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Youngest Son of Sunyang RAW novel - Chapter 217
진영기 부회장의 호출을 받자마자 달려갔다. 오세현이 한바탕 휩쓸고 지나갔으니 모두 계산기를 두드렸을 것이다.
출혈이 얼마나 되는지, 지분 구조 변동이 정확히 어떻게 됐는지 지금도 파악하는 중일 게 뻔한데…. 설마 얹어준 웃돈 다시 뱉으라고 소리치지는 않겠지?
부회장실의 문을 열고 들어가자 첫째 큰아버지는 환히 웃으며 나를 반겼다.
“어서 와, 도준아.”
돈 이야기가 아닌가? 하지만 이럴 때는 내가 먼저 선수를 치는 게 낫다.
“큰아버지. 죄송합니다.”
머리를 푹 숙이자 무슨 의미인지 알아차린 큰아버지는 나를 바로 세웠다.
“아니다. 네가 죄송할 게 뭐가 있어?”
역시, 곧 죽어도 가오 떨어지는 말은 절대 못 하는 사람이지.
줬던 돈을 다시 달라는 말은 나오지 않을 것 같다.
“도의상 적당한 프리미엄 정도만 빼고 다 돌려드려야 하는데….”
슬쩍 눈치를 보니 큰아버지의 눈빛이 초롱초롱하다. 기대감이 슬슬 오를 것이다. 억지로 뜯어내는 건 가오 상하는 일이지만 준다는데야 마다할 리가 없다.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였어요. 돈 들어오자마자 생명, 화재, 캐피털에서 단기채 갚느라 다 써버렸다고 하더군요. 지금 외국 자본이 싹 빠져나가서 어쩔 수 없었다고….”
큰아버지의 눈빛에 실망이 잔뜩 서렸지만, 입에서는 다른 말이 나온다.
“도움 됐다니 그나마 다행이구나. 급한 불 끄는데 회사 구분하면 쓰나? 가족인데 서로 편의 봐주는 거지. 괜찮아.”
가족인데 급전 좀 빌려달라는 동생을 매정하게 뿌리친 사람 입에서 나올 말은 아니지만 난 당연하다는 듯 머리를 끄덕였다.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엉덩이를 소파에 걸치자 큰아버지는 나를 호출한 진짜 용건을 말하기 시작했다.
“내가 널 부른 건 다른 게 아니라 지분 구조 때문이다.”
지분?
오세현 대표에게 두 분 모두 손을 뻗쳤고 진동기 부회장만 절반의 성공을 거뒀다. 최소한 그는 현재의 자리를 지킬 수 있게 되었다.
대주주인 오세현을 포섭하는 데 실패했으니 내가 가진 10%라도 아쉬운 대로 끌어들이려는 걸까?
“일단은 내가 하는 말을 끝까지 들어.”
“네.”
“네 둘째 큰아버지와 상의를 좀 했는데 말이다. 아무래도 지금 이 상태로는 안 되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
끝까지 들을 수밖에 없다. 뭐가 안 된다는 건가?
“우리 집안 기둥을 좀벌레가 갉아먹고 있다.”
“오세현 대표 말입니까?”
“그래. 지금 정확한 수치를 뽑아내고 있는데 대충 계산해도 23%의 지분은 넘을 것 같아.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
말이 되고 안 되고를 떠나 끝까지 듣자. 무슨 꿍꿍이일까?
“그놈이 혹시라도 딴생각을 품으면 우리가 난처한 일을 당할지도 모른다.”
“딴생각이라면…?”
“오세현이 임시주주총회를 요청하면 순양의 모든 계열사가 주총을 열어야 해. 게다가 그놈은 금융 전문가, 만약 우리 순양그룹의 전체 회계장부를 들여다보겠다고 하면?”
국세청이 순양그룹을 털겠다고 덤벼드는 것이 더 낫다. 여기저기 전화를 돌려 살살 다뤄주기를 부탁할 수도 있고, 언론을 동원해서 대기업 죽이기라는 여론을 조성할 수도 있다.
하지만 대주주가 덤벼들면 내부 문제로 바뀌어버린다.
두 손 놓고 오세현의 현미경 조사를 고스란히 받아내야 한다.
아마도 임원이나 대표이사 여럿이 고소당할 것이 뻔하다.
“그런 일 없도록 제가 미리 부탁하겠습니다.”
큰아버지는 손을 내저었다.
“네게 그런 일 시키려고 이런 말 하는 거 아니다. 어차피 임시방편일 뿐이야. 그리고 이건 네게도 큰일이다. 친한 사이라고 해서 방심할 때가 아니야.”
“저도요?”
“그래.”
나의 유일한 약점, 나도 잘 안다. 그리고 집안사람 모두가 안다. 심지어 전 국민이 안다.
바로 상속세다.
기업가치 십조 원이 넘어가는 금융그룹을 물려받았지만, 상속세는 빌딩 하나 물려받은 사람보다 더 적게 냈다.
모두 분통을 터트릴 만 했지만, 이런 재벌들의 행태에 이미 익숙해졌는지 씨발, 니미, 좆같네 등의 욕설 한 번으로 다 잊어버린다. 사는 세상이 다르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딴 세상이라고 생각하면 분통 터트릴 일도 없다. 다른 세상은 다른 규칙이 적용되는 법이니까.
그리고 불법이라기보다는 편법이라는 표현을 쓴다.
하나하나 따지면 불법적인 요소를 찾아낼 수도 있겠지만, 편법이라는 말로 어물쩍 넘어가는 것이다.
“설마 오 대표님이…. 에이, 아니에요.”
웃으며 세차게 손을 내저었지만, 목적이 다르니 큰아버지는 굳은 표정을 풀지 않았다.
“친분이 깊다고 해서 시험할 생각 하지 말어. 오세현이 지금까지 투자한 돈을 생각해봐. 어쩌면 그자는 외국 자본을 등에 업고 순양그룹을 노리고 있을 수도 있어.”
방향은 엉뚱한 곳을 향하지만, 위기를 느끼는 건 정확하다.
“큰아버지. 좀 과잉 반응이신 것 같은데요? 오 대표는 아버지와 절친입니다. 그리고 순양을 넘보기에는 너무 미약하고요.”
“그래서 네게 다짐을 받아야겠다.”
“다짐요?”
“그래. 만약 오세현이가 네 아버지와 네게 접근해서 허황한 소리를 늘어놓으면 어쩔 셈이냐? 그자와 네가 손을 잡으면 단번에 2대 주주야. 충분히 헛된 꿈을 꿀 수 있다.”
큰아버지는 곁눈질로 날 흘깃 보더니 한마디 툭 던졌다.
“지배지분을 손 좀 볼 생각이다. 그리 알고 너도 협조하도록 해라. 그게 다짐이다.”
여기 또 다른 과욕을 보고 있다.
아니, 이번에는 불안인가?
계열사 지분을 옮긴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공정위가 우리 순양의 순환출자 구조를 살피다 포기했다는 소문이 돈 적도 있다.
전문가들이 구조를 살피는 것도 버거운데 구조를 바꾼다?
“쉽지 않을 텐데요? 순환출자로 묶인 지분을 완전히 이동해야 하는 겁니다. 다른 계열사 지분은 회사 자산인데 이동하려면 서로 사고팔아야 합니다. 자칫 잘못하다가는 대표이사 배임 행위까지….”
“그건 내가 알아서 하마. 쉽지 않은 일이라는 걸 나도 잘 안다. 단번에 해치우는 건 불가능해. 아주 천천히 그리고 신중하게 진행할 거다.”
지금은 무조건 찬성하는 수밖에 없다. 지분 구조를 바꾼다는 게 사실일 수도 있고 나를 시험해보는 것일 수도 있다.
괜한 반대는 의심만 짙어진다.
두 큰아버지의 의심이 잠시도 멈춘 적이 없다는 것쯤은 잘 안다.
“알겠습니다. 제 의결권이 필요할 때 언제든 알려주십시오.”
망설임 없는 대답에 큰아버지는 만족한 웃음을 보였다.
“그래. 너도 내 의견을 받아들이니 내 마음이 한결 가볍구나. 허허.”
큰아버지의 웃음이 억지스럽게 보였다.
내 미소도 억지스럽게 보이려나?
순양 본관을 나와 일단 집으로 향했다. 생각할 게 많아졌다.
* * *
그룹의 지분 구조를 정확히 파악하는 사람은 한 명뿐이다.
바로 이학재 비서실장.
내가 궁금한 것은 이 사람의 손을 거치지 않고 지분 이동이 가능할까 하는 것과 진영기 부회장이 이학재 실장과 논의를 거쳤는가 하는 것이다.
만약 두 사람이 이 문제를 이야기했다면 지분 이동은 확실하게 진행된다. 그리고 할아버지는 이 사실을 알고 계실까?
복잡한 여러 변수를 놓고 생각하려면 하나하나를 정확히 확인하는 수밖에 없다.
결국, 전화를 걸었다.
일 년에 한두 번 얼굴 마주하며 안부를 묻는 사람, 두어 달에 한 번 정도 전화 통화 하는 사람, 하지만 믿을 수 있는 사람.
일 끝마치고 집으로 오라고 하자 그는 흔쾌히 달려왔다.
“어쩐 일로 먼저 전화를 다 주시고….”
김윤석 대리는 캔맥주 몇 개와 과자가 든 편의점 비닐백을 들고 웃으며 들어왔다.
“어쩐 일이긴요? 그냥 얼굴이나 보자고 부른 게 아니란 건 잘 알면서. 하하.”
잠깐 웃음을 나눈 뒤 맥주를 마시기 시작했다.
“요즘 특이한 일은 없었습니까?”
“없죠. 회장님이 은퇴하신 것이나 진배없으니… 비서실 전체가 한가합니다.”
김윤석 대리는 비서실에 완전히 적응한 듯 여유가 넘쳤다.
“요즘도 이학재 실장을 수행합니까?”
“네. 여전히 가방모찌이긴 한데, 그나마 좀 편하게 대해주십니다.”
“최근에 이학재 실장이 두 부회장과 만난 적은 없습니까?”
김윤석 대리는 잠시 기억을 더듬더니 머리를 흔들었다.
“제가 퇴근한 뒤에 만났을 수는 있지만, 적어도 낮에 만난 적은 없습니다.”
“특별한 지시도 없었고요? 이를테면 그룹 지분 현황 문제라든가…?”
“전혀요. 말씀드렸다시피 정말 한가해졌습니다. 두 부회장님이야 이학재 실장과 거리 두기를 한 지 오래됐어요.”
두 분 큰아버지는 할아버지 최측근의 사람까지 물려받을 생각이 없다. 그들은 자신들이 직접 키운 새로운 비서실장을 이학재처럼 만들고 싶어 한다.
김윤석 대리는 슬쩍 내 눈치를 살피더니 조심스레 말했다.
“무슨 일인지 여쭤봐도 될까요?”
“진영기 부회장께서 지주회사를 바꾸겠다고 하시더군요. 이게 날 떠보려는 것인지 진짜 실행에 옮기려는지는 불확실합니다.”
김윤석은 크게 놀라지는 않았다.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걸 보니 교육을 잘 받은 것처럼 보인다.
“지분 문제라면 이학재 실장을 거치지 않고는 힘들죠. 지분만 담당하는 법무팀을 꽉 쥐고 있으니까요.”
“은밀하게 자체적으로 진행한다면 불가능한 건 아닙니다. 단지 시간이 오래 걸릴 뿐.”
김윤석은 잠시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이런 말씀드리는 게 좀 조심스럽지만, 지분 이동을 부회장님이 직접 하려면… 진 회장님이 안 계셔야 가능할 겁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셔야 가능하다는 뜻이다.
“아직 이학재 실장의 빨대가 많은가 봐요?”
“네. 계열사마다 이학재 실장의 사람들이 수두룩합니다. 그들은 매일 이 실장님에게 보고서를 올리고 이 실장님은 곧바로 회장님께 보고하니까요.”
김윤석은 맥주 한 모금으로 목을 축이며 말했다.
“이 사실을 보고해버릴까요?”
“이 실장에게요? 어떻게 알게 됐냐고 물으면 어쩌려고요?”
“에이, 제가 누구 사람인지 이학재 실장님도 아는데요, 뭐…. 소스야 말 안 해도 알 겁니다.”
“아뇨. 그냥 놔둡시다. 당장 실행에 옮기는 건 힘드니 아직 여유가 좀 있어요.”
큰아버지도 분명히 말했다. 아주 천천히 그리고 신중하게 진행한다고.
김윤석의 말처럼 계획을 세웠다가 할아버지가 돌아가시면 단숨에 처리할 모양이다. 물론 그 전에 이학재 실장부터 정리해야겠지만.
“참, 하나 물어봅시다.”
“네.”
“이학재 실장은 무슨 생각입니까? 할아버지가 은퇴하셨는데 언제까지 그 자리를 지킬 수도 없는 노릇 아닙니까?”
“그 때문에 요즘 머릿속이 복잡하신지 저녁에 술 드시는 횟수가 늘었어요. 회장님과 함께 은퇴하기에는 아직 나이가….”
“첫째 큰아버지와 비슷한 연배니 10년은 더 일해도 되죠.”
하지만 이학재는 이제 그룹에서 계륵이 되어버린 사람이다.
“김 대리.”
“네.”
“이학재 실장이 원하는 게 있을까? 아니, 할아버지가 안 계셔도 순양에 계속 남고 싶을까요?”
김윤석은 조금의 고민도 없이 대답했다.
“진 회장님이 영원히 회장님이기를 바랄 겁니다.”
영원한 이인자이기를 원한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김 대리. 요즘 이학재 실장님이 술을 즐겨 마신다고 했죠?”
“네. 우리 수행원들을 먼저 보내고 혼자만의 시간을 자주 가지십니다.”
김윤석은 내 뜻을 읽었는지 물어보지도 않은 것을 말했다.
“강남에 ‘상(象)’이라는 조용한 바가 하나 있습니다. 거기 단골이죠.”
“그럼 다음에 그곳을 들르면 곧바로 제게 알려주세요.”
“알겠습니다.”
김윤석은 빙그레 웃었다. 이제 자신의 역할이 빛을 발할 것 같은 기대감이 보이는 웃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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