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Youngest Son of Sunyang RAW novel - Chapter 211
“돈놀이의 끝은 돈을 떼이고 패가망신하거나, 돈을 벌어도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면하지 못한다고 내가 몇 번이나 그놈들에게 말했어.”
여전히 신용카드 사업을 마땅치 않게 여기신다. 화폐 대신 신용카드가 자리 잡아가는 시대의 변화를 체감하지 못하는 것이다. 하긴, 지갑을 직접 들고 다니며 돈을 써본 적이 언제인지 기억도 못 하실 것이다.
필요한 건 말 한마디면 비서들이 알아서 챙기니 돈이 어떻게 생겼는지 잊어버렸다고 해도 믿어야 할 판이다.
어쩌면 카드사였기 때문에 부도나는 걸 별것 아닌 것처럼 생각하실 수도 있겠다 싶었다. 다른 제조업 계열사였다면 불호령이 떨어졌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패가망신 일보 직전입니다만 제가 부수고 새롭게 쌓겠습니다. 튼튼하게요.”
“당연히 그래야지.”
“네?”
“시절 좋을 때 비싸게 팔았다가 망할 때 되산다면 바보짓이지. 다른 비전이 있으니 그리할 것 아니냐?”
“맞습니다. 앞으로 카드 사업이 순양의 금융 부문에 큰 역할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눈치를 슬쩍 보자 할아버지는 눈을 가늘게 떴다.
“이놈 보게. 그게 다가 아니구먼. 뭐냐?”
“사실은….”
금융위를 급히 만난 이유, 카드사 담보 문제 그리고 진영기 부회장과의 거래 등, 단 하루 동안 있었던 일을 자세히 말씀드렸다.
내 이야기가 끝나도 할아버지는 한동안 아무 말씀이 없으셨다.
한참을 기다리다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괜찮으십니까?”
“응? 뭐가 말이냐?”
“말씀이 없으셔서요.”
“욕심에 눈이 멀면 얼마나 멍청해질 수 있는지 보여주는 아들놈이 한심해서 말이 나오지 않았어. 허허.”
한심한 표정을 감추지 않는 할아버지께 말했다.
“아닙니다. 만약 그룹 지배 지분 7%를 확보할 수 있다면 저 역시 그 정도 돈은 생각하지도 않고 던졌을 겁니다.”
“멍청하다는 건 그런 말이 아니다. 어째서 너처럼 생각하지 않았느냐 하는 거지. 수혈해도 되살아날지 아닐지 모르는 순양카드를 중심에 놓고 생각했어야 한다. 영기 그놈은 오로지 주식만 바라보고 있지 않으냐?”
두 번의 인생을 살지 않는 다음에야 누구나 나처럼 생각하는 건 불가능하다. 4년 뒤 벌어질 카드 대란을 예측할 천재는 쉽게 나오지 않는다.
“전 운이 좋았을 뿐입니다. 아시다시피 제게는 천운이 따르지 않습니까?”
“겸손은 됐다. 넌 네 큰아버지들을 반면교사로 삼아. 욕심만 앞서면 지도를 눈앞에 들이대도 길을 잃는다. 명심해라. 순양의 회장이 되려는 이유가 오로지 회장이 되고 싶다는 단 하나의 이유뿐이라면 절대 이 서재의 주인이 되지 못한다.”
“워낙 높은 자리이다 보니 욕심이 앞서는 것 아닙니까? 전 큰아버지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목표가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랬다가는 이 자리를 오래 못 지켜.”
아뇨, 지킵니다. 수만 명의 순양 직원들이 자리를 더욱 공고히 만들어줍니다. 물려받은 순양그룹을 자식에게 물려주는 것만이 목적인 진영기도 서재를 지켰고 아마 손자인 진영준도 지켰을 겁니다.
입 밖으로 내지 못한 말이었다. 대신 크게 머리를 끄덕였다.
“명심하겠습니다.”
“내가 전화 몇 통 넣어줄까?”
금방 온화한 표정으로 변한 할아버지가 말했다.
“어떤 전화 말입니까?”
“똥덩어리인 순양카드, 깔끔하게 치울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말이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고위 관계자들이 할아버지의 말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혹시 부채를 덜어달라는 압력으로 느껴지지나 않을까? 새 정권의 눈치를 봐야 하는 그들에게 괜한 부담만 주는 건 아닐까?
아니, 아예 반대로 받아들인다면?
재빨리 생각을 정리한 뒤 말했다.
“그냥 강력한 조치를 취할 거라는 중간발표만 빨리 해달라고…. 아닙니다.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그것참, 뭘 그리 잔머리를 굴리느냐?”
할아버지는 수화기를 들었다.
“경제수석에게 민원 하나 넣고 싶다고 해. 급한 민원이니 오후에 차나 한잔하면서 말이야. 그래, 청와대에서 가까운 명동에서 보잖다고 전해.”
할아버지는 전화를 끊고 날 향해 눈을 찡긋했다.
명동이면 강북 순양호텔이다. 나도 재빨리 휴대전화를 꺼냈다.
“조용히 대화 나눌 수 있는 자리를 빨리 준비하세요. 출입이 눈에 띄지 않도록 동선 확보해 놓고요.”
전화를 끊고 할아버지를 보며 말했다.
“제가 모시겠습니다. 오후에 만나실 테니 저랑 점심 하시겠습니까? 호텔에 준비시켜 놓겠습니다.”
“내가 왜 만나? 볼일은 네놈이 봐야 하는데.”
“네?”
“가서 만나. 어떻게 할지는 네가 알아서 하고.”
이런 기회를!
가장 적절한 도움이 아닌가?
“고맙습니다. 할아버지.”
“쉽지는 않을 거다. 너만 민원 넣는 거 아니다.”
“가장 먼저 민원 넣는 건 저니까, 일단은 유리하지요.”
정부 발표가 나오면 진동기 부회장도 가만있지는 않을 것이다. 영업 정지라는 극단의 조치를 막으려 연줄을 총동원할 것이고 그 연줄 속에는 분명 경제수석도 포함될 것이 뻔하다.
“그래. 단 하루 만에 이렇듯 많은 일을 벌였고 앞으로도 많은 일이 벌어질 테니 먼저 출발하는 놈이 유리하지. 암.”
재미있는 구경거리를 앞둔 할아버지는 계속 웃음을 지었다.
“그럼 여기서 할아버지와 점심을 함께 먹고 출발하겠습니다.”
* * *
“실례를 범했습니다.”
“별말씀을요, 진도준 씨. 당사자를 만나서 이야기 나누는 게 더 빠르죠.”
청와대 경제수석은 환히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내미는 손을 잡자 그의 힘이 느껴졌다.
“사실 진 회장님께서 이 자리에 계셨다면 오히려 불편하죠. 툭 터놓고 편하게 말하기도 어려우니까요. 진도준 씨는 속마음을 에둘러 말하지는 않겠죠? 하하.”
자신감 넘치는 표정과 좋은 인상으로 호감을 준다.
갓 들어선 정권이니 이런 태도가 가능한 것이다.
“숨기는 게 없다면 이야기도 빨리 끝나겠군요. 한창 바쁘신 분 오래 잡고 있으면 결례니까요.”
작은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았다.
“그나저나 실물이 훨씬 잘생겼군요. 순양그룹의 일원이 아니었다면 연예인을 해도 성공하셨을 것 같습니다.”
“원래 제 꿈은 잘생긴 법조인이었습니다. 할아버지 뜻에 따라 이러고 있지만 말입니다.”
“재능이 꼭 꿈을 따라가지는 않죠. 타고난 겜블러 같으니 어차피 이쪽 길로 걸었을 것 같습니다.”
겜블러라….
이미 내 조사를 끝냈구나.
하긴, 순양카드를 부도내자고 말한 게 나였으니 나부터 탈탈 털었음이 틀림없다.
“그럼 이번에 제가 내민 패는 어떻습니까? 승산이 있어 보입니까?”
“글쎄요. 히든카드를 한번 보여주시죠. 그래야 승패를 점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툭 터놓고 말하자더니 선문답 흉내를 낸다. 누가 정치하는 놈 아니랄까 봐.
“순양카드 외에 자빠지는 카드 회사 하나 더 살려드리죠.”
“뭐요?”
“정부 차원에서 공적 자금 투입은 없을 테니까 순양카드가 부도나면 두어 개는 더 버티지 못할 테죠. 그중에 하나는 살리겠습니다. 말씀만 하세요.”
경제수석은 잠깐 눈을 깜빡하더니 머리를 갸우뚱했다.
“거참, 이해하기 어렵네요. 부실덩어리 카드사를 두 개나 떠안으면 부담이 보통은 아닐 텐데, 괜찮겠습니까?”
“감당할 수 있으니 말씀드리는 겁니다. 미라클 인베스트먼트의 자금력은 상상을 초월하죠. 이번에는 미국 자본이 들어온다고 하니 좋지 않습니까? 외국 자본을 끌어들이는 모양새가 나오니까요. 외국 자본으로 한국의 망한 회사를 살린다. 이 정도면 어떻습니까?”
“히든카드가 좀 세군요.”
살포시 보이는 미소가 그의 마음을 보여준다.
“히든이 하나 더 있는데 들어보시겠습니까?”
경제수석은 머리를 끄덕였다.
“두 번째 카드사로 대현그룹이 어떨까요?”
순식간에 미소가 사라지고 눈을 크게 떴다.
“대현카드 말입니까?”
“이미 그쪽도 오늘내일합니다. 링거 꽂고 겨우 버티는 중이죠. 대현자동차의 도움을 일절 받지 못하니 돈 나올 곳도 없을 겁니다.”
“순양과 대현이라… 이거 살 떨립니다.”
말과는 다르게 약간 흥분한 모습이다.
세상에 뭔가 보여주고 싶을 때 아닌가?
새로운 정권의 힘과 권위, 그것이 한국을 양분하는 재벌을 조지는 모습으로 보여진다면? 그림은 아주 좋다.
“두 곳만 손대면 대기업들은 알아서 길 겁니다. 다음 차례가 되지 않으려면 부실을 빨리 걷어내고 정상화에 최선을 다하겠죠.”
“그럴듯하긴 한데, 말했다시피 살 떨려서 원….”
이 사람이 이렇게 엄살떠는 이유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혹시 언론이 떠들어 댈까 봐 그러십니까?”
“당연하죠. 허니문 기간이라 살살 긁는 정도가 전부인데, 정부가 신문사의 광고주를 두들겨 패면 그들이 가만있겠어요? 대형 광고주인 순양과 대현을 보호하기 위해 우리를 물어뜯기 시작할 겁니다. 허니문이 비터문(Bitter Moon)으로 변하는 건 한순간입니다.”
“겁먹지 마십시오. 그런 일 없을 겁니다.”
“네?”
난 웃으며 찻잔을 들었다. 궁금해서 미칠 지경일 때 잠시 뜸을 들이는 것도 나쁘지 않다.
“최대 광고주는 순양, 대현그룹이 아닙니다. 순양전자와 대현자동차죠. 이 회사들의 주인은 카드사의 주인을 아주 싫어합니다. 이유는… 잘 아시죠?”
“아…!”
경제수석은 긴 한숨을 쉬었지만, 표정은 확연히 밝아졌다.
“모든 언론사가 청와대를 칭찬하지는 않겠지만 침묵할 겁니다. 가장 시끄러운 한성일보도 바로 순양전자와 사돈 간이니 쓴소리 한 번 정도로 끝낼 거니까 걱정은 접어 두십시오.”
경제수석은 등받이에 기대 깍지 낀 손으로 턱을 문질렀다.
한참을 석상처럼 꼼작도 하지 않던 그가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그런데 진도준 씨, 당신은 이 일로 얻는 게 뭡니까? 물론 미라클 인베스트먼트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건 알지만, 그것만으로 집안 계열사를 망하게 하는 데 앞장서는 건 당최 이해가 안 되는군요.”
“그건 이미 금융위원장님과 미팅할 때 말씀드렸습니다만.”
“복잡한 집안 문제라고 하신 것 말입니까?”
“네.”
“그렇다면 전 오늘 나눴던 이야기는 없었던 일로 할 수밖에 없어요.”
갑자기 왜 딴소리를 꺼내지? 절대 손해 보는 장사가 아닐 텐데?
“청와대, 아니 정부의 힘을 집안 문제 푸는 데 쓸 수는 없으니까요. 오늘 일을 쓸모 있게 하려면 그 집안 문제까지 구체적으로 말해줘야 합니다. 제가 이용당한다는 기분이 들지 않도록 말입니다.”
결국, 빤스 안까지 들여다봐야 움직이겠다는 말인데… 빤스 안은 지린내가 진동해야 한다. 그룹 지분을 움켜쥐겠다는 고차원적인 것보다는 좀 더 원초적이고 자극적인 게 그럴 듯하다.
“제가 뛰어난 겜블러가 된 건 가려진 패를 미리 다 봐 뒀기 때문입니다. 타짜들은 그렇다지요? 48장의 화투패의 순서를 다 안다고 하더군요.”
“돈 때문입니까?”
눈치 빠른 자다.
“네. 전 수석님께서 제 제안을 받아들신다면 내일부터 순양카드와 대현카드의 주식을 사 모을 생각입니다. 특히 순양카드는 이미 액면가보다 더 떨어졌으니, 다시 정상화가 됐을 때는 족히 10배의 수익은 문제없을 겁니다.”
“캬! 무섭네, 우리 후배님.”
참, 이 양반도 우리 학교 출신이었지. 그런데 왜 갑자기 학벌을 거론할까?
“도대체 얼마나 챙길 생각이실까?”
“밑천이 워낙 많아서 얼마나 챙길지는 저도 모릅니다.”
난 경제수석의 웃는 얼굴을 보며 슬쩍 한마디를 던졌다.
“필요하시면 언제든 말씀하십시오, 선배님. 어차피 전 범생이라 돈 쓸 일도 없습니다.”
그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