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Youngest Son of Sunyang RAW novel - Chapter 19
단지 동정심 많은 어린애로 본다면 실책이다. 회사를 경영할 때 잔혹하리만치 냉정해야 할 때가 동정심을 발휘해야 할 때보다 훨씬 많다.
“으흠……. 직원들? 저 사람들이 왜?”
“우리 때문에 저 아저씨들은 놀지도 못하잖아요. 어린이날인데.”
순간 이학재의 날카로운 눈빛이 느껴졌다. 그리고 잠깐이지만 그 눈길을 거두지 않았다.
“저 사람들은 일을 할 뿐이다. 어린이날이든 일요일이든 각자 맡은 일을 하는 거지. 그리고 저들은 오늘 일하는 대신 내일 쉴 거야.”
“우리만 있으니까 그런 거죠. 저 사람들은 이제 우리를 미워할지도 몰라요.”
또다시 쏟아지는 눈빛.
내가 한 말의 속뜻을 눈치챘을까?
우리가 싫어지면 순양도 싫어질 것이다. 결국, 소비자를 잃는 것이다.
그가 어떤 말을 할지 궁금했다.
“도준아.”
“네. 백부님.”
“널 미워하는 사람이 생기면 네 할아버지처럼 하려무나.”
이런! 생각이 어긋났다.
“할아버지는 어떻게 하시는데요?”
“미움을 두려움으로 바꿔버리지.”
그의 말이 내 머릿속에서 폭죽처럼 터졌다.
젠장, 난 아직 머슴의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주인이 되려면, 회장이 되려면 이런 자질구레한 걱정 따위는 안중에 없어야 한다.
생산성 향상, 매출 극대화, 소비자 만족 같은 하찮은 문제는 아랫것들이 걱정해야 할 문제다.
회장과 경영자는 다르다.
경영자는 회사를 살찌우지만, 재벌 회장은 돈을 버는 게 아니다. 회장은 전쟁을 한다.
미워하는 적을 무릎 꿇리고 영토를 지키고 넓히는 것이 회장이 해야 할 일이다.
그렇게 정복한 영토에서 머슴들이 농사를 지어 돈을 번다.
회장님이 원하면 가족 따위는 내팽개치고 달려 나와 꼬리를 흔들게 만들어야 한다.
“회장님의 혼을 쏙 빼놓은 이유가 있구먼.”
이학재가 내 머리를 쓰다듬자 제정신이 들었다.
그를 올려다보자 환한 웃음부터 보였다.
“표정 보니 내 말뜻을 알아들은 것 같은데? 애늙은이 같은 건가……?”
그나마 다행이다.
날카로운 시각을 뽐내려 했던 것은 무산되었지만 적어도 말귀는 빨리 알아듣는 머리라도 보여줬으니 손해는 아니다.
지금부터는 이학재, 이 사람을 더 알고 싶었다. 하지만 갑자기 나타나 내 손을 잡고 끄는 상준 형 때문에 다음으로 미뤄야 했다.
어린이날은 어린이는 신나지만, 부모는 피곤하다.
나는 부모처럼 피곤했고 찝찝함까지 더한 하루를 보내야 했다.
하지만 다음날, 진 회장과 함께 방문한 나만의 목장을 봤을 때는 그 피곤함과 찝찝함이 싹 날아갔다.
넓게 펼쳐진 푸른 대지 위에서 여유롭게 뛰어다니는 말을 보자 온몸의 짜릿함을 만끽했다.
나만의 목장은 좋았으나 큰 숙제를 안았다.
이제부터 재벌 3 세답게 승마를 배워야 한다.
무섭다, 젠장.
그러나 한 해가 저물어갈 때쯤 무서움을 사라졌고 말 타는 재미를 알게 되었다.
***
1988년은 참으로 대단한 한해였다.
이 해를 배경으로 드라마까지 나온 이유를 충분히 알 것 같았다. 다사다난했던 한 해, 이 말이 너무나 적합한 365일이다.
제6공화국 헌법이 효력을 발하기 시작하였으며, 직선제로 뽑은 대통령이 취임했다.
국방부는 논산훈련소의 훈련병 면회제도를 29년 만에 부활시켰고 8년간에 걸친 이란-이라크 전쟁이 끝났다.
한겨레 신문이 창간했고 대통령은 남북교류 제안과 북미 관계 개선 협조를 담은 7.7선언을 발표했다.
조용필이 10집을 내놓았고 메탈리카는 네 번째 정규 앨범 …And Justice For All을 발매했다.
국가 인지도를 세계적 수준으로 높인 올림픽이 개최되었고, 놀랍게도 기적 같은 성적, 종합 4위를 달성했다.
38년 만에 여소야대 국회가 출범했으며 유신 이후 16년 만에 부활한 국정감사가 재개되었다.
제5공화국 비리를 밝히기 위한 특별위원회가 설치되어, 헌정 사상 처음으로 국회에서 청문회가 치러졌다.
정계, 재계, 언론계 등 유명 인사들이 출석하여 TV로 생중계되는 등 올림픽에 버금가는 전 국민적 화제를 낳았으며, 국회의원 중에서는 훗날 대통령으로 당선될 분께서 청문회의 스타가 되기도 했다.
그 후 11월, 전두환 전 대통령 부부가 대국민 사과 성명을 발표한 이후 강원도 설악산의 백담사로 유배를 자처했다.
환율이 600원대에 진입하며 3저 호황이 정점을 찍었지만, 사람들이 끝없이 서울로 몰려들어 집값은 폭등했다.
정부는 목동 신시가지나 상계동 지역을 개발하는 등 주택 건설에 들어갔으나 치솟는 부동산 가격을 잡을 수 없었다.
이에 ‘주택 200만 호 건설계획’을 발표하고 산본, 중동, 평촌 등에 대규모 택지개발을 발표했으나, 집값은 안정되지 않은 채 1989의 새해가 밝았다.
* * *
“신도시 개발을 서두른다고 합니다.”
“흥분하지 말고 천천히.”
“아, 네. 죄송합니다. 회장님.”
순양건설 홍송철 사장은 말과는 달리 좀처럼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대통령의 신년사는 주택난 해결이 주요 메시지였다. 당연히 계획은 이미 수립되어 있다. 그 계획이 옳은지 그른지는 나중에 알게 되겠지만 말이다.
계획이 있으니 당연히 실행이 뒤따라야 했고 그에 따른 회의가 이어졌다.
순양건설 홍송철 사장은 경제부총리, 청와대 경제수석 그리고 건설부 장관이 주관한 회의에 참석하고 곧바로 진 회장의 서재로 달려온 것이다.
“소문이 사실이었군요.”
먼저 서재에 도착해서 기다리던 이학재 비서실장도 조금은 흥분한 듯 보였다. 가장 활발한 건설 분야에 정부가 기름을 부어주는 꼴이다.
순양건설이 얼마나 더 커질지 기대하지 않을 수 없다.
“신도시의 물망에 오른 후보 지역은 알려주던가?
“후보 정도가 아니라 확정입니다. 성남 분당지구와 일산요.”
물 한잔으로 입을 축인 홍 사장은 오늘의 회의 내용을 소상히 말했다.
“……적당히 나눠 먹기 식으로 진행할 것 같습니다. 사실상 특혜는 없다고 봐야 합니다.”
“특정 기업의 독식은 막겠다?”
“그렇습니다. 그리고….”
홍송철 사장은 조금 주저하며 말을 이었다.
“해당 지역의 토지 매입은 불허 한다고…….”
“미리 정보를 줬지만 땅은 사지 마라?”
“네. 만약 투기 정황이 나오면 신도시 사업에서 빼버리겠다고 경고했습니다.”
“그거야 늘 나오는 말 아닙니까? 어차피 다들 명의 빌려서 사재기할 텐데요.”
이학재가 미간을 찌푸렸다.
“아닙니다. 오늘부터 정부의 공식 발표까지 해당 지역 토지거래를 전부 확인한답니다. 이번에는 분위기가 좀 다릅니다.”
홍 사장은 회의 때의 분위기를 전달하기 위해 크게 손을 내저었다. 정부의 의지는 강력하다.
“작년부터 주택문제로 워낙 물어 뜯겼잖아. 대통령도 민감할 거야. 송철아.”
“네. 회장님.”
“신도시 준비단 꾸리고 철저히 대비해. 그리고 땅 투기하는 놈 안 나오게 확실히 단속하고. 이번에는 청와대 보조 맞춰주자고.”
“네. 회장님.”
물러가라는 진 회장의 손짓에 홍 사장은 공손히 허리를 굽히고 서재를 나갔다.
“회장님. 진짜 협조하실 생각이십니까? 드러나지 않게 매입할 방법은 얼마든지….”
“놔둬. 푼돈 좀 먹자고 괜히 밉보일 필요 없어. 이번 신도시는 대통령 측근들 꺼야. 이 정권의 논공행상은 끝났고, 한자리 얻지 못한 놈들 돈 좀 만지게 해주려고 기업들 차단하겠다는데 괜히 끼어들 필요 없어.”
“아, 그렇습니까?”
“박 의원이 슬쩍 흘렸어. 대통령이 각별히 신경 쓴다고.”
“그렇군요.”
올해는 몸 사려야 할 때다. 동유럽의 정세가 심상치 않게 돌아가고 소련과의 수교가 머지않았다는 게 정가의 소문이다.
이런 급변의 시기는 언제나 기회가 있고 그 기회는 바로 정부가 주는 것이다.
조금이라도 꼬투리가 잡히면 안 될 일이다.
“참, 혹시 모르니까 준비단 꾸려지는 대로 감사팀 돌려. 혹시라도 딴짓하는 놈 나오지 못하도록 말이야.”
진 회장은 홍 사장이 놓고 간 신도시 개발 관련 서류를 건성건성 뒤적이다 손을 멈췄다.
미간을 찌푸리고 서류를 노려보는 진 회장에게 이학재는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왜 그러십니까? 혹시 문제라도…?”
“아, 아닐세. 왠지 눈에 익은 곳이라서 말이야.”
진 회장은 한동안 서류의 지도를 보다 수화기를 들었다.
“지난번에 매입한 목장 말이야……. 그래, 그거. 지적도 확인해서 팩스 보내.”
수화기를 내려놓는 진 회장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걸렸다.
“이거, 아무래도 집안에 돈 귀신이 단단히 붙은 놈 하나가 있는 것 같은데….”
“네? 무슨 말씀이신지…?”
“기다려봐. 팩스 오면 확인해 보자고.”
이학재는 잔잔한 미소를 머금고 있는 진 회장을 영문도 모른 채 슬쩍슬쩍 훔쳐볼 뿐이었다.
잠시 후, 가정부가 공손히 들고 온 팩스와 서류를 번갈아 보며 확인한 진 회장은 마침내 큰 웃음을 터트렸다.
“이거 원, 으하하. 기가 막히는구만.”
좀처럼 보기 힘든 모습이다.
이학재는 궁금함을 억누르며 진 회장의 설명을 기다리느라 미칠 것 같았다.
“아, 자네는 모르겠구먼. 내가 우리 도준이를 위해 목장 하나 만든 건 알지?”
“네. 경기도 쪽에…. 아, 설마! 혹시 분당입니까?”
“그래. 이걸 한번 보게.”
이학재는 황급히 팩스와 서류를 비교하며 정확한 위치를 살피기 시작했다.
“어때? 그 정도면 미리 알고 찍었다는 의심이 들지 않나?”
“도준이가 이곳을 찍었다는 뜻입니까? 회장님이 아니라?”
“그래. 서울 빼고, 경기 남부지역에서 골라보라고 하니 그곳을 찍더군.”
지도를 유심히 보는 이학재의 머릿속은 계산기가 되어갔다.
“팔만 평쯤 되는군요.”
“아깝지? 팔십만 평이라면 좋았을 텐데. 허허.”
웃음을 멈추지 못하는 진 회장과는 달리 이학재는 아직 모르는 부분을 명확하게 짚고 넘어가야 했다. 정부의 정식 발표 전에 이 땅에 대해서는 한점의 오류도 없어야 한다. 그 오류를 지우는 것이 바로 이학재의 의무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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