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youngest of the returning tycoons RAW novel - Chapter 45
45화 외숙부의 버팀목
성북동 서재.
소파 상석에 앉은 엄상현 회장은 아들의 속마음을 꿰뚫어 보는 듯 조용히 엄현태를 응시했다.
이에 엄현태는 고개를 살짝 숙인 채 초조하게 그의 입이 벌어지기만을 기다렸다.
잠시 후.
“그 애랑 결혼하겠다고?”
엄상현이 입을 열었다.
“예, 아버지.”
엄현태는 결심을 보이기 위해 고개를 들어 그를 쳐다보며 대답했다.
“네가 유럽으로 가는 것을 알면서도 결혼하겠다더냐?”
“네,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네 손에 뭘 쥐여 주겠다더냐?”
“예?”
“겨우 두세 번 만난 애와 결혼해서 여기 남으려면 손에 쥔 거는 있어야 할 게 아니냐?”
엄현태는 정곡을 찌르는 얘기에 뜨끔했지만 당황한 티를 내지 않으려 애썼다.
어차피 유럽으로 떠나 승계 싸움에서 밀려나면 회복하기 힘들다.
그에게 지금 중요한 것은 이곳에 남아야 한다는 것. 그걸 위해 결혼을 선택했다.
“얘기하면 결혼을 허락해 주시는 겁니까?”
“들어 봐야지.”
엄현태는 아버지가 이렇게 나올 줄 알았다.
이 상황에서 그를 설득하는 것은 좋은 방법이 아닌 것도 안다.
어차피 결혼은 거래 아닌가.
손에 쥐여 줄 물건을 가진 사람에게 직접 듣게 하는 게 나으리라.
“배원우 사장님께서 아버지께 연락하실 겁니다.”
“뭐?”
이 대답은 예상하지 못했는지 엄상현의 미간이 꿈틀했다.
그때였다.
똑똑.
노장석 비서가 서재로 들어왔다.
엄현태는 그가 들어온 용건을 알기에 입가에 엷은 미소를 띠었다.
“회장님.”
“무슨 일이야?”
“나라일보 배원우 사장님께서 통화를 원하십니다.”
엄상현이 엄현태를 쳐다보며 무슨 일인지 알겠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얘기된 거냐?”
“그분과 얘기하고 싶어 하실 거 같아서요.”
엄현태는 배원우 사장에게 이 시간쯤 전화해 주기를 이미 부탁했었다.
엄상현이 손짓하자 노장석 비서가 대기 중인 수화기를 넘겼다.
“엄상현입니다.”
[엄 회장님, 오랜만이네요.]
“그러네요. 지난번 창간기념일 초대에 참석하지 못해 죄송했습니다.”
[별말씀을요. 바쁘신 회장님이 신경 써 주셔서 화환과 이사님을 보내셨지 않습니까.]
“그건 그렇고, 제게 직접 전화하신 용건이 있으시죠?”
[그렇습니다. 우리 딸아이가 둘째 아드님을 만난 거 같습니다.]
“알고 있습니다.”
[결혼하겠다고 하는데, 얘기 들으셨습니까?]
“조금 전에 들었습니다.”
[회장님을 한번 뵈어야 할 거 같은데.]
“비서에게 스케줄 조정해서 연락드리라 하겠습니다.”
전화를 끊은 엄상현은 다시 현태를 보며 말했다.
“네 문제는 배 사장을 만난 후 얘기하자.”
“예, 아버지.”
엄현태는 일단 안심했다.
자신을 유럽으로 보냈겠다는 아버지의 결정이 바뀔 여지가 생겼기 때문이다.
이 기회를 반드시 잡아야 한다.
그래야 지금의 자리를 지키고 다음을 노릴 수 있다.
* * *
똑똑.
현호의 방문을 누군가 노크했다.
“들어와요.”
문이 열리며 엄현주가 들어왔다.
“벌써 자려고?”
잠옷 차림의 현호를 본 그녀가 의아한 눈빛을 띠었다.
“내일 일찍 글로리 엔터 팀이랑 회의가 있어. 그런데 무슨 일이야?”
“작은오빠 결혼 말이야…… 무슨 꿍꿍일까?”
그녀가 찾아온 용건이 이것일 줄 알았다.
“무슨 절절한 사랑이 있는 것도 아닌데, 일주일 안에 결혼이라니. 이게 말이 돼?”
“그럴 만한 이유가 있겠지.”
“네가 생각하는 그 이유가 뭔데?”
“누나가 얘기했잖아. 일주일 안에 결혼식을 하는 건 말이 안 된다고. 그럼 뭐겠어?”
“역시, 너도 그 생각하고 있구나. 결혼으로 유럽행 무산시키려는 거라고.”
현호가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가 비아냥거리듯 말을 내었다.
“작은오빠 머리 잘 썼네. 그런데 이런 갑작스러운 결혼을 아버지가 허락하실까? 아무리 나라일보가 무시할 수 없는 언론사이기는 하지만…….”
“신부 측이 뭘 내놓느냐에 달렸겠지.”
“뭐?”
이것은 예상하지 못했는지 그녀가 흠칫 놀랐다.
“누나가 신부라면 일주일 후에 유럽으로 떠날 거 알면서 결혼할 거야? 가면 언제 돌아올지 모르고 애틋한 사랑이 있는 것도 아닌데?”
“아……!”
이제야 상황을 이해한 그녀의 입에서 비아냥이 흘렀다.
“하아…… 신랑, 신부 합동 작전이야? 그래, 별의별 짓을 다 해서라도 출국은 막아야겠지.”
현호는 그녀의 눈에서 전투의 기세가 타오르는 걸 볼 수 있었다.
의외의 상황이 발생하기는 했지만, 현호로서는 나쁘지 않았다.
작은형이 떠나지 않게 되면 큰형과 누나까지 셋이 계속 싸우게 될 테니, 그 싸움의 틈바구니에서 자신의 것을 챙기면 된다.
“현호야, 무슨 방법 없을까?”
“결혼 못하게 하는 방법을 묻는 거야?”
그녀가 동의하듯 다시 물었다.
“없을까?”
“글쎄, 딱히 떠오르는 게 없네.”
현호는 속으로 웃었다.
작은형이 별의별 짓을 다 한다며 비웃던 그녀 자신조차 별의별 짓을 다 하려는 꼴이니.
“지금은 지켜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 누나. 아버지가 허락하신 것도 아니고. 신부 쪽에서 뭘 내놓는지도 모르니까.”
“그렇기는 하지.”
이렇게 얘기하지만, 여전히 날이 서 있는 그녀의 모습을 보면서 느껴지는 게 있다.
싸움은 멈추지 않으리라는 것을.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축복과 희망으로 가득해야 할 결혼.
그러나 우리 집안은 작은형의 결혼으로 가족이 늘어나 행복해지는 게 아니라 더욱 소란해질 것 같다.
* * *
글로리 엔터테인먼트 사장실.
영화, 드라마, 투자배급 팀장 세 사람이 둘러앉아 얘기 중이다.
“외갓집으로 시나리오는 완성됐습니다. 현재 제작에 들어가기 위해 준비 중이라 늦어도 내년 상반기 중에 촬영에 들어갈 예정입니다.”
서호창 팀장이 얘기했다.
“알겠습니다. 다른 시나리오 작업은 어떻게 되고 있습니까?”
현호의 물음에 투자배급 팀장 최수민이 대답했다.
“글로리에 송우그룹이 투자했다는 얘기가 시장이 퍼진 덕에 시나리오들이 많이 들어왔습니다. 그중 투자할 몇 개의 시나리오를 추린 목록인데 한번 보시죠.”
현호는 최 팀장이 건넨 목록을 살피는데, 낯익은 제목과 이름이 있었다.
살인 생각, 조준상.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연쇄살인범에 대한 영화.
한국 영화의 황금기를 열었다는 비평과 흥행에서 모두 성공시킨 대작.
현호는 입이 벌어지는 것을 가까스로 참으며 대답했다.
“진행하시죠.”
이어 드라마 팀장에게 시선을 주었다.
“윤준호 팀장님, 준비 중인 드라마는 어떻게 되고 있습니까?”
“KCS 방송국과 얘기하는 중입니다. 순조롭게 진행되면 내년 하반기에 촬영 들어갈 겁니다.”
“사장님, 지난번에 얘기하신 멀티플렉스 상영관은 어떻게 되고 있습니까?”
최수민 팀장이 물었다.
“송우백화점 사장님과 얘기 끝났습니다. 신축하는 백화점에 상영관이 오픈될 겁니다.”
“잘됐네요.”
“내년 상반기 중으로 오픈하고, 성과가 좋으면 다른 백화점으로도 확대할 겁니다.”
“하하, 사장님 덕분에 일사천리로 진행되네요.”
두 팀장 모두 반가운 기색을 띠었지만, 특히 투자배급 팀장 최수민의 기쁨은 더 컸다.
그동안 그는 제작이 끝난 영화가 개봉관을 잡지 못해 상영하지 못할까 늘 동분서주해야 했다.
그렇게 글로리 엔터테인먼트 팀장들의 회의는 정오가 되어 갈 때까지 이어지다 끝이 났다.
회의를 끝낸 현호는 외숙부 최해식과 만나기로 했던 장소로 이동했다.
약속 장소에 도착해서 보니 쌈밥정식 식당이었다.
식당 안으로 들어가니 맛집답게 빈 테이블 없이 손님들로 가득 차 있었다.
“어서 오세요.”
직원의 밝은 인사 소리가 들렸다.
“혼자 오셨어요?”
“예약이 되어 있을 겁니다. 최해식…….”
“아! 2층 룸으로 안내해 드릴게요.”
직원의 안내로 룸 앞에 도착한 현호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먼저 와 있던 최해식이 밝은 미소를 지었다.
“현호야, 어서 오너라.”
“제가 늦었네요. 죄송해요.”
“아니다. 바쁜 줄 뻔히 아는데.”
“여기 맛집인 거 식당 들어오면서부터 알겠던데요.”
“그러냐? 하하. 음식 맛이 일품이야.”
“그런데 컨디션이 안 좋으세요? 안색이 좋지 않으세요.”
“어, 그렇게 보이냐?”
정곡을 찔렸는지 최해식이 겸연쩍은 미소를 지었다.
그의 미소를 보는 현호는 짐작하는 바가 있었다.
“사실, 요즘 언제까지 재경부에서 일하게 될까를 고민 중이다.”
역시 현호의 짐작이 맞았다.
한 달도 남지 않은 올해가 지나 내년 초에 차관급 인사가 있다.
“왜 그런 고민을 하세요?”
“네가 높이 올라가라고 선물까지 줬는데, 내년에 차관이 안 될 것 같다.”
“내년에만 차관 인사가 있는 건 아니잖아요.”
“그렇기는 한데…… 내 동기 중에 김형희라고 있어. 그 친구가 차관으로 유력해. 아니, 확정된 거나 마찬가지야.”
그렇다. 전생에도 그는 내년에 차관에 승진하지 못했다. 그리고 미련 없이 재경부를 떠나 로펌 고문으로 일하게 된다.
하지만 자신이 준 땅으로 인해 많은 자금이 생긴 그는 비밀리에 행해지는 권력 실세에게 인사 청탁도 했을 것이다.
그러면서 상상했으리라.
차관이 되고, 장관이 되고, 총리가 되는.
그러나 현실은 그의 높아진 욕망을 채워 주지 못했다.
현실이 그렇지만 이미 출세의 욕망이 불타오른 최해식은 자기 욕망을 포기하지 못해서 고민하는 것이다.
“그 동기분은 어떤 분입니까?”
“일은 그럭저럭하는데…… 젊었을 때부터 윗분한테 잘하고 여기저기 인맥을 넓혔지. 그 덕을 이번에 보는 거고.”
결코 그 자신보다 능력이 뛰어나다는 걸 인정하고 싶지 않은가 보다.
이런 그의 속마음을 알게 되어 다행이다.
계획한 일이 잘 풀릴 거 같다.
“내년 초에 있게 될 인사인데 그분이 차관이 된다는 거는 어떻게 아셨어요?”
“그 친구가 그저께 식사를 같이하자더라고. 그래서 함께 먹는데 얘기하더라. 나와 그 친구가 후보였는데 장관이 자기에게 낙점 언질을 주었다고.”
“외숙부, 솔직하게 얘기해 주세요.”
“응? 뭐를?”
뜬금없다고 생각했는지 최해식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차관이 되고 싶은 게 확실하세요?”
“그거야 당연하지.”
“그럼 됐어요.”
“뭐가 됐다는 거냐?”
“차관 예정인 분을 밀어내면 되는 거잖아요.”
“뭐?”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으로 최해식이 눈을 깜빡였다.
“제가 외숙부를 차관으로 만들어 드린다고요.”
“뭐?”
화들짝 놀란 최해식의 눈이 커졌다.
“현호야, 지금 무슨 말을…….”
현호가 그의 말을 끊었다.
“국가 경제를 맡는 중요한 자리예요. 능력 있는 분이 있는데 인맥으로 자리를 차지하면 안 되죠.”
“하, 하지만 네가 어떻게……?”
“저에게 맡겨 주세요. 실망하지 않으실 거예요.”
“…….”
현호는 안다.
그가 말은 하지 않지만 혼란스러워한다는 것을.
그가 뇌물까지 주며 인사 청탁의 노력을 했음에도 실패한 차관 승진을 젊은 조카가 이뤄 주겠다고 했으니.
이것은 단순히 땅을 선물하는 차원과는 다른 문제이니까.
하지만 현호가 약속한 대로 외숙부를 차관으로 만들게 되면 그는 자신을 대하는 마음이 달라질 것이다.
단순히 돈 많은 외조카가 아닌 그의 출세에 버팀목이 되어 줄 사람으로.
그렇게 되면…….
‘내 뜻대로 외숙부를 움직이게 할 수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