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Youngest Son of Sunyang RAW novel - Chapter 166
“네게 맞는 새 사람을 쓴다는 건 꼭 필요하지만, 오래된 사람 괄시는 안 된다. 물러나는 사람의 뒷모습을 아름답게 해줘야지. 모욕감을 느끼게 하면 큰일이야.”
오랜 시간 함께한 사람들의 끝을 염려하는 마음이었다.
첫 대면이라 내가 좀 과하게 나간 면이 없지 않았기에 할아버지의 마음을 편히 해드리고 싶었다.
“저분들의 자리는 당분간 그대로 놔두겠습니다. 충분한 역량을 보인다면 굳이 교체할 생각은 없습니다.”
“아니다.”
“네?”
“시점의 문제일 뿐, 저 친구들은 다 정리해야지. 시대가 바뀌었다는 걸 전 직원이 알도록 해야 한다. 내 시대가 아니라 네 시대가 왔다는 걸 느끼게 해주는 방법 중 가장 효과적인 건 대가리를 치는 거야.”
역시.
사람을 생각해서 하는 말이 아니다.
“저 친구들을 정리할 때 생길 수 있는 부정적인 효과를 최소화해야 한다. 그래도 순양의 충신들이었어. 저들이 냉혹하게 잘려 나가는 모습을 자신의 미래로 생각하는 사람이 나오지 않도록 하라는 뜻이다. 배신감을 느끼는 놈은 꼭 배신한다. 이유를 아느냐?”
“자신의 배신을 정당화할 수 있기 때문 아닐까요?”
“바로 그거다.”
할아버지는 나를 보며 흐뭇한 미소를 보였다.
“마지막까지 흠잡을 데 없다면 섭섭하지 않을 만큼 대우해주고, 문제 삼아도 모두 수긍할 만한 흠이 나온다면 냉혹하게 정리해. 저들의 남은 순양 생활은 회사 사람들에게 본보기가 되어야 한다. 좋든 나쁘든 말이다.”
“명심하겠습니다.”
헛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도대체 우리 할아버지는 단 한 줌의 측은지심도 옛정도 없는 걸까? 순양생명 양우찬 사장은 삼십 년 넘게 고락을 같이한 분인데도 그를 배려하는 마음은 보이지 않는다.
나도 이렇게 되는 걸까?
“참, 장도형 전무는 제가 한번 만나보겠습니다. 어떻게 할 건지는 그 뒤에 결정하도록 하죠.”
“정 전무는 내가 잘 모르는 놈이긴 한데, 평판이 좋긴 하더라. 참! 만만한 놈은 아닐 거야.”
“그 나이에 순양에서 전무까지 올랐으니 오죽하겠습니까?”
“너랑 죽이 잘 맞는다면 괜찮은 조합이 나오겠어. 허허.”
잘 맞아야 한다.
장도형 전무는 부사장까지 올라가지만, 결국 미끄러지는 사람이다.
진영기가 회장 자리를 차지하고 물갈이를 시작했을 때 장도형의 도전적이고 공격적인 기업 운영 방식을 못마땅하게 생각했기 때문이다.
진영기에게 순양의 금융 계열사는 단지 지배 지분을 보관하는 곳이며 필요할 때마다 돈을 빼 쓰는 저금통일 뿐이었다.
그런 회사를 전 세계 금융 네트워크의 거점으로 삼아 글로벌하게 키우고 싶어 하는 장도형이 진영기와 어울리는 건 불가능했다.
진영기는 자기 생각에 순응하는 자를 대표이사로 승진시켰고 장도형은 토사구팽 신세를 면하지 못했다.
이것이 내가 아는 숨은 이야기지만 확인은 해야 한다.
장도형 전무가 나랑 잘 맞는 사람일까? 정말 글로벌 기업으로 키울 만한 능력은 있을까?
* * *
“이거, 좀 기괴한 느낌인데요? 진 실장님과는 영 어울리지 않는데…. 아 참, 실장님이라고 불러도 되겠습니까?”
“네. 그게 저도 편합니다, 전무님.”
크기는 아파트만 하지만 가구라고는 편안한 소파 세트와 테이블이 전부인 텅 빈 오피스텔.
이곳에 문을 열고 들어온 장도형 전무의 첫마디는 기괴하다는 것과 나와 어울리는 곳이 아니다였다.
뭐가 어울리지 않는다는 걸까?
“술 한잔하시겠습니까? 아니면 커피? 차?”
“혹시 캔맥주 있으면 가볍게 목이나 축이죠.”
냉장고에서 캔맥주 두 개를 꺼내 테이블 위에 놓았다.
“양 사장님이 호되게 당했다고 웃으며 말씀하시던데 사실입니까?”
장도형 전무는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호되게 당했으면 아랫사람에게 말씀하셨겠습니까? 자존심 강한 분일 텐데.”
요것 봐라.
이 자식, 그날 어떤 이야기가 오갔는지 알아내기 위해 떠본 거 아닌가?
“하하. 그럼 저 겁주시려고 농담처럼 하신 말씀이었군요. 전 또 그걸 진지하게 받아들였고. 괜히 바보 같은 모습만 보였습니다.”
슬쩍 넘어가려는 듯 캔맥주 한 모금을 삼켰다.
“그런데 왜 절 보자고 하셨는지…?”
“여쭤볼 게 좀 있어서요. 이미 아시겠지만, 순양그룹 금융 부분은 제가 물려받습니다.”
“네.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전 제 큰아버지들과 다릅니다. 회사 내에서 큼지막한 직책을 맡아 경영할 생각은 추호도 없어요.”
“의외군요.”
장도형 전무는 손에 든 캔맥주를 내려놓고 자세를 바로 세웠다.
“빌딩 안에서 벌어지는 일은 밖에서는 절대 파악하지 못합니다. 결산 자료가 전부가 아니에요. 빌딩 로비에 들어섰을 때 느끼는 공기의 기운, 오가는 사원들의 표정, 사무실의 웅성거리는 소리. 이런 것들이 바로 회사의 참모습입니다.”
“그런가요?”
짐짓 놀란 표정을 지으며 그가 어떤 말을 하는지 귀를 기울였다.
“회장, 부회장 같은 큼지막한 직책은 회사 시스템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 직책을 이마에 달고 빌딩 로비로 들어오는 사람에게 모두 허리를 90도로 숙이죠.”
“전 그런 모습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좀 올드하지 않아요? 조폭도 아니고….”
“모르셔서 그런 겁니다.”
“뭘 말입니까?”
“월급쟁이들의 속물근성 말입니다.”
“속물?”
이 사람 좀 독특하다. 할아버지가 말씀하신 만만하지 않다는 것이 이런 면을 말한 것인가?
“그룹 오너 일가 사람들에게 깍듯이… 말씀하신 것처럼 조폭 두목 대하듯 머리 숙이는 월급쟁이 99%는 회장과 말 한마디 못 하고 회사를 떠납니다.”
“그렇겠죠.”
“그 사람들이 그걸 모르겠습니까? 하지만 회장이 직접 다가와 악수라도 한 번 해주면 모든 게 달라지죠. 자신은 그 99%가 아니라 특별하다. 이런 환상을 갖게 됩니다.”
“그러니까 하고 싶은 말이 뭡니까?”
“직책을 원하지 않는다는 건 매년 실적만 체크하고, 실적이 형편없을 때 대표이사를 비롯한 임원을 갈아치우겠다는 뜻 아닙니까?”
“정확합니다.”
“그건 서구식이죠. 시스템을 서구식으로 한다고 해서 선진 경영이 되는 건 아닙니다. 사람도 서구식 시스템에 적합해야 하는데 아직 우리나라는 주인과 하인, 주군과 충신…. 이런 사고가 뼛속 깊숙이 박혀 있어요.”
“지금 21세기라는 거 모르십니까?”
말은 이렇게 했지만 조금 놀란 건 사실이다.
장도형 전무, 정말 독특하다.
나도 잘 안다.
스스로 선을 정해서 그 위는 쳐다보지도, 꿈도 꾸지 않는 보통 사람의 뼛속에 박혀 있는 노예근성.
가장 큰 포부를 지닌 사람마저 대표이사가 끝이다. 회장까지 노린다는 꿈은 미친놈 취급받는다.
하지만 창업자도 아니고 아무것도 한 것 없고, 능력마저 없는 2세가 그 자리를 차지하는 건 당연하게 생각한다. 회사를 대기업으로 키운 자신은 창업자 가문의 충복이라고 생각하는 게 한계다.
그런데 이 사실을 인정하고 분석까지 하는 사람은 처음이다. 자존심이 없나?
“다시 묻습니다. 그러니까 하고 싶은 말이 뭡니까?”
“하는 일 없더라도 가장 위에 앉아라도 있으시라는 뜻입니다.”
“그럴 필요 있을까요? 계열사마다 훌륭한 사장님이 계신데?”
“그 훌륭한 사장들도 예외는 아닙니다. 그분들도 옳든, 그르든 지시를 받아 움직였던 사람들입니다. 평생. 머슴이죠. 시키는 대로 일해야 마음이 편합니다. 시키는 대로 일한다는 건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되기 때문입니다.”
“책임이라는 거… 생각보다 무게가 많이 나가는 거죠. 어떨 땐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장도형 전무의 눈이 반짝였다.
“잘 아시는 분이 단지 주주 자격만 쥐고 뒤로 물러서시겠다? 나이 때문입니까?”
“외적으로는 나이, 내적으로는 몸을 좀 사려야 하는 처지라서요.”
이 말의 뜻을 저 사람은 알아들었을까?
“아…….”
표정은 이해한 것 같기도 한데.
장도형 전무는 맥주를 시원하게 한 모금 한 뒤, 목소리를 낮췄다.
“많이 치열한가 보죠?”
“아무래도 좀 그렇죠. 아파트 한 채 물려받는 집안이 아니니까요.”
장도형 전무는 머리를 끄덕이며 낮게 읊조렸다.
“진 실장님은 아무래도 집안에서 죠스 같은 존재로 보이는군요.”
“죠스? 영화 말인가요? 상어?”
“네.”
“어째서 그렇죠? 설마 제가 모든 걸 먹어치우는 무시무시한 존재라고 생각하시 건 아니겠죠?”
“그건 아니고…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다 바다 밑에 뭔가 있다는 건 알지만 정확한 정체를 모릅니다. 크기도 모르고 공격성도 모르죠. 하지만 존재한다는 건 정확히 압니다. 언젠가는 공격할 거라는 것도 알죠. 그게 두려운 겁니다.”
“그래서 날 견제한다?”
“사실 죠스도 무서울 겁니다. 물 위의 존재가 자신을 해칠지 모른다고 생각하니까요. 실장님은 그보다 좀 더 심하겠죠. 순양 핵심 계열사를 차지하는 순간 집안 어른들이 공격할 테니까요. 이거…. 저 같은 사람은 그런 종류의 압박을 짐작할 수 없으니 뭐라 말하기 그렇군요.”
이 사람, 뭔가 알고 있나?
아니면 누구나 짐작하는 그 수준 정도만 아는 걸까?
죠스. 적절한 비유다. 하지만 내 이빨의 크기는 아는 사람이 없으니 그나마 다행인가?
“감당하실 수 있겠습니까?”
“뭘 말입니까?”
“제가 장도형 전무님을 신뢰한다는 것이 알려지면 힘든 일이 많아지실 겁니다. 누군가는 위협하고 누군가는 회유하려 들 테고. 아무튼, 별의별 일이 다 생길 겁니다.”
“그 별의별 일을 상황에 맞게 이용할 수 있는 권한을 주신다면 마다할 이유가 없습니다만.”
목소리가 다시 높아졌고 입꼬리도 올라갔다. 안색도 조금 붉어졌다. 이 사람은 흥분한 걸 애써 감추려 하지 않는다.
싸움을 즐기는 전투적인 타입인가?
“깊게 생각하는 편이 아니시네요. 제가 신뢰라는 말만 했지 아직 구체적인 제안은 하지도 않았는데 이렇게 덥석 받아들이시다니.”
“받아들인 적 없습니다. 전 어떤 권한을 제안하실지 들어보고 결정할 생각이었어요.”
싱긋 웃는 표정을 보니 어떤 사람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이 사람은 노예근성이 없다.
지금까지 말한 서구식 시스템에 적합한 인물이다.
하지만 순양에서는 그런 시스템이 통하지 않는다는 걸 답답해하거나 바꾸려고 노력한 것도 아니다. 그랬다면 초고속 승진은 불가능했을 거다.
이자는 현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자신만의 방법을 찾고 있다.
“오늘은 이 정도만 할까요?”
“네?”
“서로 상대가 어떤 사람인지 파악하는, 면접 아니겠어요? 결정은 천천히 시간 두고 하죠.”
“동등하지는 않습니다. 진 실장님은 선택하는 존재, 난 선택받아야만 하는 처지. 확연히 다르죠.”
“하하. 선택받아야 하는 처지치고는 너무 당당하고 여유가 보이는데요? 아쉬울 것이 없어 보였습니다.”
“그런 척한 거죠. 상당히 떨고 있습니다.”
솔직한 건지, 능글맞은 건지는 조금 헷갈린다. 후자 쪽일 것 같은데….
“장 전무님은 저 아니더라도 누군가가 선택할 것 같습니다. 순양생명 미래의 대표이사라고 다들 칭송하지 않습니까?”
“진영기 부회장님, 진동기 부회장님보다 전 실장님의 손길을 기다립니다.”
“저요?”
“네.”
“왜 그럴까요? 아…! 제가 아직 어리니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다? 뭐 이런 겁니까?”
“천만에요. 제 손에서 놀아날 사람이었다면 진 회장님께서 핵심 계열사를 물려주실 리가 만무하죠. 아직 어린 나이지만 벌써 회장님의 낙점을 받을 만큼 뛰어난 사람이라는 뜻 아니겠습니까?”
장도형 전무가 눈치 빠른 것은 인정해야겠다. 그리고 뭔가가 더 있어 보이기도 하다. 그게 뭘까?
어쩌면 오늘 꽤 오랜 시간 이야기를 나눠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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