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youngest of the returning tycoons RAW novel - Chapter 36
36화 차, 돌리세요
“어디십니까?”
현호의 물음에 여상길이 대답했다.
[송우리조트 상무실입니다. 꽤 괜찮은 자리를 주선해 놓으셨더군요.]
“마음에 드신다니 다행입니다.”
[세상에 공짜는 없죠. 내게 원하는 게 뭡니까?]
“공짜는 싫어하시는 것 같으니, 외상으로 남겨 놓겠습니다. 오늘은 편히 쉬세요.”
통화를 끊자 곁에 있던 최명준이 걱정스레 얘기했다.
“회장님께서 여상길 씨와 접촉한 사람을 찾으려 하실 겁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이미 손을 써 놨으니까.”
현호는 잠시 의자 등에 기대어 앉아 생각에 잠겼다.
앞으로 벌어질 일들에 대해.
그리고 그것에 대한 대응을.
* * *
성북동.
“최 실장, 수고했어요.”
“아닙니다. 그럼 사장님, 편히 쉬세요.”
현호는 바빴던 송우미디어에서의 첫날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최명준 비서실장을 보내고 본관을 향해 걷는데, 낯익은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현호 도련님.”
뒤를 돌아보니 큰형 엄현식의 아내, 채연희가 미소 지으며 다가오고 있었다.
자기 관리에 뛰어난 그녀는 4살 아이의 어머니라고 믿기 힘들 정도로 젊어 보였다.
“오랜만이에요, 도련님.”
“오늘 귀국하셨어요?”
“정오쯤 도착했어요. 도련님 건강해진 모습 보니 좋네요.”
대한민국 최고의 사립대라 불리는 명운대학교를 설립한 재단, 명운대학재단을 소유하고 있는 집안의 장녀 채연희.
그녀는 현재 명운대학교 음악과 교수로 재직 중이나, 훗날 명운대학재단의 이사장 자리를 물려받을 예정이었다.
“강인이는 건강하죠?”
“그럼요. 돌아오니 할머니 품에서 떠나질 않아요. 강인이한테 제일 든든한 빽이잖아요.”
엄현식과 채연희 사이에 태어난 아이는 엄씨 집안의 장손이기에 당연히 아버지도 엄청난 사랑을 주었지만, 그보다도 어머니가 더 귀여워하셨다.
“어머니가 강인이를 많이 보고 싶어 하셨어요.”
“그나저나 돌아오니 반가운 소식이 많네요. 도련님, 축하해요. 송우미디어 사장 취임한 거.”
“감사합니다.”
미소 속에서 오간 축하와 감사.
하지만 현호는 그 미소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생각은 없었다.
큰형수 채연희, 그녀는 이번 생에도 아들 엄강인에게 그룹을 물려주고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테니까.
정치와 재계에 넓은 인맥을 지닌 든든한 집안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그녀는 형제들 못지않게 경계해야 할 인물이었다.
“설마 했는데 정말 성북동 직원들 말이 맞네요.”
“……?”
“도련님이 많이 바뀌었다고 들었거든요.”
“학생도 아닌데 예전처럼 놀 수는 없죠.”
“아! 제가 너무 오래 붙잡고 있었네요. 어서 들어가요, 도련님.”
그녀가 환히 미소 지으며 현호의 팔에 팔짱을 끼었다.
“네, 형수.”
현호는 그녀를 향해 방긋 미소를 날렸다.
가식적인 행동에는 가식적인 미소로 답하는 게 진리이니까.
* * *
“정말 현식 오빠에게서 연락이 왔어요?”
“내 뭐라더냐. 연락해 오는 놈이 있을 거라고 했지? 흐흐.”
엄수경의 물음에 엄상철이 비웃음을 흘리며 대답했다.
“만나서 뭘 어떻게 하시려고요?”
“급한 놈이 우물 파는 법이다. 방법은 그놈이 가져올 거야. 그나저나 리조트 자금 문제는 어떠냐?”
“아직 견딜 만해요.”
엄수경은 사실대로 말하지 않았다.
하루라도 빨리 자금 압박을 풀어야 하지만, 사실대로 말하려면 여상길 얘기를 해야 했기 때문이다.
과연 여상길이 자금 압박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지 알 수 없는 상황이다.
아직 확실하지도 않은 이야기를 꺼낼 수는 없었다.
더구나 여상길을 소개시켜 준 사람이 현호다.
송우미디어의 새 주인이 된 그에게서 도움을 받았다는 걸 알게 되면 아버지는 자신을 딸로 여기지 않을 것이다.
설사 여상길이 자금 압박을 해결하더라도 얘기할 수 없다. 송우미디어를 되찾기 전에는.
이런 사정을 모르는 엄상철이 격려하듯 얘기했다.
“조금만 더 버텨. 내 무슨 수를 써서라도 해결할 테니. 리조트마저 넘어가게 두지 않을 테니까.”
“네, 아버지.”
엄수경에게 내일은 중요한 날이다.
적장을 만나는 심정으로 큰아버지를 만나야 한다.
여상길이라는 패가 실패하면 리조트는 지금보다 더 어려워져 부도를 피하지 못할 것이다.
그리되면 결국 큰아버지가 리조트를 차지하게 될 거라는 건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일이다.
‘어쩌다 이런 지경까지…….’
엄수경은 답답함을 느꼈다.
리조트의 운명이 자신이 아닌 여상길에게 달렸으니.
‘그래도 이 문제만 해결되면…….’
아버지와 자신이 겪은 수모를 되돌려줄 방법을 찾을 수 있으리라.
* * *
다음 날.
엄수경은 여상길과 함께 성북동으로 향했다.
그녀는 옆자리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는 여상길을 힐끔 쳐다봤다.
어제와는 사뭇 달랐다.
깔끔한 매무새의 그는 경험 많은 사업가처럼 보였다.
엄상현 회장을 만나서 어떤 얘기를 할 것이라고 말하리라 생각했는데, 성북동으로 출발한 지 꽤 되었음에도 그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결국 마음이 조급해진 엄수경이 먼저 입을 열었다.
“여 상무님.”
“네, 사장님.”
“오늘 엄 회장님께 어떤 얘기를 하실 건가요?”
“어떤 얘기요?”
그는 무슨 얘기하는지 모르겠다는 눈으로 쳐다봤다.
“그러니까 자금 압박을 풀기 위해 회장님을 어떻게 설득하실 건지를 묻는 겁니다.”
“고집이 센 분인데 설득이 될까요?”
“예? 아니, 그게 도대체 무슨…….”
“사장님.”
여상길은 측은하다는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봤다.
“고집은 설득이 아니라 꺾는 겁니다.”
“아……!”
무안해진 엄수경이 어색한 미소를 보였다.
그 이후로 성북동에 도착하기까지 두 사람 사이에 대화는 없었다.
* * *
“어서 오세요.”
성북동에 도착하자 박경국 과장이 두 사람을 맞이했다.
“회장님께서는 서재에 계십니다.”
박경국의 안내를 받으며 두 사람은 본관 서재로 향했다.
박경국이 먼저 서재로 들어가 두 사람의 도착을 알린 후에야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큰아버지, 저 왔어요.”
“집안일로 온 거냐, 회사 일로 온 거냐?”
응접 소파 상석에 앉아있는 엄상현이 차가운 시선으로 물었다.
그 물음의 의미를 깨달은 엄수경은 곧바로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회장님.”
“내게 의논할 일이 있다고 했는데 무엇이냐?”
엄상현은 엄수경과 여상길에게 앉으라는 말도 하지 않은 채 감정이 드러나지 않는 목소리로 물었다.
“얘기하기 전에 소개해 드리고 싶은 분이 있습니다. 송우리조트 여상길 상무입니다.”
“상무?”
그 순간 미간을 찌푸리는 엄상현.
그가 다른 말을 하기 전에 여상길이 한 걸음 앞으로 나와 허리를 숙였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회장님.”
‘오랜만! 아는 사이가 확실하군.’
짐작한 대로 여상길이 오래전부터 엄상현을 알고 있다는 걸 확인한 순간이었다.
“여전히 건강하신 것 같아 제 마음이 기쁩니다.”
기쁘다고 말하는 여상길은 무표정했고, 곁눈으로 쳐다보는 엄상현의 눈에는 경멸이 담겨 있었다.
이런 상황이 흥미로운 엄수경은 조용히 두 사람을 지켜볼 뿐이었다.
“인사가 끝났으면 나가도 좋네.”
“드릴 말씀이 있어 찾아뵙게 해 달라고 사장님께 부탁드렸습니다.”
엄상현 회장이 말없이 그를 쏘아봤다.
그 눈빛에 아랑곳없이 여상길이 다음 말을 이었다.
“앉아서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앉게.”
마뜩찮은 표정이지만 그의 허락이 떨어지자 여상길이 엄수경을 쳐다봤다.
“사장님, 먼저 앉으시죠.”
“아…… 그러죠!”
엄수경은 금세 알아차렸다.
여상길은 엄상현에게 보이려는 것이다. 자신이 모시는 사람은 이제 그가 아니라 엄수경이라는 것을.
엄수경이 자리하자 여상길이 그 옆자리에 앉았다.
여상길은 엄상현이 그 모습을 못마땅하게 보는 것도 개의치 않고 입을 열었다.
“출소 후 앞일이 막막했는데, 다행히 좋은 일자리를 구했습니다. 제 나이에 이처럼 번듯한 직장을 다시 구할 수 없을 겁니다. 그런데 자금 사정이 좋지 않아 회사가 어렵습니다. 회장님께서 힘써 주시리라 믿고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저와의 옛정을 생각해서.”
엄수경은 여상길이 말을 시작할 때부터 엄상현의 기색을 살폈다.
부탁하는 여상길의 말투는 냉랭했다.
특히 여상길의 마지막 말에서는 엄상현의 미간이 꿈틀거리는 걸 포착했다. 그 말이 심기를 건드린 건 확실했다.
그런데 엄상현은 그의 말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여상길이 재차 부탁하지도 않았다.
서재에는 침묵이 흘렀고, 엄수경은 초조했다.
만약 엄상현이 거절하면 그녀에게는 다른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흐르는 1초가 10분처럼 느껴지는데, 얼마나 지났을까.
“엄 사장.”
드디어 엄상현이 먼저 입을 열었다.
“네, 회장님.”
“자금 사정이 어렵다니, 내가 신경을 써 보지.”
“감사합니다, 회장님.”
“다른 용건이 없으면 가 봐.”
“예, 회장님.”
엄수경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여상길도 따라 일어났다.
그리고 정중히 인사한 후 서재 밖으로 나갔다.
* * *
엄수경과 여상길이 성북동에 있던 그 시각, 현호의 비서 최명준이 전화를 받았다.
“출발했다고요? 알겠으니 따라가세요.”
그가 전화를 끊고 현호에게 얘기했다.
“사장님, 엄상철 회장님이 자택에서 나오셔서 어디론가 출발하셨다고 합니다.”
“큰형과 작은형이 회사에 있는지 확인하세요.”
“예.”
최명준이 다시 어디론가 전화를 했다.
그리고 잠시 후.
“사장님, 엄현식 사장님이 조금 전 외출하셨다고 합니다.”
“감사실장에게 가서 준비되어 있는 자료를 받아오세요.”
“예, 사장님.”
현호는 형들 중 누군가가 엄상철에게 접촉하리라 예상했는데, 큰형 엄현식이었다.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빠르게 접촉했다.
그만큼 마음이 급하다는 방증이었다.
‘감사를 지시하길 잘했군.’
한편, 현호가 이런 일을 대비해 준비하고 있다는 걸 모르는 엄상철은 창밖을 보며 비서에게 물었다.
“약속 장소까지 얼마나 남았지?”
“10분 내에 도착할 거 같습니다.”
“음…….”
엄상철이 눈을 감고 엄현식이 어떤 요리법을 가지고 와서 협상하려는지를 생각하던 그때, 그의 휴대폰이 울렸다.
“여보세요.”
[작은아버지, 현호입니다.]
“요즘 젊은것들은 염치가 좋은 거냐? 버릇이 없는 거냐?”
송우미디어를 차지한 현호의 전화가 못마땅한 엄상철이었다.
[할 얘기가 있어 전화드렸습니다.]
“네놈이 내게 할 얘기가 뭐가 있어?”
그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현호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작은아버지, 지금 어디 가십니까?]
“뭐? 너, 나를 미행하는 거냐?”
[작은아버지, 차 돌리시는 게 좋으실 겁니다.]
“네놈이 뭔데 돌리라, 마라야?”
[엄상철 회장님과 관련한 감사가 진행 중입니다.]
“뭐?”
순간 엄상철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 위로 현호의 목소리가 나직하지만 소름 돋게 하는 경고가 흘렀다.
[제 손에 횡령 자료가 있습니다. 여생을 교도소에서 보내고 싶지 않으시면, 차 돌리세요.]
“……!”
그의 경고에 엄상철 회장의 얼굴이 창백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