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Youngest Son of Sunyang RAW novel - Chapter 121
“도준아.”
“네.”
“넌 이 할애비가 참 고약하다고 생각하느냐?”
“갑자기 무슨 말씀이세요?”
“자식 놈들이 싸우는 거 말리지는 못할망정 오히려 부추기고, 손자가 곤란한 지경에 빠졌는데 즐거워하니 말이다.”
“음…. 그럼 면이 없지는 않죠. 흐흐.”
진지하게 말씀하셨지만, 농담으로 받을 수밖에 없다. 더 무거워지는 건 피하고 싶다.
“너도 네 속셈을 숨기지 않는 걸 보니 군산행의 의미를 알았나 보구나.”
“네. 두 분 큰아버지와 고모가 절 끌어들이려 애쓰시는 게 분명하니까요.”
“싸워서 이기는 놈이 갖는 거다. 주는 대로 받아 가는 놈치고, 받은 거 제대로 지키는 놈 못 봤어. 해방되고 50년 넘게 흐르는 동안 사라진 기업이 몇인 줄 아니? 그게 다 거저 받아서 그런 게다.”
“저도 그 싸움에 끼어들 건지 아닌지 궁금하신 것 같군요.”
할아버지는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아니다. 내가 네게 얼마를 더 줘야 할지 궁금한 게다. 이미 넌 오래전부터 싸움판에 들어왔지 않으냐.”
여기서 잠깐, 따질 건 따져야 한다. 철저히 계산하시는 분인데 셈이 틀리면 안 된다.
“할아버지. 더 준다는 게 무슨 말씀이신지…. 전 받은 게 없는데요?”
“뭐라? 어허, 이놈 보게? 순양자동차 가져갈 때, 지분 17%나 더 얹어준 걸 벌써 잊었어?”
“아니죠. 그건 제가 급전 빌려드리고 이자로 받은 거죠. 말 그대로 달러 이자 아닙니까?”
할아버지는 잠시 눈만 깜빡거리더니 버럭 소리 질렀다.
“에라이, 날도둑 같은 놈아. 뭣이 어째? 허허.”
“그리고 할아버지. 절대 잊으시면 안 되는 것도 있습니다.”
“또 있어?”
“네. 제가 생명을 구해드린 거 말입니다. 사고 났을 때요.”
“요놈 보게나. 사고 났을 때도 멀쩡했던 놈이 생색은!”
흐뭇한 미소도 잠시, 할아버지는 다시 목소리를 낮췄다.
“도준아.”
“네.”
“우는 놈에게 떡 하나 더 주는 법이다.”
갑자기 생뚱맞은 소리, 왜 이러실까?
“부족한 자식 놈을 보다 널 보면 이런 생각이 든다. 우리 도준이는 좀 덜 줘도 잘해내겠지. 똑같이 주면 자식 놈들이 손자와 자웅을 겨룰 기회조차 없을 게 뻔해. 이런 생각 말이다.”
할아버지의 마음, 이해한다.
핏줄은 한 다리가 무서운 법이다.
나는 다리 하나를 건너서 만난 핏줄이지만 큰아버지들이야 한울타리에서 만난 핏줄 아닌가?
혈육의 정 때문이라는 말을 차마 못 하고, 능력으로 포장해버려야 하는 자존심도 이해한다.
“그럼 내일부터는 저도 우는소리도 하고 부족한 모습도 보여드리겠습니다. 하지만 오늘까지는 잘난 손자 노릇 할게요.”
“어떻게?”
“할아버지 뜻대로 하십시오. 순양그룹은 할아버지 꺼 아닙니까?”
자식보다 순양그룹을 더 아끼는 마음. 내가 기대할 곳은 바로 그 마음이다.
* * *
“이거, 역풍 제대로 맞겠는데?”
“사설은 더 섬뜩합니다. 단어 하나하나가 전부 비수로 날아들어요. 지금 고모부는 안절부절못할 겁니다.”
오세현은 신문을 탁자 위에 휙 던져버렸다.
“왜 쓸데없이 오버해 가지고…. 이러다 DMC마저 역풍 맞는 거 아냐?”
“좀 그렇죠? 땅 투기는 쏙 빼고 DMC 자체를 비리의 온상으로 부각시키네요. 입찰 방식이 아니라 수의 계약 한다는 게 약점이니까요.”
“야! 너, 강 건너 불구경하듯 말할래? 한성일보 말려야 하지 않겠어? 오늘은 한성일보뿐이지만 내일이면 모든 신문사가 다 받아쓸걸?”
“제가 뾰족한 방법이 있나요? 혹시 할아버지를 생각하신다면 그 생각 접으세요. 관여하지 않으시겠다고 일찌감치 선을 그었어요.”
“이러다가 정말 DMC까지 무산되는 거 아냐?”
오세현은 걱정 한가득한 얼굴이었다.
“그런 일은 없을 겁니다. 순양건설이 최소 30%를 먹는 사업인데 할아버지가 가만히 놔둘 리가 없어요. 고모부를 두들겨 패는 거야 구경만 하시겠지만, 사업까지 건드리면 한성일보가 작살나요.”
“그럼 다행이고.”
오세현의 걱정거리는 덜었지만 내 고민은 남아 있다.
고모부를 어찌해야 할까?
마누라가 시키는 대로 움직이던, 조금은 모자라 보이던 사람이 어디로 튈지 모르는 모습을 드러낼 줄이야. 취임한 지 며칠이나 지났다고.
할아버지는 고모부의 이런 경박한 본모습을 알고 있었을까?
그렇기 때문에 정치하는 걸 그토록 반대했던 걸까?
일단은 고모를 만나야겠다.
철딱서니 없는 남편 길들이는 건 마누라가 제격이다.
“삼촌. 고모부가 더 큰 사고를 치기 전에 고모 만나서 상의하는 게 어떨까요?”
“그래. 불안해서 안 되겠다. DMC가 궤도에 오를 때까지 제발 잠자코 있도록 단단히 일러 두자.”
우리가 가방을 챙겨 일어나려 할 때 문이 벌컥 열렸다.
“오세현이! 이 개새끼가 보자 보자 하니까. 어디서 수작질이야? 감히!”
문 앞에서 거친 숨을 몰아쉬며 소리치는 사람은 다름 아닌 강무성이었다.
“느닷없이 뭐요? 그리고 말조심하쇼. 새끼라니!”
“내 방을 왜 뺐어? 출근하니까 공사 중이더구만. 내게 말 한마디 없이 무슨 짓이야?”
“아, 그거? 낙하산 하나 들어온다고 해서. 전직 차관인데 우리 사업에 아주 큰 도움이 될 분이요. 전망 좋은 방 하나 빼줘야 하는데, 어떡하겠소? 자리가 없는데?”
“뭐야? 이 새끼들이…. 내가 모를 줄 알아? 지난달부터 월급도 안 들어오고, 차도 사라지고, 이젠 방도 빼? 날 쫓아내려는 수작 아니냐고!”
방방 뛰는 강무성과 달리 오세현은 피식 웃으며 여유로웠다.
“잘 아네. 그 정도 눈치면 그냥 사표 내고 집구석에 처박혀 있지 뭐 하러 여기까지 와?”
“야!”
“뭐? 험한 소리 나오기 전에 말조심해.”
오세현이 도리어 적반하장으로 나오자 강무성은 주먹 쥔 두 손만 부르르 떨었다.
삼촌도 참 독한 사람이다. 적어도 6개월 정도는 놔둘 줄 알았는데 딱 석 달 만에 쫓아낸다. 그것도 집무실을 빼는 수모까지 줘 가며 말이다.
강무성이 저질렀던 악행을 고스란히 되돌려준다.
하루아침에 책상을 뺀 뒤 직원을 자르고, 밀린 월급은 나 몰라라 하며 회사 돈이나 빼돌렸던 사장이 직원의 억울한 심정을 고스란히 느끼도록 한 것이다.
이 흥미진진한 광경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지켜보기로 했다.
“내가 이대로 당하고만 있을 것 같아? 내 손에는 계약서가 있어. 소송 걸면 당신네들 위약금까지 물어야 한다고. 내가 5년 치 월급에, 위약금까지 챙길 테니까 두고 보라고.”
강무성은 주머니에서 서류를 꺼내 흔들었다. 작정하고 왔나 보다. 계약서까지 챙겨 온 걸 보면 말이다.
“아이고, 그러세요? 마음대로 하세요. 법 참 좋아하네. 그 법이 아직 당신 편인 줄 알아?”
“뭐라?”
“이 양반이! 아직 똥인지 된장인지 구분이 안 돼? 내가 아무 생각 없이 당신 쫓아낼 것 같아? 계약서가 살아 있는데?”
강무성은 그제서야 우리 손에 계약서를 무용지물로 만들 무기가 있다는 걸 감 잡은 것 같았다.
“대아건설 재무팀장이랑 총무과장은 기억력이 좋더구먼. 꼼꼼하게 기록도 다 해놓고. 그 사람들이 우리에게 준 자료만 서너 박스야. 그걸 검찰에 줄까 말까 고민 중인데, 어떡할까?”
강무성의 눈동자가 이리저리 흔들렸다. 우리 손에 든 박스가 뭔지 생각하지만, 자신이 기억도 못 하는 숱한 비리가 한둘이 아니다.
기억을 못 하니 대꾸도 못 한다.
“당신이 소송 들어가는 순간 검찰이 당신 변호사 비용의 출처부터 캘걸? 아직 추징금 많이 남았지? 가진 돈 한 푼도 없다고 말했는데 소송 비용은 어디서 났는지 검사님들이 궁금해할 거야.”
월급쟁이를 개처럼 취급하던 놈의 창백한 안색을 보니 속이 좀 시원하다. 잠자코 있기에는 입이 근질근질했다.
“영감님. 말년에 옥살이하기 싫으면 조용히 사직서 내고 가쇼. 집 근처 노인정에 가서 바둑이나 두며 살라고. 조금이라도 뭔가 하려고 꼼지락거리는 순간, 검찰청에서 육개장 먹게 해줄 테니까.”
“이, 이 대가리에 피도 안 마른 새끼가…….”
나를 노려보는 강무성에게 마지막 일격을 날렸다.
“잘 들어요. 내가 양자 철자 쓰시는 분의 손자야. 우리 조부님께서 손자를 끔찍이 생각하셔. 밖에서 이 새끼 저 새끼 욕 들었다는 거 아시면 몽둥이 들고 달려오실 분이니까 말조심하쇼.”
“양자 철자?”
“이런, 내 명함 잃어버렸구만. 나 진가요.”
“진… 양… 철? 진양철?”
강무성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서, 설마…. 순양그룹 진양철?”
나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거, 말조심합시다. 내 조부님이 당신 친구도 아니고 말이오.”
두 다리가 후들거리는 강무성을 남겨 두고 일어섰다.
“삼촌, 우리 먼저 나가죠. 이 분은 여기서 사직서 쓰고 나가려면 시간 좀 걸리겠어요.”
“그, 그럴까?”
오세현은 가방을 집어 들었다.
우리는 결국 소파에 털썩 주저앉은 강무성을 뒤로하고 사무실을 나왔다.
“야. 너 웬일이냐?”
“뭐가요?”
밖으로 나오자마자 오세현은 놀란 듯 말했다.
“한 번도 족보 내세우며 잘난 척하지 않던 놈이 회장님 손자라는 걸 내세워서 말이야. 무슨 바람이 불었어?”
“저 양반 무릎을 꺾어놔야 할 것 같아서요. 지금은 우리 손의 자료 때문에 한 걸음 물러서겠지만, 돌아서면 무슨 꿍꿍이를 부릴지 모릅니다. 아예 한번 해보자고 덤빌 엄두도 안 나게 주저앉혀야 뒤가 편하죠.”
“이럴 때 보면 넌 네 아버지 안 닮았어. 독한 건 할아버지 판박이구먼.”
오세현은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닙니다. 독한 놈한테는 아버지도 독한 모습 보이세요. 친구라면서… 잘 모르시는구나.”
* * *
고모는 호텔에서 백화점으로 집무실을 옮겼다. 호텔의 럭셔리한 이미지는 정치인에게 하등 도움이 안 되기 때문이다.
집무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이미 호텔 집무실과 차이 없는 인테리어로 치장한 게 눈에 띄었다.
“여보! 도대체 왜 그래요? 여기서 그만둬요. 검찰이랑 싸워서 뭘 얻겠다고요!”
수화기에 대고 날카롭게 소리치던 고모는 우리를 발견하자 전화를 끝냈다.
“아, 오 대표. 왔어요? 도준이도 별일 없지?”
애써 웃는 고모를 보니 고모부가 또 뭔가 사고 칠 준비를 한다는 게 느껴졌다.
“별일 많아요. 아시면서.”
“뭘?”
“할아버지요. 그날 고모 먼저 가시고 전 할아버지께 몇 시간 동안 야단맞았다고요.”
“너 설마…?”
“제가 바본가요? 고모 이야기는 안 했어요. 그냥 어쩌다 나온 소리라고 둘러댔어요.”
“그래. 고생했다.”
고모는 내 등을 쓰다듬었다.
“일단 앉으시죠. 우리 그이 때문에 오 대표님 마음 쓰시게 해서 죄송해요.”
“아닙니다. 이미 벌어진 일이니 마무리나 잘해야죠.”
백화점 유니폼을 차려입은, 예쁘장하게 생긴 직원이 찻잔을 내려놓고 나가자 오세현이 슬쩍 입을 열었다.
“본의 아니게 통화 내용을 들었습니다. 혹시 또 문제 생겼습니까?”
“그, 그게….”
오세현은 난처한 듯 입술을 잘근잘근 씹는 고모에게 미소 지었다.
“진 사장님. 이미 한배를 탄 사람입니다. 문제는 같이 해결해야죠.”
“그이가 중앙지검을 방문하겠다고 하네요. 미진한 검찰 수사를 항의하는 차원에서요. 이거 또 입방아에 오를 것 같아요.”
“네? 이런….”
오세현뿐만 아니다. 나도 어처구니가 없어 말이 나오지 않았다.
이거야말로 검찰에 괜한 시비를 거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검찰에게 화해의 신호를 보내도 모자랄 판에 무슨 삽질인가?
우리 세 사람은 동시에 이마를 감싸 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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