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Youngest Son of Sunyang RAW novel - Chapter 228
“이게 원래는 목조창고였는데 보수 작업을 계속 거치면서 이렇게 변했어. 까마득한 옛일이지만 아직도 기억나. 때 묻은 나무가 내는 향기. 바짝 말라가는 쌀가마니의 냄새와 누렇게 변해버린 그 갈색 나락. 난 거기서부터 돈을 모았어.”
할아버지는 이미 콘크리트와 벽돌로 뒤덮인 건물을 매만지며 추억에 잠겼다.
“바람이 찹니다. 회장님. 안으로 들어가시지요.”
급히 연락받고 달려 나온 순양그룹 역사관의 책임자는 하얀 입김을 내뿜는 할아버지 곁에 서서 안절부절못했다.
감기라도 드는 날엔 본사에서 불호령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비록 많은 급여는 아니지만 겨우 건물 관리하는 정도만으로 월급 끊어질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는 땡 보직이다. 늙어 거동하기 힘들 때까지는 악착같이 붙어 있고 싶을 것이다.
“거, 사람 참…. 조금만 기다리게. 자네가 일을 똑바로 하는지 안 하는지 점검하는 게야. 건물 벽에 금이라도 하나 발견하는 날엔 아주 혼쭐날 줄 알아.”
“아이고 회장님. 제가 밥줄인 이곳을 얼마나 애지중지하는지 아시지 않습니까? 제 손주가 다쳐도 눈 한 번 깜빡하지 않는 접니다만, 여긴 거미줄만 발견해도 온갖 호들갑을 다 떱니다요.”
역사관 책임자는 건물 벽을 손으로 쓱 훔치고 할아버지 눈앞에 내밀었다.
“보십시오. 먼지 좀 묻은 게 전부 아닙니까? 땟자국 하나 없어요.”
“허허, 그러네. 관리 잘해줘서 고마우이.”
할아버지는 그의 어깨를 가볍게 툭 쳤다.
“자, 들어가자.”
아무도 없는 텅 빈 실내는 할아버지의 구두 소리가 낮게 울렸다.
우리는 구식 양복 차림의 중년 남자들이 환하게 웃는 모습을 담을 낡은 흑백 사진 앞에 멈춰 섰다.
“…이건 순양섬유가 최초로 1억 불 수출을 달성했을 때야. 지금이야 너도나도 1억 불이지만, 저 때만 해도 정말 대단한 쾌거였지.”
불도저와 포크레인, 공사장 인부들의 곡괭이질 사진도 있었다.
“너 이 사진 뭔지 알겠니?”
“혹시 경부고속도로 아닙니까?”
“맞다. 대통령의 특별 지시로 시작한 대역사 아니냐? 건설, 토목회사들이 난리 치던 때야. 누가 가장 먼저 공사를 끝내느냐로 마치 달리기 시합처럼 공사를 서둘렀지. 그래야 대통령 눈에 띄거든. 허허.”
과거 빛나는 순간을 포착한 사진은 계속 이어졌다.
“이건 리비아 대수로 공사 때 쓰던 송수관 사진이구나. 정말 말도 안 되는 엄청난 사업이지.”
리비아 대수로는 남부 사하라 사막의 지하수를 끌어올려 북부 지중해 해안에 있는 도시들에 물을 공급하기 위한 수로다.
총 길이가 4,000km가 넘는 거대한 송수관을 사막을 가로질러 지하에 매설해서 하루 650만t의 물을 북부 지중해 연안에 공급하는 이 초대형 프로젝트는 총 공사비가 무려 300억 달러에 이른다.
할아버지는 사진과 기념품을 통해 과거의 기억을 더듬으며 하나하나 설명을 이어갔다.
마치 현장에 계신 듯한 상기된 표정, 쉴 새 없이 흘러나오는 미소, 반작이는 눈. 꺼져가는 촛불이 아니라 활활 타오르는 횃불 같은 모습이었다.
할아버지는 미술관의 큐레이터처럼 사진 하나하나에 얽힌 일화와 그때의 감정을 자세히 설명하고 한쪽 벽에 놓인 의자에 앉았다.
“어떠냐? 이렇게 보니 그럴싸하지?”
“뭐가 말입니까?”
“순양의 성장 말이다.”
“그럴싸한 게 아니고 대단한 거죠.”
“아니다.”
“네?”
“저거 전부 다 가짜야. 허허.”
가짜라니? 이건 또 무슨 의미일까?
“보자…. 어디였더라? 아, 아마 ‘한일상사’였을 거다. 지금이야 흔적도 찾기 힘든 회사지만, 아무튼 그놈들이 최초로 1억 불 수출 달성을 코앞에 두고 있다는 소문이 돌더라고. 이거 큰일이다 싶었지. 최초는 내가 되고 싶었거든. 그래서 가짜 서류 만들어서 언론에 발표해버렸지.”
가짜라고 하길래 다른 의미가 있을 줄 알았다. 모든 게 허망하다든지, 부질없는 1등 싸움에 치중했다든지 하는….
정말 거짓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기자들 떡값 돌리고 잘 부탁한다고 하니까 대서특필한 거야. 떠들썩하게 해 놨으니 다들 그런가 보다 하고 받아들였어.”
“그래도 수출 통관 서류가 남아 있을 텐데요? 그거 확인하면….”
“아, 그거야 금방 들켰지. 정부도 난감해했지만 어쩌겠어? 1억 불 수출이라는 상징성 때문에 국민도 자기 일처럼 뿌듯해하는데 아니라고 초를 칠 이유가 없잖아. 대통령도 수출, 수출하며 입에 달고 살았고…. 으허허.”
그게 전부는 아닐 것이다. 엄청난 돈을 여기저기 뿌려 무탈하게 넘어갔을 게 뻔하다.
“경부고속도로 속도전은 부실 공사라 나중에 하자 보수 하며 메꿨고, 리비아 대수로 공사는 앞으로 남고 뒤로 아까지(あかじ,적자) 난 헛발질이었어.”
회한에 잠긴 음성이 아니라 재미있는 추억을 더듬는 밝은 목소리였다.
“그렇지만 지금 이 역사관은 어떠냐? 성공을 써 내려간 상징처럼 보이지?”
“처럼이 아니라 상징 맞습니다.”
“그래. 한국 경제의 역사와 맞물리는 성공의 상징이지. 과정이야 여기저기 너덜너덜했지만 말이다.”
할아버지는 내 손을 꼭 잡았다.
“어떠냐? 넌 이 역사관을 계속 넓힐 자신이 있겠지?”
“아뇨. 이곳은 지금 이 상태로 멈춰야죠. 여긴 할아버지의 기념관입니다.”
의외의 대답에 할아버지가 눈을 치켜떴다.
“왜? 더 크게 키울 자신 없어?”
“어린애가 성인이 될 때까지는 무럭무럭 자라죠. 하지만 성인이 되면 키도 멈추고, 덩치도 더는 커지지 않습니다.”
“순양그룹은 이제 다 큰 어른이다?”
“한국 경제성장률을 보십시오. 클 만큼 컸습니다. 병들지 않고 시들지 않도록 건강 관리가 우선이죠.”
“그래서? 지키는 것에만 힘쓰겠다? 에라이!”
할아버지의 손이 내 뒤통수를 갈겼다.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손길이었지만 꽤 맵다. 난 뒤통수를 만지며 말했다.
“순양은 건강만 지키면 됩니다. 대신 또 다른 종자를 심어 새싹을 틔우고 거목으로 키워야죠. 제2의 순양이 될 겁니다.”
“또 하나의 순양이라….”
“네. 아, 물론 키우는 데 필요한 거름값은 순양이 좀 보태야겠죠.”
또다시 뒤통수에 손이 날아왔다. 이번은 그리 맵지 않았다.
“순양 돈을 왜 빼먹어? 네 돈으로 거름 대고 물 뿌려. 돈도 많은 놈이!”
나란히 앉은 할아버지의 표정을 곁눈질로 보니 웃고 계셨다.
이 정도면 만족하시려나?
“그만 일어나자. 출출한데 해장국이나 먹으러 갈까?”
“피곤하시지는 않으세요? 좀 쉬시는 게….”
“어제 하루를 꼬박 잤다. 피곤할 게 뭐가 있다고? 어여 가자. 여기 선지해장국 잘하는 데 있어. 먹을 만하다.”
밖으로 나오자 의료진이 우르르 몰려와 할아버지를 부축했다.
“괜찮아. 내 몸 정도는 가눌 수 있어. 자네들도 출출할 테니 같이 가자. 해장국 한 그릇 정도는 내가 대접하마.”
* * *
해장국 한 그릇을 깨끗이 비우고 밖으로 나오자 희끗한 새벽빛이 밝아오기 시작했다.
“이제 올라가셔야죠? 또 장시간 차를 타야 하는데 어디 온천이라도 가서 좀 쉬시고 출발할까요?”
“아직 멀었다. 들를 데가 있어.”
“아차, 깜빡했습니다. 인사드릴 분이 계시다고 하셨죠?”
“그래. 여기서 그리 멀지 않아. 바로 출발하자.”
“방문하기에는 너무 이른 시간 아닙니까?”
“늙은이라 새벽잠이 없어. 동트기 전에 일어나서 밥 챙겨 먹을 영감이다. 괜찮아.”
영감이라고 하니 숨겨 둔 여인은 아니다. 누굴까?
한 시간 남짓 국도를 달렸다.
도착한 곳은 완전 깡촌도 아니었고 중소 도시도 아닌,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시골이었다.
논밭과 비닐하우스 그리고 과수원이 펼쳐져 있지만, 흙길이 아닌 포장도로가 집 앞까지 깔린 그런 작은 마을로 들어섰다.
집집마다 이미 불이 켜진 것으로 보아 새벽부터 농사일을 준비하는 듯했다.
우리가 도착한 곳은 이런 시골에서는 보기 힘든, 꽤 멋들어진 한옥이었다. 낮은 담 너머로 보이는 넓은 마당은 관리가 잘된 잔디가 깔려 있었고, 본채와 별채로 이루어진 집은 누가 보더라도 고급 자재를 잔뜩 썼다는 걸 알아챌 만큼 화려했다.
이미 자동차 소리를 들어서인지 백발의 노인이 담 너머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다.
“이놈아. 형님 오시는 걸 뻔히 보고도 문 안 열고 뭐 해?”
“거참, 새벽부터 뭐 이리 요란하게 행차하십니꺼? 동네 사람들 다 깨것수.”
툴툴거리며 문을 열었지만 반가움을 감추지 못하는 표정이다.
“아침은 자셨습니꺼? 밥 준비하라고 하까예?”
할아버지는 지독한 경상도 사투리로 반기는 노인의 손을 꼭 잡았다.
“해장국 한 그릇 했어. 나중에 점심이나 챙겨주게.”
“오믄 온다꼬 전화라도 하제. 그라고 밥때 됐는데 만다꼬 사 묵는교? 와서 자시면 되지.”
섭섭한 듯 말하는 노인을 따라 할머니도 나와 할아버지를 반겼다.
“아이고, 회장님. 여까지 어인 일이라예? 참말로 오랜만이라예. 아이고 참, 우짜노? 쪼매만 기다리소. 내 얼른 밥 안치고 아침 준비하께예.”
“고마 됐다. 자시고 오셨다니께 우리끼리 묵자. 차나 좀 내온나.”
“그래도 밥 한술은 뜨고 가셔야지예. 저기 젊은 장정들이 몇인데? 얼른 준비하께예.”
할머니는 뭐라 말할 새도 없이 쪼르르 부엌으로 달려갔다.
“제수씨는 여전하시네. 허허.”
“말도 마이소. 인자 내 말이라믄 똥으로도 안 듣는다 아입니꺼? 그냥 지 하고 싶은 대로 다 합니더. 그만 들어가입시더. 바람이 찹니다.”
노인은 같이 온 일행을 향해 말했다.
“저짜 별채에 가서 손발 좀 녹이소. 보일러 틀어 놔서 따습을 거라.”
모두 할아버지의 눈치만 살피자 버럭 소리 질렀다.
“집주인이 괜찮다고 안 하나? 얼릉 안 드가고 뭐 하노?”
할아버지가 머리를 끄덕이자 모두 집 안으로 들어갔다.
“근데 야는 누꼬? 손잔교?”
“그래. 우리 집 막내야. 도준아, 인사드리거라.”
난 이 경상도 영감님 앞에서 대뜸 큰절을 올리고 일어나서 머리를 조금 숙였다.
“진도준입니다. 작은할아버지.”
살얼음이 낀 잔디에 주저 없이 엎드렸으니 조금 놀란 듯 보였다.
“어흠…. 거 어린놈이 싸가지는 있네. 형님 핏줄 맞소?”
“시끄럽고. 춥다. 빨리 들어가자.”
반가움을 저리 표현하는 걸 보니 두 분은 보통 사이가 아닌 듯했다. 누굴까?
* * *
집 밖이 화려한 만큼 내부도 보통이 아니었다. 멋들어지게 쓴 붓글씨가 돋보이는 족자, 골동품처럼 보이는 도자기까지.
가짜가 아니라면 이 노인은 부자가 틀림없다. 노부부 둘이 사는 집이 이리 크고 깔끔하다는 건 분명 집안일 하는 사람도 있다는 증거다.
아니나 다를까, 다과상을 들고 온 사람은 조금 전 그 할머니가 아니라 삼십 대로 보이는 젊은 여인이었다.
머리만 꾸벅 숙이고 나가는 거로 봐서는 딸이나 며느리가 아님은 분명했다. 핏줄이라면 인사를 했을 테니까 말이다.
“차 드이소. 형님이 지난번에 보내주신 중국차라예. 맛이 에법 납디다.”
“내가?”
할아버지가 고개를 갸웃하자 곧바로 이마를 찌푸렸다.
“그럼 그렇지. 이런 거 챙겨 줄 만큼 살가븐 사람이 아이제. 보나 마나 밑에 것들 시킨 거구먼.”
“누가 보냈든 내 돈으로 산 거다. 고맙다는 말도 안 하면서 불평은…!”
두 분이 찻잔을 들고 나서 나도 한 모금 마셨다.
따뜻한 차를 마시니 몸이 녹는 것 같았다.
노인은 무릎 꿇고 공손히 앉은 나를 물끄러미 보더니 할아버지를 향해 물었다.
“야도 델꼬 갔다 왔소? 군산에?”
할아버지는 머리를 한 번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순양카드 하나로 지 큰아버지 둘을 데꼬 논 게 이놈이요? 똘똘해 보이긴 하구먼.”
은퇴해서 유유자적하는 시골 노인이 아니다.
누굴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