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Youngest Son of Sunyang RAW novel - Chapter 21
스스로 극장이라고 부르는, 가장 좋아하는 방에서 아내와 함께 영화를 보던 진윤기는 말없이 술잔만 기울였다.
유일한 취미인 연극과 영화.
그 취미를 위해 영화관처럼 스크린과 영사기까지 갖추고 영화 필름까지 틈틈이 모으는 진윤기였다. 그가 영화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엿볼 수 있는 방이었다.
그의 아내는 영사기의 필름은 돌아가지만, 남편이 영화에 집중하지 않는다는 것쯤 알 수 있었다.
“여보. 도준이 때문에 그래요?”
“응? 아, 뭐…. 그렇지.”
아들이 통장을 내보이며 뭐든 하고 싶은 걸 말하라고 했을 때 진윤기는 할 말을 잃었다. 그 순간 아들보다 통장이 더 눈에 밟힌 자신을 경멸했다.
“철없는 애가 좋은 뜻으로 한 말이잖아요.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여보.”
“네.”
“난 화가 난 게 아냐. 쪽팔렸던 거지.”
진윤기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아내의 어깨를 감쌌다.
“도준이가 그 말을 했을 때, 백억이 넘는 돈으로 뭐든 하고 싶은 일을 하라고 했을 때 심장이 뛰더라고. 이건 기회다! 이런 생각마저 들었어.”
진윤기는 그 순간의 기억이 되살아났는지 어깨를 움찔했다.
“내가 얼마나 한심하던지…… 아빠가 돼서 애의 저금통에 침 흘리는 꼴이라니.”
“너무 큰돈이라 그런 거여요. 저도 그랬는걸요. 그 돈이라면 당신이랑 상준이, 우리 가족 다 함께 외국으로 건너가서 살 수도 있겠다, 이런 생각 들었어요.”
아내의 위로도 그의 구겨진 자존심과 부끄러움, 아버지로서의 자괴감을 되살릴 수는 없었다.
“그런데 여보. 저도 궁금하긴 한데… 당신은 진짜 뭘 하고 시어요? 충분한 돈이 있다면요. 아직도 영화감독 하고 싶어요?”
진윤기는 이미 버린 꿈을 이야기하는 것이 탐탁지는 않았지만, 애써 화제를 돌리려는 아내의 노력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아니. 난 연출 감각이 없다는 걸 알아. 내가 영화를 찍는다면 정말 밋밋하게 나올걸?”
“그럼 영화에 대한 미련을 완전히 버렸어요?”
“아직 많이 남아 있어. 할 수만 있다면 제작과 기획일은 하고 싶지. 특히 지금 보고 있는 소설이 너무 와 닿아. 영화로 만들면 좋겠다 싶어.”
영화 이야기를 시작하니 진윤기의 눈이 빛났다. 꿈을 쫓는 소년의 눈이다.
“영화는 제조업과 다를 바 없어. 제작비를 건질만큼 흥행하면 다음 작품을 만들 수 있거든. 그런데 제작비를 줄이면 흥행 부담도 줄어들어.”
“제작비를 어떻게 줄여요?”
“지금 한국 영화는 주먹구구식으로 제작해. 거품도 많고, 중간에서 돈 빼먹는 놈들도 수두룩하고. 최소 30%는 줄일 수 있어. 참, 당신도 알잖아.”
진윤기는 한때 영화배우였던 아내와 시선을 맞췄다.
“겨우 한편 찍었어요. 그런 거까지 알기에는 시간이 없었죠.”
“당신도 나 아니었으면 스타가 됐을 텐데… 억울하지 않아?”
“뭐야? 연기력이 발바닥이라 어차피 못 버틴다고 포기하라고 한 게 당신이에요.”
진윤기는 팔을 꼬집는 아내를 사랑스럽게 바라봤다.
“그건 사실이야. 하하. 당신은 배우보다 모델이 더 적당했어.”
아내 덕에 부끄러운 순간을 잊을 수 있었다. 진윤기는 그런 아내의 어깨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
“얼마?”
“토지 보상금만 140억입니다. 또, 상업용지로 쓸 수 있는 이만 평이 남았는데…… 이건 100억이 훌쩍 넘을 겁니다.”
순양 그룹의 부회장이자 진양철 회장의 장남인 진영기는 분당 신도시 지적도를 앞에 놓고 이마를 문질렀다.
“그 꼬맹이 손에 140억? 은행 이자만 해도 10억이 넘네. 웬만한 대기업보다 나은데요? 이자만으로도 매년 강남 아파트 스무채를 살수 있으니까!”
아들인 진영준이 부러운 표정을 짓자 진영기 부회장이 소리를 버럭 질렀다.
“이 자식아! 은행 이자 생각하니 부러워? 지금 그깟 푼돈이나 생각할 때냐?”
아버지의 큰 소리에 진영준은 고개를 돌렸다.
“대학 4학년이나 된 놈이 아직 그 모양이야? 정신 안 차릴래?”
“여보! 애한테 왜 그래요? 가뜩이나 유학 못 가서 풀죽어 있는데!”
부회장의 부부 싸움 조짐을 느낀 비서실 직원은 낮은 헛기침으로 자신이 아직 거실에 있다는 것을 상기시켰다.
“김 과장.”
“네.”
“윤기 집, 계속 살펴. 특별한일 생기면 즉각 보고하고.”
“알겠습니다. 부회장님.”
“가 봐.”
김 과장이 조용히 뒷걸음질 치며 거실을 빠져나가자 진영기 부회장은 다시 장남을 노려보기 시작했다.
“너 계속 그딴 식으로 여자나 밝히며 살래?”
여자라는 단어에 진영준은 머리를 들지 못했다.
“이 새끼야! 데리고 놀 여자가 연예인밖에 없어? 세상에 이쁜 여자가 어디 한둘이야? 하필이면 테레비에 나오는 여자만 건드려? 그딴 식으로 신문에라도 나면?”
진영기는 속이 터져 죽을 지경이었다.
돈과 인맥을 총동원해서 미국 명문대의 입학허가서를 받아 놨는데 철딱서니 없는 자식놈이 당대 최고 여배우를 임신시켜버렸다. 그것도 7살이나 많은 여자를.
그 여배우의 애를 지우고 입을 막는데 들어간 돈이 빌딩 한 채 값이 넘는다.
다시 돈과 인맥을 동원해서 가까스로 언론의 입을 막기는 했지만 회장인 아버지의 눈과 귀는 막을 수 없었다.
– 발정 난 개새끼도 아니고 임신까지 시켜? 그런 놈이 미국 가서 공부? 집어치워! 백인, 흑인 골고루 씨를 뿌릴 놈이야. 내가 혼혈아를 증손주로 봐야겠어?
유학길은 막혔고 그룹 감사실 직원 두 명이 24시간 아들을 밀착 감시하는 지경이다. 그런 놈이 열 살이나 아래인 사촌을 부러워하니 속이 뒤집혔다.
“잘 들어. 네 할아버지는 단돈 십 원이라도 그냥 주시는 분이 아니다. 어린놈한테 목장 하나 만들어줄 수도 있어. 하지만 그 명의까지 다 넘기고, 그걸 처분한 거금까지 다 준다는 건 전혀 다른 문제다.”
“그만 좀 해요. 다 지난 일을 가지고…….”
진영기 부회장은 계속 짜증 내는 아내는 못 본 체했다.
그의 아내 박혜영도 부족함 없이 자란 여인이다. 비록 순양 그룹보다 한참 아래에 있지만 그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없는 재벌가가 친정이다.
그러다 보니 항상 시아버지에게 쩔쩔매는 남편을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도준이가 지금 몇 살이지? 그런 애에게 백사십억을 줬다. 이건 단순한 증여가 아냐. 열두 살 꼬맹이의 가치를 무려 백사십억이라고 생각하시는 거야. 만약 남은 땅도 처분하고 도준이에게 주신다면 그놈 가치는 이백억이 넘는다고!”
진영준은 아버지의 말이 무슨 뜻인지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어차피 장손 아닌가? 할아버지가 세상을 떠나면 모두 아버지 것이 될 것이고 결국 자신이 모든 걸 물려받는다고 믿었다.
“할아버지가 너한테 땅 한 평, 통장 하나 준 적 있어? 그게 바로 할아버지가 생각하는 네놈 가치다.”
“여보. 뭐가 걱정이에요? 당신은 이미 부회장이에요. 순양은 당신 거라고요. 그리고…….”
박혜영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시아버님이 몇 년이나 더 사실지… 시간은 우리 편이에요.”
진영기는 자신이 괜한 걱정을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마누라나 자식새끼나 진양철이라는 사람을 모른다.
지금까지 자신의 승계를 걱정한 적 없다. 막내 조카가 지금 회장의 관심을 받고 있지만 그리 큰 걱정은 않는다. 너무 어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경계를 늦추면 안 된다.
아무리 피를 나눴지만 순양 그룹의 벽돌 한 장이라도 나눠 가질 생각은 없기 때문이다.
* * *
거실에 앉아 신문을 보고 있는 아버지의 곁에 슬며시 앉았다.
“아버지. 죄송합니다.”
“도준아, 괜찮아. 뭐가 죄송해? 아빠 화난 거 아니었어. 그냥 좀 놀랐을 뿐이야.”
아버지는 내 손을 꼭 잡으며 품 안으로 끌었다.
“우리 도준이, 너무 빨리 큰다. 벌써 이렇게 어른스러워지면 아빠는 어떡하지?”
이런!
갑자기 이런 식으로 훅 들어오니 할 말이 없다.
자식을 키워보지 않았으니 아버지의 마음이 어떤지 짐작도 못 하겠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아버지의 손을 힘주어 잡는 것이 전부였다.
내 손의 힘을 느꼈는지 아버지는 잔잔하게 웃었다.
“그래, 도준아. 아빠에게 할 말 있으면 해.”
“어머니가 할아버지에게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어요. 제가 하고 싶은 일을 했으면 좋겠다고요.”
“엄마가?”
“네.”
조용한 어머니가 무서운 시아버지에게 그런 말을 했다고 하니 의외라는 표정이다.
“그래서 궁금했어요. 아버지는 어떤 일을 하고 싶으신지… 영화 좋아하신다고 들었어요.”
“엄마가 그래?”
“네.”
조금은 씁쓸한 미소를 보이던 아버지는 마음을 다잡은 듯 나를 당신 앞에 앉혔다.
“아빠는 대학 3학년 때 영국으로 유학 갔었어.”
오호라!
이번에는 제대로 말할 생각인가보다. 어른이 추억을 끄집어낼 정도면 아주 긴 이야기가 될 것이다.
“난 아버지가 하라는 대로 했어. 어릴 때는 공부 잘 하라고 해서 좋은 성적 받으려고 노력했고, 유학 가라고 해서 영국으로 갔어. 특별히 하고 싶은 게 없었거든. 그리고 경영학을 공부하는 게 당연하다고 여겼어. 순양그룹 계열사 몇 개는 맡을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별다른 의심 없이 주어진 환경에 잘 적응하는 도련님이었다는 말인데, 언제부터 삐딱선을 탔을까?
“영국 런던에는 웨스트 엔드라는 지역이 있거든. 그곳에는 수백 개의 극장에서 매일 뮤지컬과 연극을 공연해. 난 공부하다 머리 식힐 때 가끔 들렀어.”
순수했던 시절의 기억을 더듬는 아버지는 어느새 눈을 반짝였다.
“거기서 셰익스피어를 봤고 싱클레어, 헤이워드, 앤더슨을 알았지. 그리고 존 오스본의 ‘성난 얼굴로 돌아보라’, 밀러의 ‘세일즈맨의 죽음’, 윌리엄스의 ‘뜨거운 양철 지붕 위의 고양이’ 같은 작품이 나를 흔들었어.“
불현듯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엔터테인먼트 판의 그 화려함에 유혹당한 게 아니라 순수한 예술에 이끌렸다.
동기가 순수하고 올바르면 다시 한 번 해볼 만하지 않은가?
“그때부터 학교는 뒷전이었고 연극과 영화에 빠져들었지. 연극학교 등록하고 연출을 배우기 시작했어. 물론 영화도 함께. 하지만 네 할아버지가 아셨고 난 한국으로 잡혀 온 거야. 하하.”
아버지의 꿈은 이제 추억일 뿐일까?
추억을 다시 불 지피고 꿈을 이루게 해준다. 그리고 내 꿈을 이루도록 도움받아야 한다. 그 도움의 힌트를 방금 아버지가 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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