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youngest of the returning tycoons RAW novel - Chapter 21
21화 판이 바뀌다
성북동.
[의약분업 시행을 앞두고 병원과 의사들은 폐업과 파업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저녁 식사 후 거실에 모인 엄상현 회장의 가족들.
박경국 과장이 가져온 과일 디저트를 먹으며 TV 뉴스를 보고 있었다.
의약분업에 관한 뉴스가 나오자 현호는 빠르게 엄현주의 기색을 살폈다. 그녀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간 걸 보고 확신했다.
‘파업 불참 뉴스가 터지겠군.’
현호의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
철회를 요구하는 의료계와 강행하려는 정부와의 갈등 소식이 끝났을 때였다.
[다음 소식입니다. 의료계와 정부의 대화가 평행선을 걷는 가운데, 송우병원이 오늘 파업 불참을 선언했습니다.]
“뭐야?”
현호와 현주를 제외한 가족 모두가 놀랐다.
그중 장남 엄현식은 얼마나 놀랐는지 저도 모르게 입 밖으로 소리를 흘렸다.
뒤이어 TV 화면에 남정수 송우병원장이 클로즈업 되었다.
[남정수 원장 : 의사는 질병으로 고통을 받는 환자들 곁에 있어야 합니다. 주위에서 파업의 권유가 있었지만, 신념을 포기할 수는 없었습니다. 감사하게도 병원 동료 의사들도 한마음으로 이해해 주어서 이런 선언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남정수의 인터뷰까지 나오자, 거실에는 숨소리도 들리지 않는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잠시 후, 엄상현 회장은 굳은 표정으로 엄현주를 바라보며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네가 한 짓이냐?”
“네, 아버지.”
싸늘한 목소리에 떨릴 만도 하건만 엄현주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지금 병원으로 발령냈다고 내게 반항하는 거냐?”
“반항이라뇨. 모두 송우그룹을 위해서 한 행동이에요.”
“뭐? 의료 단체와 의사들을 적으로 돌리는 게 그룹을 위해서 한 행동이라고?”
엄상현은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흘렸다.
이에 엄현주는 차분히 설명을 이어 나갔다.
“파업에 동참하여 얻는 이득보다 정책에 협조해서 청와대에 좋은 인상을 주는 편이 더 이득이 되리라 판단했어요.”
“고작 파업에 불참한다고 청와대에서 콩고물이라도 떨어질 거 같으냐?”
“대한경제인 오찬.”
“뭐?”
엄현주가 갑자기 엉뚱한 말을 하자 엄상현은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아버지가 대통령과 가장 가까운 자리에 섰던 자리가 바로 대한경제인 오찬이었죠.”
“말하고 싶은 게 뭐냐?”
“이번 일로 송우그룹의 사람이 그때보다 더 대통령의 곁에 가까이 있게 될 거예요.”
“…….”
너무나도 확신에 찬 목소리.
그에 엄상현은 그녀가 아무런 생각도 없이 꺼낸 이야기가 아님을 느끼곤 되물었다.
“무슨 수로 말이냐?”
“송우병원장을 대통령 주치의로 만들 거예요.”
“뭐? 설마 파업에 불참했다고 남 원장이 대통령 주치의가 될 수 있으리라 생각한 건 아니겠지?”
“농사를 지으려면 씨도 뿌리고 약도 쳐야죠.”
엄상현은 그녀의 말뜻을 이해했다.
파업 불참은 일종의 씨 뿌리기일 뿐이라는 것.
그렇다면 분명 이다음 계획도 있을 터였다.
그러나 엄상현은 어떤 수단을 쓰더라도 엄현주에겐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녀에게 아무런 정치적 인맥이 없기 때문이었다.
대통령 주치의는 단순히 뒷배가 든든하고, 실력이 뛰어나다고 해서 얻을 수 있는 자리가 아니었다.
송우그룹이라는 배경을 빼면 아무것도 없는 그녀가 그러한 일을 해낼 수 있으리라곤 조금도 생각되지 않았다.
“약을 함부로 쳤다간 도리어 그 독에 죽는 수가 있다. 이미 벌인 일은 어쩔 수 없겠지만, 이 이상 함부로 나서지 말고 맡을 일에만 집중해.”
그에 엄상현은 확실하게 선을 그었다.
되지도 않는 일에 시간을 낭비할 뿐만 아니라, 자칫했다가 오히려 청와대의 눈 밖에 날 수도 있는 탓이었다.
“…….”
그 대답 속에 담긴 말뜻을 알아차린 엄현주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자세한 이야기조차 들어 보지 않고 자신에겐 불가능한 일이라며 단정 짓는 아버지의 모습이 무척 섭섭했다.
그때였다.
[누나, 걱정하지 마. 누나는 분명 해낼 수 있어. 기운 잃지 마.]
현호에게 온 문자였다.
그 문자를 읽은 직후, 그녀의 두 눈에 점차 독기가 어렸다.
이대로 포기한다면 자신에겐 아무것도 남지 않을 터였다. 여기서 결코 물러설 수는 없었다.
변화하는 엄현주의 눈빛을 포착한 현호는 미소를 머금었다.
‘참 다루기 쉽다니까.’
전생에도 엄상현은 낡은 관념에 사로잡혀 딸 엄현주의 능력을 온전히 인정해 주지 않았다.
당연히 엄현주는 여자라는 이유로 자신을 제대로 평가해 주지 않는 아버지에게 불만을 쌓아 나갔다.
현호는 그 빈틈을 파고들어 속삭였다.
자신만이 그녀의 능력을 인정하는 사람이며, 유일한 조력자라고.
이제 그녀는 현호의 말을 의심하지 않고 귀 기울일 것이다.
* * *
송우문화재단 이사장실.
“이사장님, 박원식에 대한 자료가 왔습니다.”
최명준 비서가 현호의 책상 위로 서류 봉투를 놓았다.
“언제 왔습니까?”
“방금 도착했습니다.”
현호는 박경국 과장이 자신을 미행시킨 카메라맨을 역으로 고용하여, 박경국의 아들인 박원식을 미행하게 했다.
그 결과가 드디어 도착한 것이다.
현호는 봉투를 열어 내용물을 확인했다.
봉투 안에는 사진과 함께 날짜별로 박원식의 동선이 간단히 기술되어 있었다.
대부분이 크게 특별할 거 없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어?”
어제 점심 일정이 특이했다.
평소에는 직장 동료와 함께 점심 식사를 했던 반면, 그날은 강남의 카페로 향한 것이다.
문제는 그곳에서 만난 사람이었다.
큰형 엄현식과 송우미술관장 윤소은.
그 두 사람이 어제 박원식이 만난 사람이었다.
‘뭐, 정리했을 리가 없지.’
송우미술관장 윤소은, 그녀는 엄현식의 불륜 상대였다.
할아버지 기일에 온가족이 모였을 때, 현호는 분명 그에게 불륜 관계를 정리하라고 조언했다.
예상은 했지만, 역시나 엄현식은 불륜 관계를 계속 이어 나가고 있었다.
‘그런데 세 사람이 왜 만난 걸까?’
사진 속 세 사람의 분위기는 좋아 보였다. 마치 친구를 만나 수다를 떠는 듯했다.
전생에서도 박원식과 엄현식의 관계는 좋았는데, 혹시……?
‘박원식도 두 사람의 관계를 아는 건가?’
“상당히 친해 보입니다.”
옆에서 함께 사진을 보던 최명준이 한마디 거들었다.
“그렇게 보이네요.”
“왜 만났을까요?”
“글쎄요. 일단 짧게 만난 것을 보면 뭔가 중요한 이야기를 나눈 건 아닐지도 모르겠네요.”
함께 적혀 있는 내용에 따르면 박원식이 카페에 머무르는 시간은 30분에 불과했다.
어쩌면 정말 친구 사이라서 담소를 나눈 것일지도 몰랐다.
현호는 고민을 끝내고 사진을 정리했다. 당장 고민해서 나올 답이 아니라고 판단한 것이다.
디링.
그때, 엄수경에게서 문자가 도착했다.
[아버지가 대출금 상환했어.]
현호는 피식 미소를 지었다.
‘아버지도 곧 아시게 되겠군.’
예상하지 못한 결과에 성북동에서는 한바탕 난리가 벌어지리라.
아니나 다를까.
엄상철 회장이 송우미디어 대출금을 상환했다는 소식은 곧바로 성북동 저택에 전달되었다.
“회장님.”
노장석 비서가 본관 서재로 급히 들어왔다.
“무슨 일이야?”
“한민은행장에게 연락이 왔습니다.”
“그 사람이 왜?”
“엄상철 회장이 오늘…… 대출금을 모두 상환했다고 합니다.”
“뭐?”
소스라치게 놀란 엄상현의 눈이 커졌다.
송우미디어가 대출을 진행한 한민은행에는 대출 만기 연장이 되지 않도록 손을 써 둔 상태였다.
그에 송우미디어는 대출금을 상환하기 위해 어떻게든 자금을 마련해야만 했지만, 찌라시로 퍼진 부도설로 인해 신규대출도 어려웠다.
결국 엄상철로서는 가진 것이라도 쥐고 가려면, 엄상현에게 백기를 드는 수밖에 없었다.
분명 그렇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대출금을 갚았다고?
“도대체 어디서 대출을 받은 거야?”
“한민은행장이 알아봤는데, 은행에서 대출을 받은 건 아니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사채를 쓴 거겠군.”
“제 생각도 그렇습니다.”
하지만 이 또한 이해가 안 가는 건 마찬가지였다.
은행에서 대출을 받지 못한다면, 결국 사채시장에 접근하리라 예상하여 그쪽도 주시하고 있던 상황이었으니까.
송우미디어의 대출을 해결할 만큼의 재력을 지닌 곳에는 모두 사람을 심어 두었는데, 엄상철이 돈을 빌렸다는 이야기는 아직까지도 전해지지 않았다.
“도대체 누가……?”
자신에게조차 알려지지 않게 돈을 빌려준 이가 누구란 말인가?
찝찝한 부분은 한 가지 더 있었다.
담보도 없이 그런 거액을 빌릴 수는 없을 터.
그러나 송우미디어에, 엄상철에게 그만한 돈을 빌리기 위해 담보로 내세울 수 있을 만한 게 있을 리 없었다.
그런 게 있었다면 진작 그것을 매각하고 대출금을 상환했을 테니까.
‘그렇다면 도대체 뭘 담보로…….’
그때, 엄상현의 머릿속을 스치는 한 가지가 있었다.
“설마……! 노 비서, 재무이사와 최 변호사에게 당장 전화 넣어.”
“예, 회장님.”
급히 전화를 거는 노 비서.
곧 재무이사와 통화가 연결됐다.
[회장님, 찾으셨습니까?]
“우리 자금을 최대한 끌어모으면 얼마쯤 될지 알아보고 연락해.”
[예, 회장님.]
엄상철이 가지고 있는 가장 가치 있는 재산.
그것은 송우미디어의 주식이었다.
그만한 돈을 빌렸다면, 담보로 송우미디어의 주식을 넘겼을 가능성이 농후했다.
만약 추측대로라면 지금이 송우미디어를 집어삼킬 절호의 기회였다.
잠시 후 최덕일 변호사와도 통화가 연결됐다.
“최 변, 한민은행장 연락받았어?”
[예, 회장님.]
“우리가 가진 모든 정보통 이용해서 송우미디어에 돈을 빌려준 전주가 누군지 알아봐.”
[알겠습니다, 회장님.]
* * *
성북동에서 송우미디어에 돈을 빌려준 전주를 찾고 난리가 난 그 시각.
현호는 글로리 엔터테인먼트에서 서호창, 최수민 팀장과 회의 중이었다.
“시나리오 작업은 어떻게 되어 가고 있습니까?”
현호의 질문에 서호창이 대답했다.
“허태복 감독은 오래전부터 준비해 왔던 시나리오라서 올해 말이면 작업을 끝마치고 내년에 촬영에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김연희 작가는 시간이 많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신인 작가라 미니시리즈의 시나리오를 쓴다는 것에 압박을 심하게 느끼는 듯합니다.”
서호창의 설명에 최수민이 거들었다.
“엄 사장님, 저희는 영화를 한 사람들이라 사실 김연희 작가의 드라마 대본에 피드백을 주는 것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알고 있습니다. 서 팀장님, 드라마제작을 맡아 줄 분으로 이분을 스카우트해 주세요.”
현호는 서호창에게 메모 하나를 건넸다.
“윤준호 피디라면 KCS에서…….”
“맞습니다. 그 방송국 드라마 피디.”
“잘나가는 피디가 저희 회사로 오려 할까요? 큰 제작사에서도 스카우트 제안을 받을 텐데.”
“업계 최고 대우와 간섭하지 않고, 제작할 드라마의 전권을 준다고 하세요.”
“그래도 괜찮겠습니까?”
서호창이 놀라 되물었지만, 현호의 표정은 담담하기 그지없었다.
“괜찮으니까 걱정마시고 어떻게든 섭외만 해 주세요. 제가 미국 출장을 가 있는 동안에도 보고는 계속 부탁드리겠습니다.”
“출장 가십니까?”
갑작스런 얘기에 놀란 두 사람이었다.
하지만 현호는 태연히 대답했다.
“네, 내일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