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Youngest Son of Sunyang RAW novel - Chapter 176
“자, 잠시만. 도준아. 너 방금 뭐라고 했어? 3년짜리 채권이라고 한 거 확실하지?”
진동기 부회장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반면에 진영기 부회장은 너무 당황해서 말도 제대로 못 했다.
“네. 대신 매각 대금은 1조4천억으로 하겠습니다. 아 참, 정확한 수치는 아니지만, 은행 부채가 4천억 이상이라고 알고 있어요. 그러니까 부채 안고 9천억 조금 넘을 겁니다.”
“9천억?”
진동기 부회장의 머리 돌아가는 소리가 생생하게 들렸다.
숫자 계산이 아니다. 3년 뒤 9천억을 갚을 수 있을지 없을지는 이미 안중에 없다.
1년 뒤도 예측하기 어려울 만큼 세상은 휙휙 돌아간다. 하물며 3년 뒤의 회사 상황을 어떻게 정확히 추정할 수 있을까?
지금 그의 머릿속에는 1조에 가까운 채권을 발행할 수 있느냐 없느냐만 계산 중일 것이다.
반면에 다잡은 승기를 놓쳐버린 진영기 부회장은 할 말을 찾느라 전전긍긍이었다.
하지만 가족이라 편의를 봐주겠다는데 외상 거래 불가를 외칠 수도 없는 일, 자꾸 동생의 눈치만 살필 뿐이었다.
기뻐하는 한 사람과 전전긍긍하는 또 한 사람의 표정을 보니 우습기도 하다.
남은 시간이 3년인 시한폭탄을 서로 가져가려 눈치를 보는 꼴이라니.
천천히 오는 변화는 적응할 수 있다. 가랑비 몇 방울이 떨어지면 폭우가 오기 전에 비를 피할 시간이 있지만, 갑자기 쏟아지는 소낙비는 고스란히 맞아야 한다.
하지만 위험은 항상 갑자기 닥치며 혼자 오는 법이 없다. 위험은 두 가지 이상이 함께 움직인다. 강풍을 동반한 소낙비처럼. 태풍을 동반한 쓰나미처럼.
3년 뒤 카드 대란이 소낙비라면 만기가 돌아오는 1조 원가량의 채권은 강풍이 될 수도 있고 쓰나미가 될 수도 있다.
카드 대란으로 채권회수가 불가능해지고 회사의 자금이 씨가 말라갈 때, 1조 원이라는 채권은 핵폭탄을 맞는 것이나 다름없다.
누가 이 폭탄을 가져갈지 궁금하다.
자금력이 풍부한 순양전자라면 강풍과 소낙비를 견딜 수도 있다. 하지만 순양중공업이라면?
3년 뒤의 중공업 시황에 따라 다르겠지만, 쉽게 버텨낼 수는 없을 것이다. 시한폭탄의 효과를 보려면 진동기 부회장이 카드사를 인수하는 게 훨씬 좋긴 한데….
“도준아! 제정신이야? 3년짜리 채권이라니? 카드사를 매각하는 순간 수익이 끊어지는 거다. 당장 자금 압박에 시달릴 수도 있어.”
진영기 부회장이 황급히 말했지만, 이미 늦었다.
“형님. 헛소리 좀 그만하쇼. 도준이가 맡은 계열사는 전부 화폐 찍는 은행이나 다를 바 없어요. 자금 압박은 무슨…!”
진동기 부회장은 형님을 향해 눈을 부라린 다음 내게 말했다. 분명한 확답을 받으려는 것이다.
“도준아. 카드사를 1조4천억으로 평가한 것은 다른 계열사 지분을 싹 뺐다는 뜻이지?”
“그렇습니다. 관계 자회사 서너 개를 제외하고 핵심 계열사 주식은 다 옮길 겁니다. 순양생명이나 순양증권 지분까지 포함하면 3조에 육박하니까요.”
“좋아. 그리고 매각 대금 전부 3년 만기 채권으로 받겠다는 거 맞지?”
“네, 큰아버지. 우린 가족이니까요.”
둘째 큰아버지에게 환한 미소를 보냈다. 그는 내 미소에 화답이라도 하듯 술을 따랐다.
“그래. 일단 그 정도로 끝내자. 자세한 이야기는 실무자들이 해야겠지. 그리고 형님.”
“뭐냐?”
“조카 보는 앞에서 언성 높이지 맙시다. 식사 끝내고 우리 둘이 따로 이야기 좀 하시죠. 어떻습니까?”
진동기의 간절한 눈빛, 조카 앞에서 체통을 잃지 않으려는 마지막 자존심. 이 눈빛을 진영기 부회장도 거절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는 머리를 끄덕이며 수저를 들었다.
“일단 먹자. 그리도 도준아.”
“네. 큰아버지.”
진영기 부회장은 언제 그랬냐는 듯 인자한 표정으로 말했다.
“넌 네 어깨에 짊어진 회사가 무겁니?”
“조금은요. 그래도 제가 잘 아는 분야라서 다행이죠. 만약 제조업이었다면…. 어휴, 어떻게 감당하겠어요? 공장에, 노동자에, 노조에….”
나는 머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오세현 대표 보면 알 수 있어요. 아진그룹, 순양자동차, 대아건설…. 이 회사들 챙기느라 정신없더군요. 그나마 사장들과 임원들이 제 회사처럼 챙기니까 버티죠. 저였다면 못 버텼을 겁니다. 그 임원들이 어린 저를 인정하겠어요?”
큰아버지들은 원하는 대답을 듣지 못해 실망한 표정이었지만 희망의 끈은 놓지 않았다. 사람 상대하는 걸 극도로 싫어한다는 사실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아직 지시나 명령 내리는 것에 익숙하지 않은 젊은 놈.
그 맛을 모른다고 생각하기에 경영 상황이 나빠지면 내 멘탈이 흔들릴 것이고 그때는 어떻게든 기회를 잡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래. 앞으로 어렵거나 힘든 일 생기면 언제든 우리에게 말하렴. 적극 도와주마.”
고양이 쥐 생각해주는 척한다. 가증스럽게….
“네. 감사합니다.”
폭탄은 매물로 내놨고, 서로 사겠다고 다투는 모습까지 봤으니 할 일은 끝났다.
이제 경쟁을 붙여 1조4천억 이상을 뜯어내면 되는데…. 매각 대금을 너무 올리면 첫째 큰아버지가 유리하다.
가족인데 경쟁은 동등해야 하지 않겠는가?
이자나 듬뿍 뜯어낼까?
두 사람의 보이지 않는 팽팽한 기 싸움을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했는데 코스 요리와 디저트까지 먹고 나니 이만 일어나야 했다.
“그럼 저 먼저 일어날까요? 두 분은 더 말씀 나누실 거죠?”
“아, 그래. 먼저 가렴. 수고했다.”
두 분에게 허리를 숙이고 호텔을 빠져나왔다.
조금 아쉽다.
경영이나 지배보다는 승부에 집착하는 모습을 더 보여주고, 복잡한 것을 싫어하고 돈벌이를 좋아하는 단순한 모습을 부각하고 싶었다.
그랬다면 조금이라도 경계심을 희석할 수 있었을 텐데 좀 부족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다.
* * *
“어떻게 생각해?”
“뭘?”
“도준이 말이유. 저놈 오늘 진심이었을까?”
“복잡하게 생각하지 마라. 저놈이 본모습을 숨겼든, 고작 저 정도 놈이든 변하는 건 없어. 도준이가 가진 회사, 지분, 다 가져와야 하니까.”
진영기는 술을 삼키며 속마음을 드러냈다. 어차피 동생도 자신과 다를 바 없다는 걸 잘 안다.
재미있는 일이다. 모두에게 진심을 속이지만 가장 강력한 경쟁자니까 숨겨야 할 것이 없다니 말이다.
진동기는 술을 홀짝이면서 형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진심을 드러냈다.
“형님. 순양카드 꼭 가져야겠수? 그룹 지분도 없다고 하잖아.”
“자식이, 꼭 아쉬울 때만 그런 표정이지?”
“형님!”
“그만해. 지금 와서 서로 사정 봐줘 가며 챙기는 우애 좋은 형제 흉내 내면 뭐하냐?”
“그래서? 회사 하나 놓고 경매라도 붙자고? 우리가 싸우면 도준이만 좋아지는 거, 알잖소?”
“안 싸우면? 너 좋아지는 거는 괜찮고? 돈지랄할 자신 없으면 지금이라도 포기해.”
“도대체 이유가 뭐요? 카드사가 현금 돌리기 좋다고는 하지만 형님은 전자만으로도 충분하잖아. 그리고 소비재 관련 회사도 많아 현금 아쉬울 건 없는데 왜 욕심내는 거요? 그냥 나 엿 먹으라고?”
“뭐? 엿 먹어? 이 자식아! 엿 먹은 건 나야! 난 이미 아버지한테 엿 먹었다고. 빌어먹을.”
쨍강―!
진영기는 술잔을 바닥에 던져버렸다.
“내가 철들기도 전부터 아버지는 귀에 못이 박이도록 말했다고. 영기야, 앞으로 넌 순양의 선장이 될 거다. 내 모든 걸 네게 줄 테니 넌 더 웅장한 순양을 만들어야 한다.”
진영기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런데…. 수십 년을 그 말을 믿고 살았는데…. 내 나이 곧 환갑이다. 이 나이에 받은 게 절반도 안 돼. 무슨 말인 줄 알아? 네가 가진 거든, 어린 조카 새끼가 가진 거든, 전부 내 꺼라고! 내가 내 것을 돈 주고 사야 하는 지금 이 상황이 지랄 맞은 거야! 이래도 내가 너 엿 먹이는 거라고 생각해?”
진영기가 불같이 화를 냈지만, 진동기의 눈빛은 오히려 차분히 가라앉았다.
조금 안쓰럽기까지 했다.
장남이란 저런 것인가? 부모의 기대를 한 몸에 받고 막중한 중압감을 느끼지만 대신 부모의 모든 것은 당연히 자기 것이라고 착각하는 존재가 장남인가?
“형 생각은 잘 알았어. 그럼 나도 생각을 고쳐먹어야겠어.”
“무슨 생각을 어떻게 고쳐먹어?”
“아주 잠시, 각자 맡은 계열사를 더 키우고 더 늘려서 서로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고, 필요하다면 서로 바꿔가며…. 거 있잖아, 선의의 경쟁 같은 거. 그런 걸 생각했는데…. 역시 안 되겠어. 그냥 지분 싸움하자고. 누구 하나 자빠져서 두 번 다시 일어나지 못할 때까지.”
진동기는 입을 닦은 냅킨을 식탁에 툭 던지며 일어섰다.
“순양카드는 내가 가져갈 거야. 형도 아버지에게 배웠겠지? ‘돈으로 사는 건 누구나 할 수 있다. 중요한 건 꼭 가지려는 의지다. 그럼 돈이 중요한 게 아니라는 걸 알게 될 거다.’ 난 이 말을 귀에 못 박히도록 들었어. 그리고 사실이더라고.”
진영기는 진동기가 떠나간 빈 의자를 뚫어지게 쳐다보며 이를 악물었다.
“개 같은 새끼…. 끝까지 잘난 척은.”
* * *
순양그룹 본관에 들어서자 장도형 전무가 황급히 달려왔다.
“미리 연락을 좀 주시죠. 하루 만에 정리하느라 많이 부족해서…. 마음에 드실지 모르겠습니다.”
“책상, 의자, 컴퓨터, 회의용 테이블만 있으면 됩니다.”
“하하, 그게 더 어렵죠. 미니멀리즘 추구하는 사람이 얼마나 까다로운데요?”
“전 미니멀리즘이 아니라 필요한 것만 있으면 됩니다.”
본관 입구에서 전용 엘리베이터까지 걸어갈 때 많은 사람들이 도열해서 허리를 숙였다. 이 모습을 보며 이맛살을 찌푸렸다.
“전무님. 앞으로 이런 거 시키지 마십쇼. 제가 싫어하는 거 아시잖습니까?”
“그렇지 않아도 오늘만 이럴 겁니다. 적어도 실장님 얼굴을 알아놔야 할 사람들이거든요. 인사는 천천히 나누시더라도 말입니다.”
전용 엘리베이터는 단둘만 탔다. 조용히 나눌 이야기가 있기 때문이다.
“지시한 건 어떻게 됐습니까?”
“대표이사 네 분은 이미 실장님 방에서 대기 중입니다. 그리고 직원들은 각 사장실 앞에서 대기 중입니다. 실장님 들어가시면 곧바로 시작할 겁니다.”
“네. 번개처럼 해치우죠.”
“문제없습니다.”
24층에 준비한 내 방으로 처음 들어갔다.
응접 소파에 앉아 있던 네 명의 대표이사가 불편한 기색을 감추지 않고 그대로 드러내며 엉거주춤 일어났다.
일단 방을 한번 둘러보니 누구 솜씨인지 알 것 같았다.
심플하면서도 고급스러운 가구로 꽉 찬 방.
고모가 준비한 것이 틀림없다.
“모두 편히 앉으세요.”
상석에 앉자 장도형 전무가 내 곁에 섰다.
“이민섭 사장님.”
“네.”
“카드사는 매각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사장님은 오늘부로 해임합니다.”
이민섭 사장의 얼굴이 순식간에 일그러졌을 때, 딴소리가 나오지 않도록 덧붙였다.
“진영기, 진동기 부회장님께 말씀드리니 인수하시겠다고 하시더군요. 이민섭 사장님의 재선임은 그분들께 달려 있습니다.”
일그러졌던 이 사장의 얼굴이 더할 나위 없이 밝아졌다.
바본가?
큰아버지가 다시 사장 자리에 앉힐 리가 없지 않은가? 큰아버지 곁에 줄 서 있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난 큰아버지를 위해 내 손으로 잘랐을 뿐이다.
“그리고 양우찬 사장님. 고인규 사장님.”
“네.”
“두 분도 해임합니다.”
두 사장은 벼락이라도 맞은 듯 얼어붙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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