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youngest of the returning tycoons RAW novel - Chapter 30
30화 조정하는 자
“이, 이보게…….”
창백해진 이병수의 말을 현호가 잘랐다.
“제 말부터 들으시죠, 이사장님.”
“…….”
“엄수경 사장이 이사장님께 도움을 요청할 겁니다. 엄상철 회장에게 임시 주총과 임시 이사회를 열자고 제안해 달라고 말이죠. 그 부탁을 들어주세요.”
여기까지만 들었을 땐 그다지 문제 될 건 없었다. 애당초 엄수경을 도울 생각이었으니까.
다만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어째서 그는 송우미디어의 주인이 교체되길 원하는 것일까?
그것이 그에게 무슨 이득이 되기에…….
물론 이병수는 그러한 의문을 입 밖으로 내뱉지 못했다. 어차피 그에게 다른 선택지는 없었다.
“그렇게만 하면 그 녹음은…….”
“아직 제 얘기는 끝나지 않았습니다. 한 가지 더 이사장님께 부탁드릴 사항이 있습니다.”
현호는 단호하게 말을 자르며 이병수의 앞으로 봉투를 내밀었다.
이병수는 마른침을 삼키며 조심스레 봉투의 안을 확인했다. 그리고 순간 눈을 크게 치떴다.
“이, 이건…… 그 펀드?”
“맞습니다. 엄수경 사장에게 받으셨던 것과 같은 펀드입니다.”
현호가 건넨 것은 다름 아닌, 엄수경이 이병수에게 이전에 건넸던 사모펀드였다.
현호는 이병수가 당황을 감추지 못하자, 설명을 이어 나갔다.
“임시 주총에서 이사장님이 다른 사람을 지원해 주신다면, 그 펀드는 이사장님의 것이 될 겁니다.”
“……!”
“똑같은 보상에, 명예도 지킬 수 있는데…… 어느 쪽을 선택하시겠습니까?”
“내가 어떻게 하면 되겠는가?”
이병수는 고민할 필요도 없다는 듯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엄수경의 편을 들려고 했던 이유는 오직 이 펀드 때문이었다.
그런데 똑같은 대가를 보상받으며, 명예까지 지킬 수 있다면 망설일 이유는 없었다.
* * *
무더웠던 여름이 지나가는 어느 날, 엄현태는 기다리던 소식을 뉴스로 듣게 되었다.
[청와대는 새로운 대통령 주치의를 선임했습니다. 새로 선임된 장백진 박사는 중원병원 소화기내과 전문의로 재직하고 있으며, 국내뿐만 아니라 해외에서도 활발한 의료봉사 활동으로 많은 이들의 존경을 받는…….]
“하하하!”
엄현태가 호탕하게 웃었다.
“그럼 그렇지. 현주 네가 대통령 주치의를 만들어?”
엄현태는 비아냥거리는 투로 혼잣말을 했다.
결국 대통령 주치의는 엄현주가 밀던 남정수 송우병원장이 아니라, 다른 사람으로 선임되었다.
이로써 아버지는 다시 한번 그녀에게 실망하게 될 것이고, 이제는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게 되리라.
한시라도 빨리 울상을 하고 있을 엄현주의 얼굴이 보고 싶었다.
엄현태는 저녁 약속조차 취소하고 서둘러 집으로 돌아갔다.
* * *
성북동.
저녁 식사까지 끝낸 엄씨 일가는 거실에 모여 다과를 먹고 있었다.
엄상현 회장부터 막내인 현호까지 있는데 엄현주만 자리에 없었다. 아직 집으로 돌아오지 않은 것이다.
“현주가 늦네. 병원 일이 많은 건가.”
평소엔 엄현주가 언제 들어오든 관심도 없던 장남 엄현식이 염려된다는 듯 말했다.
당연하게도 그녀의 늦은 귀가가 걱정되기 때문은 아니었다. 대놓고 물을 수는 없으니, 흘리듯 이야기하여 아버지의 의중을 파악하고자 한 것이다.
뒤이어 엄현태가 장단을 맞추듯 거들었다.
“형, 내가 전화해 볼까?”
“그래, 해 봐.”
“관둬라.”
엄상현이 가라앉은 소리로 명령하듯 내뱉었다.
“지 능력을 알았으니 생각할 시간도 필요할 테지.”
그의 말에 엄현식의 입꼬리가 올라갔고, 엄현태도 싱긋이 미소 지었다.
그러나 엄현식은 내색하지 않은 채 엄현주를 감쌌다.
“아버지, 너무 나무라지 마세요. 가끔 의욕이 넘쳐서 탈이지만 아버지 생각은 끔찍하게 해요.”
마음에도 없는 애정을 보이려고 애쓰는 엄현식의 모습에, 현호는 한심하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사실 대통령 주치의 선정이 끝난 후 엄현주는 현호에게 가장 먼저 연락을 해 왔다. 애써 준 구진수 정무수석과 저녁 식사를 함께하기로 해서 늦는다고.
물론 현호는 그녀가 직접 얘기하기 전까지 어떤 말도 하지 않기로 했다.
‘작가의 기분이 이럴까.’
앞으로 벌어질 상황을 모두 아는 입장에서, 모르는 사람들을 바라볼 때의 기분은 꽤나 흥미진진했다.
“다녀왔어요.”
그때, 엄현주가 돌아왔다.
이에 엄현태가 가장 먼저 반응을 했다.
“왜 이렇게 늦었어?”
“병원에 일이 좀 있었어.”
“그래, 병원 일 열심히 해야지.”
엄현태가 비아냥대는 투로 대꾸하자 엄현식도 훈수하듯 끼어들었다.
“왔으면 아버지께 죄송하다는 얘기를 먼저 해야 하는 거 아냐?”
“일하다 조금 늦은 거로 사과하라는 거야?”
엄현주는 일부러 딴청을 부리며 대꾸했다.
“새 대통령 주치의가 선임된 거 알고 있지?”
“안 그래도 지금 얘기…….”
“야, 야. 참 빨리도 얘기한다. 눈 부릅뜨며 장담할 때는 언제고.”
“오빠, 잘 알지 못하면 끼어들지 마.”
“뭐?”
엄현주는 그를 무시하곤 엄상현을 쳐다봤다.
“아버지, 남정수 원장님은 아니지만 다른 송우병원 의사가 대통령 주치의로 선임됐어요.”
“뭐?”
현호를 제외한 모두가 당황한 표정으로 그녀를 응시했다.
엄상현도 어이가 없는 건 마찬가지였다.
이미 세상 사람 전부가 누가 새 대통령 주치의가 되었는지 아는데, 엄현주는 표정조차 바뀌지 않고 다른 말을 하는 것이다.
이에 엄상현이 가라앉은 소리로 엄현태에게 얘기했다.
“현태야.”
“예, 아버지.”
“새 대통령 주치의 소식이 실린 신문기사를 현주에게 보여줘라.”
“예, 아버지.”
엄현태가 거실 탁자에 있는 신문을 현주의 손에 쥐여주었다.
“이거 보고 정신 차린 다음 얘기해.”
“풉.”
그녀가 재밌다는 듯 웃음을 흘리자, 놀란 엄현태가 눈을 부라렸다.
“너, 아버지 앞에서 이게 무슨 태도야!”
엄현주는 그의 말을 무시하곤 엄상현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아버지, 제 말 못 믿으시는 거죠?”
그제야 엄상현은 눈빛을 달리했다.
그가 아는 엄현주는 거짓말로 상황을 모면하려 하지 않았다.
게다가 너무나도 당당한 태도.
그건 결코 실패한 사람이 보일 모습이 아니었다.
엄상현은 자신이 알지 못하는 무언가가 있음을 직감했다.
“내가 모르는 게 있는 거냐?”
“장백진 새 대통령 주치의. 중원병원 소화기내과 전문의, 맞아요. 그리고 두 달 후 송우병원으로 이직할 예정이고요.”
“뭐?”
엄상현만 놀란 게 아니었다.
엄현식과 엄현태도 놀라 입이 저절로 벌어졌다.
“계약서를 가져왔어요.”
엄현주는 장백진과 맺은 계약서를 엄상현에게 건넸다.
그 계약서를 본 엄상현의 눈이 커지더니 끝내 만족스러운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그의 웃음을 본 엄현태는 뒷골이 서늘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왜 아니겠는가.
송우병원장과 아버지의 관계로 장벽을 세웠는데, 그녀가 생각지도 못한 방법으로 그 장벽을 넘었으니.
믿고 싶지 않은 만큼 확인하고 싶었다.
“아버지, 현주 말이 사실이에요?”
“아버지.”
엄현주가 얼른 끼어들었다.
“약속하신 거 받고 싶습니다.”
“오냐. 현주 너는 내일부터 송우식품으로 다시 출근해. 그리고 현태야.”
“예, 아버지.”
“그동안 라이스타 맡아서 하느라 수고했다. 현주에게 넘기고 송우건설로 복귀해라.”
“……예.”
엄현태는 티를 내지 않으려 애쓰며 대답했지만, 굴욕감을 떨치기 어려웠다.
반면 엄현주는 싸움에서 승리했다는 희열이 온 혈관을 타고 흐르는 것만 같았다.
그렇게 들뜬 기분에 젖어 엄현태의 굳은 얼굴을 감상하던 그때였다.
“현주는 내 서재로 잠깐 오너라.”
엄상현이 명령하며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 서재로 향했다.
그 순간, 엄현주가 현호를 쳐다봤다.
이에 현호는 눈빛으로 그녀에게 얘기했다.
‘내가 말한 대로 하면 돼.’
현호의 눈빛을 이해한 엄현주가 고개를 살짝 끄덕이고는 서재로 향했다.
현호는 아버지가 왜 엄현주를 서재로 불러들이는지 알았다.
이번 계획을 성공시킬 수 있도록 만들어 준 그녀의 인맥에 대해 알고자 하는 것이 분명했다.
* * *
“청와대 인맥이 있다고 했지?”
“네.”
“누구냐?”
엄현주는 이런 상황을 예상해서 현호가 해 준 말을 기억했다.
-아버지에게 정무수석에 대해 이야기하면, 아버지는 그와 직접 이야기를 하려 하실 거야. 절대 손에 쥔 패를 놓아선 안 돼.
물론, 구진수 정무수석이 아버지와 이야기를 하려 들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일말의 가능성이라도 있다면, 여지를 줄 필요는 없었다.
“죄송하지만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그 대답에 엄상현의 미간이 꿈틀했다.
“뭐?”
“수는 함부로 드러내는 게 아니라고 아버지께서 매번 이야기하셨었잖아요. 솔직히 말씀드릴게요. 저는 이걸 저만의 수로 만들어 두고 싶어요.”
현호는 엄현주에게 감추되, 감추지 말아야 한다고 조언했다. 둘러댄다고 한들 그 속내를 알아차리지 못할 아버지가 아니라고 말이다.
엄현주도 이에 수긍했다. 그녀 또한 어설프게 숨겼다가는 오히려 독이 될 수도 있다고 판단했다.
때문에 그녀는 차라리 솔직하게 이야기하는 쪽을 선택했다.
“흠…… 알겠다. 나가 봐.”
다행히 엄상현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더 이상 그녀를 추궁하지 않았다.
엄현주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는 서재를 떠났다.
“그래, 이번 일은 잘 처리했으니 기를 꺾을 필요는 없지.”
엄현주가 떠난 뒤, 엄상현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어쨌든 이번 일을 성공시킨 건 인정해 줄 만했다.
게다가 설령 자신에게 숨기는 일이 있다고 해도, 그것이 자신과 송우그룹에게 도움이 된다면 문제 될 것은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부르셨습니까, 회장님.”
“박 과장, 남정수 병원장에게 연락해서 만나봐.”
“원장님은 왜……?”
“현주가 만난 청와대 인사가 누구인지 남 원장은 알 거야.”
“아! 예, 알겠습니다.”
제아무리 숨긴다고 해도, 자신에게 모든 걸 감출 수 없으니 구태여 엄현주를 추궁할 필요가 없었다.
엄상현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떠올랐다.
* * *
다음 날.
박경국은 약속을 잡기 위해 남정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남 원장님, 박경국입니다.”
[박 과장님, 오랜만이네요.]
“회장님 지시로 잠시 만나고 싶은데 시간이…….”
박경국이 말을 이어 나가던 그때, 남정수가 말을 끊고는 이야기했다.
[대통령 주치의 건으로 전화하신 거죠?]
“아시네요. 그럼 오늘 점심에…….”
남정수는 다시 한번 박경국의 말을 끊었다.
[박 과장님, 제가 아는 게 전혀 없어서 말씀드릴 게 없습니다.]
“아는 게 없다고요?”
[저는 오늘 아침 회장님의 두 아드님이 얘기해 줘서 알았어요. 대통령 주치의는 생각해 본 적도 없고, 실장님께 얘기 들은 적도 없습니다. 회장님께 그렇게 전해 주세요. 아, 엄현식 사장님과 엄현태 부사장님께도 똑같이 얘기했다는 것도 전해 주세요.]
그렇게 전화가 끊어지고 박경국이 당혹스러워하던 그 시각, 남정수는 자신의 사무실에 방문한 손님을 앞에 두고 있었다.
“시키는 대로 했습니다.”
“잘하셨습니다.”
현호가 그를 바라보며 싱긋 미소 짓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