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Youngest Son of Sunyang RAW novel - Chapter 235
“어? 도준아. 일찍 왔네.”
“뭐야? 왜 전화를 안 받아?”
상준 형은 당황한 듯 호주머니를 이리저리 만졌다.
“아, 밑에 놔두고 왔어. 미안, 오래 기다린 건 아니지?”
“방금 왔어.”
“잠깐만, 나 얘들 배웅하러 올라왔거든.”
상준 형은 빌딩 밖을 흘깃 보더니 곁에 서 있는 여자애들에게 말했다.
“로드 안 불렀어? 왜 안 보여?”
“방금 문자 했어요. 곧 오겠죠, 뭐.”
한 무더기의 여자애들은 똘망똘망한 눈으로 나를 보며 상준 형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뭐예요, PD님. 소개는 해주셔야죠.”
“응? 아, 이쪽은 내 동생이야. 친동생. 그리고 이쪽은 이제 막 데뷔한 애들. 당당하게 공중파 탔어.”
형이 걸그룹까지? 이제 아예 상업성으로 눈을 돌렸나? 공중파라고 하니 문뜩 생각난 게 있었다.
“그래? 그럼 아버지한테 말해서 케이블 음악 방송….”
갑자기 당황한 상준 형이 머리를 조금 흔들며 내게 눈을 끔뻑했다.
아차차. 이 바닥에서 누구 아들이네, 누구 손자네 하는 소리는 듣고 싶지 않다고 했지?
그나마 다행인 건 이 철딱서니 없어 보이는 애들은 내 말을 귀담아듣지 않았다는 것이다.
아무리 봐도 스무 살이 넘지 않아 보였다. 행동도 영락없는 애들이다. 순식간에 내 곁으로 우르르 몰려와 조잘대기 시작했다.
“이야, 진짜 잘생기셨다. 난 우리 PD님이 아이돌 데뷔 않은 게 신기했는데 동생분 보니까 이해가 돼. 늘 비교하며 컸을 테니까 자신감이 없었던 거지. 맞죠?”
“근데 이분 어디서 본 듯한데… 혹시 방송인 아니세요?”
혹시 가끔 했던 내 인터뷰를 봤나? 만약 기억해 내면 낭팬데?
하지만 자신 없게 말하는 걸 보니 대충 스쳐 가며 본 것 같기도 하고…….
“쓸데없는 소리 말고 빨리 가! 방송은 무슨 얼어 죽을, 내 동생은 지금 대학원 다녀. 너네들은 잘생긴 놈만 보면 다 방송인이래.”
화들짝 놀란 상준 형이 큰소리 내며 어린 애들의 입을 막았다.
“아닌데… 분명히 봤는데….”
그중 한 명이 여전히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며 중얼거리자 상준 형은 양 떼 몰 듯 그 애들을 밀어내기 시작했다.
“이것들이…! 쓸데없는 소리 말고 빨리 안 가? 그리고 헛다리 짚지 마. 내 동생 엄청 이쁘고 똑똑한 여친 있어. 너네들이랑 비교도 되지 않으니까 괜히 찔러보지 마.”
“PD님. 차가 와야 나가죠. 근데 진짜 로드 오빠는 뭐 하는 거야?”
잠시도 한눈팔 수 없는 초딩들보다 더 하다. 밀어내고 떼 내도 끊임없이 다가온다.
“저기 근데 이름이 뭐예요? 나이는요? 스물둘? 셋? 피디님 동생이니까 이십 대 중반?”
“진짜 방송 탄 적 없어요?”
내가 이 생이 처음인 혈기 왕성한 이십 대였다면 이 상황을 즐겼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시끄럽고 귀찮기만 했다.
눈살을 찌푸리며 짜증을 감추지 않았지만, 이 애들은 조금도 아랑곳하지 않고 끈질기게 달라붙었다.
이 걸그룹의 로드 매니저가 구세주였다.
빌딩 입구에서 빵빵거리는 클락션 소리가 나자 상준 형이 이 애들을 내 곁에서 떼냈다.
“자, 빨리 가. 딴짓하지 말고. 목 컨디션 조절해야 하니까 숙소에서 푹 자. 밤부터 녹음하는 거 잊어버리지 말고.”
“피디님! 동생분에게 제 전번 알려줘도 돼요!”
쫓겨나듯 나가면서도 마지막까지 끈질긴 면을 보여준다.
신인 애들이 다 사라지자 우린 동시에 한숨을 쉬었다.
“정신없지?”
상준 형이 웃으며 내 어깨에 팔을 걸쳤다.
“뭐야? 재들은?”
“가능성 있는 신인? 우리 회사 기대주? 그 정도…?”
“도대체 쟤들 몇 살이야? 혹시 전부 고삐리야?”
“반은 고삐리, 반은 스무 살. 프로필은 19세로 되어 있지만.”
“형은 음악성 있는 신인 키운다고 하지 않았나?”
“언제까지 나 하고 싶은 것만 할 수 있나? 회사도 먹고살아야지. 인디 애들도 키우고 걸그룹, 아이돌도 키우고. 아, 쟤들은 마냥 맹탕은 아냐. 다들 기본기는 탄탄해. 트레이닝도 많이 시켰고.”
“나이도 먹을 만큼 먹었구만, 왜 저리 애 같아?”
“학교도 안 다니고 트레이닝만 해서 그래. 몸만 컸지 정신은 아직 어린애야.”
상준 형은 갑자기 어깨에 올린 손을 잽싸게 내렸다.
“참, 이럴 때가 아니지. 나 옷 좀 갈아입고 올 테니까 넌 사장님 만나고 있어. 전화할게.”
“내가 형 사장을 왜 만나?”
“투자자가 대표이사 만나는 게 뭐가 이상해?”
“뭐?”
형은 놀란 내 표정을 보며 싱긋 웃었다.
“이야기 들은 지 오래됐다. 네 덕분에 그나마 이만큼이라도 컸다고 늘 고마워하시더라.”
“뭐야 그럼? 다들 아는 거야?”
“아니. 사장님만 알아. 괜찮아. 우리 사장님, 그것 때문에 내 눈치 보거나 그러지 않아. 공과 사를 잘 구분해. 나도 여기서는 그냥 PD야. 순양 회장님 손자도 아니고 투자자 친형도 아닌, 일개 프로듀서.”
“다행이네. 아무튼, 됐어. 월별 보고자료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해. 차라리 형 작업실 구경하는 게 더 나아.”
“그래? 그럼 같이 내려가자.”
계단으로 통해 지하로 내려가니 딴 세상이 펼쳐졌다.
로비의 그 깔끔함과 정반대인 새카맣게 때 묻은 벽, 쩍쩍 갈라진 가죽 소파와 의자가 뒹굴었고 테이블 위에는 빈 짜장면 그릇과 컵라면이 널브러져 있었다.
칸막이 친 녹음 부스 몇 개도 보였고 유리를 벽처럼 막은 널찍한 안무 연습실에는 예쁘장하게 생긴 남자애들 대여섯이 땀을 뻘뻘 흘리며 춤을 추고 있었다.
상준 형이 녹음 부스에 들어가 옷을 갈아입는 동안 난 그들의 춤을 구경했다.
“어? 누구?”
“네?”
누군가 어깨를 툭 쳤고 뒤돌아보니 삼십 대 초반으로 보이는 여자가 아래위로 날 훑어본다.
“오디션 보러 왔어? 나이는 좀 있어 보이는데… 아이돌은 아닐 테고, 혹시 발라드야?”
“아, 그게 아니라….”
“얼굴 좋고, 비율 좋고… 괜찮은데? 누구 만나러 왔지?”
그런데 이 여자는 날 언제 봤다고 말을 툭툭 놓지?
한마디 톡 쏘려고 할 때 상준 형의 음성이 들렸다.
“누나. 그 애는 아냐. 내 동생이야. 나 만나러 온 거야.”
추리닝 차림에서 정장 바지와 셔츠로 갈아입은 상준 형이 코트 단추를 채우며 다가왔다.
“아, 그래? 이거 미안해요. 난 또…. 그런데 일반인은 아닌 것 같은데? 혹시 지망생?”
“아놔, 아니라고! 내 동생 이 바닥 관심 없어. 서울대 법대 나와서…. 대, 대학원 다닌다고. 관심 끄고 가던 길이나 가.”
당황한 상준 형이 내 손을 잡고 끌었을 때 그 여자는 잽싸게 우리 앞을 막아섰다.
“생각 있으면 연락해요. 요즘 고학력 연예인 많아. 스타성이 충분히 보여.”
명함 한 장을 내 주머니에 쏙 집어넣고는 눈을 찡긋하며 사라졌다.
“이런…. 이제 시달리게 생겼네, 젠장.”
상준 형은 얼굴을 찡그렸다.
“왜 그래? 누구야? 저 여자?”
“여기 기획팀장인데 명함까지 주는 거 보면 너한테 꽂혔나 봐. 이제 널 데려오라고 들들 볶을 텐데….”
“귀찮으면 말해. 내가 사장님에게 말해서 저 여자 자르라고 할 테니까. 흐흐.”
“일은 잘한다. 사람 보는 안목이 좋아서 잘 찾아내고 컨셉 세팅도 잘해. 아무튼 빨리 나가자. 여기엔 저런 인간들 많아. 여차하면 너 연예인 되겠다. 흐흐.”
우린 농담을 주고받으며 건물을 벗어났다.
* * *
“할아버지는 좀 어떠셔?”
나와 나란히 뒷좌석에 앉아 차가 출발하니 상준 형이 조심스레 물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정정하셔. 하지만 쓰러지면 어떻게 될지 장담할 수 없어.”
“할아버지의 죽음은 왠지 현실감이 없다. 영원히 군림하며 사실 것 같은데….”
“그렇지? 벌써 두 번이나 쓰러지셨는데 나도 실감이 안 나. 여든 넘은 노인이라는 걸 자꾸 잊어먹게 돼.”
상준 형은 내 얼굴 보며 말했다.
“괜찮냐?”
“뭐가?”
“넌 할아버지와 좀 특별했잖아. 우리 사촌 중에 유일하게 지분을 직접 물려받았고.”
“아버지 대신 받은 거지 뭐.”
“아무도 그렇게 생각 안 해. 네게 직접 주신 거야. 어찌 됐던 우리 중에는 네가 제일 힘들 것 같다.”
“어쩌겠어? 마지막까지 자주 찾아뵙는 수밖에. 참, 형은 어때? 괜찮아?”
오늘 회사 꼬락서니를 보니 보통 고생이 아닐 것 같았다.
“난 지금 만족해. 이 바닥의 좋은 점은 다들 지가 좋아서 발 담근 놈들이니까 돈이나 환경에는 그닥 민감하지 않아. 그놈들에게 비하면 난 호강에 겨운 거야. 적어도 밑바닥까지 떨어져서 빌빌대지는 않을 테니까.”
“응? 나도 모르는 돈이라도 좀 꿍쳐 둔 거야? 믿는 구석이 있나 보네?”
“야! 하나뿐인 형님이 밥 굶으면 보고만 있을 거냐?”
상준 형은 팔꿈치로 내 옆구리를 쿡 찌르며 웃었다.
“마흔까지만 죽어라 해. 그렇게까지 했는데 성공 못 하면 운 탓으로 돌려야지 어쩌겠어? 할 만큼 한 거 아니겠어? 그때는 나랑 같이 손잡고 코타키나발루 리조트에 가서 정원 손질이나 하며 살자.”
“네가 마흔 전에 은퇴한다고? 말 같은 소리를 해라.”
오랜만에 만나 이런 농담이라도 주고받으니 상준 형은 할아버지를 만난다는 긴장이 풀린 것 같았다.
차는 어느새 병원 주차장으로 들어갔다.
* * *
“상준이도 왔어?”
여전히 정장 차림의 할아버지는 문을 열고 들어오는 상준 형을 보자 환하게 웃으셨다.
“네. 할아버지. 죄송합니다. 많이 늦었어요.”
“아니다. 병원에 누운 지 며칠이나 됐다고. 그래 넌 잘 지내고?”
“네. 염려해주신 덕분에 잘 지냅니다.”
할아버지는 우리를 소파에 앉혔다. 직접 음료수 두 병을 가져와 우리 앞에 놓으며 웃음을 지우지 못했다.
“듣자 하니 열 평짜리 오피스텔에서 혼자 산다고? 내, 집 한 채 주랴?”
“괜찮습니다. 집이라고 해도 옷만 갈아입고 잠깐 들러 잠 좀 자는 게 전분데요, 뭐. 대부분 스튜디오에서 지내니까 열 평짜리 오피스텔도 충분합니다.”
기특한 대답인지 머리를 끄덕였고 오랜만에 만난 손자에게 질문을 퍼부었다.
“그래? 월급은 얼마나 받누?”
“얼마 안 됩니다.”
“이놈아, 내가 그걸 모르겠냐? 왜? 너무 적어서 부끄러운 게냐?”
오랜만에 듣는 할아버지의 고함에 상준 형은 재빨리 대답했다.
“아닙니다. 월급 이백에 인센티브 받으면 삼천만 원은 넘습니다. 그런데 하루 종일 녹음실에서만 지내다 보니 오피스텔 관리비 외에는 돈 들어갈 일이 없어 고스란히 다 모읍니다.”
“그래? 그깟 노래 만드는 놈에게 뭐 그리 후하게 줘? 네 녀석 회사 사장 좀 데리고 오너라. 내가 월급 적게 주고 부려먹는 법 좀 가르쳐줘야겠다.”
할아버지의 농담에 긴장이 풀린 듯 평소에 잘 보이지도 않던 능청을 떨었다.
“할아버지. 저 일 잘해요. 우리 회사 사장님이 틈만 나면 월급 적게 줘서 미안하다고 그럴 정도라고요. 그래서 인센티브도 제가 제일 많이 받아요.”
“그렇다면 다행이로구나.”
할아버지는 갑자기 상준 형의 손을 덥석 잡았다.
“내 손자가 몇이더냐? 열 명이 넘는 놈들 중에서 내 돈 빼먹지 않는 놈은 너희 형제뿐이구나. 제 손으로 밥벌이하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처자식을 제힘으로 먹여 살리는 게 사내자식이 해야 할 첫 번째 일이라는 걸 아는 놈이 어른인 게다. 손주 놈들 중에서 어른이 된 건 너희 둘이 전부다. 내가 자식 농사 잘못한 거야.”
“그럴 리가요? 다들 제 갈 길이 다른 거겠죠.”
“아니, 아니다.”
할아버지는 애틋한 눈으로 상준 형을 바라보며 말했다.
“내가 네 애비에게 실망한 걸 네게 화풀이했다. 어린 네가 무슨 죄가 있다고…. 원망이 깊지? 이 할애비를 용서하거라.”
“아닙니다. 다 지나간 일인데요, 뭐. 그리고 끝이 좋으면 전부가 좋다고 하지 않습니까? 할아버지께서 제가 음악 하는 걸 인정해주시는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할아버지는 묵은 짐 하나를 내려놓은 듯, 편안한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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