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Youngest Son of Sunyang RAW novel - Chapter 230
병원 주차장에는 아버지와 이학재 실장이 초조한 얼굴로 기다리고 있었다.
차에서 내린 할아버지는 의사들이 가져온 휠체어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몇 발짝 된다고 그걸 가져와? 됐다. 그냥 올라가자.”
엘리베이터 앞까지 성큼성큼 걸어간 할아버지는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두말 않겠다. 모두 돌아가. 오늘은 혼자 있고 싶다.”
우리는 빠르게 닫히는 엘리베이터 문을 보고만 있어야 했다.
아버지는 다른 엘리베이터에 오르며 말했다.
“도준아. 넌 가서 좀 쉬도록 해. 난 병원장 만나보고 갈 테니까. 학재 형님도 가서 좀 쉬세요.”
아버지가 탄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자 이학재 실장은 마음이 놓였는지 긴 한숨을 쉬었다.
“도준아. 피곤하니?”
“아닙니다. 올라오면서 눈 좀 붙였어요.”
“그럼 나랑 이야기 좀 할까?”
그와 난 병원 근처의 카페로 자리를 옮겼다.
“군산은 어떻더냐?”
“썰렁하던데요?”
“뭐? 썰렁?”
“네. 순양그룹의 역사관이라고 하기에는 좀 빈약하지 않습니까? 사진 몇 장과 기념품 몇 개가 전부던데….”
“그런가? 그 현장을 직접 겪지 않은 사람들은 별다른 감흥을 못 느끼나 보군.”
“차라리 할아버지의 사진첩이라고나 할까요?”
“사진첩? 하하. 그래, 그편이 더 어울리겠다. 회장님의 추억을 담은 곳이니까 말이다.”
이학재는 웃으며 나를 살폈다.
“별말씀 없으시더냐?”
“그때 그 사고에 대해서 말씀하셨어요.”
그의 눈썹이 꿈틀하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설마 할머니 짓이라는 걸 할아버지가 다 털어놓을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한 게 틀림없다.
“실장님도 알고 계셨죠?”
“으흠…. 당연히. 내가 조사했으니까.”
“궁금한 게 있는데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그래. 뭐지?”
“할머니도 손발이 되어주는 사람들이 있습니까? 그런 일을 실행에 옮기려면 보통의 직원들로는 불가능하지 않습니까?”
“돈만 주면 무슨 짓이든 저지르는 놈들이 득실거리는 세상 아니냐?”
“순양그룹 회장 사모님이 그런 놈들과 어울려 지낸다고 생각하기 어려운데요? 그놈들에게 약점 잡히는 일인데…. 그리 단순하지는 않을 겁니다. 말씀해 주십시오.”
“왜 그렇게 자세히 알려고 하지?”
“할아버지께서 그러시더군요. 또 해코지할지 모르지만, 당신을 봐서 용서하라고요. 그럴 때를 위해 저도 대비해야죠.”
이학재 실장은 내 눈을 똑바로 쳐다보기 시작했다.
“용서할 자신은 있고?”
“할아버지 부탁인데 들어드려야죠.”
“흠….”
그는 커피를 한 모금 마셨고 난 그가 이야기하기를 기다렸다.
“사모님이 미술관과 예술지원센터를 운영하는 건 알지?”
“네. 최고의 후원단체라고 들었습니다.”
“고가의 예술품이 움직이는 세계다. 가짜가 판을 치고 웬만한 전문가가 아니면 위작과 진품을 구별하기 어렵지. 그리고 음지에서 거래하는 경우가 다반사고.”
“아…!”
“떳떳하지 못한 거래를 했는데 위작이라고 판명 나면? 경찰에 신고할까?”
음지, 떳떳하지 못한 거래…. 바로 밀수를 말한다.
한때 떠도는 소문이 있었다.
북한의 골동품이 중국을 통해 한국으로 쏟아져 들어왔다고.
그 골동품을 싹 거둬들여 지하 수장고에 고이 모셔둔 곳이 바로 순양갤러리라는 소문이었다. 이 역시 밀수를 통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그런 불미스러운 일을 힘으로 해결하는 손발 조직이 있군요.”
이학재 실장은 대답 대신 머리만 끄덕였다.
“돈과 힘이라…. 할아버지 말씀 새겨 둬야겠네요. 처음이 어려워서 그렇지 두 번째는 별다른 죄책감도 못 느낄 테니까요.”
“너도 마찬가지 아니냐? 돈과 힘을 다 갖췄어. 우병준이는 네가 지시하면 눈 하나 깜빡 않고 사모님께 경고할걸? 널 건드리면 그대로 되갚아준다고 말이다.”
“설마요?”
“내 전화도 안 받던데? 너한테 충성 맹세 한 거 아냐?”
보여주기 쇼가 아니었다.
정말 순양의 이인자를 지워버렸다.
아니, 그래도 이 사람의 말을 다 믿으면 안 된다. 두 사람이 입을 맞추고 나를 속이려면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다.
사람을 쉽게 믿고 따르다 어떤 꼴을 당했는지, 죽음으로 배우지 않았던가?
“우병준이 정도면 초일류다. 잘 벼린 칼이니 신중하고 조심해서 써.”
“네. 유념하겠습니다.”
“뭐, 집안 문제는 내가 관여할 바는 아닌 것 같고…. 회장님께서 그룹에 대한 말씀은 없으셨어?”
내가 이 사람에게 약속한 바가 있으니 할아버지와 내가 어떤 말을 주고받았는지 궁금해하는 건 당연하다.
“순양을 더 크게 키울 자신이 있느냐만 물어보셨습니다. 그 외에는 특별한 건 없었고요.”
“그래? 그게 전부야?”
“네, 실장님. 아니 오히려 제가 여쭤보고 싶습니다. 할아버지는 제게 그룹 지배 지분을 더 주실 생각이십니까?”
이학재는 머리를 흔들었다.
“다들 회장님이 비장의 카드 한두 장을 가지고 있을 거라 생각하지만…. 잘못 생각한 거다. 회장님 손에 그룹 지배 지분은 없어. 남은 건 부동산과 예금이 전부다. 개인 재산에 대해서는 나도 잘 몰라. 그건 개인 변호사가 관리하니까.”
“확실합니까?”
“내 손으로 나눴다. 더는 없어.”
단언하는 그의 말을 듣자 힘이 좀 빠졌다.
최후의 일격을 가할 만큼의 비밀 무기 하나쯤은 주시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사라졌다.
참 냉정한 분이다. 끝까지 싸워 이긴 놈이 당신의 후계자라 이건가?
“실망한 얼굴인데? 하하.”
“네. 기대했거든요.”
“네가 실수만 하지 않았다면 회장님이 그 기대를 저버리지 않으셨을 텐데.”
실수? 내가? 이건 또 무슨 말이지?
휘둥그레 뜬 내 눈을 보며 이 실장은 손을 살짝 저었다.
“그런 실수가 아니라 사람의 마음을 못 읽은 걸 말하는 거다.”
“제가요?”
“그래. 부모 마음을 약간만 알았더라면 좋았을 텐데… 넌 너무 잘난 모습만 보여줬어. 조금은 부족하고 약한 모습을 보여드렸어야 해. 그래서 측은하고 안쓰러운 마음이 들도록 했다면 조금 달랐을 거다. 우는 애에게 떡 하나 더 준다는 말, 그거 사실이다.”
정말일까? 나에 대한 신뢰가 컸기 때문에 딱 그 정도의 지분만 주신 걸까?
“아, 너무 깊이 생각하지는 마. 단지 내 생각일 뿐이니까. 이거…. 자꾸 이야기가 딴 데로 새는구나. 참, 올라오는 길에 어디 들렀다면서?”
“네. 실장님은 아시는 분일 것 같습니다. 주병해 씨라고….”
“응? 주 사장님을?”
이학재 실장은 의외인지 놀란 표정이었다.
“네. 앞으로 어려운 일 있으면 도움을 청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종종 찾아뵙고 인사도 하라고 하시면서요. 잘 아시는 분입니까?”
“물론.”
그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맺히는 걸 보니 좋은 기억이 많은가 보다.
“대단한 분이다. 조금만 참았다면 순양의 절반을 그분이 가질 수도 있었어. 그걸 다 팽개치고 미련 없이 돌아섰으니… 진짜 사내지.”
“그래도 사는 모습 보니 궁색하지는 않던데요?”
“버린 거에 비하면 궁색한 거 맞아. 회장님이 신경 쓰시니까 그 정도로 사는 거야. 참, 그분을 네게 보여드린 건 회장님 안 계시면 네가 그분 돌봐드리라는 뜻도 포함되어 있는 거다.”
“아, 그렇군요. 잊어먹지 않아야겠군요.”
“현명하신 분이니까 종종 자문을 구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야. 나도 가끔 전화드린다.”
이학재 실장은 커피 잔을 싹 비우며 말했다. 나를 따로 보자고 했던 진짜 이유를 말할 것 같다.
“이제 각오 단단히 해라. 회장님 저리되신 거 알면 모두 본색을 드러낼 거다. 특히 진영기 부회장이 가장 먼저 시작할 거야. 첫 먹이가 네가 될지 아니면 진동기 부회장이 될지 모르지만, 곧바로 축출 작업 들어간다.”
“도와주실 겁니까?”
“말했지? 회장님의 유지는 받들 거라고. 지분 이동은 막아주마. 하지만 그 이상은 없다. 날 앞세울 생각은 하지 마.”
“알겠습니다. 준비 단단히 해야겠군요.”
“특히 두 부회장이 단합해서 너부터 쫓아내려는 수작을 부릴지도 몰라. 그 고비 잘 넘겨.”
“싸울 만한 뭔가를 제 손에 좀 쥐여주실 생각은 없으시고요?”
웃으며 슬쩍 찔러보니 이학재도 웃음을 보였다.
“직접 찾아봐. 재벌 2세 공격할 만한 흠집이야 널리고 널린 거 아니겠어? 흐흐.”
이 양반도 뭔가 한껏 움켜쥐고 있는 게 틀림없다.
* * *
2003년은 검찰이 2002년 대선 전반에 불법자금이 만연했다는 의혹을 조사하며 야당 대선 후보의 측근을 긴급 체포했고 이 뉴스가 2003년의 대미를 장식했다.
일명 차떼기 수법에 가담한 대기업을 전방위로 수사한다는 중수부의 발표가 터져 나오자 모두 비상이었다.
두 분 큰아버지는 선거자금 전달 과정에 자신들의 흔적을 지우고 누군가 대신 검찰 포토라인에 설 사람을 구하느라 정신없었다.
“실장님. 미라클 인베스트먼트의 관계자는 어떻게 됐습니까?”
“오세현 대표는 은퇴나 다름없고, 그때 돈을 전달한 직원 두 명도 일찌감치 미국으로 출국했습니다. 두 직원은 가족들과 함께 나갔으니 저쪽 흔적은 지웠다고 봐도 되겠죠?”
우병준 상무는 머리를 끄덕였다.
“그럼 됐습니다. 진동기 부회장 측에 실장님의 돈을 전달한 놈들도 검찰 수사가 끝날 때까지 동남아로 휴가 보냈습니다.”
“제 돈의 흐름은 찾으셨나요?”
“아뇨. 오세현 대표님이 깔끔하게 처리하셨더군요. 제힘으로 발견하는 건 불가능하고 검찰이 작정하고 덤벼들어도 힘들 겁니다. 미국 계좌까지 전부 확보해서 일일이 대조해야 하니까요.”
“설사 그렇게 해도 못 찾습니다. 뉴욕과 여의도 양쪽으로 하루에 왔다 갔다 하는 돈만 수십억입니다.”
내가 자신감을 보이며 말하자 우병준 상무도 어깨를 으쓱하며 받아들였다.
“두 분 다 보통 아니시군요.”
“제 나이 이제 겨우 스물일곱입니다. 벌써부터 구정물에 손 담글 수는 없죠.”
우병준은 천천히 미소를 거두며 말했다.
“회장님께서 계속 병원에 계신다는 소문이 돕니다. 아시고 계십니까?”
“어디서 그런 소문이 시작됐죠?”
“회장님 자택 경호원들입니다. 통 출입을 안 하시니 그놈들도 이상하게 생각하겠죠. 사실입니까?”
이 사람에 대한 내 믿음이 백 퍼센트는 아니지만, 소문을 확인시켜줄 만큼은 된다고 생각했다.
“네. 일주일쯤 전입니다.”
그는 놀라지도 않고 담담하게 말했다.
“비밀로 하신 이유는…?”
“할아버지께서 원하셨습니다.”
“그렇군요. 그럼 이학재 실장님께 연락하셔서 회장님 자택 경호원들 교대하라고 요청하십시오. 경호실은 일정 기간 지나면 교대 근무하는 게 원칙이니 그놈들도 특별한 일로 받아들이지 않을 겁니다.”
언제까지 비밀로 할 수 있을까?
할아버지가 공식적인 자리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면 시간문제일 뿐이다. 어쩌면 두 분 큰아버지도 눈치채지 않았을까?
“알겠습니다. 이 실장님께 말씀드릴게요.”
“이런 말씀드리기가 조심스럽습니다만, 회장님 건강이 많이 나빠졌습니까?”
“네. 병원에서는 남은 시간이 그리 길지 않다고 합니다.”
우병준은 내 말이 떨어지자마자 휴대전화를 꺼내 들었다.
“직원들 전부 모이라고 해. 진도준 실장님 운전하는 애만 빼고 전부.”
그는 짧은 통화를 끝내고 바로 일어섰다.
“오늘은 외부 일정 짧게 하시고 댁으로 가시는 게 좋겠습니다. 그리고 내일부터 경호 수준을 좀 더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갑작스러운 그의 행동이 과잉인 것 같아 좀 거북했다.
그는 내 표정을 보고 더욱 음성이 굳어졌다.
“물리력과 금력을 모두 쥔 사람이 초조해졌을 때, 상식을 벗어난 짓을 저지르는 걸 여러 번 봤습니다. 순양그룹의 차기 구도가 명확해질 때까지 온갖 사건 사고가 연이어 난다 해도 전 조금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실장님도 긴장하실 필요가 있습니다.”
할머니가 벌인 일을 생각하면 우병준의 말이 틀린 것도 아니다. 새삼 할아버지의 죽음이 현실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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