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Youngest Son of Sunyang RAW novel - Chapter 169
“죄송해요.”
“괜찮다니까. 회사 그만둔 게 네 책임만은 아냐. 내가 조심하라고 했는데, 어쩌겠냐? 다들 눈치 보느라 그랬다는데.”
무슨 내용인지 몰라 눈치 보는 사람은 어머니뿐만 아니다.
나도 두 사람의 얼굴을 번갈아 보며 눈만 깜빡거렸다.
“아, 별일 아니다.”
별일 아니라고 했지만, 내용은 좀 우습기까지 한 일이었다.
어차피 나는 아버지의 미디어 회사에 관심도 없으니 아버지는 자연스럽게 상준 형을 끌어들였다.
음악에 관심도 많고 예술을 사랑하는 피는 상준 형이 더 낫다고 판단했다. 이쪽도 나름대로 빡센 곳 아닌가?
바닥부터 차근차근 익히는 게 정석이라고 생각한 아버지는 상준 형을 엄하게 굴리라고 지시했지만, 지시대로 움직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일을 배우기는커녕 모두 눈치만 보며 왕자 대접하기에 하루 종일 구경꾼처럼 서성대기만 하다 퇴근했다.
출근해서 일하지 못하고 하루를 때우는 게 얼마나 큰 고통인지 대기 발령받은 사람만 안다.
아직 머리를 들지 못하는 상준 형을 보니 마음이 편치 않다.
좋아하는 음악 공부하며 재능이 없음을 깨달았을 때 얼마나 절망했을까? 일터에 나가 멍 때리다 하루를 마감했을 때 얼마나 참담했을까?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복에 겨운 소리지만 다들 자기 상황이 가장 힘든 법이다.
풀 죽은 형의 모습을 보니 짠한 마음이 솟았다.
“아버지, 어머니. 저 잠시 형이랑 이야기 좀 할게요. 괜찮죠?”
난 깜짝 놀라 머리를 든 형을 향해 눈짓하고 구석 테이블로 자리를 옮겼다.
“형. 이런 건 어때?”
“뭐가?”
“요즘 가수 기획사가 대세잖아. SM엔터테인먼트 상장한 거 알지?”
“너 거기 투자했어?”
상준 형은 휘둥그레진 눈으로 물었다.
“아니. 엔터주는 답 안 나와. 규모도 작고. 거긴 그쪽 계통 사람들이나 투자하는 거지. 앞으로 10년쯤 지나야 가치를 인정받을 거야.”
연예인이 귀족처럼 행세하는 세상. 모든 청소년이 꿈꾸는 직업. 짝퉁 걸그룹이 오로지 섹시함만을 내세워 대학 축제에 행사 뛰는 게 이상하지 않은 시대.
연예인이라는 직업을 대를 이어 물려주고 재벌 2세처럼 연예인 2세라는 단어가 자연스러운, 참으로 요지경 같은 세상.
그런 세상이 올 때쯤이면 엔터주는 급등한다. 아직은 아니지만.
“하고 싶은 말은 그게 아니고. 형도 그쪽으로 한번 해볼래?”
“기획사? 내가? 어림도 없어.”
머리를 절레절레 흔드는 형을 보니 뒤통수라도 한 대 갈기고 싶었지만 참았다.
“음악 좋아하잖아. 물론 좋아한다고 잘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아버지가 하는 영상보다는 음악이 낫지 않을까?”
“도준아. 마음 써주는 건 고마운데 그거 아무나 하는 거 아냐. 일단 매니지먼트에 대해 내가 아는 게 없다고. 신인 발굴하는 거, 교육시키는 거…. 방송 데뷔 성사시키고…. 불가능해.”
이 대답은 조금 기특하기까지 했다.
능력도 안 되는 놈이 얼씨구나 하고 시작한다고 말했다면 내가 멈췄을지도 모르겠다.
“배워.”
“뭐?”
“일을 배워야지. 설마 내가 회사를 차려줄 거라고 생각한 거야?”
“그… 그게 아니라…….”
“형이 한번 골라봐. 꼭 취직하고 싶은 곳. 아직 성공하지도 않았고 가수도 몇 없는 작은 곳. 하지만 형이 보기엔 가능성이 엿보이는 그런 회사 말이야. 거기 취직하라고.”
“그러니까 회사부터 골라라?”
“진짜 빡빡 기고 일 배워. 가수 차도 운전하고 생리대 심부름도 해. 성질 더러운 아이돌한테 쪼인트도 까이고. 그렇게 시작하는 거야.”
“…….”
“우리 집안 팔지 말고 형 이름만으로 취직해. 외국 유학 다녀온 스펙도 있잖아. 형은 월급 적어도 괜찮잖아? 매달려서라도 취직하라고.”
과연 그 정도의 의욕이 있을까?
하지만 바닥을 건너뛰겠다는 안일한 생각이라면 차라리 평생 백수로 사는 게 낫다. 생활비와 용돈이야 충분히 줄 수 있다.
“그러다 자신감 생겼을 때 말해. 회사 차려줄게. SM보다 더 크게 키울 자신과 능력만 내게 보여줘. 그럼 돈이 얼마가 들든 형에게 투자할 테니까. 어때?”
“생각 좀 해볼게.”
이 자식이 장난하나?
고생은 싫고 성공만 원하는 재벌 3세 흉내라도 내겠다는 건가?
일그러진 내 표정을 본 상준 형은 급히 입을 열었다.
“야! 빡빡 기는 거 때문에 생각해보겠다는 거 아냐. 일 배우는데 그 정도는 해야지. 그런데 내가 엔터 회사를 키울 수나 있을지, 경영할 그릇은 되는지부터 생각해보려고. 부모님 돈도 아니고 동생이 준 돈을 홀라당 날려먹는, 그런 병신 짓은 피해야 하잖아.”
오호라, 이런 기특한 소리까지 할 줄이야!
“생각하지 마.”
“뭐?”
“일단은 그냥 배워. 배우다 보면 자신감도 붙을 것이고 능력도 생기는 거야. 그 분야를 모르면서 생각만으로 결정하는 게 더 병신 짓이다. 그렇지 않아?”
내 말에 아무런 대꾸도 못 하던 상준 형은 잠깐의 침묵 뒤에 입을 열었다.
“아버지께 말하지 마. 그럼 어디선가 또 말이 샌다. 이제 누구누구의 아들, 누구누구의 손자라는 말은 듣고 싶지 않아. 들어서도 안 되고.”
“그래. 형이랑 나만의 비밀로 하자. 됐지?”
몇 번 실패해도 밀어줘야 가족이다.
상준 형이 고른 회사에 몇십억 투자해주고 제대로 일 배우도록 부탁해야겠다.
정말 로드매니저만 하다 몇 년 까먹을 수는 없지 않은가?
* * *
“기분이 어떠냐? 나이 스물넷에 계열사… 몇 개나 되냐? 열 개 넘어?”
“HW 그룹 9개, 순양금융사 4개. 주력만 그렇고 자회사는 몇 갠지 저도 헷갈리네요.”
“어쭈? 너무 척하는 거 아냐? 흐흐.”
집으로 돌아와 아버지와 단둘이 맥주 한잔을 마셨다.
“할아버지도 그렇고, 세현 삼촌도 그렇고…. 회사 쪼개서 여기저기 붙이는 데는 귀신이더군요. 솔직히 자회사는 신경 쓸 여력도 없습니다.”
“또 잘난 척은. 야! 나도 회사 많아. 하지만 조그만 제작 스튜디오까지 신경 쓰며 관리한다고. 신경 써야지.”
“아버지.”
슬쩍 웃으며 나지막이 아버지를 불렀다.
“왜?”
“사이즈가 다르지 않습니까? 국내 제1의 생보사, 한국 점유율 32%의 자동차 회사. 도급 순위 6위의 건설사. 더 말할까요?”
“됐다. 자식이…. 끝까지 잘난 척은, 흐흐.”
물려받았든, 편법을 썼든, 아버지는 아직 어린 아들이 거대한 기업을 일궜다는 자랑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하지만 몸에 딱 맞지 않는 옷은 탈이 나는 법, 아버지의 웃음은 묘한 여운이 남았다.
“네 큰아버지들은? 연락 온 적 없어?”
“아직까지는…. 아마 아버지께 연락하지 않을까요? 대주주인 저와 미라클, 양쪽을 컨트롤할 수 있다고 여길 테니까요.”
“그럴 수도 있겠네. 내가 어떻게 해줄까?”
“제가 학업 끝마칠 때까지는 관여하지 않는다고 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응? 학업? 그게 무슨 소리지? 내년 2월이면 졸업인데? 두어 달 남았는데 그사이에 무슨 일이 생기는 거냐?”
“아뇨. 대학원 갈 생각입니다.”
아버지는 황당한 표정으로 말했다.
“학교도 잘 안 가던 놈이 대학원은 무슨? 왜? 경영학이나 경제학을 공부해볼 생각이야? 아니면 회계학이라도?”
“그건 아니고요.”
난 아버지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레 말했다.
“할아버지 연세가 만만치 않잖아요. 졸업하면 곧바로 영장 나올 테고, 군대 가야 하는데 그동안 할아버지께 좋지 않은 일이라도 생기면 어떡합니까? 살아계시는 동안은 군대 미루고 곁을 지키고 싶어서요.”
“군대?”
아버지의 얼굴은 더 황당한 표정으로 변했다.
“너 군대 가? 그룹에서 조치했을 텐데…?”
“네? 무슨 조치요?”
“잠깐만 있어 봐.”
아버지는 휴대전화를 꺼냈다.
“아, 형님, 저 윤깁니다. 네, 네. 잘 지내시죠?”
아버지는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어 일상적인 안부 인사를 한참 나눴다.
“여쭤볼 게 있는데요. 우리 도준이 군대 문제 어떻게 됐습니까? 네. 네. 아……. 그때 그 사고? 네…. 그렇군요. 아, 아뇨. 연락을 못 받아서요. 네…. 네. 아무튼 알겠습니다. 고맙습니다. 형님. 일간 한번 뵙죠. 소주나 한잔…. 하하하.”
통화를 끝낸 아버지는 빙긋 웃었다.
“그럼 그렇지. 연락하는 걸 깜빡했구만.”
“누구와 통화하셨어요?”
“응? 아…! 이학재 실장님. 너 군대 문제 어떻게 됐나 해서….”
설마?
조금은 이상하게 생각했다. 상준 형은 물론이고 사촌 형들 모두 군대 간 놈이 없었다. 기억을 더듬어봐도 방위조차 없었으니 모두 면제였던 게 확실했다.
나도 당연히 면제라고 생각했지만, 아직 졸업하지 않았고 휴학한 적도 없으니 알 수 없었다. 영장 나오면 처리하는 거라고 짐작만 할 뿐이었다.
더욱이 할아버지와 나를 떨어트려놓는 가장 좋은 방법은 내가 군대 가는 것이니, 큰아버지들이 장난이라도 치지 않을까 걱정했다.
대학원은 만에 하나를 대비한 꼼수였는데….
“너 면제 판정 받아놨어. 넌 좀 쉬웠다더라. 예전에 큰 교통사고를 당했을 때 진단서를 끊어 처리했다고…. 그러니까 영장 나오는 거 연기하려고 대학원 갈 필요는 없어졌어.”
“그렇군요.”
아무렇지 않은 듯 머리를 끄덕였다.
“혹시 군 문제 아니라도 공부 더 할 생각 있어? 외국 유학이라도 가볼래?”
“아뇨. 공부는 성공을 위해서든, 공부 자체를 좋아하든 둘 중 하나 때문에 하는 건데…. 전 둘 다 아니잖아요. 성공했고, 공부는 하기 싫고.”
“그럼 다시! 내가 어떻게 해줄까? 형님들이 날 들볶을 때?”
“당분간은 관망하겠다고 하시죠.”
“지금은 그래야겠지?”
“네.”
아버지는 남은 맥주를 싹 비웠다.
“그래. 필요한 거 있으면 언제든 이야기하고.”
“그렇게 하겠습니다. 참, 상준 형 있잖습니까?”
“응? 상준이?”
“네. 혼자 어떻게 해보겠다고 했으니 당분간 취직 알아보지 마시고 놔두세요. 형도 성인이니까요.”
물끄러미 날 보던 아버지는 내 어깨를 두드렸다.
“내가 전생에 나라를 서너 번은 구한 게 틀림없어. 이런 복덩이 아들을 두다니 말이야. 그래, 모른 체하마.”
나는 별다른 말 없이 아버지를 향해 미소만 지었다.
아버지가 나라를 구한 게 아니고 전생에 억울한 죽임을 당한 아들을 둔 겁니다. 덕분에 아버지는 행운이 얻어걸린 셈이라고요.
* * *
월드컵 개최를 코앞에 둔 한국 축구 대표팀은 시드니 올림픽 조별리그 탈락, 아시안컵 3위의 성적을 기록하는 등 성적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마침내 허정무 감독은 쫓겨났고 1998년 프랑스 월드컵 조별예선에서 대한민국에 5-0의 참패를 안겼던 거스 히딩크가 2001년 1월 1일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공식 취임했다.
“축구 좋아하십니까?”
“보통이죠, 뭐. 국대 경기만 좀 보는 수준? 그게 전부예요.”
장도형 전무는 히딩크 감독의 취임식 인터뷰를 보며 흥미를 보였지만, 결과를 알았을 때 스포츠만큼 재미없는 게 있을까?
맥 빠지는 걸로 치면 영화 스포일러보다 더하다.
내가 별다른 흥미를 보이지 않자 장도형은 화제를 돌렸다.
“새해 첫날인데 집에 계시지 왜 이곳에 계십니까?”
“임원들이 인사하러 올 것 같아서요.”
“받으시면 되죠.”
“아이고, 그거 엄청 불편합니다. 자식 같은 놈에게 문안 인사를 하는 것도 힘들겠지만, 아버지뻘이신 분들에게 인사받는 건 더 고역입니다.”
“그럼 전 아버지뻘이 아니라서 편하신가요? 새해 첫날 절 보자고 하신 이유가?”
“전무님께 힘을 실어드리기 위함이죠.”
“네?”
“내일 회사 가서 슬쩍 흘리세요. 새해 첫날 저랑 독대했다고.”
“아…!”
힘을 실어준다는 뜻을 이해하자 장 전무는 슬쩍 웃음을 보였다. 그가 바라는 것, 바로 새로운 실세의 첫걸음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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