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Youngest Son of Sunyang RAW novel - Chapter 128
“너무 겸손한 말 아냐? 넌 그 이상이야. 우리 조카, 왜 이리 자신감이 없어?”
고모는 더할 수 없는 친근함을 보이며 내 등을 쓰다듬었다.
“넌 아직 어려. 벌써부터 그렇게 네 한계를 정하지 않아도 돼. 아무튼 이 이야기는 뒤로 미루자. 그보다 이혼 서류 있잖아. 그걸 어떻게 쓰면 좋겠어?”
“할아버지께는….”
“그건 알아. 이혼장 들이밀고 챙길 건 챙기라는 거지?”
“네. 그런데 하나 더 얹어 달라고 하세요.”
“하나 더? 뭘?”
“순양 유통요. 지금 하이퍼마켓(Hypermarket)을 준비 중이지 않나요?”
“하이퍼? 아, 대형할인점 말이구나.”
“네. 그쪽에 엄청난 자금이 쏠렸어요. 게다가 순양 유통은 비상장 회사니까 거기를 모기업으로 하세요. 백화점, 호텔 지분도 그쪽에 넘기고요. 그럼 고모는 그룹에서 현찰장사 하는 건 다 손에 넣었다고 봐야죠. 그룹 은행이나 다름없는.”
“그것까지 주실까?”
자금순환이 가장 활발한 계열사를 다 먹는다고 생각하자 고모는 흥분에 휩싸였다.
“어차피 백화점이나 대형할인점이나 똑같은 구조 아닌가요? 취급 상품의 격만 다를 뿐이죠. 고모는 이미 백화점을 훌륭하게 경영한 성과도 있고, 이혼까지 하는데 그 정도는 얻어야죠. 순양 유통을 모기업으로 해서 완전히 계열 분리하세요. 그럼 기반은 확보했다고 볼 수 있잖아요.”
고모는 꿀꺽 군침을 삼켰다.
“유통을 모기업으로 만들면 난 유통 주식만 쥐면 되고, 나머지는 회사 돈으로 주식을 옮기면 깔끔하게 마무리되겠네?”
“네. 어차피 주머니만 옮기는 거니까 돈 들어갈 일 없이 계열 분리할 수 있어요. 일거양득?”
고모는 나를 확 끌어안았다.
“공명인지 장량인지 아무리 똑똑해도 우리 조카 발끝에도 못 미칠 거야.”
거북해서 고모를 슬쩍 떼어냈다.
“고모는 할아버지부터 만나보세요. 전 고모부를… 아니, 오 대표님이 고모부를 만날 겁니다. 먼저 겁을 좀 줄 테니까 고모가 결정타를 날리세요.”
“겁을 줘? 어떻게?”
“고모의 남편이 아니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걸 깨닫게 해야죠. 오 대표님이 남의 속을 긁는 데는 타고나신 분이거든요.”
* * *
“최 시장님. 이 바닥에 소문 다 퍼졌어요. 양손에 꽃패 쥐고 이권장사 제대로 벌일 생각이시라는 거.”
“뭐요? 누가 그래?”
“요즘 대현 주 회장과 수시로 독대한다면서요? 어쩌시려고 그럽니까?”
이미 태도가 다르다. 최 시장은 권력의 본질을 깨달아가는 중이다. 한 줌의 권력 앞에 수백 배의 돈이 줄 서는, 힘의 균형을 경험했다.
장인의 돈이 권력을 움직이는 줄 알았는데 실상은 그 반대였던 것이다. 장인인 진 회장은 수천, 수만 배의 돈을 저울추에 올려놓은 것뿐이다.
오세현은 자신을 내려다보는 최 시장의 눈길에 슬슬 화가 치밀기 시작했다.
“주 회장은 내년에 시작할 뉴타운 건설 때문에 만난 것뿐이요. 아, 이번엔 오 대표도 빠져줘야겠어요. 이미 DMC로 우리 계산은 끝났으니까. 그렇죠?”
“그 뉴타운, 대현 건설과 수의계약 하면 말 많을 겁니다. 그렇다고 오해는 말아요. 우리 HW는 아파트에는 관심 없어요.”
“HW? 아, 대아건설도 이름 바꿨지. 이젠 HW 그룹 총수신가?”
“총수는 아진의 송현창 회장님이 하시죠. 저야 지주 회사 대표일 뿐이고요.”
“족보는 이제 다 알았고, 용건만 말해요. 난 또 뉴타운에 밥숟가락 올려달라고 부탁하러 온 줄 알았는데….”
오세현은 한숨을 쉬고 입을 열었다.
“제가 순양그룹 딱지 떼라고 한 건 재벌가 사람이라는 이미지를 지우라고 한 겁니다. 순양에서 대현 그룹으로 갈아타라고 한 게 아니고요.”
“주제넘은 소리나 하려면 그만 끝냅시다. 내 앞가림은 내가 하리다.”
불쾌한 표정을 감추지도 않는다. 자신이 엄청난 강자라고 생각한다. 숨기지도, 참지도, 감추지도 않는 게 권력자의 특권이니까.
“아직도 모른다면 가망 없군요. 이봐요. 최 시장. 당신은 그냥 주 회장의 장난감일 뿐이요. 잠시 가지고 놀다 싫증 나면 버리는 그런 장난감 말이요.”
“뭐야? 어디서 감히 그딴 소리를!”
소파 손잡이를 잡은 손이 부르르 떨렸지만, 오세현은 멈추지 않았다.
“그냥 재미 삼아 당신한테 바람 잔뜩 넣어서 이리저리 흔들어대는 거요. 바로 당신 장인인 진 회장 열 받으라고. 그게 전부야. 넘치게 가졌고 저물어가는, 인생이 심심한 심통 맞은 영감들 장난일 뿐이라고.”
“입 닫아!”
“진 회장이 당신을 버리면 대현 회장도 심드렁해서 당신 버려. 주 회장이 그깟 아파트 재개발하는 데 관심이라도 있을 것 같아?”
최 시장은 표정을 싸늘하게 바꿨다. 더는 흥분한 모습이 아니었다.
“버려? 누가 누굴 버려? 진 회장이 사람 두 번 버리는 재주도 있나? 아무것도 모르면서 어디서 함부로 나불대?”
“뭐요?”
“진 회장은 이미 날 버렸어. 서울시장 출마한 그 순간에 말이야. 장인과 사위라는 법적 고리만 있을 뿐 이미 그 영감과 나는 남남이야.”
오세현은 최 시장이 이토록 어긋난 길을 가는 이유를 완전히 알았다. 이런 마음이라면 절대 되돌릴 수 없다. 더 큰 충격을 받기 전에는….
“마음에서 지우는 게 한 번이고…. 방금 말했죠? 법적 고리는 남았다고. 그럼 그 고리마저 끊으면 두 번 버리는 셈이네. 그거 끊어지면 당신은 정말 끝이야. 순양 장학생들이 그 고리 때문에 참고 있는 거 몰라요?”
최 시장의 안색이 변했다. 설마 그런 일이?
“그 고리 끊어지는 순간 여의도부터 서초동까지 당신 사냥하겠다는 놈들이 우르르 몰려들 거요. 이제 이 방으로 돈 싸 들고 오는 업자 대신 화살만 날아들걸?”
오세현은 의자에서 일어섰다. 이 정도면 충분한 사전 경고는 날린 셈이다.
“최 시장 당신 때문에 나까지 불똥 튈까 봐 걱정돼서 찾아온 겁니다. 죽으려고 용쓰는데 말릴 방법이 없네. 갈 때는 혼자 조용히 가쇼. 불똥 튀면 나도 가만있지는 않을 거요.”
멍한 얼굴의 최 시장을 남겨두고 오세현은 시청을 빠져나왔다.
조금 아쉬운 마음이 들기도 했다. 앞으로 남은 임기 동안 좀 더 빼먹을 수도 있는데 말이다.
* * *
“이게 뭐냐?”
진 회장은 진서윤이 내미는 파일을 열었다.
“이혼 서류예요. 협의이혼요.”
“빨리도 가져온다. 그깟 덜떨어진 사내 하나 정리하는데 무슨 고민이 이리 긴 게냐?”
“아버지! 제가 아들만 셋이에요. 아이들 생각은 해야 할 거 아니에요?”
“다 큰 자식 눈치 볼게 뭐 있누? 그리고 그놈들이 부모가 뭐 하는지 신경이나 쓴다던? 엄마 백화점 명품 가져가서 계집애들에게 안기는 것만 신경 쓰는 최가 놈 자식 아니냐.”
“아버지!”
진서윤이 소리를 버럭 지르자 진 회장은 피식 실소를 흘리며 서류를 찬찬히 보기 시작했다.
“그런데 왜 날짜가 없어? 내일이라도 당장 도장 받아서 처리해.”
“서울시장 임기 끝나는 날 처리할게요. 현직 시장이 이혼했다는 사실이 알려지기라도 해봐요. 신문 방송이 떠들어댈 게 뻔한데 집안 망신이잖아요. 애들도 그렇고.”
이혼 서류를 툭 던진 진 회장은 딸을 노려보기 시작했다.
“얼렁뚱땅 넘어갈 생각하지 마. 그놈은 전자 공장 지역구에서 국회의원 한 것도 감지덕지한 놈이다. 내가 네게 주는 모든 걸 그놈이 나눠 가진다고 생각하면 열불 나서 못 참겠다.”
진서윤은 아버지의 말에 담긴 진심을 읽자 용기가 샘솟았다.
“얼렁뚱땅 넘어갈 생각은 조금도 없어요. 저도 이제 신물 나니까요. 멍청한 사내를 여기까지 끌고 왔는데 하는 짓 보니 가망 없어요. 이제 애들이나 바라보며 살 생각이에요.”
“지 애비 닮은 놈들 아니냐?”
진서윤은 아버지지만 진절머리가 났다.
딸의 몸에선 난 손자지만 최 씨라는 이유만으로 단 한 번도 살갑게 대한 적이 없었다.
“절 닮았어요. 아버지가 관심 두지 않아서 모르시는 거예요.”
“알았다. 뭔 앙탈이냐?”
진서윤은 한결 부드러워진 아버지의 태도를 보며 남편을 얼마나 싫어하는지 알 것 같았다. 그런 남자와 결혼시킨 것도 아버지였지만 말이다.
어쩌면 그 사실 때문에 미안한 마음을 품고 있지는 않을까, 기대하기도 했다.
“그럼 이제 약속하신 대로 계열 분리 진행해 주실 거죠?”
진 회장은 나이 오십인 딸이 어린애처럼 눈을 반짝이며 빤히 쳐다보자 애잔한 마음이 일어날 정도였다.
어쩌다가 이렇게 철없이 늙어버렸을까? 언제까지나 품 안에 품고 키운 자신의 잘못이 제일 크다는 것이 아려왔다.
“알았다. 주식 확보하고 처리하는데 시간은 좀 걸릴 게다. 네가 이혼장에 최 서방 도장 받아오면 바로 시작하마.”
“그런데 아버지. 저기….”
“또 뭐가 남았어?”
“백화점과 같은 계열이니까 유통도 함께 묶어서 줘요.”
진서윤은 조심스레 말을 꺼냈지만 진 회장은 그녀가 뭘 원하는지 단번에 알아챘다.
“순양 유통이 내년부터 새로운 사업을 시작한다는 거 알고 하는 소리냐?”
“….”
진서윤이 주저하자 진 회장은 손을 내저었다.
“욕심 그만 부려. 네가 만질 만한 게 아니다.”
“제가 백화점 맡고 경영실적 좋아진 거 알고 계시잖아요. 판매하는 상품의 질만 다를 뿐 대형할인점은 백화점이랑 그 구조가 똑같아요. 저… 잘할 자신 있어요.”
“그것까지 묶으려면 복잡한 일이 한두 가지가 아냐. 순양 유통 주식을 백화점에 넘기려면 이건 합병 수준….”
“아니에요. 유통을 모회사로 만들면 돼요. 백화점, 호텔의 지배 지분을 유통으로 넘기고 제가 유통지분을 쥐면 한결 수월해요. 유통이 비상장 기업이니까 경영권 방어하기도 어렵지 않고요. 부족하면 유상 증자하면 되잖아요.”
딸의 말을 허투루 흘릴 수 없었다. 쉽고, 세금 피하고, 경영권 방어에도 유리하다. 게다가 같은 카테고리 사업이니 함께 묶어도 편법 상속이라는 의심을 피할 수 있다.
진 회장은 놀란 눈으로 딸을 보며 말했다.
“그런 머리도 돌아가는 게냐? 허허, 참.”
“제가 오빠들보다 훨씬 낫다고 몇 번이나 말씀드렸어요? 절 좀 믿어보세요.”
진서윤은 진 회장이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자 목표에 한층 더 가까워졌다는 생각이 들어 날아갈 것 같았다.
* * *
“인감 찍어요. 당신 사정을 생각해서 다음 선거 끝나고 법원에 제출할 생각이니까 고맙게 생각해요. 그렇다고 꼭 재선되리라는 보장은 없지만.”
“여, 여보. 이게….”
“우리나라 공직자 중에 이혼남은 없어요. 이혼은 선거에 치명적이니까 선거 끝나고 법적인 절차 밟을게요. 대신 지금부터는 별거 상태로 하죠. 이달 안으로 짐 싸서 나가요.”
이혼 서류를 든 최 시장의 손이 부르르 떨렸다. 이럴 수가!
며칠 전 오세현이 경고처럼 한 말이 현실로 다가올 줄은 꿈에도 생각 못 했다.
“위자료니 뭐니 꿈도 꾸지 말아요. 나랑 결혼하면서 당신이 가져온 건 그 몸뚱아리뿐이잖아요. 이 집도 내 명의고, 결혼 생활 동안 당신은 단돈 십 원짜리 하나 들고 온 적 없으니까 치사하게 위자료 가지고 싸우지는 않겠죠?”
몽둥이로 뒤통수를 세게 맞은 느낌이다.
아내가 하는 말이 제대로 들리지 않았고 귓가에서 윙윙거릴 뿐이었다.
“여, 여보. 아니 서윤아. 갑자기 왜 이래? 나이 오십 넘어서 이혼이라니? 우리가 이혼할 이유가 어디 있어?”
“이유? 몰라서 물어요? 내가 왜 이러는지?”
최 시장은 매섭고 차가운 눈빛의 아내를 보자 까마득한 과거가 떠올랐다.
재벌 딸과 처음 만났던, 자신을 내려다보는 시선에 주눅이 들어 눈도 마주치지 못했던 그 순간. 바로 맞선 본 그날의 기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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