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youngest of the returning tycoons RAW novel - Chapter 40
40화 난장판 속으로 (1)
앞으로 닥칠 일을 알지 못하는 엄현태는 바쁜 시간을 쪼개어 맞선을 보러 왔다.
“반가워요, 배희진이에요.”
나라일보 사장의 딸이었다.
웨이브가 살짝 들어간 긴 머리를 옆으로 넘긴 그녀는 도도하게 보였다.
“엄현태입니다. 대학에서 강의하신다고 들었습니다.”
그녀는 파리에서 음악학 석사를 마쳤고 대학에서 관련 강의를 하고 있다.
“현태 씨에게 맞선은 오늘 해야 할 업무인가 보네요?”
“네……?”
“신입사원 면접 보는 거 같네요. 제 직업이 현태 씨에게 중요한 것도 아닐 텐데.”
그녀가 재밌다는 듯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다음 말을 이었다.
“아니면 나와의 맞선을 빨리 끝내고 싶던지.”
정곡을 찔린 엄현태의 미간이 꿈틀했다.
그는 오늘 두 번의 맞선을 봐야 한다. 그리고 배희진이 첫 맞선 상대자이다.
하지만 그는 그녀에게 그다지 관심이 없었고, 만남을 빨리 끝내고 싶었다.
오후에 약속이 된 다른 맞선 상대자에게 관심 있는 엄현태로서는 이 만남은 시간 낭비인 것이다.
그런 마음을 그녀가 알아차리자 엄현태는 오히려 얘기하기 편해졌다.
“희진 씨가 솔직하게 얘기하니 저도 솔직히 얘기하죠. 저는 현모양처인 아내가 필요한 게 아니라 저를 도울 힘 있는 집안의 여자가 필요합니다.”
엄현태는 유휴지 개발사업을 놓고 벌이는 형과의 경쟁에서 더욱 그러한 필요성을 느꼈다.
큰형 엄현식은 형수의 명운재단 인맥을 통해 유휴지 개발사업단장 추천위원회의 위원들을 만나 로비를 벌이고 있다.
자신도 백방으로 그들을 접촉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번번이 만남을 거절당했다.
“나라일보는 현태 씨를 도울 힘이 없다는 건가요?”
“송우건설과 가까운 언론사는 나라일보만 있는 건 아닙니다.”
필요할 때 이용할 수 있는 다른 언론사들이 있으니 엄현태에게 나라일보가 반드시 필요한 게 아니라는 의미였다.
기분 나쁠 법도 한데 배희진은 예상했다는 듯 여유 있는 태도였다.
“궁금하네요. 만나기로 한 다른 여자분의 집안 배경이.”
“…….”
엄현태의 다음 맞선 대상자는 다선 국회의원의 딸이자 판사인 여자다.
하지만 그는 배희진에게 얘기하지 않고 침묵했다.
그 침묵의 의미를 알아차린 그녀가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그 힘이라는 게 얄궂어요. 절대적인 게 아니라 상대적이거든요.”
그때였다.
똑똑.
노크 소리가 들리더니 레스토랑 룸의 문이 열리며 이지홍이 들어왔다.
“부사장님.”
그의 표정이 굳어 있었다.
엄현태는 단박에 나쁜 소식이 있음을 직감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맞선 자리에 그가 들어올 리 없기 때문이다.
“무슨 일이야?”
“천명기 씨가 자진 사퇴했습니다.”
“뭐?”
예상하지 못한 사태에 엄현태는 갑자기 머리가 텅 빈 듯 멍해졌다.
“추천위윈회에 천명기 씨와 관련한 투서가 있었다고 합니다.”
“무슨 투서?”
“그 내용까지는 확인할 수 없었습니다.”
“천명기 씨 연락해 봐.”
“연락이 되지 않고 있습니다.”
엄현태는 치밀어 오르는 화를 누르느라 미간을 찌푸렸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배희진이 입을 열었다.
“바쁘신 거 같으니 가 보세요. 도울 힘이 생기면 다시 만날 날 있겠죠.”
눈치 있게 그녀가 허락하자 엄현태는 자리에서 일어나 서둘러 룸을 빠져나갔다.
* * *
엄현식에게는 승리를, 엄현태에게는 패배를 안겨 준 천명기의 사퇴 소식을 엄상현 회장에게 알리지 않을 박경국이 아니었다.
“회장님, 유휴지 개발단장 추천위원회 소식 들으셨습니까?”
박경국이 따뜻한 찻물이 담긴 잔을 엄상현의 서재 책상 위에 놓으며 물었다.
“개발단장 선정한다는 얘기는 들었는데, 추천위원회에 무슨 일이 있는 거야?”
“부사장님께는 안타까운 소식이죠.”
박경국은 애써 아쉬운 표정을 지었지만, 엄상현의 미간이 꿈틀하는 걸 포착했다.
“뭔데?”
“부사장님께서 지원하는 단장 후보가 자진 사퇴했습니다.”
“자진 사퇴? 왜?”
“사생활과 관련해서 추천위원회에 투서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 사람 사생활이 뭐가 문제라는 거야?”
“자세한 내용은 모르지만, 심각한 사안이라 자진 사퇴하지 않을 수 없었겠죠.”
“…….”
“부사장님이 열심히 준비하셨는데 안타깝네요.”
박경국은 엄상현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그의 기색을 유심히 살폈다.
미간이 찌푸려진 채 차를 한 모금 마신 엄상현이 중얼거리듯 내뱉었다.
“자진 사퇴를 막지도 못하다니…….”
경쟁에서 승패는 갈린다.
하지만 자기 사람을 관리하지 못해 패한다면 그것은 실력의 문제라고 그는 생각했다.
자신의 아들이 후보자를 통제할 수 있었다면 경쟁 상대에게 승리를 넘겨주는 자진 사퇴까지는 가지 않았을 것이다. 실력의 부재라고 할 수밖에 없어 못마땅했다.
반면 그의 신경질적인 반응을 살피던 박경국의 입가에는 미미한 미소가 걸렸다.
그리고 얼마 후.
엄현식의 승리를 알리는 보도가 있었다.
성국건설이 끝까지 경쟁했지만, 엄현식이 아내의 명운재단 인맥까지 동원해 추천위원들을 이미 포섭해 두었기에 결과를 바꿀 수는 없었다.
“하하하, 수고했다.”
가족이 함께 모인 거실에 엄상현의 호탕한 웃음이 울렸다.
자기 아들이 사업을 따내게 된 것도 기쁜지만, 무엇보다 성국건설을 이긴 것이 더 기뻤다.
“최종적으로 확정이 되면 일을 떼어 달라고 다른 업체에서 연락이 올 거다. 필요한 회사는 쓰되…….”
엄현식이 다음 그의 말을 알고 있는 듯 끊으며 끼어들었다.
“걱정 마세요, 아버지. 성국건설은 국물도 없습니다. 하하.”
“오빠, 축하해.”
“축하해, 형.”
엄현주와 현호도 진심은 아니지만 모두 축하 한마디씩 했지만, 엄현태는 아무 말이 없었다.
그리고 이것을 놓칠 엄현주가 아니었다.
“작은오빠는 왜 말이 없어?”
엄현태는 그녀의 속이 빤히 보여 엄현주를 째려보는데 엄상현이 그를 불렀다.
“현태야.”
“예, 아버지.”
“송우물산에서 일손이 필요하다는구나. 유럽 지사장으로 발령 낼 테니까, 그리 알고 준비해라.”
“아버지!”
화들짝 놀란 그가 목소리를 높였다.
유배나 다름없는 발령이었다.
말이 좋아 유럽 지사장이지, 가게 되면 언제 돌아올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엄현태는 억울했다. 경쟁에서 한 번 진 것으로 자신을 유럽으로 내쫓다니. 가만히 입 닫고 있을 수는 없었다.
“아버지, 이번 한 번 졌어요.”
엄현태의 원망 어린 말에 엄상현이 얼굴에서 웃음을 거두었다.
“한 번도 되고, 두 번도 질 수 있다. 그런데 너는 싸움을 해 보기도 전에 자진해서 물러난 거다.”
“……!”
“단장 후보자가 스스로 결정한 거라고 말하고 싶은 건 아니겠지? 네가 선택한 후보자를 네가 컨트롤하지 못했다는 것부터 문제가 있는 거다.”
“하지만 아버지, 건설도 아니고 물산 유럽 지사에서 제가 뭘…….”
“건설에서 큰 덩어리들만 만지다 보니, 작은 것을 살피는 데 소홀했던 거겠지. 물산에 가서 다시 공부하라고 보내는 거다. 그게 싫으면 사표 쓰면 된다.”
엄상현이 사표를 언급하자 엄현태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어 입술만 깨물었다.
화기애애하게 시작되었던 가족 모임은 냉랭한 분위기로 끝이 났다.
엄상현 회장 내외가 먼저 거실을 떠나자 다른 식구들도 모두 각자의 방으로 돌아가던 그때였다.
“작은오빠.”
엄현주가 부르는 소리에 엄현태가 돌아봤다.
“유럽 여행을 할 때와는 다를 거야. 낯선 게 많을 테니까 가서 필요한 게 있으면 얘기해 줘. 보내 줄게.”
“야, 엄현주.”
엄현태가 인상을 팍 구겼다.
“아주 신났구나?”
“어머, 오빠. 몇 년 못 볼 수도 있는데 내가 어떻게 신나겠어? 난 그때 오빠가 해 준 따뜻한 위로가 생각나서 되돌려 주고 싶은 거야.”
“뭐?”
“내가 송우병원으로 밀려났을 때 오빠가 해 준 말.”
“…….”
“아버지 화 풀리실 때까지만 참아. 나도 기회 봐서 아버지께 잘 얘기할게.”
솟구치는 분노로 부들부들 떨며 눈을 부라리는 엄현태. 그는 뒤돌아서 걸어가는 엄현주를 노려보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 * *
“아, 시원해!”
현호의 방으로 온 현주가 소파에 털썩 앉았다.
“현호야, 가슴에 맺힌 말 돌려주니까 속이 너무 시원한 거 있지.”
현호는 피식 웃고는 얘기를 시작했다.
“우리 일, 아직 안 끝났어.”
“알아.”
그녀가 자세를 바로 하며 대답했다.
“큰오빠는 역시 만만하지가 않아. 성국건설까지 이기고 탁호진 씨를 단장으로 만들었잖아.”
“탁호진 단장이 곧 평가위원 구성을 마무리할 거야.”
유휴지 개발사업 입찰 경쟁에 뛰어든 업체들을 평가할 위원회 구성은 단장의 책임이었다.
평가위원회의 구성이 완료되면 탁호진 단장은 평가위원들과 세부적인 평가 항목과 비율을 조정하기 위한 논의에 들어가게 된다.
이대로라면 엄현식이 속한 컨소시엄에게 유리한 평가 항목과 비율이 정해져 유휴지 개발업체로 선정될 게 확실했다.
평가 항목이 완성되기 전에 한주혁 철도공사 사장과 탁호진 단장 사이에 갈등을 일으켜 싸움이 일어나게 해야 한다.
“평가 항목이 완료되기 전에 우리도 시작해야 하는데, 탁호진 단장 만날 때 쓸 자료는 확보했어?”
엄현주가 물었다.
“확보했어.”
“네 동생이지만 빠릿빠릿하게 일하는 게 참 마음에 들어.”
“누나가 이것저것 코치해 준 덕분이지.”
현호는 그녀를 향해 싱긋 웃으며 공을 그녀에게로 돌렸다.
사실 현호가 다 차린 밥상에 그녀는 수저만 올린 거와 다름없었다.
하지만 현호는 자신이 이 계획을 주도했다고 주장할 생각이 없었다.
‘아직은 앞선다는 생각을 하게 해서는 안 돼.’
자신이 송우미디어를 차지하면서 형제들에게 경계의 대상으로 떠올랐었다.
그로 인한 집중적인 견제와 공격을 방어하는 데 시간을 쓰기에는 아직 자신이 해야 할 일들이 많았다.
지금은 자신에 대한 경계심을 흐트러트리고 세 남매가 서로 싸우게 해야 한다.
“단장과 약속 잡는 대로 누나에게 알려 줄게.”
“그런데 현식 오빠 사람인데 우리를 만나려고 할까?”
“알아보니 형이 직접 컨택했던 건 아니었어.”
“누가 연결해 줬어?”
“어. 중간에서 오신주 국회의원이 연결해 줬어.”
“그럼 만날 명분으로 오신주 의원을 거론하면 되겠네.”
“좋은 방법이야. 그렇게 할게.”
현호도 그럴 생각이었지만 엄현주의 지시를 따르는 척했다.
어차피 탁호진 단장과 철도공사 사장 사이를 틀어지게 하려면 오신주 의원에 관해 얘기해야 하기 때문이다.
* * *
탁호진 단장이 사업단 사무실에서 나와 철도공사 사장실로 향했다.
몇 걸음을 떼었을 때, 휴대폰이 울렸다.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탁호진 단장님.]
낯선 남자의 목소리에 탁 단장이 걸음을 멈췄다.
“누구시죠?”
[송우미디어 엄현호라고 합니다.]
“송우미디어…… 아!”
탁호진은 얼마 전 신문에서 본 기사를 기억해 냈다.
엄상철 회장이 송우미디어 경영난에 책임을 지고 물러나고 새 대표이사가 선출되었고, 그 대표이사는 송우그룹 엄상현 회장의 아들이라는 내용이었다.
“송우미디어에서 왜 제게 전화를 한 겁니까?”
[단장님을 만나 뵙고 전할 얘기가 있어 연락했습니다.]
탁호진은 의아했다.
자신이 아는 한 송우미디어는 사업에 참여하려는 어떤 컨소시엄에도 들어가 있지 않다.
그런데 왜 자신을 만나고 싶다는 걸까?
“실례지만 용건을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오신주 국회의원에 관해 알려 드릴 게 있습니다.]
오신주 국회의원?
자신이 이번 사업 단장이 될 수 있게 남모르게 지원해 주신 분이다.
그런 분에 대해 자신에게 알려 줄 게 있다고?
‘일단 들어 보고…….’
음해하는 이야기라면 오신주 의원에게 알려 주는 게 나을 수 있다. 그런 공적이 쌓이면 공천받기에도 훨씬 수월할 테니까.
“알겠습니다. 점심때 시간을 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탁호진은 자기 이익을 위해 만남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그는 몰랐다.
그게 같은 편이라 믿었던 사람들을 난장판 속으로 몰아넣게 될지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