없었다.
그늘에 있어도 더운 날씨였다.
젊은이들은 친구와 함께 시원한 바다로 뛰어들고 싶은 날이리라.
그런데 그러지 못하는 청년이 있다.
산업기능요원으로 군 복무를 하는 채민수.
대통령 주치의의 아들이다.
이 시각 산업기능요원으로 회사에서 일하고 있어야 할 채민수가 맞은편 오피스텔에 있다. 에어컨이 작동되는 시원한 곳에서.
현호는 카메라를 맞은편 오피스텔을 향해 줌인했다.
혼자 있던 채민수가 현관으로 갔다. 그가 문을 여니 그 또래의 친구들이 오피스텔 안으로 들어왔다.
사람만 온 것이 아니다.
파티라도 하려는 듯 술과 음식들이 오피스텔 안으로 배달되어 중앙 테이블에 차려졌다.
“언젠가 드러났을 일이니 원망하진 말라고.”
몇 년 후, 그들끼리 찍은 영상이 유출되며 채민수의 병역 비리는 드러나게 된다.
현호는 어차피 벌어질 사건을 조금 더 앞당길 계획이었다. 아주 적당한 타이밍에.
그의 계획대로 일이 흘러가기 위해선, 엄현주가 반드시 송우식품으로 복귀해야 했다.
다만 그 안에서 자신의 모든 능력을 내보일 생각은 없었다.
완벽히 숨길 수는 없겠지만, 최소한 그녀가 자신을 경계하지 않도록 만들 필요는 있었다.
경계하지 않고 끝까지 자신을 믿을 수 있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