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Youngest Son of Sunyang RAW novel - Chapter 132
집이 좁다는 생각을 처음 했다.
의료재단 이사진들이 새로운 이사장에게 새해 인사하러 온 건 이해한다. 아, 지방 의료원 다섯 곳의 원장들까지도 이해한다.
그런데 과장들은 좀 심했다. 지방에서 상경한 과장들까지 합치니 백여 명에 육박한다.
진료과목이 서른 개가 넘으니 병원의 중요한 과장들은 전부 달려왔다고 봐야 한다. 출세에 관심 없는 의사들만 오지 않았다.
아버지도 당황한 기색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좀 있으면 영화계 사람들도 올 텐데… 그럼 아수라장이 될 게 뻔하다.
그렇다고 문전 박대할 수는 없는 일, 나는 재빨리 고모에게 전화했다.
“고모. 강남 호텔 연회장 하나 급히 비워줄 수 없어요? 백 명 정도…. 약 삼십 분 뒤에 도착하고요. 식사와 술도 준비해야 하는데….”
– 누구 부탁인데 안 되겠어? 염려 마. 세팅해 놓을 테니까.
고모의 경쾌한 콧소리가 울렸다.
“아버지. 이사진들과 원장들은 집 안으로 들이셔서 인사하세요. 의사들은 호텔에서 식사하도록 조치했습니다. 다들 동문이거나 선후배 사이니까 술이라도 한잔하도록요.”
“그, 그래. 잘했다.”
이럴 때 또 써먹는다. 과거에 얼마나 많은 의전을 치렀는가? 예상치 못한 일이 생겨도 매끄럽게 진행해야 했다. 그때의 순발력이 아직 죽지 않았다.
의사들이 싹 빠져나가자 한숨 돌린 아버지는 손님들을 접대했다. 내가 특히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도 잊지 않으셨다.
재빨리 원장들을 불러 VIP 환자와 병원당 딱 20개만 있는 VVIP 병실의 비밀 환자를 확인했다.
오늘이 아니더라도 빨리 찾아가 직접 새해 인사를 드려야 할 사람들이 아닌가? 아플 때 찾아와 안부 챙기는 사람은 항상 고마운 법이다.
뒤이어 찾아온 영화계 인사들 때문에 새해 분위기는 더욱 좋아졌다. 재단 이사들과 병원장들은 스크린에서나 봤던 스타들에게 명함을 돌리며 안면을 트자 횡재한 표정으로 변했고, 조금이라도 몸이 아프면 언제든 찾아오라는 말도 잊지 않았다.
오후까지 한바탕 손님을 치르자 우리 가족만 남았다.
술기운이 조금 남아있는 아버지는 조용히 나를 불러 정원으로 나갔다.
“찬 바람 쐬니 술이 확 깨는구나.”
“술기운이 다 날아가야 할 만큼 중요한 말씀 하시려고요?”
아버지는 나를 쓱 보시더니 옆구리를 쿡 찔렀다.
“자식이, 눈치 하나는 정말….”
아버지는 오늘 서재에서 있었던 일을 하나도 빠짐없이 담담하게 이야기했다. 아버지의 이야기가 끝나자마자 떠오른 사람은 고모였다.
약속한 대로 지분의 절반을 내놓을까?
그리고 내 관심을 확 끄는 하나의 단어.
“금융 부분요?”
“그래. 네 생각은 어떠냐? 할아버지께서 네게 금융 부분을 줄 거라고 생각해?”
“네.”
자신 있게 대답했다. 사족을 덧붙여서.
“큰아버지들의 방해만 없다면 자연스럽게 넘기실 겁니다. 하지만 계열사 지분 관계 정리하려면 시간이 좀 걸리겠죠? 그 안에 무슨 일이 생길지는 모르는 일 아니겠어요?”
“무슨 뜻이냐?”
“고모만 확실하게 챙긴 겁니다. 큰아버지 두 분은 인사권만 확보했고요. 하지만 할아버지의 변덕은 누구도 예측할 수 없으니 어떻게 바뀔지 아무도 모릅니다.”
아버지는 차디찬 겨울 공기를 들이켜며 생각에 잠겼다.
이윽고,
“뭐든 혼자 하려 하지 말고 도움이 필요할 때는 이야기해라. 여차하면 내가 형님들 멱살이라도 잡으마.”
“큰아버지들께서 아버지 멱살 잡을 일이 먼저 생길 거 같은데요? 하하.”
그전에 고모부터 시작하고…….
* * *
새해 둘째 날, 최창제 시장은 서재 앞에서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조용히 문들 두드렸다.
응답이 없었지만, 조용히 문을 열고 들어갔다.
“아이고. 어서 오시게, 최 시장. 번거롭게 새해 인사까지 올 필요는 없는데 말이야. 허허.”
잔뜩 긴장한 최 시장은 자신을 향해 환히 웃으며 내미는 진 회장의 거친 손을 얼떨결에 잡았다.
하지만 그의 입에서 나온 호칭, 최 서방이 아닌 최 시장이라는 단어가 마음에 걸렸다.
“죄송합니다, 장인어른. 일찍 왔어야 했는데 제가 많이 늦었습니다.”
“공무 바쁘신 분인데 뭘 그리 신경 쓰나? 괜찮네.”
최 시장은 진 회장의 말투에서 자신을 어떤 사람으로 생각하는지 깨달았다.
자신은 순양의 사위가 아니라 서울시장일 뿐이다. 최 시장은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서재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장인어른. 죄송합니다,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십시오. 제가 잠시 권력에 취해 제정신이 아니었습니다. 용서해주십시오.”
진 회장은 납작 엎드린 최 시장을 물끄러미 보다 낮지만 단호한 한마디만 던졌다.
“끝났어. 그만 일어나게.”
끝났어…!
진 회장의 입에서 나온 말이다. 돌이킬 수 없다. 이건 불변이다.
최 시장은 계속 엎드린 채 굳어버렸다. 그는 진 회장의 사위라는 명함은 없어졌지만, 정치인 최창제의 명함은 버릴 수가 없었다.
이 명함을 유지하려면 진 회장과 깔끔한 이별을 해야 한다는 것도 잘 안다. 저 노인이 마음먹으면 자신의 인생이 지옥으로 변해버린다.
“용서해주십시오!”
기회를 달라는 소리는 소용없지만, 용서를 바라는 마음은 꼭 전달해야 했다.
최 시장은 진도준이 알려준 대로 들고 온 선물 보따리를 풀었다. 이것으로 용서받아야 한다.
“대현 그룹과 약속했던 뉴타운 계획은 백지화했습니다. 만약 장인어른께서 기회를 주시면 새로운 뉴타운 계획을 세우겠습니다.”
최 시장은 진 회장이 원하는 장소와 규모로 만들어 상납하겠다는 뜻이 제대로 전달되기를 빌었다.
“그만 일어서라니까.”
최 시장은 천천히 몸을 일으켜 의자에 앉았다.
“할 말이 뭔가? 이 늙은이가 알아들을 수 있게 본론만 짧게 말해.”
“시키는 대로 뭐든 하겠습니다.”
“그런다고 바뀌는 건 없을 텐데?”
“시키는 대로 뭐든 하겠습니다.”
“이혼은 진행할 걸세. 서윤이가 마지못해 내 뜻을 따르는 게 아냐. 그 애가 결정한 거야. 어떤 일이 있어도 자네는 우리 집안에 발붙일 수 없다는 뜻이야.
“시키는 대로 뭐든 하겠습니다.”
“허허, 그 사람 참….”
고개를 숙인 채 미친놈처럼 같은 말만 되풀이하는 최 시장을 보며 진 회장은 피식 웃었다.
근본이 자잘하다.
순양의 힘이 아무리 크다 해도 이럴 때일수록 사내답게 독기 품고 덤비는 놈이 큰 과일을 따 먹는다.
수박 한 덩이가 딸기 몇 개보다 낫지 않은가?
진 회장은 마지막으로 당부의 말이자 동시에 경고의 말을 남겼다.
“자네가 20년 넘게 이 집안사람으로 지내며 보고 들은 거 전부 잊게. 철저히 남이 되는 거야. 그러면 나도 자네를 남으로 대할 걸세. 무슨 말인지 알아듣겠는가?”
최 시장에게는 완전히 남이라는 말이 이처럼 반갑게 들릴 수 없었다.
섭섭함도, 분노도, 기대도 없는 게 남이다.
자신이 입만 다물면 최소한 앞길을 가로막지는 않겠다는 뜻 아닌가? 괜히 남의 인생에 끼어드는 사람은 없으니까 말이다.
아직 서울시장이다. 임기도 많이 남았다. 그 안에 정치적 기반을 굳건히 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모두 잊겠습니다.”
“잘 알아들으니 다행이네. 그만 가시게. 이제 우리는 다시 볼 일 없을 걸세.”
“장인… 아니, 회장님. 전 아직 서울시장입니다. 서울시장으로서 회장님과 만날 수는 있지 않겠습니까?”
“무슨 말씀을 그리 시건방지게 하시는가? 청와대가 불러도 당선 직후 딱 한 번 얼굴 비추는 게 전부야. 내가 그리 한가해 보이나? 서울시장 따위를 직접 만나게? 일 이야기 하고 싶으면 어디를 접촉해야 하는지 잘 알 텐데?”
사안 하나하나 다르다. 주로 순양건설 기획실이나 그룹 전략실 본부장급을 만날 수 있다.
서울시장은 순양그룹 전무나 부사장이 한계다.
“아, 죄송합니다. 결례를 범했습니다.”
“나가보게.”
최 시장은 자리에서 일어서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마지막 부탁이다.
“그리고…. 혹시 옛정을 생각해주신다면….”
“남이라는 말 잊었나? 우리 사이에 과거는 없네.”
차디차게 말을 끊어버리는 진 회장을 보자 마지막 한 가닥의 기대도 사라졌다.
집안의 대들보인 법무법인은 이제 문 닫아야 한다. 당장은 아니더라도 풍족한 수입원 하나가 사라진다.
집안 전체가 매달렸던 곳이 무너지면 자신만이 유일한 희망이요 등대다. 집안 전체를 먹여 살리려면 참 많은 일을 벌여야 하고 해야 한다.
이미 풍요로운 생활에 익숙한 집안사람들. 그 사람들이 최소한의 생활을 영위하게 하려면 정말 빡세게 돈을 벌어야 한다.
* * *
“아버지께 이야기 들었어요. 축하해요, 고모. 순양백화점 그룹의 회장님이 되셨네요. 하하.”
“축하합니다. 진 사장님. 아니, 이젠 회장님으로 불러야 하나요?”
고모는 환히 웃으며 나와 오세현 대표를 반겼다.
이제 고모부의 사정 따위는 조금도 개의치 않는지 다시 호텔 생활을 시작했다. 여전히 화려한 여인이다.
“어휴, 회장이라뇨? 그런 말씀 마세요, 부담스럽습니다. 아무튼 고마워요, 다 오 대표님 덕분이죠.”
“무슨 말씀을요? 제가 한 게 뭐 있다고….”
“아니에요. 우리 도준이, 오 대표님께 배워서 이렇게 훌륭하게 컸잖아요. 전 도준이만 믿고 있어요.”
내 엉덩이를 툭툭 건드리며 널찍한 소파에 자리 잡았다. 중앙 상석에 앉은 자세가 이미 달라졌다. 한결 더 거만하고 도도했다.
“제가 꼭 뵙자고 한 건. 함께 일 좀 하자는 제안 드리려고요. 꼭 좀 함께했으면 합니다.”
오세현은 내 눈과 마주친 후 머리를 끄덕였다.
“순양백화점 그룹과 함께 일하는 건 제게도 큰 기회죠.”
고모는 두툼한 서류철 하나를 내밀었다.
“이걸 한번 봐 주세요. 계열 분리하면서 우리 백화점 그룹이 순양그룹에 갚아야 할 빚이에요. 우리 임원들은 대형할인점 체인이 영업이익을 낼 때까지 감당하기 버겁다는 의견을 내놓았어요.”
재빨리 서류를 낚아챈 오세현은 한참을 들여다본 뒤 긴 한숨부터 쉰다.
“체인점 부지 확보와 건설비용이 만만치 않네요. 호텔과 백화점 예상 매출 목표는 좀 과하고요. 요즘 같은 불경기에 이 정도 매출이 나오기를 바란다는 건 좀….”
위에서 찍어 누르니 아랫사람들은 과도한 숫자를 만들어냈을 것이다. 백화점, 호텔이 매출을 내지 못하면 빚은 더 늘어나고 이자는 감당할 수 없다.
고모는 오세현의 부정적인 평가는 이미 예상한 듯 표정이 변하지는 않았다.
“내년까지 할인점 네 곳 오픈은 무리수 아닐까요? 자금 부담만 가중될 텐데.”
“제가 맡은 뒤 벌이는 첫 사업이에요. 대형마트 체인 사업을 연기할 수는 없죠. 이건 그룹 내에서의 능력 문제니까요. 연기하거나 포기한다는 말이 조금이라도 나오면 계열 분리 자체가 없었던 일이 될 겁니다. 안 돼요.”
오세현과 고모가 현실적인 이야기를 늘어놓을 때 난 고모의 본심을 발견했다.
고모는 채권자를 바꾸고 싶은 것이다.
순양그룹 벽돌 한 장도 자기 것으로 생각하는 장남과 자신만이 회장 그릇이라 자부하는 둘째 오빠는 호시탐탐 여동생의 몫을 다시 뺏어가려고 발톱 드러낸다.
고모는 발톱을 피해 제삼자인 미라클을 원한다. 그리고 조심스레 본심을 슬쩍 드러냈다.
“그래서 제가 오 대표님께 제안 드리려고 하는데요.”
“네. 말씀하세요.”
“대형할인점 체인 공사…. 대아건설이 좀 맡아 주면 안 될까요?”
오, 이런 아이디어까지 짜내다니.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확실한 영역을 굳히려는 각오가 엿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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