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Youngest Son of Sunyang RAW novel - Chapter 165
외통수.
이처럼 적합한 단어가 없다.
소유와 경영을 분리하고 경영에는 일절 관여하지 않겠다는 걸 대환영한 사장단 아닌가?
대신 오너를 대신해 경영을 책임질 사람을 고르는 건 당연한 일이다. 그 대리인이 외부인도 아니고 자신들도 인정하는 대단한 인재. 장도형 전무.
이것마저 반대한다면 지금껏 회사를 걱정한다고 떠들어 댄 그들의 말은 전부 입에 발린 소리에 불과하다.
회사를 걱정한 게 아니라 자신들의 자리를 걱정했을 뿐이다.
장도형 전무를 반대한다면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한 양우찬 사장의 입장이 난처할 뿐만 아니라 파격 승진을 허락한 진 회장을 바보로 만드는 일이다.
만약 찬성한다면?
바로 오늘까지 아랫사람으로 부리던 부하직원을 상사로 모셔야 한다. 아무 말 말고 사표 던지는 게 모양새가 좋다.
차라리 내가 총괄이라면 그만두지 않을 명분이라도 있다.
오너 일가이며 대주주니까 말이다.
“왜들 그런 표정이십니까? 장도형 전무는 자격이 없습니까? 믿을 만한 분이 아닌가요?”
누가, 어떤 대답을 할까?
네 사람과 한 번씩 눈길을 주고받았지만 쉽게 말하는 이 없었다.
이들은 할아버지의 눈치를 본다. 지시를 기다리는 것인지, 도움을 청하는 것인지 모호하기까지 하다.
하지만 할아버지는 이들의 눈을 외면했고 오히려 대답을 재촉해버렸다.
“뭐지? 대주주의 질문을 무시한 건가? 경영의 문제가 아니라 인사 문제니 주주로서 응당 물을 수 있는 수준 아닌가?”
“그… 그렇습니다만, 너무 파격적이라….”
고인규 증권 사장이 겨우 대답했지만, 이건 또 걸려든 것이나 다름없다.
“40대 후반에 전무라는 것도 파격 아닙니까? 파격적 인사라는 건 처음만 그렇습니다. 파! 격! 일정한 격식을 깨뜨림. 이미 깨져 버렸으니 연공서열을 무시한 인사 발령 자체가 격식이며 형식이 돼버린 겁니다.”
고인규 사장도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기회를 놓치지 않고 한 번 더 밀어붙였다.
“선진 금융사, 글로벌스탠다드라고 말할 수 있는 서구 기업 중 나이나 입사순으로 승진하는 곳 있습니까?”
금융은 철저히 서구의 비즈니스 영역이다. 하나에서 열까지 피부 하얀 놈들이 만든 사업 아닌가? 그들이 이 영역을 이끌어가는 걸 부인할 수는 없다.
“IMF 구제 조건이 바로 금융시장 개방입니다. 외국자본은 물밀 듯이 몰려드는데 그 자본과 경쟁하거나, 이용하거나 흡수하려면 그들의 방식으로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전 장도형 전무라는 사람을 그 상징으로 생각했고 우리 순양은 이미 글로벌 경쟁에 뛰어들 준비를 끝마쳤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사장님들의 표정을 보니 저 혼자만의 착각이었군요.”
조용하고 차분하게 말했지만 매서운 질타로 여겨졌으니 누구 하나 내 눈길을 받아내는 이가 없다.
“이거, 내가 봐도 자네들이 첫 번째 해야 할 일이 뭔지 알겠어. 도준이의 질문에 한 치의 의문도 남지 않을 만한 완벽한 보고서를 만들어야 할 것 같지 않아? 외국자본의 대응. 그렇지?”
“즈… 즉시 준비하겠습니다.”
양우찬 사장이 가까스로 대답했을 때 난 머리를 흔들었다.
“아닙니다. 제가 준비한 게 있습니다. 그걸 보면서 함께 논의하는 게 나을 겁니다. 아, 제가 거북하시면 전 빠져도 됩니다. 금융사 경영진 모두 모여 충분히 논의하시고 최종 결과만 알려주시면 됩니다.”
“자네가 준비했다고?”
내가 준비한 건 맞지만, 사실대로 말해줄 필요는 없다. 좀 더 무게를 싣고 압박을 가하려면 권위를 빌려야 한다.
“아뇨. 미라클 인베스트먼트 미국 본사에서 준비한 겁니다. 순양의 금융사 분석하는 데만 몇 개월 걸렸습니다. 도움 되실 겁니다.”
사장들은 난감한 표정이지만 할아버지는 호기심을 드러냈다.
“그게 어떤 내용인지 궁금하구나. 미국에서 우릴 분석해?”
“할아버지는 이해하시기가 좀 어려울 수도 있어요.”
“뭐라? 이눔이!”
큰 줄기의 회사 정책만 짚어내는 할아버지가 복잡하기 짝이 없는 디테일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좋다. 그럼 이 친구들에게 말해봐. 나는 몰라도 이 친구들은 알겠지. 안 그러냐?”
지금껏 실실 웃으며 구경만 하던 할아버지는 웃음을 거두며 사장단을 노려보기 시작했다.
“양 사장님.”
“응?”
화들짝 놀라는 모습을 보니 조금 우습기도 했다.
“순양생명의 자금을 여기저기 투자하실 텐데 국내 은행의 금융상품도 꽤 있죠?”
“그, 그렇지.”
난처한 마음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얼굴로 변했다. 명색이 생보사의 대표이사니 회사에서 투자한 상품 하나하나를 다 파악하고 있을 리 없다.
혹시나 내가 투자 상품에 대해 질문하면 회장님 앞에서 개망신당하는 건 기정사실 아닌가?
“그 상품에서 보통 설명하는 건 실적, 예상 수익률. 안전도 등이 전부입니다. 그런데 내가 그 금융상품에 투자했을 때 내 돈이 어디로 흘러들어 가는지 설명하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내가 투자한 상품이 무엇으로 이뤄졌는지도 모릅니다.”
“그게 무슨 말이냐? 채권, 주식, 현물 투자… 딱 정한 곳에….”
할아버지는 모른 척 기다리지 못했다.
“아닙니다. 요즘은 좀 더 복잡합니다. 채권도 굉장히 다양한 종류를 묶어서 상품으로 만들죠. 예를 들면 플로리다 주의 주택 담보 대출의 채권과 영국 기업의 회사채, 멕시코 국채를 섞습니다.”
“복잡해 보이지만 어차피 채권 아니냐.”
“그렇다면 머리 아플 일도 없죠. 아닙니다. 여기도 다른 것이 섞여 들어갑니다. 바로 이 채권 묶음의 회수율에 베팅한 파생상품까지 들어가죠.”
“도준아. 도대체 하고 싶은 말이 뭐냐? 내가 그런 상품의 디테일을 모르기 때문에 사장으로서 자격이 없다는 게냐?”
역시, 양 사장은 눈치도 빠르고 순발력도 좋다.
더 세세한 이야기가 나올까 봐 내 말을 자르고 버럭 소리까지 질렀다.
이쯤 되면 체면도 세워주고 장단도 맞춰주는 게 좋다.
앞으로도 계속 얼굴 봐야 하는 사람인데 사소한 일로 틀어지면 나만 곤란해진다. 아직 내 앞의 사장님들은 확보한 세력이 꽤 크다.
“아뇨. 그걸 어찌 다 알겠습니까? 그걸 정확히 꿰고 있어야 하는 사람은 바로 애널리스트죠. 투자 책임자인 애널리스트가 상품의 디테일을 모른다면 해고 대상이지 임원은 몰라도 됩니다.”
“그럼 자네가 생각하는 임원의 책무는 뭐지? 뭘 알아야 한다고 생각해?”
“책무가 한두 가지겠습니까마는 가장 중요한 건 바로 발밑에 차오르는 물이 어디쯤에서 멈출지 정확히 판단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눈치 빠른 건 양 사장뿐만이 아니다. 모두 내 말을 알아들을 눈치는 있다.
“코밑까지만 물이 찬다면 다행이겠지만 머리까지 물에 잠긴다면 살아날 길이 없습니다. 안 그렇습니까? 이민섭 순양카드 사장님?”
갑자기 표적이 된 이민섭 사장은 영문을 모른 채 화들짝 놀랐다. 지금 불붙은 카드 사업이다.
판만 깔아놓으면 캐시가 쏟아져 들어오는, 그야말로 노다지 사업 아닌가? 실적도 천장을 뚫고 하늘에 맞닿으려는 듯 치고 오르는 중이다.
물이 찬다는 건 리스크를 말하는 건데 이곳에서 자신이 그 대상이 될 줄 상상도 못 했다.
“그게 날 향한 경고인 줄은 생각도 못 했는데…. 이거 참. 허허.”
기분이 많이 상한 듯 표정이 좋지 않았다.
“카드 사업은 기본적으로 대출업입니다. 대출의 핵심은 회수 여부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소득 없는 주부가 3백, 아르바이트도 하지 않는 대학생이 2백을 신용이라는 이름으로 매달 현금서비스를 받습니다. 소득이 확실한 직장인들이 지금 카드 돌려막기를 하느라 정신이 없습니다. 당장 순양카드 직원에게 물어보세요. 카드 돌려막기 하지 않는 사원이 몇이나 될 것 같아요?”
이민섭 사장은 입술만 깨물었다.
습관은 무서운 것이다. 습관적으로 카드를 긁고 습관적으로 월급을 때려 박는다.
연체료를 물고, 카드 돌려막기를 하는 사람이 주변에 많다 보니 당연한 패턴이 된 것이다. 빚을 두려워하는 사람이 없어졌다.
카드 쓰는 사람은 물론이고 카드 회사마저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그게 물이 차오르는 흔적이다?”
할아버지가 굳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 판단을 하는 게 임원이며 경영진 아니겠습니까? 빚내서 카드 긁는 게 물이 차오르는 것인지, 한국 경제를 살리는 생명수가 될지 누가 알겠습니까?”
할아버지의 표정이 바로 서재의 모습이다.
딱딱하고 차디찬 서재에서는 숨소리만 새어 나왔다.
침묵은 할아버지가 깼다.
다시 서재는 훈풍이 감돌기 시작했다.
“어떤가? 자네들 생각은?”
“네?”
“아직 도준이가 몇 년 동안 회사 여기저기 뺑뺑이 돌며 실무를 익혀야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느냐는 말일세.”
이건 또 무슨 소리?
아하, 소위 말하는 경영수업을 받아야 한다는 말이구나.
“잠깐 한 말씀 드려도 되겠습니까?”
양해를 구하니 할아버지가 머리를 끄덕였다.
할아버지의 질문에 대답을 주저하는 사람들은 내가 노려보자 움찔했다. 앞으로 자신의 생사여탈을 마음대로 할 윗사람을 교육시킨다고 했으니 첫걸음부터 삐걱거린 것이다.
“주주가 해당 기업의 교육까지 받아야 한다는 사실은 처음 듣는 소리입니다만.”
“아, 그… 그건….”
“경영에 깊숙이 관여할 경우를 생각해서 제안한 것이네. 소유와 경영을 분리할 생각이란 걸 알았다면 그런 말은 꺼내지도 않았을 거야.”
“그, 그렇지. 우린 도준이 자네가 당연히 경영 일선에 설 거라고 예상했거든. 그래서 한 말이니 오해는 말게.”
당황한 사장들이 황급히 손을 내저으며 더듬거렸다.
“아뇨. 오해 아닙니다. 전 벤치에 앉아 지켜보다 필요하다면 선수로 뛸 생각도 있습니다. 그럼 그때 회사 부서를 돌며 실무를 익혀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당돌한 질문에 조금씩은 당황한 모습을 보였지만 노련함은 살아 있었다.
양우찬 사장이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건 그때 봐서 스스로 결정하는 게 낫겠지? 오늘 보니까 누가 강요하지 않아도 필요하다면 먼저 뺑뺑이 돌겠다고 나서겠는걸? 허허.”
가장 적절한 대답이다.
나를 재단하거나 판단하는 걸 내게 맡긴다.
띄워주는 말이기도 하고 책임을 피하는 대답이기도 하다.
“자, 이 정도면 내 손자에 대해 충분한 판단을 할 만큼 알았다고 보는데, 더 할 말 있나?”
모두 입을 닫고 가볍게 머리만 저었다.
자신들은 세대교체의 대상이 되지 않으려 무리수를 뒀지만 이젠 앞날을 예측하기 어려워졌으니 밝게 대답하지도 못한다.
이런 모습을 눈살 찌푸리며 보던 할아버지는 손을 슬쩍 내저었다.
“그만 가서 일들 봐. 회사 비우는 시간이 길면 불안한 건 자네들일 테니. 어여 가.”
네 명의 사장은 서재를 빠져나가며 모두 내 눈과 마주쳤다.
그럴 때마다 옅은 미소를 보이는 거로 봐서 나와의 관계를 받아들이는 것 같다.
“도준아. 진정이냐? 일개 전무를 최고 자리에 앉힌다는 거 말이다.”
단둘만 남게 되었을 때 할아버지가 처음 던진 질문은 바로 인사 문제였다.
“면접은 보고 결정해야겠죠. 하지만 장도형 전무의 평판이 좋더라고요. 양 사장의 말처럼 순양의 미래를 짊어질 만한 자질이 있다고 하더군요.”
“그게 여의도에서 도는 소문이냐?”
“네.”
“흠…….”
“왜 그러십니까?”
할아버지는 긴 한숨 끝에 말했다.
부탁인지, 당부인지 모호한 태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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