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Youngest Son of Sunyang RAW novel - Chapter 167
“그렇게 해석할 수도 있겠죠. 그런데 단지 그것 때문에 큰아버지보다 제가 더 낫다?”
“또 있습니다. 저 역시 여의도 바닥에 지인이 꽤 많습니다. 그들 중 몇몇이 그러더군요. 진도준은 미라클의 미래다. 진도준이 미라클에서 전권을 휘두를 자리에 올라가면 한국 금융시장은 그의 손에서 놀아날지도 모른다.”
“누가 그따위 헛소리를 하고 다니던가요?”
“겸손하시네요. 하하.”
장도형은 시원한 웃음을 터트렸다.
“제 지인이 여의도에만 있는 건 아닙니다. 예일 유학 시절의 친구들이 월가에 많이 있죠. 그들이 미라클 인베스트먼트에는 미라클 보이가 있다고 하더군요. 투자의 천재. 특히 스타트 업 기업의 가치를 정확히 알아보는 혜안을 가졌다고 들었습니다. 단 한 번의 실패 없는 투자자…. 이름이 ‘하워드 진’이라고 하더군요.”
장 전무는 반짝이는 눈으로 내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물었다.
“미라클 보이, 바로 실장님 아니십니까?”
“아닌데요.”
반짝이는 그의 눈을 보며 주저 없이 곧바로 대답하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
“제가 미국 미라클의 투자자이긴 합니다. 어릴 때 목장 판 돈을 오세현 대표가 미국에 묻어 뒀죠. 그게 꽤 많이 불어났습니다. 아마 그 때문에 그런 말이 도는 것 같은데, 투자의 귀재는 아닙니다.”
“그럼 하워드 진이 실장님이라는 건 맞습니까?”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고. 미국 본사 사람들이 절 하워드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그게 전부죠. 그러니까 절 너무 높이 추켜세우지는 마세요. 그리고 저를 투자의 귀재니 뭐니 착각해서 저와 함께하겠다는 생각도 접으시고요.”
“아직 그 어떤 결심도 한 건 없습니다. 단지 두 부회장님보다 실장님이 우리 금융 계열을 맡게 된 걸 다행으로 여길 뿐이죠.”
“그럼 절 보호하고 지켜주셔야 할 겁니다. 두 부회장님께서 호시탐탐… 아니, 노골적으로 절 밀어내고 금융 계열사를 차지하려고 혈안이 돼 있을 테니까요.”
장도형 전무는 이제야 ‘누군가는 위협하고 누군가는 회유하려 할 것’이라는 내 말의 정확한 뜻을 이해한 것 같았다.
“이거 선택을 잘못하면 태풍의 눈에 들어가게 되는군요.”
“이미 들어왔습니다.”
“그게 바로 제 대답입니다. 이제 선택하는 자의 결론만 기다리겠습니다.”
눈치 빠른 아저씨다.
지금에 와서 나와 같은 길을 가지 않겠다고 말하면 당장 내가 칼을 빼 든다. 내 손길을 기다리지 않고 선택의 문을 열어 두었다면 이처럼 오랜 시간 이야기하지 않았을 것이고 내 처지에 대해 꺼내지도 않았다.
장도형은 처음부터 자신의 선택지를 나로 정했다.
그렇다면 내가 할 일은 그에게 올바른 선택을 했다는 생각이 들도록 해주어야 한다.
“생명, 화재. 증권, 카드. 이 계열사를 한눈에 파악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설계하세요. 그래서 제 손에 회사가 들어오는 날 번개처럼 그 설계대로 해치울 겁니다. 가능합니까?”
“제가 알기로는 승계 작업이 이 개월쯤 남았다고 들었습니다. 준비하겠습니다.”
“훌륭하게 처리하시리라 믿습니다.”
“실장님.”
“네.”
“전 사람에게 충성 같은 거 못 합니다. 제가 양우찬 사장님께 알랑방귀를 뀌며 아부했던 이유는 제 출세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갑자기 의구심이 든다. 이 사람은 혹시 내 뒷조사를 철저히 한 건 아닐까? 충성보다는 정확한 거래가 훨씬 더 오래가고 믿음 준다는 내 생각을 어디선가 들은 게 아닐까?
“무슨 뜻인지 알겠습니다. 두 달 뒤, 전무님은 순양그룹 통틀어 최고 연봉을 받는 순양전자 대표이사와 똑같은 대우를 받을 겁니다. 단, 제가 말했던 설계가 아주 잘 나왔다면 말이죠.”
장 전무는 입을 떡 벌린 채 감사의 인사는커녕 대답도 못 했다.
“직책은 그때 가서 생각해봅시다. 처음엔 파격적인 인사를 단행할까 생각해봤는데 아무래도 설계를 보며 결정해야겠어요. 괜찮죠?”
“무, 물론입니다. 이미 파격적인 제안을 주신 겁니다. 감사합니다.”
“그 인사는 제 지시를 훌륭하게 해냈을 때 하세요. 아직은 미정인 겁니다.”
일부러 지시라는 말에 힘을 줬다. 하지만 장 전무는 조금도 불쾌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당연합니다. 실적 없는 보상은 저도 원하지 않습니다.”
장도형 전무는 깨끗이 비운 캔맥주를 찌그러트리며 일어섰다.
“할 일 많으니 이만 일어서겠습니다.”
“네. 긴 시간 고생하셨습니다.”
우리는 굳은 악수를 나눴다.
“그런데 전무님. 마지막 질문이 하나 있습니다.”
“네. 실장님.”
“전 한참 어린놈에 불과한데 불안하지 않으십니까?”
장 전무는 마주 잡은 손에 힘을 불끈 주며 대답했다.
“전 제 눈앞의 기적을 믿거든요. 하하.”
* * *
승계 작업이 막바지에 달했을 때 조마조마했지만 할아버지께 달려가는 짓은 하지 않았다.
과연 그룹 지배 지분의 몇 %를 얹어 주실까?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20%만 주신다면 더 바랄 게 없었다.
“무슨 생각해?”
“아, 아냐.”
“어휴…. 나 축하하러 나온 자리에서 딴생각에 빠진 남자 친구를 멋있다고 생각하는 미친 애는 나뿐일 거야.”
“그걸 또 말하는 게 더 미친 거야. 넌 속마음 숨기는 법부터 좀 배워.”
“내 유일한 장점이야, 솔직한 거. 장점을 왜 숨겨?”
“또 있어. 얼굴 예쁜 것도 장점이야.”
“입에 발린 소리라는 거 알아도 기분은 좋네. 흐흐.”
서민영은 배시시 웃으며 고기 한 점을 입에 넣었다.
“이제 고생 끝 행복 시작이 아니라 더한 개고생이 남았지?”
“응. 사법연수원 1년 차는 죽었다고 봐야지. 사시는 예선, 연수원이 본선이라는 말도 있잖아.”
“종종 놀러 갈게.”
“기대는 안 한다마는…. 믿어볼게.”
여전히 밝은 모습의 그녀를 보자 괜스레 미안한 마음이 몰려왔다.
내가 부잣집의 평범한 20대 젊은 놈이었다면 이 애와 함께 즐거운 청춘을 보냈을 것이다. 하지만 즐거운 청춘 따위를 생각할 여유가 없다.
시간은 미친 듯이 빠르게 흘러가고 순양의 지배 구조는 점점 복잡해진다.
바로 지금, 재학 중 사법시험 합격이라는 그 어려운 과제를 해낸 서민영을 축하해주러 나왔지만, 머릿속은 지분 구조만 꽉 차 있다.
“참. 너 말고 합격한 애가 또 있다면서?”
“응. 올해 재학 중 합격은 딱 둘이야. 나랑 김지훈. 알지?”
“김지훈? 누구지?”
“거 있잖아. 예비군 아저씨처럼 생긴 애.”
“아…. 그래.”
내가 머리를 끄덕이자 서민영은 가볍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런데 지훈이 그 애, 빠른인 거 알아?”
“빠른? 우리보다 한 살 어려?”
“응. 대박 아냐?”
나보다 십 년은 늙어 보이는 놈이…. 어이가 없다. 이름은 또 얼마나 세련됐는가? 하지만 그놈은 어린이에서 바로 아저씨로 변한 보기 드문 놈이었구나.
“그놈은 어디 지망이야? 검사?”
“아마도.”
“넌 판사지?”
“응. 수도권 발령받으려면 미친 듯이 공부해서 연수원 성적 잘 받아야 해. 생각만 해도 돌아버릴 것 같아.”
긴 한숨을 뱉는 민영이를 보며 기분을 좀 풀어줘야겠다고 생각했다.
오늘은 기쁜 날 아닌가?
난 준비해 온 쇼핑백을 내밀었다.
“이거 뭐야? 축하 선물이야?”
“응. 판사 되면 이거 들고 다녀. 서류 가방이다.”
그녀는 황급히 쇼핑백을 뒤졌다.
“우와…. 이쁘다…….”
한참 동안 가방을 이리저리 살피던 그녀가 더듬거리기 시작했다.
“에르메니… 질? 길? 이거 어떻게 읽어?”
“에르메네질도 제냐(Ermenegildo Zegna).”
“너 이런 거 잘 아는구나. 역시 재벌이라 틀려.”
입이 찢어진 그녀에게 웃으며 말했다.
“이래 봬도 내가 백화점 주주야. 그 정도는 알아야지.”
이런 걸 내가 알 리가 있나? 고모에게 부탁해서 골랐다. 고모는 눈은 최고 아닌가?
다시 작은 상자를 내밀었다.
“이건 또 뭐야?”
“가방은 나중에 쓸 거고, 이건 곧 써야 하는 거.”
서민영은 선물 상자를 열며 눈을 빛냈다.
“혹시나 해서 먼저 주는 거야. 너 연수원 들어가면 부모님께서 분명히 준비해주실 거잖아. 미리 말씀드려. 필요 없다고.”
서민영은 두 개의 열쇠를 손가락에 걸고 흔들며 말했다.
“난 아직 면허증 없어.”
“연수원 들어가기 전에 따. 일산서 서울 왔다 갔다 할 때 운전해야지.”
“이건 마스터키 같은데?”
그녀는 또 하나의 키를 내밀었다.
“응. 연수원 근처에 오피스텔 하나 얻었어. 괜히 기숙사에서 지낸다고 하지 마. 고생도 고생이고 남자 새끼들 득실거리는데….”
“불안해?”
불안하기야 하겠냐마는 오늘이라도 기분 맞춰주는 게 예의 아니겠는가?
“당연하지. 넌 거울도 안 보냐?”
“불안한 걸로 따지면 나보다 더할까?”
“너 나 몰라? 불안하긴 뭐가 불안해?”
그녀도 내 말을 수긍하는 듯 머리를 끄덕였다. 집과 사무실만 오가는 내 일상은 웬만한 직장인보다 훨씬 바쁘다는 걸 잘 안다.
“백화점 직원들에게 네 취향을 말해줬어. 그 사람들이 필요한 가구는 다 채워놓았으니까 언제든 들어가서 써. 참, 디지털 도어니까 번호 세팅 다시 하고.”
“네 생일로 맞춰놓을게.”
“나 마음대로 불쑥 들이닥쳐도 되는 거야? 흐흐.”
“그땐 각오하고 들이닥쳐.”
“무슨 각오?”
“내가 확 덮쳐버릴지도 모르니까 각오하라고!”
서민영은 참…… 솔직하다.
* * *
12월의 찬바람도 매섭지 않았다.
긴장이 풀리지 않으니 몸에서 뜨거운 열만 계속 나오는 것 같다.
내 눈 앞에 펼쳐진 수많은 결재판. 그 위에 놓인 두꺼운 서류들.
이 서류들 맨 아래에는 진도준이라는 이름과 서명란이 긴장을 풀지 못하게 했다.
“이놈아. 그냥 찍어. 뭘 그리 유심히 살피는 게냐?”
“아…. 네.”
“숫자 챙겨 보지 마. 지분 구조는 워낙 복잡해서 한 번에 계산 못 한다. 도장 다 찍으면 내가 알려주마. 싫음 안 찍어도 되고.”
“아닙니다.”
가장 위에 놓인 서류 몇 장에 내 인감을 찍었다.
일종의 세리머니.
곁에서 대기하던 직원에게 도장을 넘겨주니 서류 더미와 내 도장을 들고 조용히 서재를 빠져나갔다.
나 대신 저 두꺼운 서류에 인감을 찍을 것이다.
“궁금하지?”
할아버지는 선물 포장지를 못 풀어서 궁금해하는 나를 보며 계속 웃기만 했다.
“금융 주력사 4개와 고만고만한 자회사 몇 개 묶었다. 보너스로 그룹 지분도 섞어 넣었고.”
그러니까 얼마나 넣었냐고요!
소리치고 싶은 걸 억지로 누르며 차분한 표정으로 기다렸다.
“네 녀석이 순양그룹에 큰소리치는 건 딱 십분지 일이다.”
겨우 10%.
내 얼굴을 순식간에 스치고 지나간 실망을 할아버지는 놓치지 않았다.
“왜? 부족한 게냐?”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이놈 보게. 충분합니다가 아니라 괜찮습니다? 욕심은….”
“정말이에요. 충분해요.”
“대신 그 계열사들이 가진 자산은 그룹에서 가장 많다. 알지?”
많으면 뭐 하나? 돈으로 살 수 없는 게 바로 순양그룹의 지배 지분인데. 온갖 비상장 회사들이 다 쥐고 있지 않은가?
“네가 자신 있게 말하지 않았더냐? 그 계열사와 미라클이 가진 HW 그룹을 기반으로 또 하나의 순양그룹을 만들겠다고.”
“꼭 그리하겠습니다.”
시원하게 대답했을 때 할아버지는 몸을 일으켜 내 곁에 앉았다.
“도준아.”
“네.”
“이 할애비가 어떤 심정으로 이렇게 했는지 이해하지?”
애잔한 할아버지의 눈을 보니 섭섭한 마음이 일순간에 사라졌다.
“네. 잘 알아요.”
절묘한 숫자 10%.
두 분의 큰아버지가 내가 가진 지분을 차지하기 위해 위험한 도박을 시도하기엔 적고, 나를 무시하기에는 큰 숫자.
나를 자신의 편으로 끌어당기려 다정하게 대할 만한 숫자다.
날 위험에 빠트리지 않기 위해 안배한 할아버지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한다.
“감사합니다. 할아버지.”
난 주름 가득한 할아버지의 두 손을 꼭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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