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Youngest Son of Sunyang RAW novel - Chapter 133
오세현은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이미 부지 매입과 매장 건설비용을 확인했다. 수익률을 계산하려면 건설사 임직원들 손에 맡겨야 한다.
“맡는 거야 뭐 어렵겠습니까? 오히려 머리 숙여 감사드려도 모자라죠. 하지만 그냥 주시는 건 아닐 것 같고.”
오세현은 날카롭게 고모의 얼굴을 살폈다. 당당하지 못한 표정을 확인한 그는 서서히 자세가 변해갔다.
이 자리에서 누가 우위에 서 있는지 보여주려는 모양이다.
“혹시 모르실지도 몰라 말씀드리는데 그 비용, 후한 편입니다. 계열 분리 전에 설정한 금액이라…. 일종의 일감 몰아주기, 내부거래죠.”
“그러니까 더 수상한데요? 이 좋은 걸 왜…?”
모르는척하며 계속 따져 묻는다. 고모 입에서 듣고 싶은 단어가 나와야 하기 때문이다.
“숨통 좀 틔워 주세요. 자금 압박에서 벗어나야 하는데 그 방법밖에 없어요. 부탁 좀 드리겠습니다.”
“외상으로 하자, 이 말씀이군요.”
결국, 부탁이라는 말을 끝까지 듣고야 만다.
“영업 개시일부터 이자까지 포함해서 결제할게요. 분할로….”
고모는 되지도 않는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이미 계약 끝난 상태 아닙니까? 순양건설과?”
“그건 제가 처리할 수 있어요. 돈으로 족쇄 채워 놨으면서 계약까지 묶어둔 건 항의할 생각이니까요. 게다가 내부거래용 계약이니 문제없어요.”
나라면 절대 신규 사업을 벌이지 않는다.
타이밍이 절묘하다. 대형 마트가 자리 잡고 겨우 본전치기라도 할 때쯤이면 또 하나의 위기가 닥치니까 말이다.
경기가 조금 되살아날 기미가 보이니 고모의 머리에는 지금 장밋빛 미래가 그려질 것이다. 몇 년 후를 아는 건 나뿐이다.
“어차피 결정 요인은 하나죠. 외상 거래니만큼 담보를 얼마나 받아둬야 하느냐? 아닙니까?”
고모의 얼굴이 좋지 않다.
“이런, 전 오 대표님과의 신뢰 관계를 믿었는데… 담보라니 좀 당황스럽군요.”
“친구와 은행, 동시에 돈을 빌리면 보통 은행 돈부터 갚습니다. 신뢰란 그런 것이죠. 내게 유리한 쪽으로 가능성을 열어두는 것. 내게 불리한 쪽으로 흘러가면 배신당했다고 화를 내기도 하죠. 신뢰요? 돈 앞에서 쉽게 무너집니다.”
단호한 오세현 앞에서 고모는 할 말을 잃었다.
“삼촌. 빨리 일 시작하죠? 이 서류, 검토하는 게 어떨까요?”
내 눈짓에 오세현은 서류를 챙겼다.
“서로 섭섭하지 않을 만큼 적정선을 한번 찾아보겠습니다. 그럼….”
뒷일은 내게 맡겼다.
오세현이 호텔 방을 나가자마자 고모는 울화통이 터져버렸다.
“저 작자, 도대체 뭐야? 내가 밀어준다는데 저따위 태도로 나와!”
“고모 약점이 뭔지 아니까요.”
“뭐라고?”
“경리 장부만 흘낏 봐도 회사 사정 싹 꿰뚫는 분입니다. 고모가 할아버지께 백화점 지분 전부 받기도 전에 다시 뺏긴다는 걸 알아채신 겁니다. 아쉬울 게 없으니 저렇게 뻣뻣하게 나오는 거죠.”
고모는 소파 손잡이를 꽉 잡았다.
“그렇게 절망적이니?”
“백화점이나 유통 자금 담당 임원은 알 겁니다. 단지 어려워서 솔직한 말을 못할 뿐이죠.”
“망할 영감탱이….”
할아버지를 욕하는 것이 거슬렸지만, 이해는 한다. 독립하라며 한 재산 뚝 떼어줬는데 포장지를 열어보니 빚더미였으니 말이다.
“고모. 아직 모르겠어요?”
“뭘?”
신경질적인 고모를 달래듯 차분하게 말했다.
“이건 할아버지의 시험이에요. 이걸 무사히 넘기면 백화점 그룹을 그날로 고모 손에 들어올 겁니다. 고모가 맡은 사업의 본질은 유통이니 경기에 민감하고 자금 회전이 관건 아닙니까? 그걸 테스트하는 게 틀림없어요.”
눈치 빠른 고모는 내 말뜻을 정확히 이해했다.
한동안 고민하더니 내 의견을 물었다. 난 고모의 욕심을 확인하고 싶었다.
“저라면 대형 마트 계획을 좀 미루고….”
“아까도 말했잖아. 그건 안 돼.”
“그럼 과감한 정리를 시작해야죠.”
“정리?”
“네. 골프장 몇 개 처분하고, 수익 낮은 콘도도 정리합니다. 백화점과 호텔은 상징이니까 그대로 놔두고요.”
내가 말하는 동안 인상을 찌푸리고 있는 걸 보니 전혀 정리할 생각은 없어 보였다.
하긴, 살림살이 쪼그라들면 모양새가 확 빠지니 꺼리는 건 당연하다.
“당분간 자산 정리하는 건 안 돼. 그거 역시 능력 부족으로 비칠 거야.”
아니다. 아주 상식적이고 정상적인 경영이다.
현금이 쪼들릴 때는 뭐라도 팔아서 자금 구하는 게 우선이다. 할아버지도 높게 평가할 사항이다.
“고모는 미라클에서 돈을 끌어오는 것만이 해결책이라고 생각하시는군요.”
“그게 가장 간단해. Simple is best. 알지?”
이 상황에 끌어다 쓰는 게 맞는지 모르겠지만, 고모 생각은 변함없었다.
“도준아. 오 대표에게 말 좀 잘해줘. 내가 잘되는 게 너도 잘되는 거잖아. 우린 한배를 탄 동업자 아니니.”
고모의 욕심은 확인했고, 이제 믿음을 확인할 때다. 고맙게도 먼저 언급까지 했으니 말이다.
“고모. 솔직하게 말씀해 보세요. 지난번 약속 아직 유효합니까? 한배를 탔다는 게 그 뜻인가요?”
당황한 고모가 쉽게 대답하지 못한다. 이럴 줄 알았다.
“괜찮아요. 이해해요.”
내가 웃으며 머리를 끄덕이자 고모는 더 당황했다.
“이해? 뭘 이해해?”
“고모는 늦어도 올해 안으로 계열 분리하고 실질적인 주인이 되겠지만 전 불확실하니까요. 금융 계열을 제가 받는다는 보장이 없잖아요. 다시 말해 고모는 현금, 전 어음이니까요.”
“그, 그렇지? 아, 오해는 마. 싫다는 건 아냐. 네 말처럼 우리 둘의 상속이 깔끔하게 끝났을 때는 당연히 손을 잡는 거야. 단지 아직 확정된 건 없어서 섣불리 확답하기가 좀 그래.”
고모의 마음은 충분히 알았다. 어차피 진심으로 나와 손잡을 생각은 없었다. 날 이용할 생각이 전부였을 것이다.
나야 이 여인의 욕심에 불만 지르면 된다. 백화점 계열만으로 만족할 여인이 아니니까 말이다.
“그런데 고모, 잘 생각하세요.”
“뭘?”
“만약 제가 순양의 금융 계열을 가진다면 제 마음도 변할지 몰라요. 순양생명만 하더라도 고모가 가진 전부보다 더 가치 있으니까요. 그때 제 손은 큰아버지에게 향할 수도 있습니다.”
예상하지 못한 내 말에 고모는 또 당황했지만 무시하고 일어섰다.
“아무튼, 오 대표에게는 부탁해볼게요. 이건 별개의 문제니까요.”
* * *
고모의 제안을 받고 난 뒤 한 달이 지나서야 윤곽이 나왔다.
회계사들이 모여 순양유통 계열이 짊어진 빚과 자금 흐름을 검토한 내용을 정리한 내용만 한 뭉치였다.
“대형 마트 공사는 지금 HW 건설에서 아직 분석 중이야. 소요 자금은 고사하고 우리 손이 부족해서 못한다고 우는 소리부터 나오더라. DMC에 모든 리소스를 쏟아부어야 할 판이니까.”
“하도급 회사 알아보죠. 요즘 같은 불경기에 일손 부족해서 못한다는 건 말이 안 되죠. 그보다 고모가 필요한 자금은 어느 정도예요?”
오세현은 머리부터 흔들었다.
“지금 당장 사천억은 수혈해야 해. 안 그러면 이자 감당이 안 된다고. 백화점, 호텔이 버는 돈 전부 이자로 나갈 판이야. 한 달 매출만 꼬꾸라져도 연체가 시작될걸?”
“할아버지가 좀 심했네요.”
“더 확인할 것도 없어. 이건 유산 상속이 아니라 빚 상속이야. 계열사 빚을 잔뜩 얹어서 보냈어.”
“하지만 제게는 기회죠.”
“왜? 백화점 삼키려고?”
“돈 주고도 못 사는 게 순양그룹 지배 지분입니다. 자기들 울타리 안에서만 돌리는 주식 아닙니까?”
“네가 순양에 집착만 하지 않는다면 그 돈으로 더 좋은 회사를…. 아니다. 관두자. 원래 꿈이라는 건 합리적인 사고로 계산할 수 있는 게 아니니까.”
“지금은 비합리적이지만 순양그룹 총수 자리에 앉으면 모든 게 합리적으로 바뀝니다. 그 자리는 돈의 상징이 아니라 모든 권력의 상징이니까요.”
빌 게이츠는 국가 권력기관의 감시를 받지만 진양철 회장은 국가 권력기관을 줄 세운다. 욕망을 충족하기에는 우리 할아버지 자리가 더 적합하다.
“그 권력을 쥐고 뭘 하고 싶은데?”
“그건 내 손에 쥔 다음에 생각하려고요. 일단 사천억 지원하죠.”
할아버지께 10억 달러를 주고 바꾼 원화 1조 6천억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백화점 그룹이 아무리 어렵더라도 지탱하는 건 전혀 문제없는 돈이다.
“담보는 당연히 주식이겠지?”
“그렇죠. 모회사인 순양유통의 주식을 받아야죠. 주식 가치부터 계산해야겠지만 우리 고모, 머리 아플 겁니다. 흐흐.”
즐거운 웃음이 터져 나올 때 노크 소리가 들렸다.
“대표님. 손님 오셨는데요?”
비서가 전해준 명함을 본 오세현의 눈이 커졌다.
“어? 이 친구는…? 들어오라고 해요.”
자리를 비켜주려 슬쩍 일어나려 하자 오세현이 손짓했다.
“괜찮아. 그냥 있어. 인사 나눠도 될 만한 사람이니까.”
문을 연고 들어온 사내는 오세현을 향해 머리를 꾸벅 숙였다.
“선배님. 오랜만입니다.”
“이야… 이게 누구야? 이상수! 요즘 잘나가는 벤처 사업가께서 여긴 어쩐 일로….”
잘나가는 40대 초반의 벤처 사업가치고는 행색이 추레했다.
셔츠 옷깃과 소매 끝은 때가 새까맣게 끼었고 부스스한 머리, 까칠한 수염까지. 흡사 도망자 같은 모습이다.
악수하던 오세현도 이상한 낌새를 눈치챘다.
“근데 너, 꼴이 왜 이래? 사업 잘 안되냐?”
“아닙니다. 요즘 너무 바빠서…. 옷 갈아입고 온다는 걸 깜박했어요. 죄송합니다.”
“아냐. 바쁘면 좋지 뭐. 그것도 너무 잘나가서 바쁜 건데….”
이상수의 눈길이 나를 향했다.
“아, 인사해. 나랑 같이 일하는 친구야. 아주 대단한 인재라고나 할까? 하하.”
이상수는 먼저 손을 내밀었다.
“진도준입니다.”
그의 눈빛이 달라졌다.
“혹시 순양그룹…?”
“아, 네.”
어떻게 알았을까? 오세현도 조금 놀라는 기색인 걸 보니 나에 대해 언급한 적이 없었던 것 같다.
“그렇군요. 아직 대학생이라고 들었는데….”
“이 친구는 날라리 학생이야. 학교보다는 여기서 나랑 죽 때리는 시간이 더 많아. 하하.”
오세현이 웃으며 말했지만, 그의 표정은 조금도 풀리지 않았다.
“저도 소문은 많이 들었습니다. 순양그룹에서 걸출한 인재가 나타났다고요.”
“소문이 돌아?”
나도 오세현도 깜짝 놀랐다. 하지만 조금만 생각해봐도 이미 내가 전면에 나선 적이 몇 번 있으니 소문이 돌지 않는 게 더 이상하다.
“네. 심지어 미라클 인베스트먼트의 실질 소유주가 순양그룹이고 손자인 진도준 씨가 관리한다는 말까지 은밀하게 돌아다닙니다.”
순양자동차 인수 때문이다. 할아버지가 묵직한 계열사를 쉽게 넘길 분이 아니라는 건 이 바닥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다.
“헛소문이야. 나야 그런 소문 돌면 나쁠 것 없지만….”
고개를 끄덕인 이상수가 명함을 꺼냈다.
「뉴 데이터 테크놀러지. 대표이사 이상수.」
아, 바로 그 사람이다.
골드뱅크와 더불어 한국 벤처 사업의 현실을 보여준 산증인. 아니 미래의 산증인이 될 사람.
‘광고를 보면 현금을 준다.’는 아이디어로 1990년대 후반 벤처기업의 대표 주자로 각광받았던 골드뱅크가 작년 10월 코스닥에서 최초의 벤처 바람을 일으켰다면 뉴 데이터는 가장 강력한 태풍을 만든 기업이다.
골드뱅크는 현재 액면가 500원짜리가 만 원이 넘는 거래가로 치솟았다. 묻지마 투자의 장본인이다. 주가 상승으로 떼돈을 거머쥔 골드뱅크는 지금 신용금고, 프로농구단 등을 인수하겠다며 어슬렁거린다. 어차피 내년엔 쪽박 차겠지만.
이상수는 골드뱅크보다 더 기대받는 기업의 대표다.
그런 그가 왜 이리 초라한 몰골로 나타났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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