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Youngest Son of Sunyang RAW novel - Chapter 175
진영기 부회장은 진도준의 얼굴을 보자마자 오늘 낮, 금융사 사장들에게서 들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증권가 매니저?”
“그렇습니다. 딱 그 정도입니다. 그쪽으로는 상당한 소질이 있다고 합니다. 실제 여의도 증권가에서도 진도준이 뭘 찍었느냐가 초미의 관심사라고….”
“급히 날 찾은 이유가 도준이 칭찬 늘어놓으려는 거 아니잖소. 그래서요?”
“아, 죄송합니다.”
진도준에게 상처 입은 자존심을 안고, 진영기 부회장에게 달려온 세 명의 사장은 오늘 겪었던 수모를 남김없이 털어놓았다.
“그러니까 결론부터 말하면 도준이는 경영보다는 차라리 회사를 판 돈으로 투자에 쏟아붓는 게 더 낫다고 생각한다. 맞소?”
“그렇습니다. 열심히 회사를 키워서 돈을 버는 것보다 주식투자가 훨씬 쉽고, 빠르고, 더 많이 벌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 뭐요? 주식투자에 빠진 사람은 도박 중독과 유사하다던데…. 혹시 도준이가 그런 거요?”
주식투자는 도박이 아닌 건강한 투자라고 주장하지만, 경쟁, 모방, 열중, 우연의 요소가 적당히 어우러져 있기 때문에 사람이 병적으로 집중하는 매력. 즉, 도박의 얼굴이 공존하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거기다 지금까지 진도준이 보여준 모습, 대학생이지만 젊음을 즐기기보다 모든 생활이 주식투자 위주로 꾸려져 있었고, 취미는 차트 분석이고, 특기는 종목 발굴이다.
이 정도면 중독 수준이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 아닌가?
“아, 그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겠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도준이가 카드사를 빨리 매각하려는 이유가 바로 도박 자금 마련일 수도 있겠군요.”
사람은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해석한다.
세 명의 사장은 오늘 진도준에게 들었던 폭언이 한낱 도박 중독자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면 철저히 무시할 수 있다는 것에 오히려 위안을 얻었다.
“아버님이 이 이야기를 들었다면 기절초풍하시겠구먼.”
진영기는 이 사실에 웃어야 할지, 화내야 할지 어정쩡한 심정이었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도박에 환장한 어린놈의 본모습을 몰라본 아버지에게 화내야 할 상황이다.
하지만 이런 횡재도 없다.
돈만 듬뿍 안겨준다면 그룹의 지분을 잔뜩 쥐고 있는 순양생명과 증권까지 넘겨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 * *
“많이 기다리셨죠? 혹시 아버지한테 연락 못 받으셨습니까?”
두 분의 표정을 살피며 연신 머리를 조아렸다.
가장 우려하는 것은 자리를 박차고 나가버리는 것이었지만 이분들도 사업가였다.
불쾌한 기색은 분명하지만, 거래를 앞두고 기분 내키는 대로 행동하지는 않았다.
“방금 문자 받았다. 너랑 직접 이야기하는 게 나을 것 같다고 하는구나.”
“문자?”
진영기는 후다닥 휴대전화를 꺼내 확인했다. 그의 표정이 또 한 번 일그러졌다.
“이 자식은 연락 주려면 빨리 주던지…. 에이.”
폴더를 접어 안주머니에 넣은 큰아버지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내게 말했다.
“넌 체면을 좀 지켜. 여기 일하는 애들하고 왜 언성을 높이는 거야?”
“그…. 그게….”
뒷머리를 긁으며 얼버무리자 큰아버지는 짜증 섞인 목소리로 변했다.
“그 매상 내가 챙겨주마. 됐지?”
“아, 아닙니다. 큰아버지. 전 큰아버지 지시 사항인 줄 모르고….”
“형도 그 정도만 해요.”
진동기 부회장이 나를 향해 미소 지으며 말했다.
“급히 오느라고 고생했다. 저녁 챙겨 먹어.”
그래도 둘째가 더 영리하다.
본심은 숨기고 윽박지르기보다 챙겨주는 척한다.
“네. 큰아버지께서 먼저 드십시오. 아직 첫술도 뜨지 않으신 것 같은데.”
“그래 먹자. 형님도 좀 드세요.”
한동안 말없이 먹기만 했다. 내가 조급해할 필요는 없다. 아버지의 일방적인 통보에도 이렇게 달려 나온 걸 보면 두 사람은 지금 입안이 바짝 마르고 음식 맛도 모를 것이다.
가끔 내 술잔에 술을 채워주는 것 외에는 상갓집 분위기와 다르지 않았다.
누가 가장 목이 마를까?
“도준아.”
역시, 우리 첫째 큰아버지. 성급한 성격은 변하지 않았다.
“네.”
“들리는 소문이 사실이냐? 카드사를 정리한다는 거 말이다.”
“아직 생각 중입니다. 아, 오해는 마십시오. 큰아버지. 결론 내리기 전에 상의드리려고 했습니다.”
입에 발린 소리라는 걸 잘 아는지 구겨진 얼굴이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네 할아버지가 주신 걸 쉽게 버리는 거 아니다. 쥐고 있어.”
진동기 부회장이 날 보며 타이르듯 말했지만, 진심이 아닌 것쯤 한눈에 알 수 있다. 저 탐욕에 젖은 반짝이는 눈빛이 말해준다.
“그렇지 않아도 할아버지께서 절 부르셨어요.”
두 사람은 동시에 수저를 탁― 하고 내려놓았다.
“뭐라고 하시더냐?”
“이왕 물려준 거 더 간섭하지 않으시겠다고…. 누구에게 팔던 알아서 하라고 하셨어요.”
누구에게!
이 말은 두 사람에게는 아주 중요하다.
조카가 가진 것을 뺏든, 싸게 사든 괜찮다는 뜻 아닌가?
“그래서? 넌 뭐라고 말씀드렸어?”
“순양카드를 팔아 훨씬 더 큰돈을 벌겠다고 했습니다. 1조가 넘는 돈이 들어오면 지금 순양증권의 수익률의 몇 배는 벌어들일 자신 있습니다. 하하.”
이때는 최대한 거만하게 웃어줘야 한다.
하지만 두 분 큰아버지는 내 웃음에 신경 쓰지 않았다. 그들의 귀를 울린 숫자, 1조 원.
장도형 전무가 뽑아준 자료에 따르면 최저가는 1조2천억이었다. 이 금액이면 해외 금융사들도 거품 물고 덤벼들 것이라고 자신 있게 말했다.
우리 큰아버지들 역시 머릿속에는 하나의 숫자가 있을 것이다.
바로 순양카드의 맥시멈 가치.
그 숫자가 넘어가면 절대 인수하지 말라는 참모진들의 당부를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들었을 게 뻔하다.
“진심인 게로구나.”
진동기 부회장이 곁눈으로 흘깃 보며 나지막이 말했다.
“지금 미국은 부동산을 베이스로 한 금융상품이 쏟아지고 있습니다. 거기에 투자한다면 몇 년 안에 두 배로 만드는 건 문제 없어요. 신용카드 수수료에 비할 바가 못 됩니다.”
조금 과장해서 그렇지 꼭 틀린 말은 아니다. 두 배까지는 아니고 6, 70%는 가능한 수익률이다.
한껏 잘난 척하며 투자를 말했지만 두 사람은 나를 한심한 눈빛으로 바라볼 뿐이다.
프랜시스 언더우드가 말하길 “권력 대신 돈을 선택하는 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하는 실수다. 돈은 10년 후 허물어지는 새러소타의 현대건축물과 같다. 하지만 권력은 반세기를 지탱하는 오랜 석조 건축물과도 같은 것이다.”라고.
내 할아버지는 순양그룹을 이용하여 돈으로 권력을 샀고 한 세대를 지나 순양그룹은 권력이 되었다.
난 돈을 좇는 멍청이이고 두 분 큰아버지는 내가 버린 권력의 한 조각을 주우려는 현명한 사람인 것이다.
“그렇구나. 우리야 주식투자니, 펀드니 하는 걸 잘 모르니…. 이미 구세대가 돼버렸어. 허허.”
진동기 부회장이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큰형님에게 눈짓했다. 일단은 어린애 장단이라도 맞춰주라는 의미일 것이다.
“우리 조카, 대단한데? 두 배라니. 허허.”
싸게 먹으려고 마음에도 없는 소리까지 하는 걸 보면 장사치는 장사치다.
급한 성격의 장사치가 먼저 본심을 드러냈다.
“도준아.”
“네.”
“너 혹시 순양카드를 대현그룹에 넘길 생각이었니?”
“아뇨. 정한 건 없습니다. 오세현 대표와 상의했는데…. 참, 아시죠? 미라클 인베스트먼트의 대표.”
두 사람이 머리를 끄덕였다.
“그분 말씀이 농협에서 관심을 보인다고 하더군요. 다양한 카드 구성, 확실한 전산망 등을 고려하면 우리 순양카드 인수가 가장 빠른 지름길이라고 판단했다고 합니다.”
두 분 큰아버지는 당황한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농협이라면 충분한 자금력을 바탕으로 조건만 맞다면 순식간에 채갈 것이기 때문이다.
“도준아. 아무리 그래도 순양의 이름을 다른 곳에 넘기는 건 옳지 않아. 회사 하나하나에 할아버지의 숨결이 스며든 건데…. 너도 잘 알잖니.”
내가 할아버지에 약하다는 걸 아니 감성을 건드리시겠다?
“아, 아직 결론 내린 것도 아닙니다. 서두를 사안도 아니고요.”
속이 좀 탈 것이다.
서두르면 다른 곳으로 넘어갈 위험이 있고, 서두르지 않다가 내 마음이 변해버리면 카드사 인수가 물 건너 가버린다.
특히 둘째 큰아버지는 카드사 인수가 절박하다. 현금 유동성을 생각하면 하루라도 빨리 카드사를 가져오는 게 유리하기 때문이다.
이제 침착한 진동기 부회장이 먼저 방아쇠를 당겼다.
“도준아. 차라리 우리에게 넘기는 게 어떠냐? 값은 후하게 쳐주마.”
“우리? 우리라니? 회사가 조립식 장난감은 아니잖아. 쪼개자는 거냐?”
“형님. 쪼개자는 게 아니라 공동 인수도 가능하다는 뜻입니다.”
“누구 마음대로! 가만히 보자 보자 하니까 노는 꼴이 아주 가관이구먼.”
진영기 부회장의 인내는 여기까지였다.
“도준아. 허튼소리 그만하고 순양카드는 이 큰아버지에게 넘겨라. 너도 경영하기 힘들어하니, 내가 후하게 쳐주마. 이 이야기는 여기서 끝낸다. 됐지?”
“저, 저기… 큰아버지. 그게….”
“시끄럽다. 아무리 철부지라고 해도 그렇지, 순양의 이름을 함부로 해서는 안 된다는 것쯤은 알아야지! 부끄럽지도 않아?”
서슬 퍼런 그의 기세에 맞장구는 쳐주는 게 맞지 않을까?
“죄, 죄송합니다. 큰아버지.”
황급히 머리를 숙였다. 빨리 둘째 큰아버지가 나서야 할 텐데, 왜 이리 미적거리시나?
“형님. 그런 식으로 윽박지른다고 될 일이 아닙니다. 도준이가 뭘 알겠습니까? 그래도 현명한 아이니 잘 타이르면 됩니다. 도준아.”
“네.”
“너도 이제 어엿한 성인이고 또 순양의 금융 부분 대주주이기도 하다. 그러니 이 일이 얼마나 큰 건인지 잘 알 거다. 지금 이 자리에서는 딱 하나만 약속해라.”
“네. 어떤 약속을 드리면 되겠습니까?”
두 분의 눈치를 보며 잔뜩 풀 죽은 표정을 지었다.
“순양카드를 정리한다고 해도 순양의 이름을 지워서는 안 된다. 할아버지께서 널 얼마나 이뻐하시니? 그걸 생각해서라도 우리 말을 들어야 한다.”
“그 말씀은…. 두 분께 매각하라는 뜻이겠지요?”
“두 분은 무슨! 나한테 넘겨.”
“형님. 쫌! 억지 부리는 건 그만합시다.”
“동기야! 네 힘으로는 불가능하다는 걸 몰라? 1조라고, 1조! 이 돈을 만들 수나 있어? 철강이든 기계든 네 계열사를 팔아야 가능한 금액이라는 걸 알 거 아냐!”
충분히 무르익었으려나?
“저기, 큰아버지. 말씀 중에 죄송한데요. 1조가 아닙니다.”
“뭐?”
“1조가 넘는다고 말씀드렸는데….”
눈이 휘둥그레진 두 사람을 향해 일단 한숨부터 쉬고 말했다. 마치 큰 결심이라도 한 것처럼.
“좋습니다, 그럼 이렇게 하겠습니다. 미라클과 순양카드에서 산정한 최소 밸류에이션(valuation, 기업가치평가)은 1조2천억입니다. 전 1조4천억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하고요. 이 정도만 주신다면 순양의 이름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두 분 큰아버지께 넘기겠습니다.”
1조4천억이라는 숫자는 진동기 부회장을 충분히 절망하게 만들었다. 그가 이 돈을 만들기 위해서는 계열사를 정리하지 않는 한, 회사 지분을 담보로 은행 대출을 받는 수밖에 없다.
하지만 금융권은 대출 대신에 직접 순양카드를 인수하려고 나설 것이다. 아니, 그보다 앞서 담보능력이 되는지도 짚어봐야 한다.
진동기 부회장의 표정을 확인한 진영기 부회장은 이미 승기를 잡은 듯 의기양양했다.
“좋다. 나 역시 분석은 해야 하지만 도준이 너의 조건에 최대한 맞춰주마. 이제 실무진들 불러서 협상하면 되겠지?”
이 정도 말까지 나왔는데도 둘째 큰아버지가 입을 열지 못하는 걸 보니 자금 여력이 정말 좋지 않나 보다.
하지만 쉽게 끝나는 싸움은 재미없다. 피도 좀 흘려야 제맛이다.
“그럼 매각 대금은 3년 만기 채권으로 하겠습니다. 가족인데 이 정도 편의는 봐드려야죠. 저야 뭐 돈이 급한 건 아니니까요. 곧바로 실무진에게 세부 사항 준비하라고 일러두겠습니다.”
채권이라는 말을 던지자마자 두 분의 표정이 싹 바뀌었다.
3년 만기 채권.
외상 거래다.
‘외상이라면 소라도 잡아먹는다’라는 속담도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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