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Youngest Son of Sunyang RAW novel - Chapter 143
“얼마라고?”
“그게…. 처, 천사백억요.”
“그 돈을 주식으로 홀라당 말아먹었다?”
진 회장은 고개를 들지 못하는 딸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백화점 쥐여 줬더니 입점 업주들에게 줘야 할 돈을 주식에 꼬라박아? 제정신이냐?”
“죄송해요, 아버지. 경영 자금 압박이 심해서 방법을 찾다 보니…….”
“참 쉽게 산다. 경영 자금이 여의도에 굴러다니더냐?”
“아버지. 순양전자도 투자한 회사라고요. 그래서 믿고….”
진서윤은 매섭게 노려보는 아버지의 눈빛에 변명을 멈췄다. 몇 발짝만 더 나갔다가는 아무것도 건지지 못한 채 쫓겨날 것 같았기 때문이다.
“넌 이미 순양그룹과 별개가 아니냐? 남의 회사 뒤나 쫓아가는 게 가당키나 해?”
“이렇게 몇 개월 만에 무너질 회사에 이백억이나 투자한 순양전자가 잘못된 거 아닌가요? 투자 잘못한 건 저나 순양전자나 차이가 없다고요.”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뭐야? 왜 왔어? 남의 회사 트집이나 잡으려고?”
진서윤은 진 회장의 화난 표정에 아차 싶었다. 지금은 무릎 꿇고 싹싹 빌어도 모자랄 판이다.
“딱 한 번만 도와주시면 안 돼요? 이 고비만 넘기면….”
“오세현이에게 또 손 내밀면 만사 해결 아니냐? 내가 뭘 도와줘?”
“안 돼요. 오 대표에게 더는 빌릴 수 없어요.”
기겁하는 딸을 보며 진 회장은 서랍 속에서 서류 뭉치 하나를 꺼내 툭 던졌다.
“네가 원하는 대로 계열 분리까지 다 끝냈다. 이제 순양이라는 이름 떼더라도 상관없어. 주식 한 주 섞이지 않은, 완전히 별개의 회사야. 내가 도와주면 순양 돈을 횡령한 셈이 된다. 늙은 애비가 구속되는 꼴이라도 보고 싶은 게냐?”
진서윤은 서류 파일을 펼치지도 못한 채 파랗게 질려버렸다.
“아, 아버지. 지금 이러시면 안 돼요. 지금 백화점 그룹이 제 손에 들어오면 큰일 나요. 이거 다시 되돌려야 한다고요!”
“주식으로 돈만 날린 게 아니구먼. 정신도 날렸어. 네가 그렇게 원하던 걸 줬는데… 거절해?”
“그게 아니고요….”
“이거…. 애처로워서 어쩌나, 우리 딸. 남편도 버렸는데 회사도 버리려고?”
“아니, 그게 아니고 잠시만 뒤로 미뤄 달라는 부탁이라고요.”
“제정신이냐? 이거 네게 물려준다고 깨진 돈이 얼만 줄 알아? 그걸 다 날려버리라고? 도대체 넌 어떻게 생겨먹은 게야!”
진 회장이 화를 터트리자 진서윤은 눈만 질끈 감았다.
복잡한 채무관계부터 구멍 난 돈 천사백억, 새천년 첫 사업으로 오픈하는 대형 마트까지. 산재한 일 전부가 꼬여도 너무 꼬였다.
그런데 진서윤이 까마득히 잊고 있던 사실이 진 회장의 입을 통해 흘러나왔다.
“그런데 너, 주식 투자는 누구 명의로 진행했어? 혹시 차명이었냐?”
몰라서 묻는 건 아니다. 누구나 차명으로 회사 돈을 ‘유용’하지 않는가? 이건 확인하는 것이다.
“갑자기 그건 왜 물으세요?”
“빨리 대답이나 해! 맞아?”
“네.”
“미치겠구먼.”
진 회장은 머리를 의자에 기댔다.
“아버지. 왜 그러세요? 무슨 문제라도…?”
딸의 조심스러운 질문에 진 회장은 입을 꾹 다물고 아무 말 하지 않았다.
진서윤은 이럴 땐 아무 말 없이 기다려야 한다는 걸 안다. 그녀는 진 회장의 얼굴만 바라보며 가만히 있었다.
“서윤아.”
“네. 아버지.”
한참 만에 입술을 뗀 진 회장은 부드럽게 딸을 불렀다.
“네가 가장 믿는 사람이 임 상무냐?”
“네. 곳간 열쇠를 맡겨도 될 만한 사람이에요.”
“그자도 널 충심으로 따르고?”
“아마도요. 그런데 아버지, 왜 그러세요? 불안하게….”
그녀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지만 진 회장은 속 시원한 대답은 피했다.
“됐다. 뒷일은 내가 알아서 하마. 넌 돌아가서 회사나 챙기거라.”
알아서 하마.
이 말이 구원의 빛처럼 다가왔다.
“아버지. 정말 고마워요. 저 정말 잘할게요. 그리고 천사백억…. 일 년 안에 다 정리하도록 노력할 거고요.”
“무슨 소리냐? 천사백억이라니?”
“네? 알아서 다 해주신다고…?”
모녀는 동시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서로를 향해 물었다.
진 회장이 어긋난 의미를 먼저 알아챘다.
“돈은 네가 해결할 문제다. 아직도 그따위 소리나 하는 게냐? 회사를 쪼갠 이상 일과 돈은 네 몫이다. 전부 말아먹더라도 내게 와서 손 벌리지 말아!”
“아, 아버지.”
“내가 해결하는 건 네가 구속되는 일은 벌어지지 않도록 막겠다는 뜻이다. 딸이라고는 딸랑 너 하나뿐인데 옥살이하는 건 애비로서 못 보겠으니 말이다.”
“옥살이라니요? 그게 무슨…?”
“넌 알 바 없다. 그만 돌아가. 지금은 꼴도 보기 싫으니까. 어서!”
진서윤은 아버지의 호통에 영문도 모른 채 물러나야 했다. 돈 걱정 가득 안고 돌아가는 발길이 잘 떨어지지 않았지만.
* * *
“그래 전부 알아봤어?”
“네. 명동에서 몇 바퀴 돌린 겁니다. 총 16명의 이름으로 분산했더군요.”
“끙―”
진 회장은 저도 모르게 신음이 흘러나왔다.
“돈은 어떻게 뺐어?”
“회사에서 대표이사들로, 그다음 명동입니다.”
“서윤이 손때는 묻었고?”
“없습니다.”
“그건 다행이구먼.”
이학재 실장은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다.
“너무 염려하실 필요 없을 것 같습니다. 나름대로 조심한 것 같습니다.”
“자네가 하루 만에 파악했는데 검찰은? 반나절이면 돈 흐름 전부 파악해.”
머리를 흔드는 진 회장을 보며 이학재는 그의 걱정이 너무 심한 것 아닌가 생각했다.
“아무리 심각한 사태라도 주식 매입한 사람까지 조사하겠습니까?”
“5조가 넘는 돈이 증발했다. 그 5조가 재벌 돈도 아니고 세금도 아니야. 애 업고 증권사를 들락거린, 반찬값이나 벌려는 아줌마들 돈이라고. 수백만 명의 분노가 하늘을 찔러. 이거 제대로 정리 못 하면 정권마저 흔들린다. 희생양을 정할 때까지는 조심, 또 조심해야 해.”
진 회장은 이 일을 단순한 주식 폭락으로 보고 있지 않았다.
“뉴 데이터인지 뭔지 그놈 주가가 한창일 때 순양전자가 보유한 주식을 내다 팔려고 하는 걸 내가 막았어. 열 배의 이익이라고 영기 그놈이 와서 입에 거품을 물더라.”
“이렇게 될 줄 아셨습니까?”
“썩어빠진 정치하는 놈들이 붙어서 작업하는 게 뻔히 보이는데 그걸 모를까? 차라리 돈 이백억 날리는 게 낫다 싶더라고. 만약 그때 팔았어 봐. 이 난리의 주연이 우리 순양전자라고 할 게야.”
“이젠 피해자니까 그런 일은 없겠군요.”
팔순이 가까운 나이에 어떻게 저런 판단력이 살아있는지…. 참 대단하다 싶었다.
“이미 검찰과 금융위가 수사한다고 칼을 빼 들었어. 작전 세력부터 색출할 텐데, 서윤이 이름 나오지 않게 조치해.”
“네. 회장님. 그런데 명동 놈들 입에서 서윤이 이름이 나올지도 모릅니다.”
“임 상무 그자가 자금 총괄이라고 하니 그놈 뒤를 털어봐. 백화점과 호텔 돈을 십여 년 만졌으니 떡고물 많이 묻었을 게다. 그거 못 본 척해주는 조건으로 이거 책임지게 해야지.”
혹시라도 모를 일을 대비해 대신 옥살이할 놈은 이미 정했다. 진서윤의 죄를 다 뒤집어쓰고 순순히 검찰청으로 걸어가게 만드는 건 이학재가 할 일이다.
“이 건은 그렇게 정리하겠습니다. 그런데 회사는 어떻게 할까요? 자칫 잘못하면 경영권을 뺏길 수도 있습니다.”
미라클과의 계약서는 분명 심각한 수준이다. 이 일을 빌미로 채권을 주장하며 담보를 가져가 버릴지도 모른다. 이미 그 담보는 진서윤의 손으로 들어갔다.
오세현이 마음만 독하게 먹으면 뺏어버릴 수 있다.
“무너지는 것은 언제나 한꺼번에 무너진다. 무너질 때까지 참고 기다리다 한꺼번에 무너진다. 탑을 바라보면 무언가 무너져야 할 것이 무너지지 않아 불안하다.”
진 회장의 입에서 나지막이 흘러나오는 구절. 이학재는 어디서 들어본 듯해서 머리를 갸웃했다.
“시(詩) 아닙니까?”
“그래. 탑(塔)이라는 시야.”
“불안하셨습니까?”
“회사는 건재할 게야. 무너질 탑은 바로 자식이지.”
이미 경영권 방어는 어렵다고 생각하는 게 틀림없다. 하지만 탑이 무너지는 걸 기다린 건 아닐까?
아니, 불안한 탑이 무너지는 걸 일부러 지켜만 보고 있었던 건 아닐까?
무너질 불안한 탑 대신 ‘가장 안정된 자세로 비바람에 천 년을 견딜’ 새로운 탑을 원했던 건 아닐까?
이학재는 의문이 아니라 확신에 가까운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새로운 탑이 누군지 그는 정확히 안다.
* * *
“자, 이제 어떻게 할 셈이냐?”
“고모 말입니까?”
“그래. 이상수 사장 덕분에 오천억이 넘는 돈이 들어왔어. 네 고모 회사 차지하는 데 썼던 돈, 단번에 번 거잖아.”
오세현은 ‘빌려줬던’이라는 단어 대신에 ‘차지하는’이라는 단어를 썼다.
내 목적이 뭔지 정확히 안다는 뜻이다.
“네 할아버지가 도와준 게 확실하다. 딱 때맞춰 그룹 분리 작업을 끝마친 거 보면 말이다.”
“도와준 게 아니라 제게 주신 거겠죠.”
“줬다고 하기에는 모자란 감이 없지 않아. 우리가 담보로 잡은 주식은 30%에 불과해. 아직 진서윤 사장이 35%를 쥐고 있다.”
“고모가 사고 친 돈이 천사백억입니다. 그 돈으로 25%를 더 가져와야죠.”
“순순히 줄까?”
“회사 돈 천사백억을 주식 투자로 날렸어요. 죄질이 악랄합니다. 이거 묻어주는 것까지 환산해야죠.”
30%의 주식을 가진 대주주가 대표이사의 횡령을 눈감아준다. 물론 횡령한 돈 천사백억도 메꿔주고.
이정도면 고모도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니다.
“총대는 내가 메고? 또 악역을 해야 하는 거야?”
“아뇨. 이번엔 제가 나서겠습니다. 누가 백화점 그룹의 진정한 주인인지 정확히 알려줘야죠.”
의외라는 듯한 표정의 오세현을 바라보고 있자니 괜히 머쓱해졌다. 폼 잡으려 한 말이 아닌데 왠지 손발이 오글거린다.
“네 고모가 많이 놀라는 건 그렇다 치고, 집안사람들이 너에 대한 경계심이 더 커지겠는걸? 괜찮겠냐?”
“고모가 입을 다물 겁니다. 아직 욕심을 버리지 못했으니 당분간 제 곁에 바짝 붙어 다닐 겁니다.”
“고모를 수족처럼 부리겠다? 너도 참 독하다.”
“예전에 한 번 말씀하셨죠? 우리 집안 내력입니다. 그냥 그러려니 하세요. 하하.”
“그런데 헐레벌떡 달려와야 할 네 고모는 무슨 배짱으로 잠자코 있는 거지? 우리가 먼저 찾아오기를 기다리는 건가? 여전히 공주님 흉내네.”
오세현이 투덜거리기 무섭게 문이 벌컥 열리며 누군가 뛰어 들어왔다. 기다리던 고모는 아니었다.
“오 대표님. 저 좀 살려주십시오! 진 실장님 좀 도와주세요!”
갑자기 들이닥친 이는 바로 임 상무였다.
“뭡니까? 또 무슨 일이 터진 겁니까?”
황당하기도 하고, 고모가 무슨 엉뚱한 일이라도 저질렀는지 겁이 나기도 했다.
“수, 순양에서 절 희생양으로 삼았습니다. 가만히 있으면 제가 전부 뒤집어쓰게 생겼다고요. 제발 좀 구해주십쇼!”
희생양이라는 말만 들어도 모든 걸 짐작할 수 있었다.
횡령은 무거운 죄다.
오세현도 짐작 못 할 사람은 아니지만 임 상무를 달래가며 자초지종을 물었다.
“이학재 실장이 다녀갔습니다. 제 실수를 샅샅이 뒤져 죄를 따지는데…. 전 정말 억울합니다.”
이학재까지 등장했다면 실수가 아니라 임 상무가 저지른 위법 행위를 샅샅이 찾아냈다는 뜻이다. 이학재는 절대 허술한 사람이 아니다.
임 상무는 미라클과 고모의 계약 내용을 훤히 하는 사람이다. 순양의 협박에서 자신을 구해줄 사람은 백화점 그룹의 주인이 될지도 모르는 미라클밖에 없다는 걸 잘 안다.
하지만 우리의 본색을 몰라 저지른 실수다.
순양이라는 호랑이를 피해 늑대 굴로 들어온 여우.
이것이 바로 임 상무의 운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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