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youngest of the returning tycoons RAW novel - Chapter 29
29화 할 얘기 있으시죠
“그래서 해임했다고?”
“네. 징계위원회에서 그렇게 결정했습니다.”
엄현식은 윤소은 미술관장의 징계 결과를 보고했다.
“감히 송우미술관을 이용해 자기 유명세를 만들려 하다니, 윤 관장을 추천한 게 너였지?”
“죄송합니다. 미술관을 새롭게 변화시킬 적임자라 생각했는데, 그런 사람인 줄 미처 몰랐습니다.”
엄현식은 그녀를 추천한 책임을 묻지 않을까 바짝 긴장했다. 그런데 엄상현 회장의 입에서 예상치 못한 말이 튀어나왔다.
“잘했어.”
“예……?”
“그룹의 리더가 되려면 자기 사람이라도 단숨에 자를 수 있어야 해. 쌓아 온 정에 얽매여 약해지면 동네 가게나 해야지.”
긴장해서 굳었던 엄현식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왜 아니겠는가.
자신에게 호통치리라 예상했는데 도리어 칭찬을 받았으니.
“명심하겠습니다, 아버지.”
엄현식은 이제야 가슴속 깊은 두려움을 떨치며 대답했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엄상현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자신이 살아왔던 방식을 닮아 가는 아들의 모습에 대견함을 느끼는 것이었다.
그는 지금까지 자신과 송우그룹에 위협이 된다고 판단되는 인물이라면 과감하게 잘라내며 지금의 위치를 지켜 왔다.
설령 그것이 오랜 시간 자신에게 충성했던 인물이라 할지라도.
엄상현은 아직 알지 못했다.
그렇게 자신이 쳐 냈던 이들이 언젠가 자신의 등 뒤에 비수를 꽂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 * *
“그 재소자와 어떻게 아시는 겁니까?”
운전 중인 최명준 비서가 뒷좌석의 현호에게 물었다.
두 사람은 지금 안양교도소로 가는 중이었다.
현호가 미국으로 출장 가기 전, 최명준은 조금 이상한 지시를 받았다.
여상길이라는 재소자가 어느 교도소에 있는지, 그리고 그 가족이 어디에 살고 있는지를 알아보라는 것.
지시를 받은 후 엄현호와 여상길의 관계가 줄곧 궁금했었다.
“과거 아버지 사업을 도와주셨던 분이죠.”
“그런 분이 교도소엔 왜……?”
“아버지가 넣었어요.”
“예?”
최명준이 흠칫 놀랐다.
“어느 순간 위험한 사람이라 판단하신 거죠. 아버지는 위험한 사람을 결코 곁에 두지 않고요.”
“아…….”
최명준은 더 이상 묻지 않았다.
현호의 비서가 된 이후, 여러 차례 엄상현 회장을 가까이에서 볼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느낀 점은, 그가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이었다.
잠시 후, 교도소에 도착한 현호는 절차를 밟아 여상길을 면회할 수 있었다.
고생을 많이 한 탓일까. 그는 아직 50대임에도 제법 흰머리가 많았고, 피부는 어둡고 까칠했다.
다만 현호를 바라보는 눈빛은 부드러웠다.
“외모는 회장님보다 사모님을 닮았네요.”
“그렇습니까?”
“아내에게서 편지 받았습니다. 제 가족을 도와줘서 고맙기는 한데…….”
여상길의 가족은 미국에서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여상길이 엄상현에 의해 사기죄라는 누명을 쓰고 수감되자, 한순간에 가장을 잃은 여상길의 가족은 가난에 허덕이게 되었다.
현호는 미국으로 출장을 갔을 때 그의 가족을 만나 재정적 도움을 준 것이다.
“왜 도와줬냐고 묻고 싶은 겁니까?”
“출소일이 다가오니 내 입이 열릴까 걱정되는 겁니까? 그래서 회장님이 시킨 거예요?”
“아버지는 모르십니다.”
“모른다고요?”
여상길이 미간을 좁히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제가 이사장인 문화재단에서 후원할 테니 아드님 학비는 걱정하지 마세요. 물론, 제가 평생 도와 드릴 수는 없습니다. 대신 출소 후 적당한 일자리를 알아봐 드리겠습니다.”
“……회장님도 모르게 절 돕는 이유가 뭡니까?”
여상길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났다.
비록 지금 이렇게 갇혀 있는 신세였지만, 과거의 모습을 완전히 잃지는 않은 듯했다.
여상길은 엄상현이 제6공화국 당시 진행된 여러 국책 사업에서 특혜를 받기 위해 고용한 로비스트였다.
그는 뛰어난 능력으로 남들은 알지 못하게 송우그룹이 발전할 수 있도록 큰 기여를 한 인물이었다.
그런데 정권이 바뀌면서 비리가 드러날 위험이 있다고 판단한 엄상현은 여지조차 남기지 않기 위해 그에게 누명을 씌워 교도소로 보내 버린 것이다.
한 번 뒤통수를 맞았기 때문일까.
여상길의 눈빛에는 의심의 기색이 역력했다.
“아버지를 잡아먹을 수 있는 호랑이가 필요합니다.”
“……뭘 원하는지는 대충 알겠지만, 난 늘어진 가죽만 남은 이빨 빠진 호랑이요.”
“호랑이를 직접 본 적 없으시죠?”
“뭐요?”
“사람들은 호랑이가 입을 벌려 이빨을 보여주지 않아도 무서워해요. 왜? 잡아먹힐 수 있다고 믿으니까. 그건 아버지도 마찬가지입니다.”
“……!”
여상길은 현호의 말뜻이 무엇인지 알아차렸다.
엄상현이 자신을 위험한 존재로 여긴다는 것.
“살고 싶다면 절 따라오세요. 늘어난 가죽의 손질은 제가 해드릴 테니.”
현호는 그를 향해 싱긋이 미소지었다.
* * *
엄현주는 레스토랑 룸에서 시간을 확인했다.
‘약속 시간이 됐는데…….’
현호가 얘기했던 중원병원 소화기내과 전문의 장백진과 만나기로 했는데 그가 도착하지 않고 있었다.
혹시라도 그가 약속을 취소할까 불안함 마음이 커지던 그때, 문이 열리며 중년의 남자가 들어왔다.
“장백진 선생님?”
엄현주가 자리에서 일어나 물었다.
“네, 장백진입니다.”
“반갑습니다. 선생님과 통화했던 엄현주라고 합니다.”
그가 엄현주 맞은편으로 와서 앉았다.
“국제의료봉사단의 운영을 돕고 싶으시다고요?”
“네, 기회를 주신다면 그러고 싶습니다.”
“도와주신다면 제가 감사해야 할 일이죠.”
“그런데 조건이 있습니다.”
“어떤 조건입니까?”
“선생님께서 송우병원 전문의로 일해 주시는 겁니다.”
“예?”
놀란 듯 그의 눈이 커졌다.
그러나 곧 차분히 생각하더니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통화상으로는 국제의료봉사에 송우병원이 참여하고 싶다는 말씀만 하셨는데 조금 당황스럽네요.”
“오래 근무한 병원을 옮기는 게 쉽지 않다는 건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장 선생님을 저희 병원으로 모시고 싶은 마음이 큽니다.”
“왜죠?”
“그간 송우병원은 앞만 보고 달려오느라 진정한 의료인 양성에 소홀했습니다. 이제라도 설립 목적에 맞게 운영하려 하는데 이끌어 줄 리더가 없습니다.”
잠잠히 듣고 있던 장백진이 입을 열었다.
“저를 좋게 평가해 주시니 고맙습니다만, 저는 제가 좋아서 하는 일이라 다른 의사들을 억지로…….”
엄현주가 그의 말을 끊었다.
“말씀드리기 송구하지만, 의료 봉사는 혼자서 할 수 없다는 걸 아시잖아요. 의사와 병원, 그리고 의료 단체가 함께하는 일입니다.”
“……!”
“외환 위기 이전에는 중원병원도 국제의료봉사단을 지원한 것으로 압니다. 그 때문에 기업에서 약품 지원도 받았고요.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요? 나부터, 병원부터 살아야 한다고 지원하지 않고 있습니다.”
장백진은 그녀의 말을 부정할 수 없었다.
그는 아프지만 가난해서 병원에 가지 못하는 사람에게 의술을 베풀고 싶다는 열망으로 의사가 되었다.
나름 명성을 얻고 난 후 국제의료봉사단을 만들었지만, 늘 지원받는 게 쉽지 않았다.
그나마 있던 지원도 외환 위기로 인해 끊어졌다.
다음에도 꼭 와서 치료해 주겠다고 한 환자들과의 약속이 가슴을 늘 답답하게 하곤 했다.
그래서 봉사단에 참여하고 싶다는 그녀의 말이 반가워 만나러 온 것이다.
“송우병원이 국제의료봉사단을 지원한다면 더 많은 의사와 의료 단체에서 지원할 겁니다. 하지만 봉사단장이 저희 병원에서 근무해야 계속적으로 지원할 명분이 생깁니다.”
“…….”
“물론, 선생님의 의료 성과와 명성에 맞는 최고 대우를 약속해 드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중원병원을 정리할 충분한 시간도 드리겠습니다.”
곰곰이 생각하던 장백진이 입을 열었다.
“봉사단 지원에 대한 것을 계약서에 약속할 수 있습니까?”
“물론입니다.”
“알겠습니다. 중원병원에 얘기하고 정리할 시간을 주세요.”
“충분히 드리겠습니다.”
엄현주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지만, 속으로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이제 아무도 모르게 대통령 주치의에 대한 계획을 진행시킬 수 있다.
* * *
“최 이사님도 누나 편에 서겠다고 했어?”
[이거 저것 따져 보더니 결국 그렇게 하기로 했어.]
안양교도소에서 나온 현호는 달리는 차 안에서 엄수경과 통화 중이었다.
기관 투자자에 대한 포섭이 끝나자 이제 송우미디어 이사들과 만나기 시작한 것이다.
임시 이사회를 열어 새로운 대표이사가 되려면 이사들이 그녀 편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쉽지 않았나 보네?”
[아버지와 인연이 더 깊은 분들이잖아. 그래도 임시 주총 피할 수 없고, 대주주가 나를 민다는 걸 알았으니까.]
“최 이사님에게도 펀드를 선물했어?”
[당연하지. 빈손으로 부탁하는 걸 싫어하는 분이야.]
“속도가 빠르네. 두 달 안에 될까 걱정했는데.”
엄상철 회장이 M&H 인베스트먼트에 돈을 빌린 게 2개월 전이었다.
[계획대로 상환 기일 넘겨서 임시 주총과 임시 이사회를 하게 될 거 같아.]
“순조롭네.”
임시 주총이 열릴 때쯤이면 상환 약속 기일을 넘기게 되어 엄상철의 주식을 가진 M&H 인베스트먼트가 대주주가 된다.
물론, 엄수경은 나해철이 빌려준 돈의 주인이 현호라는 것을 안다. 현호는 자신을 지원해 주기로 했고, 현호의 지시를 받은 나해철이 자신을 지지하리라 믿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안심할 수 없었다.
큰아버지 엄상현 회장이 분명 경영권을 가지려 모든 방법을 동원할 테니.
그래서 기관 투자자와 이사들을 만나 자신을 지지하도록 작업하는 것이다.
[최선을 다하고 있으니까 만족해야지.]
“조금만 더 고생해.”
[알았어. 또 통화하자.]
“그래, 누나.”
현호는 통화를 끊었다.
그리고 녹음도 멈췄다.
그녀가 얘기해 주는 기관 투자자들과 이사들의 만남은 현호에게 상황을 반전시킬 기회를 주리라.
지금까지는 엄수경의 상황을 지켜만 보고 있었는데 이제 그도 움직일 타이밍이었다.
송우미디어의 기관 투자자를 만날 것이다.
* * *
“이사장님, 약속 장소에 도착했습니다.”
최명준이 차 문을 열어주자 현호가 내렸다.
서울을 벗어나서인지 나무들에 둘러싸인 고급 식당은 고즈넉한 분위기였다.
현호가 예약된 룸으로 이동해서 잠시 기다리자 문이 열렸고, 이내 굵은 안경을 쓴 남성이 들어왔다.
“처음 뵙겠습니다, 이병수 이사장님.”
현호는 그를 향해 허리 숙여 인사했다.
사학연금관리공단의 이사장, 이병수였다.
그는 엄수경이 송우미디어의 기관 투자자 중 가장 먼저 만났던 사람이기도 했다.
“자네가 엄상현 회장님의 막내라고?”
“네, 이사장님. 오시는 데 불편하지 않으셨습니까?”
“괜찮네.”
그의 얼굴에는 궁금한 기색이 역력했다.
왜 아니겠는가.
송우그룹 엄상현 회장의 막내아들이 직접 연락해 만남을 요청했으니.
“그래, 왜 날 만나자고 했는가?”
“송우미디어 관련해서 부탁하고 싶은 게 있습니다.”
“자네가 송우미디어와 무슨 관련이 있는가?”
“송우문화재단이 송우미디어의 주주입니다.”
“아, 그래? 그런데 무슨 부탁을……?”
“송우미디어의 대표이사가 바뀔 거라는 얘기, 들으셨죠?”
“으흠흠.”
그가 헛기침을 하며 불편한 기색을 내비쳤다.
그럴 만도 하리라.
엄상철도 모르게 추진되고 있다는 걸 비밀로 하고 엄현주 편에 서는 대가로 펀드까지 받았으니.
“죄송합니다. 말씀하시기 불편하실 텐데.”
“무슨 얘긴 줄 모르겠군. 송우미디어에 대해서는 할 얘기가 없네. 좋은 공기 마신 것으로 대접받았다고 여길 테니 그만 가보겠네.”
그가 불편한 기색으로 자리에서 일어섰을 때, 현호는 녹음기를 틀었다.
[그래서 펀드를 보여 주니 이병수 이사장이 뭐래?]
[아버지와 알고 지낸 지 15년이 넘었는데, 2억 앞에서 흔들리더라. 결국 사인했어.]
“헉!”
일어나려던 이병수가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이제 저와 송우미디어에 관해 할 얘기가 있으시죠?”
그를 보는 현호의 입꼬리가 올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