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Youngest Son of Sunyang RAW novel - Chapter 112
어색한 침묵은 진영준이 깨트렸다.
“아 참, 상준이는? 상준인 미국서 음악 공부 잘한데?”
“좋아하는 공부니까 알아서 하겠죠. 그런데 영준이 형.”
“응.”
“혹시 제게 뭔가 할 말 있는 거 아니에요? 있으면 말하세요. 괜히 딴말하니까 영 불편한데요?”
술도 마셨으니 취한 척, 조금은 대담하게 물었다.
“응? 하하. 이거, 역시 넌 눈치 하나 끝내준다.”
어색한 웃음을 터트리더니 목소리를 착 가라앉히고 은근하게 말한다.
“너 나랑 일해볼 생각 없냐?”
“네? 형님이랑요?”
역시, 예상했던 대로다. 후계자가 되기 전 나를 회유하려 한다.
“그래. 내가 이사 명함 박고 일해보니까 너만 한 사람 찾기 힘들더라.”
“제가 어떤데요?”
“뭐?”
진영준의 눈동자가 흔들린다. 내가 어떤 인간인지 겪어보지도 않았으면서 대뜸 칭찬 같은 말만 해버렸으니 말문이 막혔을 게다.
회사에서 ‘너만 한 사람 없어’ 라고 말하면 직원들은 황송해 하고 좋아 죽는 모습만 봤으니 내게도 통한다고 생각했을까?
회사 직원들이야 오너 일가의 말이니 무조건 좋아할 수밖에. 장차 회장이 될 유력한 사람이 인정했으니 누구라도 감격스럽게 받아들인다.
“그, 그야…. 인마. 꼭 구체적인 게 있어야 하냐? 느낌이지. 내 밑에서 일하는 애들도 학벌 좋고 스펙 좋아. 그런데 딱 꼬집어 말하기에는 그렇지만 뭔가 아쉬워.”
“저도 그럴 겁니다. 마음에 쏙 드는 아랫사람이 어디 있나요? 겉만 보면 좋아 보이지만 포장지를 까면 늘 아쉽죠.”
슬쩍 겸손을 떨어봤다.
“이 자식. 나랑 함께 일할 생각 없구나.”
웃음기가 섞인 말투지만 눈은 아니다. 매섭게 노려본다.
“꼭 그렇다기보다는 나랑 안 맞아요.”
“뭐? 내가 너랑 안 맞아?”
“아, 아니. 그게 아니라 난 사람들과 함께 일하는 게 영 어색해. 그냥 혼자 하는 게 좋아요. 공부도 혼자 하고 일도 혼자 하고.”
“그래서 투자 회사에서 경험 쌓는 거야?”
“네. 투자라는 게 그렇잖아요. 데이터 보고, 정보 취합해서 혼자 결정하고. 다른 사람들과 맞춰가며 하는 게 아니니까요. 이게 적성인가 봐요.”
“음…. 투자라.”
그룹에 관심 없다는 뜻을 비쳤다. 어떻게 나올까?
내 말을 액면 그대로 믿을 만큼 순진한 놈은 아니다. 앞으로 몇 번 더 떠보려 할 것이다.
“야. 듣고 보니까 더 탐난다.”
“엥? 왜요?”
“내가 그런 거에 약하잖아. 기획, 분석. 난 사람 관리 하는 건 편하고 잘하는데 숫자에 약해.”
그걸 말이라고!
숫자에 약하고 기획도 못 하며 분석도 엉망이라면 일 못 한다는 소리밖에 더 되는가?
사람 관리가 편해? 회장의 장손인데 누구나 설설 길 테고 말 잘 들을 거다. 하나 마나 한 소리를!
일그러지려는 표정을 감추고 웃음을 보였다.
“흐흐. 왜 그래요? 우리나라에서 똑똑한 사람 다 모아놓고 부리면서.”
“아니라니까! 겉만 번드르르하지 맹탕이 많아.”
괜히 심각한 표정을 짓는 진영준을 보며 슬슬 첫 번째 미끼를 던졌다. 이걸 물면 두 번째 진짜 미끼를 던질 것이다.
“영준이 형.”
“응.”
“만약, 이건 진짜 만약입니다.”
“그래. 말해.”
진영준의 눈이 반짝이기 시작했다.
“내가 투자일 하다 아니다 싶으면 다른 일 해야 하는데…. 결국 그룹 일밖에 없긴 하잖아요.”
“그렇지.”
“형님이 같이 일하자는 건 정확히 무슨 뜻입니까?”
“넌 내게 이학재 실장이 되는 거야.”
“그룹 총괄일 맡으라는 뜻입니까?”
“그렇지. 사실 이학재 실장보다 더 막강한 권한을 가지게 될 거야. 이 실장이야 생판 남이고, 막말로 월급쟁이잖아. 하지만 넌 오너 가족이고 내 동생이잖아. 계열사 사장들도 시기나 질투, 반발 같은 건 나오지 않을걸? 안 그래?”
이학재는 끝없이 계열사 주요 임원들과 반목한다. 같은 사장급이지만 이학재 실장보다 나이가 많고 훨씬 일찍 할아버지와 인연을 맺은 사람도 많다.
그들은 순양을 그룹으로 키운 공신이라는 자부심도 있다.
더 늦게 합류한 이학재가 사사건건 트집을 잡으니 사이가 좋을 리 만무하다.
“우리 3세들이 그룹을 맡으면 넌 진짜 이인자가 되는 거야. 창업주인 할아버지가 아끼는 손자였는데 누가 네게 불만을 품겠어? 안 그래?”
“음….”
술잔을 들고 잠시 고민하는 시늉을 하니 진영준은 애가 닳았는지 더 달콤한 말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내가 딱 버티고 중심 잡아서 너한테 힘을 몰아줄게. 솔직히 투자라는 거, 결국 돈놀이하는 거잖아. 그거보다는 순양을 글로벌한 기업으로 키우는 게 더 재미있지 않겠냐? 스케일이 다르잖아.”
“그래 봤자 나도 월급쟁이 아닙니까?”
“뭐? 그게 무슨 소리야?”
“형님이랑 제가 피를 나눴다 하더라도 그게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순양그룹 주식 한 주 없는데요?”
“….”
그룹 지분을 거론하니 갑자기 입을 닫는다. 자신이 함부로 말하기 어려운 일이기도 하고 민감한 부분이다.
어차피 지분 확보가 곧 순양그룹 계승자를 결정하는 것 아닌가?
“형님. 저 투자일 배웁니다. 전 부동산 투기꾼도 아니고 오로지 기업 주식 투자에 집중하는데…. 이 일 배우면 가장 먼저 지분의 중요성을 깨달아요. 주식은 바로 주인의 상징이며 오너의 신분증입니다.”
대답할 말을 생각하는지 진영준은 여전히 말을 못했다.
“왜 말씀이 없으세요? 조금 전 저한테 그러셨죠? 오너 가족이라고. 아닌가요?”
“응? 아, 아냐. 당연히 가족이지.”
“사촌이니까 그룹 지분은 나눠주지 않겠다는 뜻입니까?”
나는 짐짓 화난 채 술잔을 탕 하고 내려놓았다.
“뭡니까? 함께하자, 같이 일하자 해 놓고서는 결국 날 월급쟁이로 부려먹겠다는 심산이었습니까?”
“야! 새끼가…. 말을 왜 그딴 식으로 해. 인마!”
“그렇잖아요? 식구네, 가족이네 해도 직원이랑 뭐가 달라요?”
“넌 내가 그런 양아치로 보이냐? 엉?”
갑자기 큰소리치는 걸 보니 대꾸할 말을 떠올린 게 틀림없다.
“내가 인마, 지금 너처럼 주식쪼가리 하나 없으니 뭐라 말할 건덕지가 없어 그런 거야. 지금 우리가 말하는 건 먼 미래의 이야기다. 할아버지가 우리 아버지에게 그룹 승계하고, 다시 내가 받으려면 최소 10년, 아니 15년은 걸릴 거다. 15년 뒤의 일을 어떻게 장담하겠냐? 안 그래?”
이놈이 날 100% 믿지는 않겠지만, 내가 그룹의 지분 욕심 하나 없는 순진한 놈처럼 굴면 안 된다. 적당히 욕심부려야 내 말을 더 믿을 것이다.
“그럼 15년 뒤에나 내 손에 들어올 지분을 기다리라는 말입니까? 그거 믿고 형님 밑에서 일하라고요? 말이 되는 소리를….”
“야! 밑이라니, 인마. 오른팔이지 어떻게 밑이냐? 그리고 네가 진짜 생각 있으면 내가 약속한다. 당연히 지분 나눠줘야지. 주머니가 든든해야 힘이 나는 건 당연하잖아.”
내 말꼬리를 잡고 되레 큰소리친다. 그리고 잡은 기회를 발판 삼아 다시 내 생각을 읽으려 했다.
“좋다. 툭 까놓고 말해. 얼마나 원하냐?”
여기서 대답을 잘해야 한다.
내가 그룹 경영권에 욕심 없다고 생각할 만큼만 불러야 한다.
이놈에게 가장 적당한 숫자는 무엇일까?
괜히 생각하는 척, 즉시 대답하지 않고 뜸을 들였다.
“형님이 앞으로 갖게 될 순양그룹 지분의 25%.”
이 자식, 미묘한 표정이다. 애매하긴 할 거다. 많은 것도 아니고 적은 것도 아니고.
하지만 한심하다.
어차피 먼 미래의 일 아닌가? 단지 날 떠보는 중이며 줄 생각도 없을 테니, 이럴 땐 지체 없이 콜을 외쳐야 했다.
우물쭈물 대답을 못 하는 것은 속 좁은 것과 욕심 많은 속내만 드러내는 것 아닌가?
갑자기 옛 생각이 나 웃음이 터질뻔했다.
“자기 로또 1등 당첨되면 나 얼마 줄 거야?”
내가 로또 번호를 고르느라 고민할 때 아내가 물었다.
어차피 꽝인 거 아내의 기분이라도 좋도록 곧바로 전부 준다고 했어야 했다. 만약 기적처럼 1등이 됐다 하더라도 그 사실을 숨기면 되는 일이다.
그때 내 모습이 바로 저랬다.
우물쭈물.
그 대가는 바로 부부싸움으로 번졌고 냉랭한 아내의 표정을 일주일이나 봐야 했다.
저놈에게 내가 그룹을 탐내지 않는다는 확신을 주기 위해 말했다.
“내가 가질 25%는 형님 경영권 방어를 위한, 영원한 우호지분이 될 겁니다. 그리고 형님이 경영에서 물러나고 형님 아들, 즉 내 조카가 계승할 때 싸게 넘기죠. 하하.”
이렇게까지 기분을 맞춰주고 양보하는 척 했는데 망설인다면 상대할 가치도 없는 바보다.
“생기지도 않은 애에게 무슨…. 25%는 지분은 네 아들놈, 즉 내 조카한테 줘라. 하하.”
할아버지가 이 모습을 보면 기가 차서 쓰러질지도 모른다.
새파란 어린 손자 두 놈이 형님 아우 하며 주고받는 꼴이 얼마나 어처구니없을까?
“좀 쑥스럽군요. 아직 제가 어떻게 할지 결정도 못 했는데….”
“괜찮아. 이건 네 인생의 플랜 B가 될 거다. 네가 하고자 하는 일이 잘 안 풀리면 오늘 이 약속을 기억해. 나도 잊지 않으마.”
이럴 때 기분을 맞춰줘야 한다. 그래야 두 번째 미끼를 자연스럽게 던질 수 있다.
“고맙습니다. 형님. 솔직히 형님이 저를 이 정도까지 생각해 주실지 몰랐습니다.”
“야야. 관둬라. 우리 사이에 무슨…!”
진영준은 한껏 호기로운 모습으로 술잔을 싹 비우고 내게 내밀었다.
“아직 한참 뒤의 일이지만 중요한 건 너 하고 내가 통했다는 거다. 서로 밀어주고 땡겨주면서 순양그룹 끝내주게 한번 만들어보자.”
“네, 형님. 제가 그룹 일 하게 되면 항상 형님 편에 서겠습니다.”
나도 꽉 찬 술잔을 깨끗하게 비웠다.
이제 떡밥을 한번 뿌려볼까?
“형님. 그런데 돈 좀 있습니까?”
“돈? 왜? 필요해?”
“아, 아닙니다. 제가 돈 쓸데가 어디 있나요?”
“그런데?”
“제가 진심으로 형님 편이라는 걸 보여드리고 싶어서요.”
호기심이 드러나는 눈빛, 진영준은 가까이 다가앉았다.
“뭔데?”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오세현 대표가 고모부 시장 선거자금을 많이 지원했어요.”
“뭐? 진짜?”
“네. 처음에 고모가 내게 찾아와서 선거자금 좀 보태달라고 했는데 내 돈이야 전부 미라클에 묶여 있잖습니까? 그래서 오 대표를 소개해줬어요.”
“고모가 오세현이와 거래했구만. 뭐 준다고 했는지 알아?”
“그게 핵심이죠. 흐흐.”
내 웃음에 진영준은 손뼉을 짝 쳤다.
“잠시 들어가 좀 쉬지? 필요하면 다시 부를 테니까.”
우리 술자리를 도와주던 사람들이 모두 이 층으로 올라가자 진영준은 본격적인 관심을 드러냈다.
“뭐야? 설마 미디어 시티 그거야? 고모부 공약에 들어가 있던거? 설마 그거 때문에 대아건설 인수한 거야?”
“네. ”
공사판 함바집 밥 좀 먹더니 눈치가 좋아졌나? 대번에 알아챈다. 하지만 규모가 다르다는 걸 알면 깜짝 놀랄 것이다.
“순양건설 임원들, 대거 대아로 옮겼잖습니까? 할아버지와 오 대표는 협조 관계고요. 그런데 두 분이 정보를 꽁꽁 숨겨놨어요.”
“무슨 정보?”
“위치요. 미디어 시티가 어디에 들어서는지는 아직 발표 안 했어요. 뭐…. 워낙 크다 보니 입단속 하는 건 이해하지만…….”
슬쩍 표정을 보니 입을 떡 벌린 채 눈만 껌뻑거린다.
경제위기 속의 대규모 프로젝트.
정부도 적극 지원할 건 뻔한 일, 이런 프로젝트의 숨은 정보라면?
“너 위치 아는구나!”
난 싱긋 웃으며 머리를 끄덕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