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Youngest Son of Sunyang RAW novel - Chapter 137
“삼키긴 뭘 삼켜요? 우린 순양백화점 그룹과 돈독한 관계를 유지할 생각입니다. 앞으로 꽤 많은 수익을 창출할 좋은 거래처니까요.”
오세현은 순식간에 힘을 뺀 눈빛으로 변했다.
“그 수익이 사조 원이라고? 말이 안 되잖아!”
진상기는 여전히 성난 얼굴로 소리쳤다.
“손에 쥐는 캐시만 생각하지 말고요. 우린 HW 그룹이라는 기업 집단의 대주주라는 걸 잊지 마세요. 진서윤 사장님이 앞으로 진행할 사업에 우리가 참여하는 겁니다. 그 가치를 다 합쳐서 열 배라고 말한 겁니다. 이미 우리 전문가들이 계산까지 끝냈어요. 거래 깨자고 말한 게 아닙니다.”
웃음이 터지려는 걸 겨우 참았다.
투자를 업으로 삼은 사람은 기본적으로 노름꾼이다. 노름꾼은 사기도 곧잘 친다.
그럴듯하지만 지금 막 쏟아내는 헛소리일 뿐이다.
큰아버지는 반박하고 싶으나 전문가의 계산이라는 말이 주는 권위에 아무 말 못 했다.
“이사장님. 순양그룹 지분 빠져나가는 게 께름칙하시다면 진서윤 사장이 사업 잘해서 빚 갚으면 됩니다. 아니면 제게 더 나은 제안을 하십시오. 채권을 넘기겠습니다.”
“더 나은 제안이라니?”
“우리 HW 그룹이 순양의 중장기 프로젝트에 참여해서 큰돈을 벌 수 있도록 해주신다면야, 뭐….”
청소용역까지 자회사를 만들어 밖으로 빠져나가는 돈을 막은 순양그룹이 중장기 프로젝트에 우리를 끼워 넣을 리가 없다.
확고한 거절이라는 것을 확인한 큰아버지는 더 있을 이유가 없다는 걸 알았다.
“오 대표의 뜻은 잘 알았소. 내 돌아가서 상의해 보리다.”
차디찬 눈빛만 던지고 일어서는 큰아버지는 내 어깨에 손을 올리고 말했다.
“언제 집으로 한번 와라. 저녁이나 먹자.”
“네. 곧 찾아뵙겠습니다.”
진상기가 거칠게 문을 닫고 사무실을 나가자 오세현은 비웃음을 보였다.
“너희 집, 정말 장난 아니구나. 단 하나라도 뺏기지 않으려는 욕심 봐라.”
“핏줄이 어디 가겠습니까?”
대충 얼버무렸지만, 욕심 때문에 저러는 건 아니다. 할아버지의 허락만 떨어지면 언제든 되찾아갈 방법은 많다.
저들의 시커먼 속내는 뭘까?
* * *
“그 새끼, 장사치 아냐. 꿈쩍도 안 해.”
“천억을 얹어준다고 해도?”
“돈 말고 사업거리를 달래. 우리한테 빨대 꼽고 한 십 년 우려먹을 생각인 거야.”
“오세현이가 직접 그렇게 말했어?”
“그렇다니까. 도준이도 옆에서 똑똑히 들었어.”
“그놈은 뭐라고 했어?”
“아무 말 없던데? 그냥 가만히 있었어.”
오세현은 단기간에 엄청난 돈을 벌 기회마저 차버렸다. 다른 이유가 아무리 그럴듯하게 들려도 치고 빠지는 일이 주업인 여의도 놈들의 모습과 다르다.
진영기 부회장은 이대로 지켜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오세현이 아버지인 진 회장의 수족이든, 어린 조카의 동업자든 판단은 뒤로 미뤄도 된다.
가장 먼저 할 일은 백화점 그룹을 엉뚱한 놈이 가져가는 것부터 막아야 했다.
그는 진동기를 찾았다. 강력한 적이지만 이 일을 하는 동안은 힘을 합쳐야 한다. 결승전에서 만날 때까지 들러붙은 파리 새끼들부터 처리하는 게 맞다.
진영기, 진동기 형제는 조금도 지체하지 않고 순양호텔로 달려갔다.
“어머, 오빠들이 웬일이야? 그것도 함께? 사이좋아 보이네.”
진서윤은 나란히 들어오는 두 사람을 보며 한껏 목소리를 높였다. 이제 재산도 갈랐고, 순양그룹과 연결된 것도 없다.
핏줄만 나눴을 뿐 더는 눈치 볼 까닭이 없다는 걸 드러내는 것이다.
“회사 날려 먹고 속이 편한가 봐? 얼굴 좋네.”
진영기가 못마땅한 소리를 냈지만, 진서윤은 들은 체 만 체 했다.
“속 긁으려면 그만둬. 이제 그럴 때는 지났잖아?”
두 오빠는 집무실로 꾸민 스위트를 둘러보며 중앙의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긁으러 온 게 아니고 도대체 어쩌려는지 알아보러 왔다. 속 시원하게 이야기나 좀 해봐.”
진동기가 차분하게 말했지만, 진서윤은 여전히 귀찮은 표정이었다.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할게. 뭐가 그리 궁금해?”
“오세현이 말이다. 네가 생각하는 만큼 믿을 수 있는 놈 아니다.”
“내가 그 사람을 믿는다고 생각해? 이건 거래야. 믿기는 뭘 믿어?”
“단순한 채권, 채무? 그깟 이자 좀 챙기려고 오세현이가 너한테 돈 빌려준 것 같아? 천억도 거절한 놈인데?”
“뭐? 천억? 무슨 말이야?”
두 사람의 이야기를 자세히 들은 진서윤은 한동안 굳은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이제 알겠니? 건물 담보 잡아놓고 이자, 원금 상환 독촉하다가 건물 삼키는 사채업자 흉내 내는 거다. 넌 거기에 당한 거고.”
“1호 대형 마트 공사도 곧 들어가지? 그 공사 대금은? 앞으로 돈 들어갈 일이 태산인데 감당하겠어? 한 번이라도 삐끗하면 전부 다 뺏긴다고.”
두 오빠가 불길한 소리를 마구 해대자 진서윤의 닫혔던 입이 열렸다.
“그래서?”
“뭐? 아직 감 못 잡았어?”
“그러니까 내가 여우 피하려다 호랑이 굴로 들어갔다는 소리야?”
“알아들었네.”
진영기 부회장이 한심하다는 듯 툭 던지자 진서윤은 생끗 웃었다.
“아니지, 그 반대지. 호랑이 아가리에서 빠져나와 늑대 만난 거야. 운은 내가 더 좋지 않아?”
자신들을 호랑이 아가리로 표현하자 발끈했지만, 뒤를 이은 진서윤의 말 때문에 아무 소리 하지 못했다.
“오세현이가 신경 쓰이면 착한 우리 오빠들이 호랑이가 아니라 토끼라는 걸 보여주면 돼. 오세현이에게 천억 얹어준다고 했지? 여동생에게는 높은 이자 물려 놓고 생판 남에게는 천문학적인 돈을 줘? 어이가 없네, 진짜.”
진서윤은 두 오빠에게 최고의 선택지를 말했다. 물론 자신의 입장에서 말이다.
“내가 회사 뺏길 것 같아 두려우면 돈으로 막아. 사천억에 천억 더 얹어서 오천억 빌려줘. 이자는 은행의 절반 수준으로. 돈 벌어서 천천히 갚을게. 그럼 우리 오빠들 걱정할 일이 없잖아?”
구구절절 옳은 소리지만 두 오빠는 헛기침만 할 뿐이다.
진서윤의 말대로 했다가는 백화점 그룹을 다시 찾아올 방법이 없다.
불경기가 지나가고 경제가 좀 살아나면 굳히기에 들어갈 것이고 빌린 돈은 순식간에 갚아버릴 것이다.
완벽한 계열 분리가 끝나는 순간 진영기, 진동기는 백화점과 호텔의 VVIP 고객으로 등록될 뿐 더 이상은 기대할 수 없다.
오빠들이 입을 닫고 아무 말 못 하자 진서윤은 비웃음만 흘렸다.
“나이 오십인 외동딸 먹고살라고 아버지가 준 거야. 그렇게 탐나? 왜? 밤마다 올케들이 백화점 가져오라고 바가지 긁어? 그냥 쇼핑이나 하라고 해. 내가 신상 나올 때마다 잔뜩 할인해줄 테니까 돈 걱정 말고. 알았어?”
형제는 여동생에게 된통 당한 뒤 호텔을 나왔다.
“빌어먹을 년.”
진영기가 뱉은 욕설을 못 들은 척하며 진동기가 말했다.
“어차피 저 애는 계속 실수를 저지를 거야. 분명히 기회는 와. 좀 더 기다려보자.”
* * *
도시를 태울 듯한 불볕더위가 한창인 무렵, 우성그룹의 금융채권단은 우성그룹과 재무구조개선 수정약정을 체결했다. 이것은 곧 있을 워크아웃의 신호에 지나지 않았고 재계는 그야말로 충격에 휩싸였다.
우성은 IMF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전 세계를 상대로 공격적인 인수전을 벌였다. 그 결과 98년에는 외국 현지법인만 400여 개에 이르렀고 경제위기로 휘청거린 순양그룹을 제치고 재계서열 2위까지 뛰어올랐다.
그러나 경기침체의 장기화와 세계 시장의 위축으로 우성그룹의 입지는 크게 흔들렸고, 개발도상국 위주로 사세를 확대하다 보니 부진을 벗어나지 못했다.
외형확대에 초점을 맞추었으니 정부가 요구했던 구조조정에는 소극적이었다. 규모를 포기할 수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자금난이 가중되던 우성은 알짜자산인 호텔까지 매각했으나 1999년 3월에는 이미 부채 비율을 무려 400%를 훨씬 넘은 상태여서 수습이 어려운 지경이었다.
7월, 우성은 초고강도 구조조정안을 발표하였으나 채권단은 이를 반려했고 8월, 채권단의 압력이 시작된 것이다.
채권단과 우성그룹의 수정약정 뉴스를 보며 할아버지는 혀를 찼다.
“우성그룹은 사실상 해체군요.”
“그래. 우성 회장이 사재 다 털어놓고 경영권도 포기하겠다고 했지만 감당할 수준이 아니지.”
“덩치 큰 물소가 쓰러졌으니 살점 뜯어먹으려고 다들 덤비겠어요.”
“넌? 탐나는 부위가 없어? 너 돈 많잖아. 아직 원화로 1조 원 정도 쥐고 있지?”
“남의 통장 함부로 들여다보시면 안 됩니다. 그거 범죄예요. 흐흐.”
“통장 안 봐도 통밥으로 나온다, 이놈아. 아직 이 할애비 머리 녹슨 거 아니다.”
할아버지는 우성그룹 계열사 검토를 끝마친 것 같다.
“제 돈을 쓸 곳이 있습니까?”
“우성해양조선. 그거 하나는 쓸 만하다. 이걸 한번 봐.”
할아버지는 자료 파일 하나를 테이블에 툭 던졌다.
“볼 줄 알지? 그 정도면 네놈 회사 구색 갖추는데 쓸 만할 게다.”
1999년, 우리나라는 수주잔량에서 일본을 2만 CGT(표준화물선 환산톤수)가량 앞서기 시작하며 호황기를 누리기 시작했다. 세 손가락 안에 드는 우성해양조선은 우성그룹 계열사가 아니었다면 엄청난 경영성과를 낼 우량기업이다.
서류파일은 해양조선, 우성상사 그리고 우성증권은 인수할 가치가 있다고 결론지었다.
“구색 맞출 생각은 없습니다. 그리고 돈보다 사람이 부족해요. 인수해도 경영할 사람이 없습니다.”
“사람은 내가 빌려주마.”
“순양중공업 사람들요?”
“다른 곳에도 인재는 많아. 돈이 없어 걱정이지 사람 없어 걱정이겠느냐?”
“글쎄요. 아직 인수한 회사도 이곳저곳 물 새는 곳 막느라 힘듭니다. 그 회사들부터 챙겨야 해서….”
나를 노려보는 할아버지의 눈빛에 다른 뜻이 숨어있다는 걸 알았다.
“돈 빌려드려요?”
“아니다. 순양이 인수하는 건 어려워. 우리도 구조조정 한다고 소문냈는데 또 회사를 인수한다면, 그것도 엄청난 덩치의 회사를 인수한다면 정부가 가만있지 않을 거다. 우성그룹 채권단도 우리와 선 그을 거고.”
“그러니까 우성이 탐나긴 하는데 현실적으로 감시하는 눈이 너무 많다? 그리고 자금 사정도 여의치 않고. 맞습니까?”
“그렇지. 그러니까 네가 바지사장 노릇 좀 해라. 잠잠해지면 내가 다시 가져오마.”
할아버지가 원하는 게 뭔지 알았다. 우성해양조선을 미라클이 인수하고 적당한 때가 오면 순양그룹에 넘기는 것이다.
순양중공업이 조선업을 맡고 있지만, 업계 1위는 아니다. 대현 조선이 압도적이다. 하지만 순양과 우성이 합치면 대현은 2위로 밀려난다.
할아버지가 원하는 것은 단순한 것 같지만 얽힌 문제가 좀 있다.
시기가 문제다.
한두 달 안에 정리될 문제도 아니고 최소 몇 년 뒤의 일인데….
순양중공업은 둘째인 진동기 부회장이 맡았다. 만약 우성해양조선을 순양으로 넘길 때 할아버지가 살아 계시지 않는다면? 칼자루는 진동기 부회장이 쥐게 된다.
고심하는 내 모습을 본 할아버지는 뜻밖의 말을 꺼냈다.
“내키지 않으면 그만둬도 된다. 괜찮아.”
아주 인자한 표정이지만 괜찮을 리가 없다. 이미 모든 검토를 다 끝내고 결정한 상태에서 말을 꺼내는 분이다.
우성해양조선을 가지기로 마음을 굳혔을 텐데… 뭔가 이상하다.
“정말 안 해도 될….”
내가 뭐라 말하기도 전에 할아버지는 또 서류파일 하나를 툭 던졌다.
그것은 바로 미라클과 순양백화점의 계약서 사본이었다.
계약서를 보자마자 눈을 들어 할아버지 얼굴을 보니 웃음이 한가득이었다. 물론 그 웃음은 한 수 아래인 나를 완전히 내려다보는 비웃음이었지만.
“…리가 없죠. 알겠습니다. 할아버지 뜻대로 할게요.”
재빨리 머리를 끄덕였다.
“도준아.”
“네.”
“난 네가 참 좋다.”
“저도 잘 알아요.”
“구구절절 말하지 않아도 척하면 다 알아듣는 네가 좋다는 말이다. 허허.”
아끼는 손자지만 협박도 서슴지 않는 저 단호한 할아버지가 나도 참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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