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Youngest Son of Sunyang RAW novel - Chapter 177
“저보다 큰아버지를 더 따르시니 그분께 가십시오. 자리 하나쯤은 만들어주시겠지요.”
“자, 잠시만. 지금 그게….”
양우찬 사장이 급히 입을 열었지만 난 손을 들어 그의 입을 막아버렸다.
“이제 실감 나십니까? 누가 인사권자인지?”
두 사람은 노려보는 내 눈을 마주하지 못하고 시선을 피했다.
“경고합니다. 이 방을 떠나는 순간부터 순양그룹에서 있었던 모든 일은 잊으십시오. 인생을 돌아보며 추억을 회상하는 건 머리로만 하시고 입으로 하시면 안 됩니다. 제가 단 한 줄이라도 활자로 보게 되면 여러분들의 과거를 샅샅이 뒤질 겁니다.”
순양그룹 계열사 사장까지 올랐다면 온몸이 먼지투성이다. 심할 경우 진흙도 많이 나온다.
입조심하지 않으면 자신이 수사 대상이 되는 건 시간문제고 피의자 신분이 될 수도 있다는 걸 잘 안다.
순양그룹의 힘이라면 지검 검사 몇 명을 동원하는 것쯤 식은 죽 먹기 아닌가? 검사가 뒤를 털기 시작하면 말년이 꼬인다는 것쯤 모를 리 없다.
세 사람의 안색이 흙빛으로 변했다.
윤호일 순양화재 사장만이 긴장 때문에 몸을 빳빳이 세우고 굳어 있었다.
“자, 세 분 사장님. 마지막 순양그룹의 흔적을 지우겠습니다. 휴대전화 꺼내세요.”
이들은 잠시 주춤하더니 긴 한숨을 내뿜었다.
임원으로 승진하는 순간 휴대전화를 나눠준다. 업무용으로 쓰라고 주는 거지만 대부분 공사 구분을 하지 않고 사적인 통화도 많이 한다.
하지만 회사 비품이라는 것은 변하지 않는다.
세 사람은 미적거리며 휴대전화를 꺼내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너무 염려 마십시오. 사적인 통화 내용까지 들여다볼 생각은 없습니다. 공적인 업무 부문만 확인하고 전화는 폐기할 생각입니다.”
장도형 전무가 굳은 표정으로 휴대전화를 챙겼다.
“하실 이야기가 많으실지 모르지만 조금 아끼십시오. 미안하지만 전 단 한마디도 들어줄 기분이 아닙니다.”
내 말을 신호로 장도형 전무가 입을 열었다.
“각 사장실의 물건은 감사팀이 챙기고 있습니다. 하나하나 확인하고 개인 물품은 댁으로 보내드릴 겁니다. 그리고 본관 현관 앞에 승용차가 대기 중입니다. 사장님들께서 원하시는 곳으로 모실 겁니다. 그럼.”
장도형 전무는 기계적으로 말을 마친 후 문을 열었다.
명백히 나가달라는 의미였다.
세 사람은 이를 악물고 일어섰다. 나를 노려보는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지만, 말은 아꼈다.
좋지 않게 갈라서며 악담을 퍼부을 정도로 멍청하지도 않고 아마추어도 아니다. 오늘은 이렇게 헤어지더라도 언제 다시 웃으며 악수해야 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이들이 이대로 백수처럼 지낼 리 없다. 분명 이들을 초빙하는 곳이 있을 것이며 고문, 사외이사, 감사라는 자리에 앉을지도 모른다. 이들을 채용하는 곳은 순양그룹과 관계 맺기를 원하며 원하는 것을 들어주기 위해서는 웃으며 악수해야 한다.
나와 악수할 생각은 없겠지만, 드잡이질할 마음은 더더욱 없음이 분명하다.
세 사람이 나가자 장 전무가 문을 닫고 소파 한쪽에 조용히 앉았다.
“윤호일 순양화재 사장님.”
“네.”
윤 사장은 그제야 머리를 들고 내 눈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순양화재는 비상장 기업이며 지분 75%는 순양생명이 쥐고 있습니다.”
“네. 잘 알고 있습니다.”
“사장님의 생각이 궁금합니다. 방금 떠난 세 분과 행동을 같이하실 생각이신지, 아니면 순양화재의 모회사인 순양생명을 맡아 한껏 능력을 발휘하실 것인지 말입니다.”
난감할 것이다. 좋아서 펄쩍 뛰고 싶은데 방금 이 방을 나간 사람들과의 친분을 생각하면 왠지 배신자 같은 느낌이 들 것이고, 그렇다고 거절할 만큼 의리가 쌓인 관계는 아니다.
이럴 때는 내가 머리를 끄덕일 명분을 줘야 한다.
“부탁합니다. 이미 눈치채셨겠지만, 지금은 세대교체가 필요한 시점입니다. 순양금융그룹의 핵심은 누가 뭐라 해도 순양생명 아닙니까? 윤 사장님 외에는 마땅한 분이 없습니다.”
간곡히 부탁하는 말까지 들었고 이 정도면 충분할 것이다.
윤호일 사장은 마치 구국의 결단을 내린 애국지사 같은 표정으로 머리를 끄덕였다.
“먼저 감사의 인사를 드려야겠지요. 감사합니다. 앞으로 실망하시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흔쾌히 승낙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윤호일 순양생명 사장님.”
장도형 전무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이제 대회의실로 가시죠. 금융 부분 임원 전부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네. 윤 사장님. 함께 가시죠. 임원들에게 발표하겠습니다.”
우리 셋은 웃으며 대회의실로 향했다.
문을 활짝 열고 들어서자 수십 명의 사람들이 벌떡 일어났다.
조금 떨렸지만, 어깨를 펴고 최대한 당당한 자세를 유지한 채 상석으로 향했다.
좌우로 장도형과 윤 사장이 자리 잡자 모두의 시선이 우리를 향했다.
“안녕하십니까? 진도준입니다.”
내 앞의 마이크를 가까이 당기며 첫인사를 건넸다.
임원들은 가볍게 머리를 숙였다. 긴장한 표정, 시큰둥한 표정 그리고 주댕이가 나온 놈도 보였다.
“조금 전, 대표이사 세 분이 순양을 떠났습니다.”
그 세 명이 누군지 말하지 않아도 모두 알 것이다. 내 옆에 윤 사장이 있으니 말이다.
한순간 회의장이 술렁거렸다.
이 웅성거림은 누군가의 분노일 수도 있고, 누군가는 변해버릴 환경에 기대를, 누군가는 우려를 드러내는 것이다.
내가 다시 입을 열자 술렁거림이 사라졌다.
“첫 번째 인사에 불만 있으신 분은 언제든 회사를 떠나셔도 됩니다. 하지만 회사에 남겠다고 마음 굳히신 분은 이 하나를 명심하십시오.”
다시 좌중을 훑어보니 이들의 초조함이 느껴졌다.
“앞으로 펼쳐질 일들에 대해서 어린애처럼 투덜거리는 소리가 들리면 냉혹한 대가를 감당하셔야 할 겁니다. 임원이시지 않습니까? 경영진의 일원이라는 자각을 해야 합니다. 왜냐? 전 경영에 관여하지 않을 것이며 순양금융그룹에서 그 어떤 직책도 갖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 말을 믿는 사람은 없어 보였다.
누구 핏줄인데 가만있을까? 모두 이런 표정이다.
“이렇게 임원분들을 한자리에 모시는 것도 오늘이 처음이자 마지막일 겁니다. 딱 한 번이 필요한 이유는 바로 인사의 원칙을 말씀드리기 위함입니다.”
임원도 월급쟁이다 보니 인사 원칙에는 모두 귀를 쫑긋 세운다.
“우려하시는 낙하산 인사는 없을 겁니다. 그리고 내부 승진을 기본으로 하겠습니다. 오늘 윤호일 사장님께서 순양생명의 대표이사가 되셨습니다. 아직 세 회사의 대표이사 자리가 비어 있습니다. 그곳의 대표이사는 현재 차석의 자리에 계신 임원이 오르시게 될 겁니다.”
이 말의 뜻은 대규모 승진 인사를 단행한다는 것이다.
모두 한 계단씩 오르게 되니 회의실 공기는 순식간에 따뜻해졌다.
“그리고 순양금융그룹 총괄 전략실을 신설할 것이며 장도형 전무님이 책임질 겁니다. 직급은 부사장입니다.”
장도형 전무와 눈을 맞추자 가볍게 머리를 숙였다.
“새로운 대표이사님 그리고 장도형 부사장님, 마지막으로 임원 여러분께서 회사를 잘 이끌어가기 바랍니다. 전 분기별 실적만 보고받는 것이 전부일 겁니다. 다만….”
결정적인 한마디를 남겨 두고 잠시 뜸을 들였다. 임원들의 귀가 쏠리는 것이 느껴질 정도였다.
“분기별 실적을 바탕으로 항상 보직과 직책을 바꾸겠습니다. 냉혹하리만치 실용주의를 따를 거니까 각오를 다져주시기 바랍니다.”
더 말하면 군더더기일 뿐이다. 이제는 행동으로 보여주는 일만 남았다.
장도형 부사장과 함께 먼저 회의실을 빠져나왔다. 다시 내 방으로 돌아와 커피 한잔을 마시며 긴장을 풀었다.
“뒤처리는 부사장님께서 잘해주십시오.”
“네. 오늘 중으로 모두 인사 발령 내겠습니다.”
“그리고 두 부회장님 비서진과 말씀드린 대로 카드사 매각을 조율하셔야 합니다.”
장도형 부사장은 한숨부터 내쉬었다.
“정말 채권으로 협의하셨습니까? 너무 후한 조건 아닙니까?”
“그렇지 않으면 경쟁이 안 됩니다. 중공업 부문에서는 1조 원을 지금 당장 조달할 여력이 없어요.”
“알겠습니다. 마지막 푸념이었습니다. 채권으로 하신 걸 보면 진동기 부회장님 쪽으로 생각하시는 듯한데 맞습니까?”
한쪽은 수류탄이 되고 한쪽은 핵폭탄이 된다. 이왕이면 핵폭탄이 낫지 않은가? 어차피 한 명만 살아남을 전쟁인데.
“그렇습니다. 이왕이면…. 하하.”
웃음으로 얼버무리고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1/4분기 끝나는 대로 하위 실적 임원 10명을 정리하겠습니다. 우리 부사장님…. 손에 피 좀 묻히세요.”
“10명씩이나요?”
봄이 되자마자 피바람이 분다. 그 충격이 작지 않다는 걸 아니 장도형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한두 명으로 겁이나 먹겠습니까? 전 직원이 충격에 빠질 정도는 돼야 피 묻히는 보람이라도 있죠. 대신 실적 좋은 상위 10개 팀에는 보너스를 듬뿍 안겨주십시오. 한쪽은 칼바람, 한쪽은 봄바람. 모두 회사가 변했다는 걸 체감할 겁니다.”
“네. 10명의 임원이 날아가는 충격을 상쇄할 만큼 보너스를 지급하겠습니다. 괜찮겠습니까?”
말귀도 빨리 알아듣고 고집을 내세우지도 않는다. 이런 점이 장도형의 장점 같다.
“괜찮습니다. 앞으로 그런 건 알아서 하셔도 됩니다. 일일이 허락받으려 하지 마시고요.”
“재량권을 주시면 돌려드리지 않을 겁니다. 흐흐.”
이 와중에 농담까지. 배짱이 좋은 건가? 아니면 천성인가?
“앞으로 더 큰 재량권을 드릴 텐데 놀라지나 마세요.”
“기대하겠습니다. 흐흐.”
“그럼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할 일 많으신 분을 붙잡고 시간 낭비하는 건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
“여의도로 가십니까?”
“아뇨. 학교에 잠시 가봐야 합니다. 저 혼자 졸업사진 촬영을 안 했다고 연락 왔어요.”
“졸업? 아, 다음 주죠?”
장도형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네. 왜 그러시죠?”
“그게… 대학생이라는 걸 잊었습니다. 오늘 회의실에서 말씀하시는 거 보니까 사회생활 몇 년은 하신 것처럼 착각했습니다.”
이 양반아, 십 년 넘게 했다. 말하는 자리가 아니라 말 듣는 자리라는 것이 차이지만.
“아무튼, 축하합니다. 졸업식장에 꽃다발이라도 들고 갈까요?”
꽃다발이라는 소리에 손을 휘휘 내저었다.
“아이고, 그렇지 않아도 돌아버리겠어요. 부모님까지는 문제없는데 할아버지가 오십니다. 상상해보세요.”
“아…. 정말… 부담되시겠어요.”
장도형은 충분히 이해한다는 듯 안쓰러운 표정으로 변했다.
진짜, 미치도록 부담스럽다.
* * *
“할 만해? 벌써 2주가 넘었지?”
“내 얼굴을 한번 봐. 볼이 숟가락으로 파먹어 버린 것 같지 않아?”
조금 과장한 표현이지만, 20일도 지나지 않아 눈이 퀭했다.
서민영은 2월 1일 사법연수원에 들어간 후 문자 한 통 보내지 않았다. 정신없을 거라는 건 알았지만, 얼굴이 상할 만큼 혹독한 시간을 보내는지는 짐작 못 했다.
“산삼 몇 뿌리 보내줄까?”
“옥살이나 다름없는데 산삼으로 돼? 면회나 자주 와.”
“그래. 노력해볼게.”
“참, 너 순양그룹 금융 계열사 맡았다면서? 소문 돌더라.”
“맡기는 뭘, 거기서 일 배우는 거야. 나도 이제 고생길에 접어들었지. 일 못하면 거제도로 유배 가는 게 우리 집안 전통이다.”
“가기만 해! 내가 머리끄덩이 끌고 오피스텔에 감금해버릴 테니까!”
이때 법대 강당 입구가 소란스러웠다. 검은 정장의 사내들이 우르르 들어와 통로를 확보하는 모습이 보였다.
오셨다.
유별난 우리 할아버지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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