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Youngest Son of Sunyang RAW novel - Chapter 178
후광효과, 카리스마, 경외심, 존경심, 어쩌면 부자에 대한 원초적인 선망…?
그 실체가 뭔지 정확히는 모르겠다.
하지만 강당으로 걸어 들어오는 할아버지와 눈을 마주친 사람들은 한 명도 빠짐없이 얼떨결에 머리를 숙이며 인사를 드린다.
하필이면 부모님과 형 그리고 고모가 할아버지 뒤를 따랐다. 아버지는 조금 찌푸린 표정이었고 어머니는 난감해서 어쩔 줄 몰라 하는 게 확 드러났다.
고모는 그런 시선을 아주 자연스럽게 즐기며 몸에 걸친 값비싼 모피 코드를 과시하는 중이었다.
“민영아.”
“응?”
“도망가.”
“뭐?”
너무 늦었다.
나와 서민영을 발견한 할아버지는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민첩함을 보여주며 어느새 내 곁에 다가왔다.
“이놈아. 할애비를 봤으면 잽싸게 달려올 것이지 뭐 하는 게냐?”
호통은 나를 향했지만, 시선은 이미 서민영에게 향했다.
생쥐를 낚아채려는 독수리 같은 눈으로 그녀를 한 번 쓱 훑더니 부드러운 음성이 흘러나왔다.
“이쁘장하게 생겼구나. 아버지와는 딴판이로고. 어머니가 미인이시겠구먼.”
“네?”
긴장한 서민영은 인사를 먼저 드려야 한다는 걸 까마득히 잊어버리고 할아버지의 말이 무슨 뜻인지 생각해야 했다.
“아니다. 참, 아가는 이름이 뭔고?”
“아, 서민영입니다. 인사가 늦었습니다.”
좀 이상하다. 이미 알고 계셨나?
“할아버지. 민영이 부모님을 아세요? 아니, 처음부터 알고 계셨어요?”
“네 녀석이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지 모를 줄 알았더냐? 네놈 점심 메뉴까지 훤하다, 이놈아.”
뭔가 이상하다. 내 뒤를 따라다니며 조사했다는 뜻인데, 그럴 리는 없고…. 도대체 어떻게 아셨을까?
더 묻고 싶었지만, 우리 주변을 빙 둘러싼 가족들의 축하 인사 때문에 그럴 수는 없었다.
“졸업 축하한다. 공부는 뒷전이더니 용케 하는구나.”
아버지가 어깨를 두드리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을 때 고모가 톡 쏜다.
“용케는 무슨, 학교에서 알아서 처신한 거지.”
“쯧! 넌 그 조동아리 조심 좀 안 할래?”
할아버지의 한마디에 고모는 입을 닫았고 그녀의 관심은 곧 서민영에게 쏠렸다.
“도준이 여자 친구?”
“아, 네. 일단은 그런 셈이에요. 서민영입니다.”
그녀는 고모를 비롯한 가족들에게 머리를 꾸벅 숙였다.
“일단은은 또 뭐야?”
가만 놔두면 질문 공세만 이어질 것 같아 내가 나섰다.
“이쪽은 제 여자 친구 서민영입니다. 동기고, 작년에 사시 패스해서 지금 사법연수원에서 연수 중이에요. 졸업식 끝나고 다시 들어가야 합니다.”
“오호! 대단하네. 재학 중 합격이구나. 사시 패스도 더불어 축하한다.”
가족들은 그녀를 보며 놀랐고 모두 축하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십니까? 회장님.”
이때 서민영의 곁으로 슬며시 다가온 중년 남자가 할아버지께 머리를 숙였다.
“아이고, 서 판사. 이거 참 오랜만일세. 춘부장께서는 안 오셨는가? 어찌 보이지 않어?”
“네. 거동이 불편하셔서 걸음을 못 했습니다. 회장님 오시는 줄 알았다면 억지로 나오셨을 텐데, 아쉽습니다.”
뭐지? 서로 잘 아는 사이였던가?
하긴, 법조인만 십여 명인 집안이니 인사 정도는 나눴을지도 모르겠다.
“아는지 모르겠지만 서 판사 부친께서는 대법원장이셨어.”
할아버지의 설명을 듣자 모두의 입에서 낮은 탄성이 나왔다.
“그 양반이 우리 순양그룹에 추징금 200억을 때렸지. 내가 직접 만나서 보신탕까지 대접하며 봐달라고 했는데 얄짤없더라고. 허허.”
“회, 회장님…….”
당황한 서 판사가 얼굴을 붉히며 말을 더듬을 때, 서민영이 웃으며 말했다.
“회장님, 사람들이 오해하겠어요. 공직자 매수는 범죄거든요.”
“매수? 넌 아직 네 할아버지를 잘 모르는구나.”
“네?”
“보신탕 먹은 다음 날 사람 시켜서 만사천 원 넣은 봉투를 갖다 주더구나. 내가 말은 안 했지만 얼마나 화가 났는지 아니?”
“할아버지가 왜 화를 내세요? 그게 당연한 거지.”
내가 슬쩍 끼어들었다. 주변에 듣는 귀가 한둘이 아니다. 가능하면 이 이야기를 빨리 끝내고 싶었다. 강당의 모든 사람들이 바라보는 시선도 부담스럽다.
“보신탕 특은 만칠천 원이야. 삼천 원 덜 넣었어. 그때 나는 보통, 대법원장은 분명히 특을 먹었다고.”
농담도 참 아슬아슬하게 하신다.
다행히 헐레벌떡 뛰어온 총장 때문에 대법관 매수 시도 이야기는 여기서 끝났다.
“회장님. 총장실에 들를 것으로 생각했는데, 바로 이곳으로 오셨군요.”
“손자 놈 학사모 쓴 거 보러 왔지, 총장 얼굴 보러 온 거 아니네.”
“여전하시네요. 하하. 아무튼, 감사 인사가 늦었습니다.”
“인사? 무슨 인사?”
“기숙사 건립 말입니다. 저도 조금 전 보고받았습니다.”
내가 입학할 때 꽤 많은 장학금을 기부한 걸로 아는데 기숙사 건립까지? 총장의 입이 찢어질 듯 벌어진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구나.
“4년간 학교도 제대로 안 다닌 날라리를 무사히 졸업시켜주는 값으로 생각하게. 인사치레 받자고 한 거 아닐세.”
할아버지는 나를 노려보다 씩 웃었다.
“사실 그거 내 돈으로 하는 거 아닐세. 아는지 모르겠지만, 대아건설에서 기부하는 거야. 나중에 오세현 대표에게 전화나 한 통 넣어주게.”
“아, 그렇습니까?”
대아건설이면 내 돈 아닌가? 어처구니가 없어 입을 떡 벌리자 할아버지는 내 귀에 대고 속삭였다.
“남의 돈으로 생색내는 거 또한 장사다. 잘 알아 둬라.”
할아버지는 총장에게 손을 내밀었다.
“난 이만 가보겠네. 수고하시게.”
“왜 벌써 가십니까? 졸업식은 보고 가셔야죠.”
“아니야. 손자 놈 학사모 쓴 거 봤으니 됐어. 내가 있어 봐야 괜한 소란스러운 일만 더 생기지 않겠는가? 저것 좀 보게. 벌써 파리가 꼬이기 시작했네그려.”
아니나 다를까 강당 입구에는 이미 기자들이 진을 치기 시작했고 순양그룹 회장에게 눈도장이라도 찍으려는 사람들이 경호원들의 제재를 뚫으려 기를 썼다.
거의 집 안에서 나오지 않고 은둔하고 계시니 기자들에게 이 같은 기회는 다시 오지 않을 것이다.
손자가 졸업생이니 분명 나타날 거라고 생각했나 보다.
“넌 나 좀 보자.”
할아버지는 발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고것 참 심지가 대차구나. 괜찮은 애다.”
“누구요? 민영이?”
“그래. 내 앞에서 눈빛 흔들리지 않은 애 만나기가 얼마나 어려운데. 제 할애비를 많이 닮았어. 인연 끊지 말고 만나봐. 네게 도움 될 게다.”
“할아버지. 우린 심지 굳은 판사보다 조금 얍삽한 판사가 더 필요하지 않나요? 흐흐.”
“예끼 이놈아. 자고로 안사람은 심지가 굳건해야 한다. 그래야 어려운 일 당해도 집안은 조용한 법이다.”
내가 결혼해서 가정을 꾸릴 수나 있을까?
누가 됐든 내 아내가 되면 본의 아니게 힘겨운 싸움에 휘말린다. 뻔히 알면서 그 싸움에 끌어들일 필요는 없지 않을까?
“그리고 졸업식 끝나면 뭐 할 거냐? 친구들이랑 술 한잔하는 게냐?”
“아뇨. 사진 좀 찍고 바로 회사로 가야 합니다. 인사이동도 있고 벌여놓은 일이 많아서요.”
“인사이동? 내 새끼들 목을 전부 쳐버린 거 말이냐?”
미리 언질도 드리지 않고 세 명의 사장을 해임한 걸 야단치시는가 했는데 표정을 보니 아니다. 계속 웃고 계시지 않은가?
“죄송합니다. 미리 말씀드려야 했는데….”
“아니다. 네 사람 안 될 것 같은 놈들은 빨리 도려내야지. 잘했다.”
걸음을 멈춘 할아버지가 내 등을 쓰다듬었다.
“인사에 너무 깊게 개입하지 않는 것도 좋지만, 마름에게 모두 맡기는 것도 위험하다. 봉급쟁이들은 그들만의 네트워크가 있어. 그 네트워크가 굳건해지는 건 위험해.”
장도형 부사장을 말하는 거다. 내가 오세현에게 기댔듯이 장도형에게 기대는 걸 우려하시는 것이 틀림없다.
“조심하겠습니다. 그리고 가끔 브레이크 거는 걸 잊지 않겠습니다.”
“그래. 잔소리는 그만하마.”
“바쁜 일 끝내고 찾아뵙겠습니다.”
“이놈아, 늘 바쁜데 언제 끝나기를 기다려? 시간 만들어서 와.”
“흐흐. 네. 졸업식 끝나고 바로 찾아뵙겠습니다.”
할아버지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경호원들이 부리나케 강당 밖으로 달려 나가 기자들을 막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니 난감하다.
졸업식 끝나고 우리 가족을 둘러쌀 기자들을 생각하니 머리가 지근거렸다.
* * *
“이건 할아버지께 드리는 선물입니다.”
“졸업장 아니냐?”
“네.”
“됐다. 그깟 졸업장이 뭐 대수라고.”
할아버지는 내 예상과 다르게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고 관심도 없었다. 서울대 법대를 들어갔을 때 보여주셨던 것과 너무 큰 차이가 난다.
“이놈아. 서울대 법대가 어떤 곳이냐?”
“네?”
“들어가는 건 하늘의 별 따기지만 졸업이야 쉽지 않으냐? 네 동기들 중에 졸업장 못 받은 놈이 몇이나 되더냐?”
자퇴한 놈은 몇 있긴 하지만 공부를 따라가지 못해 퇴학당한 이는 없다.
“정말 가치 있는 건 바로 이거다.”
할아버지는 서랍에서 작은 액자 하나를 꺼냈다.
“그건…?”
“그래, 네 녀석의 합격 통지서다. 이게 개나 소나 다 졸업하는 그 대학의 졸업장보다 수천수만 배는 더 가치 있는 거야. 난 이걸로 족해.”
합격 통지서를 다시 서랍 속에 넣은 할아버지는 빙그레 웃었다.
“넌 내게 선물은 이미 충분히 줬다. 남은 선물은 순양 간판을 단 회사를 늘려가는 것뿐이야. 알아들었겠지?”
“네. 두 배, 세 배 키우겠습니다.”
“내가 죽기 전에는 꼭 볼 수 있도록 해다오.”
지금 당장에라도 가능하다. HW 그룹의 간판을 순양으로 바꿔 달면 되는, 어렵지 않은 일이다.
어쩌면 할아버지도 그걸 바라고 하신 말씀인지도 모른다.
“네. 제가 약속드리겠습니다. 분명히 보실 겁니다.”
“네 녀석은 말귀를 잘 알아들어서 좋아, 허허.”
역시.
그것이다.
할아버지가 주신 게 있으니 약속은 꼭 지켜야겠다. 그러려면 지금부터 슬슬 준비해야 한다.
“그럼 이제 내 차롄가?”
“무슨 말씀이십니까?”
“네 졸업 선물 말이다. 이젠 너도 사람이 필요할 때가 온 것 같다.”
할아버지는 수화기를 들었다.
“들어와.”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는지 수화기를 내려놓기 무섭게 사십 대로 보이는 사내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보자마자 어떤 자인지 알았다.
“인사드려라. 우병준 상무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향해 머리를 숙였다.
“안녕하십니까? 진도준입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우병준입니다.”
메마른 어조, 무표정한 얼굴. 순양시큐리티 사람이 분명했다.
그가 내민 명함을 받아들자 할아버지가 말했다.
“단축번호에 우 상무 번호 저장해 둬.”
“아, 네.”
우병준 상무는 전화번호를 저장하는 나를 잠시 보더니 사무적인 어투로 입을 열었다.
“편의상 실장님으로 부르겠습니다. 괜찮습니까?”
“아…. 네.”
“앞으로 실장님 차는 우리 직원이 운전할 겁니다. 이미 밖에서 대기 중입니다. 그리고 경호팀은 네 명입니다. 순양그룹 본관, 여의도 미라클 사무실에 계실 때는 건물 입구에서 항시 대기할 것이며, 실장님께서 귀가하실 때까지 밀착 경호할 것입니다. 별도의 승용차로 움직이니까 신경 쓰이지는 않을 겁니다.”
빠르게 말을 마친 우병준 상무는 할아버지를 향해 머리를 숙였다.
“이만 나가보겠습니다.”
“그래. 앞으로 고생 좀 하게.”
“별말씀을요.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할 뿐입니다.”
그는 건조하게 말을 끝낸 후 서재를 나갔다.
“누군지 알겠지?”
“네. 순양시큐리티 사람 아닙니까?”
“맞다. 앞으로 너를 위해 일할 팀을 구성했다. 우 상무가 책임질 것이고 대략 4, 50명으로 구성했을 거다.”
경호 정도 하는 데 4, 50명이 필요하지는 않다. 교대 근무한다고 해도 10명이면 충분하다.
그제야 이들의 진짜 임무가 뭔지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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