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Youngest Son of Sunyang RAW novel - Chapter 184
“자네 선친께서도 내 꺼는 손대지 않았어. 다른 놈들 꺼를 놓고 싸우기는 했지만, 서로가 가진 건 욕심내지도, 탐내지도 않았어.”
“회, 회장님…….”
더듬거리기도 하고 얼굴도 붉어진 주광식이었지만, 그의 눈은 차분히 가라앉아 있었다.
“어린 내 손자가 가진 거라고 해서 순양의 이름이 지워진 건 아니야. 경고하는데 순양카드에 손끝 하나라도 대면 힘없는 노인네 강단이 얼마나 무서운지 알게 될 걸세. 명심해.”
“회장님, 일단 고정하시고….”
장남인 주태식 회장이 나섰지만, 할아버지는 요지부동이었다.
“빈소니까 큰소리 내지 못한 걸 다행으로 여기게.”
주태식의 화살이 동생을 향했다.
“너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냐? 엉?”
“오해십니다, 형님. 그냥 회사 근황이나 물어본 게 전부입니다.”
곤혹스러워하는 주광식을 보며 할아버지는 미련 없이 돌아섰다. 돌아선 할아버지의 얼굴에 미소가 잠깐 스치는 것도 놓치지 않았다.
“가자, 앞장서거라.”
“네.”
빈소를 나오니 수행원들이 이미 승용차의 문을 열어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밖에 아직 기자들 많나?”
“네. 더 불었습니다.”
“그래? 잘됐구나. 기자들 사진 잘 찍도록 창문 다 내리도록 해.”
“할아버지! 이미 충분합니다.”
미치겠다. 적당한 수준이라는 걸 모르시는 분이다. 마음먹은 일이라면 최대한 크고 화끈하게 끝을 보려는 저 성품은 여전하다.
“세상에 충분한 건 없다. 가다가 멈추니 그런 것이지. 만족이란 포기를 아주 그럴싸하게 포장한 말일 뿐이다. 명심해.”
뭐…. 할 말 없게 만드는 것도 여전하다.
난 어깨를 한 번 으쓱하고 차에 올랐다.
사찰 입구가 보이자 할아버지는 내 옆구리를 쿡 찔렀다.
“웃어, 이놈아. 네 사진이 내일 전국을 도배할 건데 그 잘생긴 얼굴 찌푸린 채로 나갈 거냐?”
“초상집 나가면서 환하게 웃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런가? 아무튼 좋은 인상 주도록 노력해보라고.”
귀가 멍멍할 정도의 셔터 소리를 한참 들은 뒤에야 사찰에서 멀어졌다.
“그런데 할아버지.”
“왜?”
난 차의 속도가 올라갔을 때 눈치를 보며 입을 뗐다.
“주광식 회장에게 왜 그러셨어요? 혹시 도와주신 겁니까?”
“내가 누굴 도와?”
“주광식 회장이죠.”
“그놈을 왜?”
“그러게요. 할아버지께서 그런 말씀 안 하셔도 순양카드가 대현으로 넘어갈 일도 없는데…. 주광식 회장이 딴생각 없다는 걸 주태식 회장에게 알려준 꼴 아닙니까?”
“바로 봤다.”
“그러니까, 왜요? 어차피 알게 될 텐데…. 그냥 못 박는 것 이상은 아니지 않습니까?”
할아버지는 피식 웃었다.
“이놈아. 무슨 구체적인 목적이 있어야만 행동하는 건 아니잖느냐? 그냥 그러고 싶었다. 주광식이를 도와주면 대현그룹이 더 시끄러워질 테니까 말이다. 난 저놈 집구석이 조용한 걸 못 참겠더라고. 허허.”
어떤 순간이든 기회가 닿을 때마다 경쟁자를 흔들어놓는다. 목표가 없을지라도 본능적으로.
가진 것 대부분을 물려주고 일선에서 은퇴했지만, 여전하다. 우리 할아버지.
* * *
다음 날, 주 회장의 발인에 모시고 가기 위해 해 뜨기도 전 할아버지 댁으로 달려갔다.
할아버지는 이미 조간신문을 구해 기사를 샅샅이 살피고 계셨다.
“어떠냐? 꽤 그럴듯하게 나왔지?”
신문 1면은 여전히 고 주영일 회장의 장례 기사였고 주변 기사로 나의 이야기도 실렸다.
「순양그룹의 새로운 다크호스?」
「만 24세의 젊은 후계자, 진도준. 순양그룹의 금융을 짊어지는가?」
「한국 20대 부자 순위 1위의 진도준. 드디어 모습을 드러내다.」
이 정도 기사는 양반이었다.
스포츠 신문은 주영일 회장의 기사가 아니라 내 사진을 큼지막하게 박고 1면을 도배했다. 그것도 자극적인 제목과 내용으로.
「모든 것을 가진 남자. 돈, 외모, 두뇌.」
「수능 전국 10위의 성적, 서울대 법대 졸업, 재계에 화려하게 데뷔.」
「재계의 거물 진양철 순양그룹 회장과 한국 대표 미인 이서현 씨의 유전자를 고스란히 이어받은 0.001%의 남자, 진도준」
「마침내 모습을 드러낸 한국 최고의 신랑감 1순위, 진도준」
기자 놈들은 정말 대단하다. 이렇게 손발이 오그라드는 문장을 어떻게 자신의 이름을 걸고 쓸 수 있을까?
“내가 어제 단단히 일러뒀거든. 우리 손자 사진 제대로 싣지 않으면 광고 싹 끊어버리겠다고. 흐흐. 이놈들… 약발 제대로 받았구먼.”
약발이 아니고 협박이겠죠. 광고 끊는다는 건 밥줄 끊는다는 소리니까요.
입 밖으로 내지 않았지만 이미 내 표정을 보고 눈치채신 것 같다.
“광고는 무기야. 무기를 손에 쥐고 쓰지 않는다는 건 바보 같은 짓 아니냐?”
“전 한마디도 하지 않았는데, 왜 그러세요? 흐흐.”
“네 얼굴이 말하니까 그러는 거다.”
이때 이학재 실장이 서재로 들어왔다.
“출발하셔야 합니다. 회장님.”
나를 발견한 그는 신문을 가리켰다.
“실물이 더 나은데, 아깝다. 그치?”
“저 정도 나온 것도 감지덕지죠. 오늘은 실장님도 가십니까?”
“그래. 오늘은 내가 모시마. 넌 안 가도 돼.”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아니다. 오늘은 내가 긴한 약속이 있어. 그러니 넌 빠지는 게 나아.”
출발할 채비를 마친 할아버지도 손을 내저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다녀오세요.”
이럴 것 같았으면 미리 알려주시지 하는 생각이 들었으나 말하지는 않았다. 삼년상을 치르겠다는 말까지 했는데 아침 문안 인사라고 생각하면 불평할 수 없는 일이다.
할아버지가 출발하고 난 곧바로 순양 본관으로 향했다. 이른 아침이지만 이미 많은 직원들이 빠른 걸음으로 건물로 들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실장님. 오늘은 정문으로 들어가지 마시고 지하주차장의 전용 엘리베이터를 이용하시는 게 어떨까요?”
핸들을 잡은 순양시큐리티 직원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기사 때문에 그런 거죠?”
“네. 이제 실장님 얼굴을 모르는 직원은 없을 겁니다. 불편하실 것 같은데….”
“그럽시다. 순양 직원들 눈에는 부모 잘 만난, 밥맛없는 새끼 아니겠어요?”
“아니 꼭 그렇게까지 심하지는….”
“나도 내 사촌들을 보면 그런 생각 드는데 일반인들은 오죽하겠습니까? 내가 뭘 하든 전부 돈으로 쌓은 계단으로 편하게 정상에 오른 놈일 뿐입니다.”
운전대를 잡은 직원은 싱긋 웃으며 지하주차장으로 차를 몰았다.
* * *
“어쩐 일로 이렇게 일찍…. 아, 그보다 축하드… 릴 일인가요?”
전용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친 장도형 부사장은 웃으며 신문에 나온 내 사진을 가리켰다.
“쪽팔려 죽겠습니다. 그만하세요. 흐흐.”
“이제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건 힘들어지겠습니다.”
“그건 상관없어요. 일하는 데 도움만 된다면 TV 예능 프로그램이라도 나갈 생각입니다.”
“알려지면 알려질수록 도움이 크죠. 얼굴이 바로 명함이니까요. 그리고 이번 기사는 진 회장님의 신뢰를 한 몸에 받는 핏줄이라는 뉘앙스가 강해요. 앞으로 누굴 만나더라도 순양의 계승자 중 한 명이라고 생각할 겁니다.”
우리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24층의 사무실로 들어갔다.
“주광식 회장이 절 불러내서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더군요.”
장도형 부사장에게 어제 장례식장에서 있었던 일을 들려주니 그의 눈이 커졌다.
“그럼 또 한 명의 입찰자가 나타난 거 아닙니까?”
“그렇게 생각하세요?”
“아닌가요?”
“그는 다른 목적이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분 목적이 뭐든지 간에 충분히 이용할 만한 점이 있지 않을까요?”
장도형은 머리를 약간 갸우뚱했다.
“카드사는 그룹 내에서 소화하기로 결정하지 않으셨습니까?”
“맞아요.”
“아…. 페이스메이커로 이용하자는 뜻이군요.”
“네. 그럴 리는 없겠지만 혹시라도 두 분 부회장님께서 손이라도 잡게 되면 낭패니까요. 큰아버지들이 외부의 강력한 경쟁자가 등장했다는 것만 알면 됩니다.”
“만약 주광식 회장이 가장 좋은 조건을 제시하면 어쩌시려고요?”
“주 회장은 아주 좋은 조건의 계약서를 우리 눈앞에 흔들지는 모르지만 절대 도장 안 찍습니다. 인수할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어 보였어요. 그 점을 잘 알고 써먹어야 합니다.”
장도형은 약간 허탈한 표정으로 가방을 뒤적이며 서류 몇 장을 꺼냈다.
“이거, 새로운 선수가 등장했으니 지금까지 룰은 무용지물이 되었네요.”
“그건…?”
“진동기 부회장 측의 제안입니다.”
“특이한 점이 있습니까?”
“이제 시작이니까 아주 평범한 내용일 뿐입니다. 이 평범함에 우리가 특별함을 더해 카운터를 날려야겠죠.”
“복잡한 건 뺍시다. 최종 인수가격, 이자율 그리고 담보. 담보는 순양중공업과 순양건설의 주식. 모자라는 금액은 순양중공업의 전환사채 발행으로 대신하겠다고 하십시오.”
장도형은 아쉬운 듯 끙 하는 낮은 신음을 냈다.
“카운터가 아니라 가져가기 쉽게 포장까지 해주는 꼴인데….”
“말했죠? 절 믿으시라고. 좋은 조건을 내거는 만큼 인수가격과 이자율을 높이면 됩니다.”
“그래 봤자 그 돈이 지금 들어오는 것도 아닙니다. 아시죠?”
장도형이 왜 자꾸 우려를 드러내는지 안다.
기업 경영이라는 항해를 할 때 언제 폭풍우를 만날지 모른다. 항상 위기를 대비해야 하는데 가장 훌륭한 대비책 하나가 사라지니까 불안한 것이다.
그는 지금 이인자 아닌가? 경영부실의 책임을 첫 번째로 져야 한다.
물론 모든 책임은 내게 있지만, 난 순양금융그룹의 주인. 쫓겨나는 건 주인이 아니라 마름이다.
게다가 그는 순식간에 임원 목을 쳐버리는 내 모습을 봤다. 자신이라고 해서 그 꼴을 당하지 않으리라고 장담 못 한다.
늘 불안에 떨며 경영 일선에 서는 건 지옥이나 다름없다. 제대로 그를 부려먹으려면 불안에서 건져내야 했다.
“부사장님.”
“네.”
“우리 금융그룹 자금 흐름은 매일 아침 제가 받죠?”
“네. 제가 항상 메일로 보내드리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난 회사 자금 상황을 실시간으로 파악합니다. 오차가 없다면 말이죠.”
“오차 없어요, 정확합니다.”
“그럼 자금 상황이 나빠지면 제가 돈을 구해 옵니다. 순양카드가 빠져 구멍 난 자금은 전부 제가 채워놓을 겁니다. 염려 마세요.”
장도형의 표정이 딱딱하게 변했다.
“실장님 능력을 모르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제가 실장님의 말씀만 믿고 안심할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못 믿겠다는 뜻이군요. 하하.”
“웃을 일이 아닙니다. 아무리 투자의 귀재라 해도 한계가 있죠. 어떻게 개인이 국내 굴지의 카드사의 영업 이익을 커버한다는 말입니까? 차라리 미라클의 자금이라면 안심입니다만….”
“남의 투자사 돈을 함부로 빼내 올 수는 없죠.”
“그러니까요.”
치밀한 건가? 겁이 많은 건가?
젊은 나이에 갑자기 부사장으로 승진하니 더 조심스러워진 것 같다.
“작년 순양카드 순이익이 1,250억 정도죠?”
“네.”
“불안하면 지금이라도 말하세요. 회사 통장에 2천억 넣을 테니까. 이러면 안심하겠습니까?”
장도형의 표정은 조금 전보다 훨씬 굳어졌지만, 전혀 다른 이유에서였다. 잠깐 아무 말 없었다.
“허언하실 분은 아니니까 안심입니다. 저도 돈 부족하다는 말을 꺼내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보겠습니다.”
미래를 바라보는 내 눈은 못 믿어도 내가 가진 재산은 믿는다.
하긴, 그것이 더 이성적인 판단이다.
돈은 거짓말을 못 하는 확실한 숫자 아닌가?
“이야―! 우리 막내, 하루아침에 슈퍼스타가 됐는데도 여전히 성실해.”
노크도 없이 내 방문을 열고 들어올 사람은 몇 안 된다.
진영준도 그중 한 명이다. 순양의 적통이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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