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youngest of the returning tycoons RAW novel - Chapter 72
72화 엄현주의 전략적 선택
“사장님, 가방은 차에 실었습니다.”
성북동 현관 앞.
박경국 과장이 안타까운 표정으로 엄현식에게 인사를 건넸다.
“사장님, 부디 건강 잘 챙기셔야 합니다.”
갈등 속에서 배웅을 마친 가족들은 이미 성북동을 떠났고, 엄현식의 곁에는 박경국과 아내 채연희만 있었다.
무겁게 고개만 끄덕인 엄현식이 승용차로 향하려는데, 채연희가 조용히 불렀다.
“여보.”
엄현식이 돌아보니 그녀가 뭔가 할 얘기가 있는 표정이었다.
“할 얘기 있어?”
“현주 아가씨, 이 집안에서 내보내야겠어요.”
“내보내? 무슨…… 아!”
엄현주의 결혼을 의미한다는 걸 알아차리자, 채연희가 이어서 얘기했다.
“오늘 얘기하는 걸 들어 보니, 앞으로 우리에게 도움될 일 없어요. 어차피 객식구 될 사람인데, 빨리 내보내는 게 좋을 거 같아요.”
“혼자 할 수 있겠어?”
자신은 도와주고 싶어도 할 수가 없다.
“그럼요. 내게 맡겨요.”
엄현식은 고개를 끄덕여 동의를 나타내 보인 후 성북동을 떠났다.
그가 탄 차가 시야에서 사라지자 채연희는 휴대폰으로 누군가에 전화를 걸었다.
잠시 후.
채연희가 밝은 목소리로 얘기했다.
“박 여사님, 채연희에요. 잘 지내셨어요? 부탁할 게 있는데 오늘 제 학교로 와 주시겠어요? 네, 그때 뵙겠습니다.”
짧게 통화를 마친 채연희의 입가에 미미한 미소가 흘렀다.
* * *
더위가 꺾이고 선선한 바람이 불어올 때쯤 현호가 기다리던 소식이 언론을 통해 보도되었다.
[신진종합기계 주주총회, 매각 계획 취소 결정]
[신진종합기계 이사회, 재입찰 공모 계획 없다]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꼴이 됐군.’
현호는 보고 있던 신문을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송우중공업이 입찰 공모를 포기하면서 서진개발이 단독입찰이 되었다.
하지만 현호의 개입으로 결국 서진개발도 신진종합기계를 인수하지 못하게 되었다.
‘대형사건 전에 마무리되어서 다행이기는 한데…….’
한편으로 마음이 무거웠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엄청난 사건이 이튿날 터진 탓이다.
9.11 테러.
뉴욕 무역센터가 붕괴되는 모습은 사람들을 충격에 빠트렸고, 기업들은 난리를 겪어야 했다.
미국의 모든 공항과 항만이 폐쇄됨에 따라 통관과 수출이 중지되었고, 증권시장 개장을 12시로 늦추었지만, 개장 3분 만에 서킷브레이커가 발동됐다.
엄상현 회장도 그룹 차원의 대책을 마련하느라 하이큐브 반도체 문제는 뒷전으로 밀려날 수밖에 없었다.
송우그룹뿐만 아니었다.
긴급 임원 회의가 소집된 송우미디어 임원들도 불안해 보이기는 마찬가지였다.
왜 아니겠는가.
미국이 테러를 당하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탓이었다.
사람들의 소비 심리가 위축될 뿐만 아니라 수출, 금융, 에너지 등 경제의 불확실성이 커져 미래를 예측하는 게 어려워졌다.
그런 불확실성이 커지고 소비 심리가 위축되면 문화산업은 큰 타격을 받게 된다.
그래서 회의장에 모인 임원들은 입을 열지 못한 채 현호만을 쳐다봤다.
그 마음을 알기에 현호가 먼저 입을 열었다.
“오늘 이렇게 회의를 소집한 것은 대책을 논의하기 위한 자리가 아닙니다.”
당연히 대책을 내놓으라는 말이 나올 줄 알았던 임원들은 당황스러운 듯한 기색을 띠었다.
그 모습을 보면서 현호는 말을 이었다.
“여러분들의 그 걱정을 덜기 위해 이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사내에는 어떤 변화도 없을 것이며, 중단되는 프로젝트도 없을 겁니다. 평소대로 여러분들이 맡은 일을 해 주시면 됩니다.”
당혹스러워하던 임원 중 공연사업본부장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사장님, 준비 중인 프로젝트는 앞으로의 상황을 보며 진행해야 하지 않을까요? 코스닥도 최대 하락률로 마감할 거라는 전망이 파다합니다.”
그가 왜 이런 얘기를 하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사람들의 마음이 순식간에 곤두박질친 증시처럼 불안한 것.
이럴 때 무리한 사업 진행은 회사의 손실을 키울 수 있기 때문이다.
“불안한 마음은 이해합니다. 하지만 곧 안정을 찾으리라 생각합니다. 물론 상황을 예의 주시하며 지켜볼 생각입니다만,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해야죠. 각 본부에서는 프로젝트를 원래의 계획대로 진행해 주세요.”
현호의 주장에 반발하는 임원은 없었다.
미래가 불안하다고 일을 멈출 수는 없다는 현호의 말이 틀리지 않음을 아는 까닭이다.
그렇게 임원 회의는 짧게 끝이 났다.
그들에게 현호는 어쩌면 낙관론자처럼 보였을 것이다.
심지어 최명준 실장조차도 미래를 너무 긍정적으로 보는 게 아니냐고 얘기를 했을 정도이니.
하지만 며칠이 지나자, 현호가 장담했던 것처럼 사람들은 충격에서 차츰 벗어나 예전 같은 일상으로 돌아왔다.
몇 차례 등락을 반복하던 증시도 테러 이전의 상태로 회복되었다.
그렇게 어수선한 가을이 지나가는 동안 엄현식은 폭행으로 재판을 받았고, 반성하고 있으며 피해자와 합의했다는 이유로 집행유예가 선고되었다.
그럼에도 엄상현 회장은 그를 성북동으로 부르지 않은 탓에 계속해서 강릉 별장에서 지내야 했다.
* * *
성북동 서재.
문이 열리며 노장석 비서가 들어왔다.
“회장님, 한창수 경산은행장님께서 회장님과 통화하길 원하십니다.”
엄상현은 하이큐브 반도체 문제로 전화했으리라 짐작했다.
책상 위 버튼을 누르며 수화기를 들었다.
“어, 오랜만이네. 하이큐브 채권단에서 합의안을 만들지 못하고 있다는 소식은 듣고 있어.”
[회장님, 지난번 제게 주셨던 물건들을 조금 전에 성북동으로 보냈습니다.]
엄상현은 그가 말한 물건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안다.
그에게 뇌물로써 건넨 토지와 빌딩, 펀드였다.
그런데 그것들을 다시 자기에게로 보냈다고?
“자네, 무슨 말을 하는 건가?”
[하이큐브 강명식 사장이 매트로사 대표와 만나 전략적 제휴를 하기로 했습니다.]
“뭐어?”
예상하지 못했던 전개에 화들짝 놀란 엄상현이었다.
[말만 전략적 제휴이지, 사실상 물밑에서 매각 협상을 진행한다고 합니다. 채권단 전체회의에서 정상화 합의안 대신 매각 협상을 지켜보기로 했습니다.]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은 것 같은 기분에 엄상현이 미간을 찌푸렸다.
[죄송합니다. 저 혼자 매각 협상을 반대할 수는 없었습니다.]
한창수가 말을 마쳤음에도 엄상현은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잠시 생각하더니 마침내 입을 열었다.
“한 행장, 돌려보낸 물건은 다시 보내겠네.”
[네?]
“하이큐브 반도체를 해외에 매각하려고 해도 제일 먼저 채권단의 승인을 받아야 해. 그때 적당한 이유를 내세워 반대하게.”
[회장님, 매각을 반대하면 채권단에서 정상화 합의안을 만들어야 합니다. 매각을 반대해 놓고 정상화 합의안을 못 만들면, 그 책임은 제가 지게 됩니다.]
“…….”
[죄송합니다. 하이큐브 채권단으로서 매각 협상을 지켜볼 수밖에 없습니다. 다음에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통화가 끊어졌다.
엄상현 회장은 솟구치는 화를 억누르라 눈을 질끈 감았다.
어이없게 되치기당한 기분이었다.
하지만 기분 나쁘다고 감정적으로 일을 처리할 수는 없는 법.
엄상현은 치솟았던 감정을 가라앉히고 다시 차분히 생각했다.
강명식 하이큐브 반도체 사장.
전략적 제휴를 결정하고, 매각 협상을 진행하고 있다고?
정말 하이큐브의 해외 매각을 원하는 걸까?
‘아니야.’
엄상현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강명식은 하이큐브 연구소 연구원으로 시작해 지금의 위치까지 올랐다.
하이큐브가 그의 삶이나 다름없었다.
그런 사람이 하이큐브를 국내도 아닌 해외 기업에 매각한다고?
그럴 리 없다.
뭔가 다른 노림수가 있는 게 분명하다.
엄상현은 휴대폰으로 최덕일 변호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회장님, 최덕일입니다.]
“최 변, 여상길과 만날 약속 잡아 봐.”
[알겠습니다.]
* * *
거실 소파에 앉아 창문 밖을 바라보는 최유경.
그녀는 창문을 통해 정원의 나무들이 곱게 단풍 들어가는 모습을 보고 있었다.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그 아름다움에 빠져 있던 그때.
“어머니, 뭐 하세요?”
고개를 돌려보니 큰며느리 채연희가 있었다.
“어머, 오늘 출근 안 했니?”
“오늘은 강의가 없어요. 모처럼 저도 하루 쉬려고요.”
“그래, 잘 생각했어. 너도 여기 앉아서 저 풍경 좀 봐. 마음이 편안해질 거야.”
“네, 어머니.”
채연희가 그녀 옆에 앉았을 때, 박경국 과장이 거실로 들어왔다.
“사모님, 박지숙 여사님께서 오셨습니다.”
“어머, 그래요?”
예정된 방문이 아니라 최유경이 놀란 듯했다. 하지만 곧 차분히 대답했다.
“이리로 모시세요.”
“예.”
박경국 과장이 거실을 나가자 최유경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박 여사가 무슨 일이지?”
“어머님이 부르신 게 아니에요?”
채연희는 모르는 척 물었다.
사실, 그녀는 자신이 계획한 일이기에 박지숙의 방문을 알았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 사실을 알 리 없는 최유경이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아니, 난 연락하지 않았는데.”
“그래요? 궁금하네요. 무슨 일로 오신 건지.”
마침, 박지숙이 거실로 들어왔다.
“사모님, 그간 안녕하셨어요?”
“박 여사, 어서 와요.”
“어머나, 큰 며느님도 함께 계셨네요.”
“어서 오세요, 박 여사님.”
채연희는 반갑게 인사하면서 박지숙과 의미심장한 눈빛을 교환했다.
박지숙이 맞은편에 앉자 최유경이 물었다.
“무슨 일 있어요?”
“제 일이야, 사모님께서 잘 아시잖아요. 오늘 그 일로 이렇게 왔어요.”
“그 일이라면…….”
“사모님, 이것 좀 보시겠어요?”
박지숙이 최유경에게 봉투를 건넸다.
그 모습을 보는 채연희 입가에 묘한 미소가 흘렀다.
* * *
함께 모여 식사하는 엄상현의 가족들.
큰며느리 채연희는 엄현주를 슬쩍 본 후 엄상현의 기색을 살피더니 입을 열었다.
“아버님, 현주 아가씨는 정말 인기가 많은 거 같아요.”
“음?”
뜬금없는 말에 엄상현이 채연희를 쳐다봤다.
“그게 무슨 말이냐?”
“산미그룹에서 연락이 왔어요. 그 댁 셋째 아드님과 현주 아가씨를 맺어 주고 싶은가 봐요. 그렇죠, 어머님?”
‘어? 시기가 빨라졌어?’
채연희의 얘기에 현호가 흠칫 놀랐다.
전생에서는 채연희가 주도했던 엄현주의 결혼이 우여곡절 끝에 엄현주의 의지대로 이루어졌다.
하지만 그때보다 시기가 앞당겨진 것.
‘누나의 결혼 상대자가 달라질까?’
궁금하기는 하지만 현호는 차분히 가족의 대화를 들을 수밖에 없었다.
“여보, 그런 일이 있었어?”
“식사 마치면 얘기하려고 했었죠. 오늘 박지숙 여사가 다녀갔어요.”
“산미그룹 셋째면……?”
엄현태가 끼어들어 설명했다.
“똑똑한 친구예요. 산미대학병원 전문의고요, 후에 산미의료재단도 물려받을 거예요.”
배희진도 거들었다.
“아버님, 저도 그분 얘기 들었어요. 잘 생기고, 인품도 좋다고요. 여러 집안에서 탐을 냈는데 본인 눈이 높아서 거절했다고 하더라고요.”
그러면서 배희진이 엄현주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아가씨를 잘 본 거 같아요. 먼저 연락이 온 걸 보면.”
이에 엄현주가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그 전문의만 보는 눈 있는 게 아니고, 나도 보는 눈은 있어요. 그리고 평소와는 다르게 한마음, 한목소리를 내는 게 신기하네요.”
엄현주는 그들이 이렇게 나오는 이유를 알고 있었다.
자신의 결혼상대자로 산미그룹의 셋째라니.
송우그룹보다 훨씬 작은 규모의 재벌이다.
물론 현주는 그들의 생각대로 움직여 줄 마음이 없었다.
“여보, 당신 생각은 어때요?”
최유경이 엄상현에게 물었다.
“박 여사가 추천했으면 어떤 사내인지 한번 만나 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지.”
“그럼요, 아버님. 사람은 만나 봐야 알 수 있죠.”
큰며느리 채연희가 장단 맞추듯 대꾸했을 때였다.
‘어?’
현호는 엄현주의 입가에 묘한 미소가 걸리는 걸 포착했다. 그 순간, 알았다.
‘누나, 준비해 뒀구나.’
현호는 그녀의 표정을 보니 알 수 있었다.
전생에서 엄현주는 가족의 의도대로 행동하지 않았다.
‘또 한 번 집안이 발칵 뒤집히겠군.
현호는 그 시간이 기다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