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Youngest Son of Sunyang RAW novel - Chapter 102
이 자가 왜?
퇴근해서 집에서 편히 쉬고 있어야 할 사람이 왜 수술대에 누워있다는 말인가?
“누구냐? 아는 사람이야?”
놀란 나를 보며 할아버지는 내 손에 들린 명함을 낚아챘다.
“뭐냐? 우리 직원이었던 게냐?”
“아, 네. 제 전담 수행직원입니다. 오늘 새벽에 절 데려다줬어요. 퇴근하라고 했는데….”
말하다 보니 상황이 그려졌다.
김 대리는 내 말을 무시하고 자기가 할 수 있는 최대치의 성실함을 지킨 것이다. 내가 집으로 들어갈 때까지 나를 수행한다는 직무를 다했다.
그렇다고 몸까지, 아니 목숨까지 던질 줄이야?
할아버지는 이 상황을 단번에 이해한 듯 병원장을 향해 입을 열었다.
“이 친구 살 수 있소?”
“지금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의사가 할 수 있는 말은 이것이 전부다. 사람의 목숨을 놓고 장담하지 않아야 하는 게 의사 아닌가?
“꼭 살려주시게. 어쩌면 우리 생명의 은인인 것 같으니….”
“네. 회장님.”
“혹시 내 말이 기분 상하더라도 오해는 마시게. 필요하다면 순양 의료원으로 옮기는 게 어떨까 하는데?”
“지금은 무리입니다. 일단 수술을 끝내고 상태를 봐야 합니다. 자그마한 충격에도 쇼크가 올 수 있습니다. 엠뷸런스는 물론이고 헬기도 위험하니까요.”
“좋아요. 그 판단은 병원장에게 맡기지. 하지만 뭐든 괜찮으니 필요한 거 있으면 주저 말고 말씀하시게. 의료진이든, 장비든 말일세.”
“네. 수술 끝나면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병원장이 물러나자 할아버지는 나를 위로했다.
“네 녀석은 인복도 좋구나. 이런 자를 만나다니.”
위로하려고 말씀하시지만 와 닿지는 않았다.
나를 위해 목숨을 던지는 사람, 현실감이 없었다.
“나 대신 옥살이 한 놈은 많아도 목숨까지 내놓은 놈은 없었는데…. 넌 이 빚을 어떻게 갚아 할지 고민이겠구나.”
“그 빚, 저만 진 게 아닌 것 같은데요?”
“그렇구나. 나도 이 친구에게 단단히 빚졌구나. 허허.”
할아버지는 피 묻은 명함을 다시 내려다보기 시작했다.
“좀 주무십시오. 적어도 수술 끝마칠 때까지는 할아버지나 저나 할 수 있는 일이 없을 것 같습니다.”
“그래. 좀 쉬자꾸나.”
할아버지는 눈을 감았지만 나는 편히 쉴 수 없었다.
혹시라도 김윤석 대리가 수술실에서 살아나오지 못한다면 갚을 길 없는 빚을 영원히 지고 살아야 한다.
마음 한구석이 묵직하다.
* * *
공주시에 접어든 이학재는 잠시 차를 세웠다. 앞서가던 경찰을 불러 그들의 도움에 감사했고 적절한 보답도 했다.
그리고 병원보다 먼저 들러야 할 곳이 있었다.
“공주경찰서로 가자.”
경찰서에 도착한 이학재는 성큼성큼 청장실로 들어갔다.
이학재의 명함을 받은 서장은 공손한 태도를 보였다.
“청장님 연락받았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일찍 도착하실 줄 몰랐습니다.”
“워낙 다급해서 말이죠. 좀 세게 밟았습니다.”
“현장에 출동했던 애들 입은 단단히 막아 뒀습니다. 그 점은 안심해도 될 겁니다.”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상황은 파악하셨습니까?”
“현장 조사는 좀 더 해야겠지만 교통계 고참들 의견은 이렇습니다.”
경찰 서장은 A4 용지 위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스피드 마크를 확인하니 회장님 차는 신호 대기였습니다. 그런데 교차로 좌측에서 트럭이 직진하다, 핸들을 꺾었는지 모르겠지만, 회장님 차로 돌진한 겁니다.”
“그렇다면 회장님은 크게 다쳤을 것 같은데….”
“그렇죠. 그런데 이때 회장님 후방에 차 한 대가 더 있었습니다. 그게 BMW였는데… 트럭과 회장님 승용차 충돌 전에 트럭을 그냥 쾅하고 들이받았어요. 아스팔트에 BMW의 급출발을 알 수 있는 타이어 자국이 선명합니다. 그 덕분에 트럭의 방향 틀어졌고….”
이해하기 힘든 표정의 이학재를 보자 서장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회장님 수행 비서 차량이라고 짐작했는데 아닙니까?”
“혹시 BMW 운전자는…?”
“중상이죠. 아무리 안전한 독일 차라고 해도 8톤 트럭을 그대로 갖다 박았는데 멀쩡할 수가 없죠.”
“그러니까 회장님 승용차는 2차 충돌이군요.”
“네. 그나저나 순양 회장님 수행 비서들은 정말 대단하군요. 주군을 위해 목숨까지 초개(草芥)처럼 던지다니요. 감동했습니다.”
“혹시 그 사람 신분이나 이름 파악했습니까?”
“네. 지갑이 나왔습니다. 잠깐만요. 어디 적어뒀는데….”
서장은 책상 위에서 메모지 한 장을 들고 왔다.
“전략실 김윤석 대리라고, 아십니까?”
당연히 모른다. 전략실이라는 부서의 역할만 잘 안다. 이건 천천히 알아보면 되고….
“혹시 트럭 운전사는…?”
“그자도 부상이 심해서 치료 중입니다. 염려 마십시오. 형사 하나 붙여뒀습니다. 어디로 내빼지는 못합니다.”
서장은 이학재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레 물었다.
“혹시 께름칙한 일이라도 있습니까?”
“아, 아뇨. 이른 아침이니 밤새워 운전한 트럭 기사가 졸았겠죠. 그런 일 많지 않습니까?”
“저희도 일단 그렇게 생각합니다만, 조사는 더 해봐야….”
“서장님.”
“네.”
이학재는 손짓으로 서장의 입을 막아버렸다.
“그보다 먼저 트럭과 운전기사 정보 좀 주시겠습니까?”
서장은 사고 보고서를 내밀었다.
“트럭 넘버와 기사 신상입니다. 말씀드린 대로 조사는 좀 더….”
“청장님이 다시 연락하실 겁니다. 그냥 덮어주세요.”
“네?”
“아시다시피 회장님의 사고는 여러 분야에 악영향을 미칩니다. 피해자는 우리 직원이니 문제없을 겁니다.”
청장님의 지시고 순양그룹의 부탁이다. 더 고민할 필요가 없다. 귀찮은 일 하나 줄인 게 어딘가?
“아이고, 순양그룹이 하는 일인데 어지간하겠습니까? 편할 대로 하십시오.”
여기서 해야 할 일은 끝났다.
이제 병원으로 가서 그쪽 입 막고 눈 막는 일만 남았다.
* * *
병원장의 안내를 받아 이학재 실장이 조심스레 문을 열고 들어왔다.
“이 실장님.”
혹시 주무시는 할아버지가 깨어날까 싶어 목소리를 낮췄다.
이 실장은 침대를 힐끗 보더니 내 곁으로 다가왔다.
“넌 좀 어때? 괜찮냐? 검사는 다 받았고?”
“네. CT 찍었는데 큰 이상 없습니다.”
“다행이다. 회장님도 괜찮으시지?”
“네.”
이 실장은 여전히 할아버지 침대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참, 김윤석이라고 아니?”
“네. 제 수행원입니다. 전략실요.”
“역시 그렇군. 그런데 이 친구가 왜 따라붙었지?”
조금은 미심쩍어하는 표정이다.
내가 김 대리의 마음을 되짚어 보며 설명하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친구, 충정이 대단하네. 덕분에 너도, 회장님도 목숨을 건진 것 같아.”
“그렇습니까? 저도 그렇지 않을까 짐작만 하고 있었습니다.”
“맞아. 이 친구가 달려오는 트럭을 들이받았어. 그 때문에 진로가 확 바뀌어서 멀쩡한 거야.”
“왔나? 깨우지 그랬어.”
할아버지가 상체를 일으켰다.
“회장님, 그냥 누워 계십시오.”
이 실장이 급히 달려가 부축했고 난 침대 등받이를 세웠다.
“도준아. 옆방에 좀 가 있거라. 할애비는 이 실장과 할 이야기가 좀 있다.”
“네.”
나는 조용히 병실을 나오며 문을 꼭 닫았다.
“그래 조치는 다 취했나?”
“네. 이곳 서장에게 사고 자체를 지우라고 했습니다. 원장 만나서 사고 내용이 새어 나가지 않게 다시 한 번 일러뒀고요.”
“사고 내용은? 들은 게 있어?”
이학재는 경찰서장과 나눴던 내용을 고스란히 전달했다.
“트럭 기사 뒷조사는 이미 지시했습니다. 파다 보면 뭔가 나올 겁니다.”
“왜? 뭔가 있을 것 같나?”
진 회장이 눈을 빛내며 묻자 이학재는 조금 당황했다.
“만약을 생각해야 하니까요. 회장님께서도 의구심을 지울 수 없으니 아직 가족분들에게 연락하지 않으신 거 아닙니까?”
“내가 군산으로 간다는 건 아는 사람이 없다. 단순한 졸음운전일 수도 있어.”
“트럭 기사가 깨어나면 확인해보겠습니다.”
짧게 대답하는 이학재는 승낙을 바라는 것 같았다. 진 회장은 조용히 머리를 끄덕였다.
“잡음 나지 않게 조용히 처리해.”
“네. 그런데 가족분들에게는 언제 연락할까요?”
“일단은 기다려봐. 어차피 소문은 날 것이야. 병원에 사람이 한둘인가? 자네가 적당히 둘러대. 온천에 휴양한다고 해도 좋고.”
“알겠습니다.”
이학재는 진 회장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레 물었다.
“회장님, 도준이를 데리고 군산으로 가시려고 했던 건 바로 그 뜻입니까?”
군산의 조선미곡창.
순양그룹이 출발점,
그리고 그곳에는 비밀이 있다.
아는 사람이 열 명도 채 안 되는 비밀의 장소.
박물관으로 변했지만, 그곳 지하실 역시 박물관이다. 진양철 회장의 개인 박물관이지만.
회장의 어린 시절부터 현재까지, 그의 기억을 자극하는 사소한 물건들을 보관하는 장소다.
그의 인생 역정을 차분히 돌아볼 수 있는 기억의 박물관.
그곳에서 장남 진영기와 차남 진동기는 각자 순양의 후계자 작위를 받았다.
오늘 진도준은 세 번째 작위를 받을뻔한 것이다.
“그래. 왜? 도준이가 부족해 보여?”
“아, 아닙니다. 어리지만 출중하다는 건 잘 압니다.”
이학재는 진도준의 비밀을 알고 있다. 수백억을 수조 원으로 만든 놈 아닌가? 재주도 놀랍지만 그걸 비밀로 하는 치밀함이 더 놀라울 정도다.
“이미 두 아드님이 다녀갔고, 도준이는 세 번째입니까? 아니면….”
말끝을 흐렸다. 아들들을 지우고 손자로 방향을 틀었는지 묻고 싶었지만, 입에 담기에는 거북한 말이다.
“그냥 세 번째라고 해 두자. 아직은….”
“네. 회장님 뜻, 잘 알겠습니다.”
이학재가 고개를 숙이자 진 회장은 피식 웃었다.
“아들놈들은 순양그룹을 잘 이끌어 달라는 말에 날 듯이 기뻐했어. 도준이 저놈은 어떤 표정을 지을지 궁금했는데 못 본 게 아쉽구만.”
“진중한 성격이니 담담한 표정 아니었을까요?”
“어쩌면 손사래 치며 거절했을 수도 있어.”
“네? 설마요?”
순양그룹 후계자를 거절한다? 돈에 욕심 없든지, 겁먹었던지 둘 중 하나지만 진도준은 어디에도 해당하지 않는다.
“저놈이 얼마나 음흉한데?”
진 회장은 아예 낄낄대며 웃었다.
“이제 갓 스물 넘은 놈이 목숨 던져가며 충성하는 부하까지 만들었다. 학재 넌 나 대신 죽을 수 있냐?”
“이제는 못합니다. 나 죽기만 기다리는 마누라와 자식놈이 셋입니다. 내 돈 펑펑 쓰고 싶어 안달이지요. 억울해서 어떻게 죽겠습니까? 흐흐.”
진 회장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너도 나이 많이 먹었구나. 죽는 거 무서워하는 걸 보니 말이야. 허허허.”
“섭섭하지 않으십니까?”
“나 대신 옥살이 삼 년 한 네게? 내가 말은 안 해서 그렇지 늘 고맙게 생각한다는 거만 알아둬.”
“말 대신 돈을 챙겨 주셨으니 회장님 마음은 잘 압니다. 하하.”
자신 앞에서 스스럼없이 말하는 이학재를 보니 새삼 세월이 많이 지났음을 느꼈다.
이제 자신의 시대는 저물었다. 다음 시대는 누구 손에 들어가는지 지켜보는 재미도 쏠쏠할 것 같았다.
이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유 원장이 들어왔다.
“실장님. 사람들이 찾아와서 실장님을 찾습니다.”
“아, 바로 나가겠습니다.”
이 실장은 일어서며 말했다.
“혹시나 해서 시큐리티 요원들 좀 불렀습니다. 전 나가서 일 보겠습니다. 좀 쉬십시오.”
* * *
의료원 정문부터 중환자실로 통하는 입구 그리고 진 회장의 병실까지 정장 입은 사내들이 늘어섰다.
이들은 이학재 실장의 지시만 따를 것이다. 즉, 이 실장의 허락 없이는 가족도 진 회장의 얼굴을 보지 못한다는 뜻이다.
요원들의 철저한 장벽 안에서 난 오랜만에 푹 쉴 수 있었지만 이마저도 쉽지 않았다.
“이놈아. 맥주 한잔쯤이야 괜찮지 않냐?”
“할아버지. 우리 생명의 은인이 지금 생사를 건 수술 중입니다. 최소한 수술 끝날 때까지만이라도 기도하는 심정으로 기다려야죠. 술은 무슨!”
또 하나의 사실을 알았다.
건강한 노인이 병실 침대에 누우면 먹고 싶은 게 많아진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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