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Youngest Son of Sunyang RAW novel - Chapter 24
“재벌 가문에는 비밀이 많으니까요.”
“그 뜻이 아니지 않니?”
여전히 찡그린 미간을 풀지 않는다.
“제가 좀 똑똑한 편이죠. 나이답지 않게.”
“그 정도가 아닌데? 이런 걸 어떻게 알 수 있어? 네 나이에?”
오세현은 내가 준 노트를 흔들며 말했다.
이제 준비했던 시나리오를 말할 시점이다.
“3년 전쯤인가? 전 처음 알았어요. 우리 가족이 완전히 무시당한다는 걸요.”
조금 쓸쓸한 표정으로 말하는 것도 잊지 않아야 한다.
“우리 가족이 무시당하는 이유는 바로 돈 때문이에요.”
“도준아. 그건 오해야. 아무도 네 가족을 무시하지 않아.”
몰라서 하는 소리일까? 아니면 위로랍시고 하는 말일까? 아버지의 절친이라고 했으니 아마도 후자일 것이다. 난 그의 말을 무시하고 말을 이어갔다.
“그런데 큰아버지 가족들 간에는 또 서로 경계하고 질투하는 것이 보였어요.”
“눈치가 빠르구나.”
“네. 그분들은 할아버지 회사를 더 많이 가지려고 그러시는 거겠죠.”
“그래서 너도 할아버지 회사를 물려받고 싶은 거니?”
“아뇨. 이미 말씀드렸잖아요. 전 할아버지보다 더 큰 회사를 갖고 싶다고요.”
“그게 이 노트의 대답은 아닌 것 같은데?”
오세현은 다시 미간을 찌푸리며 노트를 흔들었다.
“이 노트의 내용을 12살짜리 애가 만들었다면 아무도 안 믿을 거다. 내용은 둘째로 치더라도 이런 걸 어떻게 알았어? 미국에 투자 회사를 설립하고 한국으로 다시 투자한다? 서울대 상과대학 애들도 이런 생각은 안 해.”
이제 대답을 잘해야 한다. 어차피 억지겠지만.
“서울대 대학생들은 대기업 회장님 손자가 아니니까요. 그리고 저만큼 큰 꿈을 가지지 않았으니까요.”
“뭐?”
“전 지난 3년 동안 매주 할아버지 집으로 갔어요. 방학 때는 계속 할아버지 곁에 붙어있었고요. 그리고 할아버지가 하는 말을 전부 이해하기 위해 노력했고요.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저 머리 좋거든요. 학교 시험에서 단 한 문제도 틀리지 않을 만큼.”
이 아저씨의 눈은 점점 더 커졌고 여기서 잘라야 한다고 생각했다.
말이 더 많아지면 질문도 더 많아진다.
“삼촌. 이런 이야기 그만하면 안되요?”
“그, 그래.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물어보자.”
“네.”
“왜 외국으로 돈을 옮기려 하지?”
“할아버지는 많은 돈을 외국에 보관해요. 그게 돈을 숨기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하셨어요. 그리고 내가 돈을 번다는 건 숨겨야 해요. 질투하는 사람이 많으니까요.”
“큰아버지들?”
“네. 이미 그분들은 할아버지가 절 예뻐하는 것도 질투하실걸요?”
“그러니까 네가 돈을 벌면 그 돈을 전부 미국에 만든 회사로 보내서 숨기고 싶다는 거네.”
“네.”
이제 오세현의 호기심을 지울만한 미끼를 던질 차례다.
“전 늘 할아버지 곁에 있어요. 그리고 그분은 제가 곁에 있어도 아주 중요한 이야기를 많이 하시죠. 할아버지가 하시는 대로만 하면 돈은 쉽게 벌 수 있을걸요?”
이제 무슨 말을 해도 놀라지 않는다. 아예 눈빛마저 빛났다.
누가 뭐래도 오세현 역시 자본주의의 최전방 투사다.
순양그룹 회장의 비밀 투자 또는 투자 계획을 미리 알아낼 루트를 발견했는데 욕심이 안 생길 수 있나?
하지만 저 기대는 조만간 실망으로 바뀔 것이다.
푼돈이나 벌자고 벌인 일이 아니다. 진 회장의 말에 기대어 버는 돈이라고 해봤자 수익률이 별로다.
물론 오세현 같은 사람에게는 엄청난 수익률이겠지만.
두세 배 뻥튀기에 만족하려면 미국에 회사를 세우는 번거로운 일 따위는 할 필요도 없다.
수십, 수백 배는 벌어야 제격이다. 나같이 미래를 훤히 아는 사람이라면 말이다.
오세현은 내려 놓은 한 뭉치의 투자 운용서를 다시 집어 들었다.
“이건 필요 없겠네. 순양그룹 회장님의 투자 계획이라면 이따위 계획보다는 훨씬 더 가치 있을 것 같으니까.”
서류를 챙긴 오세현은 편안한 모습으로 내 앞에 앉았다.
프로의 자세였다.
“연말까지는 미국에 투자 회사를 만들 수 있을 거야. 도준이 돈은 우리 회사에서 미국 본사로 들어간 다음 그 투자 회사 계좌에 넣을 거다.”
“그런 건 알아서 하시면 돼요.”
내가 손을 저으며 말했지만, 오세현의 설명은 멈추지 않았다.
“투자 회사의 지분은 네가 100% 소유할 거고 원할 때까지 자금은 미국에 둘게. 물론 그 회사의 운영 경비는 네 돈으로 충당할 거야.”
자산운용 책임자의 기본을 지키고 있다. 고객에게 모든 걸 숨기지 않고 설명해야 하는 의무를 행하는 것이다.
“투자 수익이 나도록 빨리 돈을 벌어야 해. 아니면 돈만 까먹는다. 흐흐.”
“그전에 부탁할 것이 또 있는데요.”
“또? 이번엔 얼마나 날 놀라게 할 거야? 하하.”
놀라기는 하겠지만 좀 다른 느낌일 것이다.
나는 그동안 계속 생각했던 것을 차분히 설명했다.
* * *
진윤기는 위층에서 내려오는 오세현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것을 보자 재빨리 그를 끌어당겼다.
“뭐야? 왜 그래?”
“넌 진짜 아들 하나는 기똥 찬 놈을 뒀다. 부러운 새끼.”
“뭐래는 거야?”
“일단 앉자.”
오세현은 가방을 휙 던지고 거실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담배 하나를 꺼내물고 길게 연기를 내뿜으며 말을 않자 진윤기는 조급한 마음을 숨기지 않았다.
“빨리 말 안 해? 담배만 필 거야?”
“아까 내가 말한 대로 도준이 돈을 굴릴 거야. 그런데 100억만 굴린단다.”
오세현은 투자 계획에 대해서는 길게 말하지도, 사실대로 말하지도 않았다. 비밀유지 약속 때문이 아니다. 아들과 아버지는 정반대의 성향이다. 자세히 알수록 충돌만 생길 것 같아 염려한 것이다.
“100억? 전부 140억 아냐? 그럼 40억은?”
“영화 제작사를 하나 만들고 싶다는데? 그 제작사의 대표이사 1순위 후보는 바로 너고.”
오세현은 후보라는 말에 힘을 주며 진도준의 표정을 살폈다.
자신도 아마 이런 모습이었을 것이다.
놀라서 아무 말도 못하고 멍하니 입만 벌린 저 얼굴.
남에게 충격을 주고 지켜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현재 한국영화 평균제작비는 겨우 1억5천이다. 지금 한창 제작 중인 명감독 임권택의 ‘장군의 아들’이라는 영화도 엄청난 제작비를 투입했다고는 하지만 6억을 넘지 않는다. 40억이라면 최소 10편의 영화를 만들 수 있다.
그것도 한 푼의 외부 투자를 받지 않아도 말이다.
“애가 생각이 깊어. 그냥 아버지한테 돈을 주면 거절할 게 뻔하다고 무조건 영화사를 만들어 달래. 그럼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라도 윤기 네가 회사를 맡지 않겠냐고 하더라.”
복잡한 심경을 숨기지 못한다.
구겨진 자존심, 속 깊은 아들의 기특함, 꿈을 잡을 수 있는 기회, 아버지 진 회장의 시선.
진윤기는 여전히 입을 열지 못했다.
“난 네가 잡다한 생각은 버리고 그냥 했으면 좋겠어. 어린 아들이 준 기회다. 잘 살려봐. 너도 아직 젊잖아.”
오세현이 진윤기의 어깨를 툭 치고 나가 버렸지만 진윤기는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꼼짝도 하지 않고 앉아 있었다.
* * *
조금 상기된 듯 옅은 홍조를 띤 아버지가 조심스레 내 방문을 열고 들어왔다.
“공부하니?”
“아, 네.”
쉽게 말을 꺼내지는 못하지만 표정을 보니 영화사를 맡겠다는 의지가 엿보였다.
어색함과 부끄러움을 동시에 날려버리려면 내가 먼저 말하는 게 낫겠다 싶었다.
“아버지. 전 우리 가족 모두가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어머니도 말씀하셨고 아버지도 그러셨잖아요.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사는 게 행복이라고.”
뜬금없는 말이었지만 내 의도를 모를 리 없다. 아버지의 얼굴이 더욱 붉어졌다.
“좀 웃기지 않니? 아버지가 아들의 행복을 지켜줘야 하는데…….”
“전 아버지에게 선물을 드렸을 뿐이에요. 아버지는 앞으로 계속 절 지켜주실 거잖아요. 변한 것도 없고 이상한 일도 아니에요.”
“내가 영화 만들어서 폭삭 망하면?”
“다시 백수 되시는 거죠.”
웃으며 말하는 내 모습에 아버지도 편안한 미소를 보였다.
“40억은 아주 큰 돈이야. 할아버지보다 더 큰 부자가 되겠다는 네 꿈에 꼭 필요할 때가 올지도 몰라. 4억, 아니 사천만 원이 없어서 망하는 회사도 많으니까.”
“아버지가 영화 잘 만들어서 사백억으로 만들어주시면 되죠.”
아이고, 전부 말아 먹어도 돼요. 그깟 40억, 없어도 그만입니다. 걱정 말고 팍 질러요, 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참았다.
순수한 어른 한 명의 꿈을 이루게 해 주는 일이 이다지도 힘들지는 몰랐다.
하지만 나를 힘껏 안는 아버지의 마음이 전해지자 괜히 눈시울이 붉어졌다.
* * *
“뭐? 전액 인출?”
– 네, 실장님. 갑작스러운 요청이라 저도 놀랐습니다.
은행 지점장의 목소리가 기어들어갔다. 고객의 요구에 응한 것뿐인데, 그 고객이 워낙 대단한 사람이라 괜히 죄지은 듯 움찔거렸다.
“언제 인출했어?”
– 조금 전 전액 계좌 이체했습니다.
“어디로?”
– 파워세어즈라는 자산운용사입니다. 아시죠?
물론 안다. 돈 좀 굴리는 사람치고 이 이름을 모를 리 있나?
“도준이 혼자 왔나? 아니면? 아버지랑 함께?
– 아닙니다. 파워세어즈 사람만 왔습니다. 부모 동의서부터 구비서류를 완벽하게 준비해 왔기에…….
“알았어. 혹시 새로운 사실 있으면 바로 연락하고.”
– 네. 실장님.
수화기를 내려놓은 이학재 비서실장은 급히 직원 몇 명을 불렀다.
“파워세어즈 임직원 중에서 진윤기와 관계있는 놈이 누군지 알아봐. 아니, 회장님 일가와 관계있는 놈 전부 찾아내.”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도준이는 어린애일 뿐이고 그 아버지는 돈 욕심 없는 호인이다.
도준이가 성인이 될 때까지 은행에서 잠잘 줄 알았던 돈이 한 달도 안 돼서 빠져나가다니.
혹시 사기라도 당했다면 큰일이다.
거의 하루를 초조하게 보낸 이학재는 직원들이 파악한 내용을 보고 긴 한숨을 내쉬며 안도했다.
적어도 사기당한 건 아닌 듯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대로 묻어둘 사안도 아니다.
이학재는 자료를 들고 진 회장의 서재로 달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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